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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21)] 세계 해군사 전설로 통하는 이순신(2) 

싸움이 끝난 후에야 칼로 살을 베고 탄환을 뽑아내다 

조선 수군이 첫 승리 거둔 옥포해전은 ‘23전 23승’ 신화의 서막
사거리 밖에서 포 쏴대는 조선군에게 왜군의 조총은 무용지물


▎옥포해전이 벌어진 거제도 옥포만을 굽어보고 있는 옥포대첩 기념비. 1991년 옥포대첩기념공원과 함께 건립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1592년 5월 7일 새벽 거제도 송미포 앞바다에서 판옥선 28척과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등 총 91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조선의 연합 함대가 가덕도를 향해 일제히 닻을 올렸다. 임진왜란 발발 23일 만에 처음으로 조선 함대의 반격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송미포는 오늘날 경남 거제시 다대리로 추정되고, 가덕도는 부산광역시 가덕도 신공항이 예정된 바로 그곳이다.

조선 수군은 원균의 경상우수영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의 연합 병력이었다. 연합 함대라고는 하지만,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전라좌수영 소속의 배였다. 전쟁 초 왜선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경상우수사 원균이 80여 척의 아군 배에 구멍을 뚫어 자침시키고 판옥선 4척을 수하 장수들과 나눠 타고 달아났던 까닭이다. 조선수군의 최고 책임자가 경상우수사고, 함대의 기동수역도 경상우수영 관할이었음에도 연합 함대의 지휘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맡은 이유다.

이순신은 거제도 연안을 끼고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앞에 보이는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에 척후선을 보냈다. 정오 무렵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사도첨사 김완이 탄 척후선에서 신호 화살이 솟아올랐다. 적선을 발견한 것이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고 산같이 조용하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이어 옥포만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50여 척의 크고 작은 왜선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다.

달아나기 바빴던 조선 수군이 달라졌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전승보고서인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의 묘사를 보자.

“큰 배는 사면에 장막을 둘렀는데 온갖 무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장막 가장자리에 긴 대가 꽂혀 있고, 붉고 흰 작은 깃발들이 어지러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깃발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모두 무늬 있는 비단이었는데, 바람에 펄럭여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개전 당시 부산포 해안에 접근하는 일본 함대를 보고도 1차 상륙 저지라는 임무를 내던지고 달아나기 바빴던 경상좌수사 박홍과 우수사 원균이 오줌을 지렸을 만한 위용이었다. 섬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라 섬 전체가 연기에 휩싸여 있는 듯했다. 거제도에 상륙한 왜군이 방화와 약탈의 분탕질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조선 함대는 일자 대형을 펼치며 접근해 적선을 에워쌌다. 그제서야 왜적들이 조선 함대를 발견하고 우왕좌왕했다. 조선 침략 후 제대로 된 조선 전함을 한 척도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100척에 가까운 함대가 나타나 자신들을 막아서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전함을 보고서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다가 제각기 급하게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는 아우성을 치면서 노를 저어 나왔는데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기슭을 따라 배를 저었습니다. 그중 여섯 척이 앞장서서 나왔습니다.”([옥포파왜병장])

이순신이 탄 기함에서 깃발이 올라갔다. 일자 대형으로 서서히 만으로 진입하던 판옥선들이 노를 멈추고 뱃머리를 90도 돌려 측면으로 섰다. 기함에서 깃발을 세차게 흔들었다. ‘쾅! 쾅! 쾅!’ 우레 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고, 커다란 철환과 길이가 2m에 가까운 어마어마하게 큰 대장군전 수십 개가 왜선을 향해 날아갔다. 철환과 큰 화살은 왜선 갑판을 뚫고 바닥에 구멍을 냈다. 포탄과 화살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거나 뼈가 부러진 왜군도 속출했다. 조선 전함에 접근해 백병전을 준비하고 있던 왜군들이 혼비백산했음은 물론이다. 자신들이 자랑하던 조총이 있었지만 조총 사거리 밖에서 포를 쏴대는 조선군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다치지 않은 병사들은 구멍이 뚫린 배에 차오르는 물을 퍼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적들도 탄환과 화살을 쏘다가 기운이 떨어지자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정신없이 바다에 내던졌습니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명인지 알 수 없고 물에 떨어져서 헤엄치는 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한꺼번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바위 언덕으로 기어오르며 서로 뒤처질까 겁을 내는 꼴이었습니다.”([옥포파왜병장])

갑작스런 반격에 혼비백산한 일본 해군


▎오카야마성에 소장돼 있는 우키타 히데이에 초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임진왜란을 지휘했다. / 사진:일본 오카야마성
일본 함대 사령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이러한 아비규환을 뒤로하고 연안을 따라 움직이며 옥포만 탈출을 시도했다. 이순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기보다는 파괴된 배에 남아 있거나 헤엄치는 적들의 육지 상륙을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 침몰한 적선은 26척이었고, 왜군 사상자는 4080명에 달했다. 이른바 ‘옥포해전’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이자 임진왜란 발발 이후 왜군에 대한 조선의 첫 승리였다.

이 승전은 단순한 승리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멀리서 왜군이 보이기만 해도 달아나기 바빴던 조선군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새로이 심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승전이었다. 특히 일본 수군에 압도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조선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려 이순신의 ‘23전 23승’ 전승 신화, 결국엔 일본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전투였다.

조선 수군의 배가 왜선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고는 하나 선박 수가 곧 전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91척의 선박 중 사실상 전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28척의 판옥선뿐이었다. 협선은 노를 젓는 격군 3명이 타는 작은 배로, 척후 또는 초계 임무를 띠고 정보를 탐지하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판옥선과 판옥선 사이의 통신이나 수심이 낮아 판옥선의 진입이 어려운 수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거나 잔존 적선을 소탕할 때 협선은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너무 작아 본격적 전투에는 활용하기 어렵고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쳤다.

포작선은 말 그대로 고기잡이 어선이다. 판옥선 승선 인원이 200명인데 비해 포작선의 승선 인원은 80명이니 당시 기준으로 중형 선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함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포작선도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가 작고 충격에 약해 총통을 설치할 수 없었다. 화살을 쏘는 사수가 주로 승선했을 것이며, 직접적 공격보다는 판옥선을 보조하고 선박 수를 많아 보이게 해 적의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됐다.

물론 일본 전함 역시 대형과 중형, 소형으로 나뉘었지만, 해협을 건널 수 있을 정도의 규모는 돼야 하니 대체로 포작선보다 컸다. 게다가 일본 배는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판옥선에 비해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조선 수승선 인원이 200명인데 비해 포작선의 승선 인원은 80명이니 당시 기준으로 중형 선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함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 포작선도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배가 작고 충격에 약해 총통을 설치할 수 없었다. 화살을 쏘는 사수가 주로 승선했을 것이며, 직접적 공격보다는 판옥선을 보조하고 선박 수를 많아 보이게 해 적의 사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됐다.

물론 일본 전함 역시 대형과 중형, 소형으로 나뉘었지만, 해협을 건널 수 있을 정도의 규모는 돼야 하니 대체로 포작선보다 컸다. 게다가 일본 배는 바닥이 뾰족한 첨저선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인 판옥선에 비해 속도가 훨씬 빨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조선 수군의 수적 우세가 전투 결과를 좌우한 주요인은 아니었다는 결론만으로 넘어가야 하겠다.

옥포해전을 승리로 마친 뒤 이순신은 가까스로 육지로 달아나는 데 성공한 왜군을 소탕하기 위해 사수들을 상륙시켜 추격하려고도 생각했지만, 거제도 산세가 험하고 날이 저물어가므로 포기했다. 그보다는 승리에 들뜬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다음 전투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이순신은 함대를 영등포(거제도 장목면 구영리)로 이동시킨 뒤 군사들에게 나무를 하고 물을 긷게 해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오후 4시께 척후장의 보고가 들어왔다. 영등포에서 멀지 않은 바다에 대형 왜선 5척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사들이 지치긴 했지만, 눈앞의 적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격군들을 독려해 적함을 추격했다. 왜선들은 조선 수군을 보자 육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오늘날 창원특례시 진해구인 합포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왜군 대형 선박 5척이 조선 수군의 재물이 된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왜군 전함 5척 침몰, 왜군 490여 명 사망. 이순신의 2차 승리인 합포해전의 전과였다.

기세 이어 합포해전에서도 연승 행진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오늘날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묶은 책 [북관유적도첩]에 있는 ‘수책거적’ 그림. 목책을 세워 적을 막아냈다는 뜻으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 사진:고려대 박물관
이순신은 함대를 오늘날 창원시 대산리인 남포로 이동시켜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고리량(진해)에 왜선이 정박 중이라는 보고가 다시 올라왔다. 함대를 움직여 일대 섬들을 수색하고 저도를 지나 오늘날 고성인 적진포에 이르자 일본 전함 13척이 정박해 있었다. 포구에 있는 민가들을 약탈하고 있던 왜군은 조선 함대를 발견하자 미처 배에 오르지도 못한 채 산으로 달아났다. 배에 남아 있던 절반가량의 왜군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조선 수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겨우 2척만 탈출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조선 수군의 3차 승리인 적진포해전이었다. 전과는 왜군 전함 11척 침몰, 2840명 사망이었다.

사실상 궤멸됐던 경상수군을 지원해 움직였던 첫 출동에서 세 차례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한 것이다. 적선을 42척이나 침몰시키고 7000명이 넘는 적군을 수장시키는 동안 아군 피해는 부상자 1명에 불과했던 압승이었다.

여세를 몰아 일본 수군을 쓸어버리려던 이순신의 계획은 그날 도착한 임금의 평안도 몽진 소식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만다. 임금과 조정이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고, 수도 한양이 적군 손아귀에 들어간 마당에 섣부르게 행동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날 정오 이순신의 함대는 후일을 기약하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왔다. 옥포해전 소식이 일본에도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옥포에서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거의 모든 전선이 전투 중 파괴되거나 소실됐습니다.”

첫 출동에서 적진포해전까지 3연승 거둬


▎사천해전은 거북선이 첫 투입돼 그 위력이 확인된 전투였다. 전과는 왜선 13척과 왜군 2600명 전멸이었다. / 사진:[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일본 최고 실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격노했다. 천하 제일이라고 자부하던 섬나라 일본 수군 아닌가. 그런 일본 수군이 배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던 조선 수군에게 패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의 실체에 대해 빠짐없이 보고하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전선에서 올라오는 보고에는 극히 피상적이고 불명확한 정보만 담겨 있을 뿐이었다.

“적은 전라도 지역에 근거를 둔 조선 수군인 듯합니다.”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눈깜짝할 사이에 이뤄져 적의 행방이나 병력, 적장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10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는데, 이것이 적이 보유한 모든 병력인지 아니면 일부인지 아직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이순신의 바다] 황현필)

히데요시가 길길이 날뛰었음은 물론이다. 전투에서 참패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적군의 병력 규모를 파악하기는커녕 적장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조선함대의 치밀한 기습작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이순신 장군의 명성이 높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587년(선조 20년) 녹둔도 사건 때다. “적호(賊胡·여진족)가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 10여 명이 피살되고 10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구금하였습니다.”([선조실록] 1587년 10월 10일자 기사)

녹둔도는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으로, 세종대왕의 6진 개척 때 조선 땅으로 편입된 곳이다. 당시 43세의 이순신은 녹둔도 둔전관이자 조산만호였다. 조산만호는 종4품 무반직으로, 오늘날로 따지면 최전방부대 대대장쯤 되지만, 실제 휘하 병력은 오늘날 중대급에도 못 미치는 정도였다. 여진족의 침입을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으로 구금되긴 했지만, 녹둔도 전투는 결코 패전이 아니었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오늘날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설명과 함께 묶은 책 [북관유적도첩]에 녹둔도 전투 얘기가 나온다. ‘수책거적(守柵拒敵)’ 즉, 목책을 세워 적을 막아냈다는 뜻의 제목과 함께 설명한 글을 보자.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수확철이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들이 무리를 불러모아(중략)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 군사들이 대부분 들에 일하러 나가 수비병력이 적어 버티기 어려웠다. 족장 마니응개가 목책을 뛰어넘어 들어오려 할 때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유성룡의 혜안으로 초고속 진급하며 두각


▎경남 거제시가 2011년 16억원을 들여 만든 ‘임진란 거북선 1호’. 전문가 고증을 거쳐 3층 구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짝퉁 목재 논란과 과도한 보수 유지 비용으로 방치되다 경매 끝에 지난해 154만원에 낙찰됐다. / 사진:거제시
선조 때까지 500년 동안 함경도에서 활약한 고려와 조선의 명장 톱8 중 이순신이 꼽힌 것이다. 당시 주민들이 승전탑을 세워 칭송하고, 조선 영조 때는 승전비까지 세울 정도였다. 선조도 열세 상황에서 이순신이 분전했음을 인정한다.

“비변사에서 이경록과 이순신을 잡아올 것에 대해 아뢰자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와는 다르다. 장형으로 다스리고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선조실록] 1587년 10월 16일 기사)

몇 개월 뒤인 이듬해 1월 북병사 이일은 함경도 군사 2500명을 동원, 녹둔도를 공격했던 여진족을 야습해 주거지 200여 채를 불태우고 수급 380개를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생포하는 공을 세웠다. 이른바 이순신의 ‘1차 백의종군’이었다.

1년 뒤인 1589년 1월 조정에서 주요 대신들에게 중용할 만한 무신을 추천하라고 하자, 우의정에서 막 영의정으로 승진한 이산해와 녹둔도 전투 때 병조판서였던 정언신이 이순신을 추천한다. 오늘날로 보자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과 국방장관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뿐, 이순신은 그해 연말이 되어서야 고작 종6품인 정읍현감으로 발령이 난다. 그러더니 1년 여 뒤인 1591년 2월 정3품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전격 발탁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품계를 여덟 개나 뛰어오른 파격인사였다. 당시 영의정이던 유성룡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이순신은)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주는 사람이 없어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벼슬이 오르지 않다가 비로소 정읍현감이 됐다. 이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나날이 급하게 전해져 (중략)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는데 정읍현감에서 수사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되자 사람들은 혹시 그가 갑작스레 승진한 것을 의심하기도 했다.”(유성룡 [징비록])

이러한 기록을 종합할 때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무공이 뛰어난 무인으로서 어느 정도 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른바 ‘빽’이 없어 요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었기에 일반 백성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을 터다. 따라서 왜적이 육지에서 잡은 포로들을 심문해도 이순신의 이름을 알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명 장수’에서 세계 해전사의 주인공으로

위기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유성룡의 선택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살린 혜안이었음은 우리가 잘 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어도 이순신이란 뾰족한 송곳이 주머니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기는 영웅을 불렀고 우리 민족에게는 천우신조로 이순신이라는 불후의 명장이 있어 그 소환에 응한 것이다. 유성룡이라는 현자가 있어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 것이며, 그것이 우리에게는 천만다행이었고 일본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총사령관은 히데요시의 양자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였다. 히데요시는 다음 사항을 우키타 사령부에 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첫째, 지체 말고 조선 왕을 사로잡을 것. 둘째, 속히 전라도를 속지로 삼아 원정군 식량을 현지 조달할 것. 셋째,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고 성을 쌓을 것. 넷째, 남아 있는 조선 수군을 찾아내 철저히 섬멸할 것. 다섯째, 서해안 돌파를 서두를 것.”

히데요시의 주문대로 왜군에게 서해안 진출은 병력과 물자의 수송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였다. 조선 수군과의 1차 충돌로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군은 서해안 항로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이순신도 모르지 않았다. 일본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수군 규모를 증강할 게 분명했고, 이에 맞서려면 전라좌수영의 병력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사람을 보내 합류를 요청했고 “6월 3일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5월 27일 원균이 “적선 10척이 사천에서 나타나는 바람에 노량해협까지 후퇴했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이순신은 이억기에게 뒤따라오라고 전하고 조방장이던 노장군 정발에게 거북선 1척과 판옥선 몇 척을 줘 본영 수비를 맡긴 뒤 급히 노량으로 출발했다. 육지에서 적이 공격할 수 있기에 가뜩이나 없는 살림을 나눈 것이다. 이틀 후 노량에 도착, 원균의 판옥선 3척과 함께 사천으로 향했다. 왜군 척후선 1척을 발견해 격침시킨 뒤 포구에 이르자 과연 대형 적선 12척이 정박해 있었고 육지에서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성을 쌓는 중이었다.

사천은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가 가깝고 육지로도 진주성과의 거리가 15㎞에 불과한 전략적 요충이었다. 만일 사천에 왜성이 축조되면 여수와 진주가 모두 위험에 빠지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의 함대가 포구에 접근하자 왜군은 조총과 화살을 쏘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사천 앞바다는 암초가 많아 대형 선박이 뭍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 이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적을 유인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이 달아나는 줄 알고 배에 올라타 조선 함대를 쫓았다. 하지만 왜장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전의 참패를 교훈 삼아 섣부르게 추격하지 않았다. 이에 양국 함대는 자혜리와 주문리 사이 바다에서 오랜 시간 대치했다. 이윽고 조류 방향이 바뀌었다. 사천 해협 쪽으로 밀물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거북선 앞으로!”

임진왜란에서 거북선이 처음 출전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왜군들도 처음 보는 배였다. 판옥선 위에 거적으로 된 지붕을 씌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북선 2척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왜군이 조총을 발사했다. 하지만 조총탄으로는 15㎝ 두께의 거북선 목판을 뚫을 수 없었다. 조선 배에 뛰어올라 백병전을 준비하던 왜군들을 향해 거북선의 용머리가 불을 뿜었다. 왜선 하나가 순식간에 박살났다. 이어 다른 거북선의 용머리에서도 화포가 발사됐고, 다른 왜선에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 돌진한 거북선이 또 다른 적선의 옆구리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가볍고 약한 삼나무로 만든 왜선은 단단하고 무거운 소나무로 만든 거북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옆구리에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당황한 왜군들은 거북선 위로 뛰어내렸지만 그곳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거북선 지붕의 거적 속에 숨겨진 20㎝ 쇠못들에 찔린 왜군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는 사이 만조가 됐고, 이순신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뱀처럼 한 줄로 늘어선 장사진을 치고 진격하는 판옥선들이 사방의 적선을 부수었다. 왜선이 포구로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10척의 왜선이 침몰했고 2척만 포구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것도 이순신의 계산이었다. 왜선을 모조리 격침시키면 육지로 달아난 왜군 패잔병들이 우리 백성을 노략질할 게 분명했다. 퇴로를 열어주고 길목에서 잡는 게 상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새벽 왜군이 2척의 배를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사천해협 끝쪽 모자랑포에서 잠복 중이던 조선군의 먹이가 됐음은 물론이다. 2차 출정의 첫 승리이자 4승째인 사천해전이다. 전과는 왜선 13척과 왜군 2600명 전멸이었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 첫 투입하며 4연승


▎해군사관학교에서 복원해 발사 시험한 대장군전. 400m를 날아가 화강암을 뚫고 들어가 80㎝ 깊이로 박혔다고 한다. / 사진:해군사관학교
사천해전은 거북선이 첫 투입돼 그 위력이 확인된 전투였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탄환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거북선의 첫 출전이었던 만큼 가까이서 지켜보고, 보다 효과적 전술을 구상하기 위해 기함이 적의 한복판에 지나치게 접근한 것이다. 사천해전의 부상자 세 명인 이순신과 나대용, 이설이 모두 기함에 승선한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날아온 탄환이 이순신의 왼편 어깨에 맞아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으나, 이순신은 말하지 않고 있다가 싸움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베고 탄환을 뽑아냈다. 그 깊이가 서너 치나 들어가서 보는 사람들은 얼굴빛이 변했으나 이순신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했다.”(유성룡 [징비록])

그 일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나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등까지 관통했다.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余亦左肩上中丸 貫于背 不至重傷)”

삼국지의 영웅 관우와 자주 비교되는 사례다. 그런 이순신도 자신이 새롭게 쓰여질 세계 해전사의 주인공이 될 줄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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