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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일본 직설(直), 요설(妖) 그리고 곡설(曲説)(14)] 죽음의 미학… 일본인 전형의 흔적을 찾아서 

다자이 오사무가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작가 된 까닭 

소설 [인간실격], 작가의 동반자살로 전후 최고·최대 베스트셀러로 떠올라
일본 문화 특징은 함께 자살하는 ‘신주(心中)’… 도쿄 미타카엔 다자이 흔적도


▎일본 도쿄 미타카의 다자이 향토 문학관. / 사진:유민호
교보문고 2024년 상반기 베스트셀러 소설을 살펴봤다. 상위 30권 가운데 한국 작품 13권, 미국·유럽 9권, 일본 7권, 중국 1권으로 나타났다. 소설은 문학의 금자탑이다. 노벨문학상에서 보듯 수상자 대부분이 소설가다. 1년에 소설 한 권 읽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지 의문이지만, 사실 그 나라 문학 수준은 소설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베스트 북이 되진 않는다. 그러나 인기 상품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통해 그 나라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베스트셀러 30권 가운데 외국 작품이 17권에 달하는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좋게 볼 수도, 나쁘게 볼 수도 있다. 글로벌 개방 시대를 맞아 외국 문학이 팔린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전체 30권 가운데 절반 이상이 외국 소설이란 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 가운데 자국보다 타국 소설에 주목하는 나라는 극히 드물다. 번역 소설이란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이기 때문이다. 10월 노벨문학상 발표와 함께 수상 작품이 번역되면서 외국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 대세는 국내 소설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 아마존 닷컴의 8월 초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랭킹 30위를 보면 3권만 외국 서적일 뿐 나머지 27권은 전부 일본 작가 작품이다. ‘K-자화자찬’이 곳곳에 퍼지면서 ‘K-문학’도 글로벌 주인공처럼 느껴지는 판이다. 한때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란 소문도 많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소식도 사라진 지 오래다. 정작 한국 내 베스트셀러를 보면 외국 소설이 더 많다.

작가는 넘치는데, 작품은 드문 한국 문학계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한국 문학은 20세기 말을 정점으로 아예 실종된 느낌이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건물·다리 붕괴 소식처럼 문학 생태계 자체가 폭삭 주저앉은 듯하다. 1년에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는 디지털 시대 독자들 때문일까? 틀린 건 아니지만, 물건을 사지 않는 소비자가 아니라 매력적 상품을 못 만드는 생산자가 더 문제다. 작가는 넘치는데, 작품은 드문 나라가 한국 문학계다. 글이 아니라 입으로 살기 때문이다. ‘꼰대 문학’이라고나 할까? 20세기 흑백필름시대 테마인 민족·계급·분단·이념이 아직도 한국 문학의 주류로 군림하고 있다. 몇 번 들으면 뻔한 스토리다. 21세기 문학의 특징이지만, ‘우리 모두’보다 ‘나의 세계’를 중시 여긴다. 인터넷 시대 주인공은 5G·6G로 무장한 모바일 개인이다. 물론 모바일 속 민족·계급·분단·이념 테마에 주목하면서 ‘인터넷 우리끼리‘로 빠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세는 ’개인‘에 기초한 각자도생이다. 거대 담론이 아닌 현실 속 일상이 세상의 주된 관심사이며 21세기 문학의 주된 테마다. 기후 변화·환경 문제도 일단 내가 불편하다고 느끼면서 글로벌 이슈로 비상하게 된다. 50년도 지난 얘기를 꺼내면서 ’우리끼리‘로 몰아가는 꼰대 문학은 낡아도 한참 낡았다.

베스트셀러 30권 가운데 일본 작품이 7권에 달한다. 21세기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로 통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작품 2권도 포함돼 있다. 미국과 유럽 합쳐 9권이란 점을 감안하면 단일 국가로는 일본이 우위다. 흥미로운 것은 책의 내용이다. 장기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이 7권 가운데 2권이다. 무라카미의 [노르웨이의 숲]과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인간실격(人間失格)]이다. 이들 작품은 10년 이상 팔려온 고전에 가깝다. 한국 작가의 13권 베스트셀러를 보면 10년 이상 애독된, 고전으로 불릴 만한 책이 없다. 길어야 5년 전 나왔던 것이 전부일 뿐 대부분 1~2년 전 출간됐다. 좋게 말하면 트렌드에 맞춰 읽는 것이 한국 문학의 특징일지 모르겠다. 베스트셀러 일본 소설이 7권에 달한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그 가운데 2권이 고전이란 점이 의미심장하다.

필자가 주목하는 장기 베스트셀러 일본 소설은 다자이의 [인간실격]이다. 이미 한 세대 전 필자의 기억이지만, 당시에도 [인간실격]을 읽는 한국 대학생이 상당히 많았다. 적어도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자이=필독 소설가’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어는 물론 일본 문화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차단된 상태였다. 노래나 영화는 아예 수입 금지 대상으로 터부시됐다. 일본 노래 하나 듣는 것만으로도 ‘친일 쪽바리’ 비난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한국인이 아무런 제약 없이 해외여행에 나선 때는 1990년대 이후다.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어떻게 많은 한국인이 다자이를 알고, 그의 소설까지 읽었는지 궁금하다. 21세기에도 이어진 다자이의 인기를 고려하면 소설 [인간실격]은 무려 30년 이상 한국 독자를 사로잡은 장기 베스트셀러로 기록될 듯하다. 일본에서도 다자이는 장기 베스트셀러 작가로 통한다. 그러나 한국 정도는 아니다. 수많은 문학가 중 한 명일 뿐 ‘다자이 vs 나머지 일본 작가’로 나누기는 어렵다. 한국에서 보면 ‘일본 문학=다자이, 무라카미’로 느껴진다. 다른 작가는 관심 밖이다. 무라카미의 인기가 21세기 들어 본격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자이야말로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작가로 볼 수 있다. 한 세대 이상 지속된 한국 내 다자이의 인기와 평가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먼저 한국인의 문학 열정을 사로잡은 소설 [인간실격]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저자와 일본인의 인생관을 반영한 '인간실격'


▎다자이 무덤은 문학도라면 반드시 들르는 문학 성지 중 하나다. 지금도 수많은 참배객이 다자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 사진:유민호
스토리는 간단하다. 오바 요조(大庭葉蔵)라는 청년의 삶을 세 장의 사진을 통해 세 개의 독백 스타일 수기(手記)로 풀어놓은, 픽션을 가장한 현실 소설이다. 현실은 작가 다자이의 인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소설 속 주인공 오바는 다자이의 99% 아바타에 해당된다. 오바는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하는 가면을 쓴 무기력한 인간으로 자란다. 남을 웃기거나 바보 짓을 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 하지만, 결국 과장과 허위로 채워진 못난 인생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고독에 방황하던 중 술·담배·여자·공산주의에 빠진다. 전부 자신이 죄악시하던 것들이다. 자신의 고독과 무기력을 감추려는 과정에서 평소 경멸하던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 결혼을 도피처로 택하지만, 결국 부인과의 동반자살을 택한다. 그러나 부인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는다. 자살방조자가 된 셈이다. 이후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면서 유부녀나 술집 여성과 관계를 갖고 약물중독자로 변해간다. 다시 결혼하지만, 정상적 생활을 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부인이 자주 오던 남성에게 겁탈당한 것을 알게 된다.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다시 살아남는다. 돈이 없어 부모에게 기대던 중 끝내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후 주름과 흰머리로 채워진 늙은 모습과 함께 27세 청년의 아비규환 인생이 슬픈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인간실격]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3년 뒤인 1948년 6월 잡지를 통해 공개된다. 8월까지 3회 연재에 이어 곧바로 단편소설로 발간된다. 출간 즉시 전후 최고·최대 베스트셀러로 부상한다. 다자이가 1948년 6월 애인과 함께 동반자살했기 때문이다. 다자이의 동반자살 소식이 알려진 상태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셈이다. 소설 [인간실격]이 다자이의 유서(遺書)가 된 것이다. 1948년 일본은 기아에 허덕였다. 패전 후 밀어닥친 식량난으로 열도 전체가 굶주리던 시기다. 한국이 그러했듯 미제 PX 제품을 얻기 위해 미군 클럽으로 몰리는 여성이 넘쳐났다. 한국과 달리 미군은 원래 일본의 철천지원수였다. 그러나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버려야만 했다. 다자이가 아니더라도 기아로, 치욕으로 인한 자살자가 넘치고 넘쳤다. 그러나 일본 문학계는 다자이를 사랑을 위해, 문학을 위해 자살한 인물로 묘사한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 천황을 위해 죽는 사람들 얘기는 이미 사람들 관심 밖으로 추락했다.

필자에게 다자이는 문학가 이전에 일본인의 ‘전형(典型)‘으로 와 닿는다. 일본 유전자 120%를 가진 인물이란 점이 먼저 떠오르고, 문학을 그 같은 일본인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 필자의 ‘다자이관(観)’이다. 다시 말해 다자이를 제대로 보면 일본, 일본인, 일본 문화, 일본 지성, 일본 문학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 같은 관점 하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 키워드는 ’분시(文士)‘라는 단어다. 한국에는 없는 말로, 일본어로 ‘부시(武士)’, 즉 사무라이에 대응되는 말이 분시다. 한국에서는 문인(文人), 멀리 고려·조선시대로 가면 문신(文臣)으로 풀이될 용어다. 일본 분시와 한국 문인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일본 사무라이와 한국 무인이 그러하듯 가장 큰 차이점은 생사관에 있다. 칼은 사무라이의 생명이다. 분시에게는 펜과 붓이 목숨이다. 사무라이는 칼을 통해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한다. 분시는 펜을 발판으로 자신의 세계와 삶을 구축한다. 사무라이의 칼이 부러진다면, 분시가 펜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죽음이다. 사무라이가 칼을 통해 생명을 지켜나가듯, 분시는 펜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한다. 칼 하나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사무라이라 할 때, 펜으로 문학과 정면승부에 나서는 존재가 분시다. 사무라이가 목숨을 걸고 싸우듯, 분시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바쳐 글을 쓴다.

인생을 모조리 바쳐 글을 쓰는 ‘분시(文士)’

주목할 부분은 목숨을 걸고 싸울 대상이다. 밖이 아니라 안, 즉 나 스스로가 최대 극복 대상이다. 눈에 보이는 적이 외부에 있지만, 진짜 적은 본인 스스로라는 것이 부시·분시의 기본 자세다. 남에게 따지고 주장하기보다 스스로를 먼저 되돌아본다. 날카로운 칼과 펜의 방향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해 있다. 따라서 평생 글에 매달린 채 살아가는 것이 진짜 분시다. 다자이는 물론 무라카미를 보면 일단 작품 수가 엄청나다. 눈 뜨는 순간 글을 쓰고, 모든 것을 문학에 바친다. 자랑이나 취미와 무관한, 목숨을 걸듯 매일 도전하는 삶으로서의 분시다. 바로 한국의 무인, 문인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국 무인, 문인도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주자학적 대의명분에 그칠 뿐, 실제 피가 튀는 생명을 전제로 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작품 수를 봐도 인기를 끌었던 작품 몇 개로 연명하는 문인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도전도 없고, 과거 생각에만 집착하는 꼰대문학에서 벗어난 문인은 극소수다. 설상가상으로 싸움 상대도 외부에 국한된다. 성찰·반성과 같은 문인 스스로와의 내면 싸움은 없다. 왜냐하면 본인 스스로는 항상 정당하고 정의롭기 때문이다. 주자학 세계관의 상식이자 특징이지만, 본인은 항상 옳다. 21세기 586 정치에서 볼 수 있듯, 벌 받아야 할 대상은 나와 나의 진영 이외의 세상 전부다.

한·일 비교학에서 널리 통하는 얘기로, ‘일본은 칼로 사람을 죽이고, 한국은 입으로 상대를 죽인다’는 말이 있다. 한국의 입은 주자학 대의명분이나 민족·애국·반일 같은 형이상학적 이념을 의미한다. 거창한 대의명분을 통한 말싸움으로 상대를 제압할 경우 승자 독식도 가능해진다. 권력·돈·명예·명성이 전부 손 안에 들어온다는 얘기다. 지금도 한국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결국 승자 독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민족·애국·반일이 되는 셈이다. 거룩하고도 존경스러운 얘기도 넘실대지만, 결국 결론은 돈과 권력이다.

일본 사무라이, 분시 모두가 1년 365일 목숨을 걸면서 싸움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아니다. 21세기 버전 사무라이, 분시로 들어가면 예외적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흐르는 공기는 있다. 한국 무인, 문인과 비교해 보면 일을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다르다. 다자이는 그 같은 한·일 간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만들어 줄 최적의 본보기 중 하나다. 글을 쓰고, 글을 맺는 과정이 ‘목숨’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다자이에게는 ‘문학=죽음’에 해당된다. ‘문학=죽음’을 퇴폐·비관·상실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죽음을 바겐세일 상품으로 내건 ‘사의 찬미’로서 다자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다르게 본다. 다자이에게는 ‘문학=죽음=생명’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분시 최후의 결전(決戦) 무대로서의 소설인 동시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세상 모두에 남길 새로운 생명으로서의 문학이란 의미다. 죽음은 그 같은 문학과 생명을 연결하는 매듭으로 활용됐다. 다자이가 바다 건너 한국의 고전에 올라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자살은 일본 문학의 주된 테마 중 하나다. 일본에서 최고 문학상은 올해 171회에 달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이다. 5000만원 상금이 즐비한 한국 문학상이라지만, 시계와 100만엔 상금이 전부인 아쿠타가와 권위에는 못 미친다. 이 영광스런 문학상의 주인공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일본 문학계 모두가 인정하는 근대 문학의 아버지다. 그러나 불과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1927년 7월 24일 이뤄진 약물 자살을 통한 인생 마감이다. 자살 이유는 불분명하다. 너무도 문학적 표현이지만, ‘딱 부러지게 말하기 힘든 불안’이 자살 이유라고 한다. 건강 문제란 얘기도 있고, 문학가로서의 한계를 느끼면서 행한 자살이란 해석도 있다. 분명한 것은 자살을 통해 죽은 이상 더 이상 문학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쿠타가와 문학은 지금도 고전으로 매년 일본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올라 있다. 작가는 죽었지만, 작품은 매년 생생하게 성장한다.

일본 문학계의 특징 중 하나인 ‘자살’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일본 작가인 [인간실격]의 다자이 오사무(왼쪽)와 동반자살한 그의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 / 사진:위키피디아
자살로 끝난 문학가로는 일본인 노벨문학상 제1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도 포함돼 있다. 가스를 틀고 수면 상태에서 자살한다. 1972년 4월 16일로, 당시 72세였다. 자살한 문학가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죽은 인물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다. 육체미 선수이자 영화배우로도 활약한 일본 우익의 아이콘으로, 사무라이 전통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인터넷 어딘가에 떠돌고 있지만, 참수된 미시마의 머리 사진이 남아 있다. 전통 할복은 두 번 목숨을 끊는다. 본인이 배를 십자가로 긋는 순간, 조력자가 위에서 목을 치는 식이다. 단숨에 칼로 처리해야만 한다. 그래야 고통이 없다. 미시마는 배를 가른 뒤 부하에게 목을 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부하는 목이 아니라 어깨를 치면서 실패한다. 두 번째 목을 치지만, 몇 초 동안의 고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요즘 유행하는 성지순례라고나 할까? 지난 5월 다자이의 흔적을 찾아 도쿄 미타카(三鷹)에 들렀다. 시부야(渋谷)에서 서쪽으로 14㎞ 떨어진 도쿄 외곽이다. 다자이에 관한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곳으로, 다른 문학가들의 흔적도 살펴볼 문학 공간이다.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이 왜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요람으로 떠올랐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주거비가 싸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쉽게 머물 수 있었다. 미타카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이래 돈과 무관한 문학가, 예술가들의 피난처가 바로 미타카 주변이었다. 미타카는 ‘사람 잡아먹는 강’으로 통하는 다마가와조스이(玉川上水)를 끼고 있는 땅이다. 다마가와조스이는 에도(江戸)시대 당시 100만 주민을 먹여 살리던 수원(水源)으로 활용됐다. 수량이 풍부하지만, 여름이 되면 한순간 물이 불어 주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서운 강이기도 하다. 바로 다자이의 자살 현장이다. 다자이는 1948년 6월 13일 다마가와조스이에서 애인 야마자키 도미에(山崎富栄)와 동반자살한다. 시신은 다자이의 39세 생일인 6월 19일 도쿄만에서 발견된다. 야마자키는 평소 간호를 하면서 다자이에게 도움을 준 문학여성이기도 하다. 당시로서는 고학력 고졸 출신 미용사로, 지성과 미모를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기차가 미타카역에 들어서는 순간 다마가와조스이가 눈에 들어온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고 좁아서 깜짝 놀랐다. 폭과 깊이가 불과 1m 정도인 시냇물이다. 여름철 비가 온다고 해도 폭 3m를 넘기 어려운 작은 하천이다. 1970년대 이후 이뤄진 대규모 수리 시설 개·보수 이후 폭과 깊이가 왕창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자이 생존 당시에도 폭 5m가 넘지 않는 작은 강에 지나지 않았다. 다마가와조스이는 폭과 깊이가 아닌 유속이 엄청난 강이었다고 한다. 좁은 강에 빠른 속도의 물이 왕창 밀려들기 때문에 발을 헛디딜 경우 그대로 떠내려갔다고 한다.

입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문학세계 표현

미타카는 다자이의 거주지와 무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곳 모두를 끼고 있다. 이미 76년 전 사라진 인물이지만, ‘지금 당장 다자이’를 느끼게 만들 공간이다. 인간이 가진 호기심 때문이겠지만, 다자이가 자살한 ‘바로 그 현장’도 성지순례지 가운데 하나다. 역에서 내려 다마가와조스이를 따라 2분 정도 걸어가면 가로, 세로 40㎝ 정도의 작은 바위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아무런 설명 없이 ‘ 카세키(玉鹿石)’란 글자만 새겨진 기념물이다. 다자이가 자살한 현장이다. 카세키는 일본인이 가장 높게 평가하는 바위재료 중 하나다.

다자이의 자살을 보면서 흥미로운 것은 부인과의 관계다. 자살 당시 다자이는 대졸 출신 부인 쓰지마미치코(津島美知子)와 자식 세 명을 가진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다. 술·마약·담배에 찌든 정신병자 같은 존재였지만 부인, 자식과 함께 산보도 하고 식사도 즐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애인과의 동반자살이다. 일본문화의 특징 중 하나지만, ‘신주(心中)’가 보편화해 있다. 함께 자살하는 것이 신주다. 가족, 연인, 부자, 모자, 심지어 같은 회사 직원끼리의 신주도 일반화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나누자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죽음의 정당성을 함께 나누자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인 시각으로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죽음이 신주의 중심이 될 듯하다. 다자이의 경우가 그러하듯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죽음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주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다자이 부인 입장에서 보면 고통이 평생 따라다녔을 듯하다.

언제부턴가 ‘극단적 선택’이란 단어가 한국 신문·방송의 단골 메뉴에 오른 듯하다. 정치적 올바름 덕분이겠지만, 자살을 대신해 등장한 애매한 단어다. 자살자의 명예를 고려한 말이겠지만, 사실 ‘극단’이란 말도 좋은 선택은 아니다. ‘자살=극단’이 아닌 ‘자살=최선’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안락사는 최적의 본보기다. 필자는 자살을 찬미하거나 두둔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대로 ‘자살=반사회범’으로 몰아갈 생각도 없다. 삶이 그러하듯 죽음도 각자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극단만이 아닌 평화와 자유 속에서 내려진 선택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자이를 술·담배·여자·마약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한 정신병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자이는 입이 아닌 행동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표현한 분시다. 남이 아닌 나의 세계를 위해, 집단이 아닌 개인의 자유를 위한 분시의 행동인 것이다. 거창한 명분과 함께 핑계와 남 탓이 대세로 굳은 지 오래다. 전부 억울하고 화가 잔뜩 나 있다. 왜 다자이가 ‘꼰대문학 나라’의 고전으로 떠올랐는지에 대한 답도 바로 거기에 있을 듯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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