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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와인 사랑은 누구도 못 말려” 

포도주 시장에서 마주친 ‘최태원 vs 정용진’ 


지난해 초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신세계백화점 바이어를 통해 선물용으로 쓸 프랑스 보르도 고급 와인을 수소문했다. 때마침 SK네트웍스가 올드 빈티지의 1등급 와인들을 수입해 놓고 있었다.

신세계 측은 백화점에 와인을 납품하는 다른 수입업체 직원을 통해 이 사실을 알았다. 이 직원은 SK네트웍스의 와인 리스트를 입수해 정용진 부회장에게 건넸다. 하지만 이를 본 정 부회장이 업체 직원을 되레 호되게 나무랐다.

샤토 라투르 85년산 315만 원, 샤토 마고 84년산 156만 원, 샤토 무통 로쉴드 84년산 190만 원 등 대부분 와인이 당시 환율에 비해 비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와인업체 관계자는 “정 부회장은 국내 와인 세금과 유통마진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이렇게 비싸게 받으면 되느냐며 화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리스트를 본 국내 특급 호텔의 한 소믈리에는 “수입 와인에 70% 가까이 부과되는 세금과 수입상-도매상-소매상으로 이어지는 유통을 고려하면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라며 “현지 네고시앙(도매상)과 직접 와인을 거래하는 SK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부회장은 그 일을 계기로 와인을 직접 수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신세계백화점이나 이마트, 조선호텔 등은 도매상이나 수입업체를 통해 와인을 납품 받고 있었다. 정 부회장은 유통 마진을 줄인다면 와인 가격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 부회장의 지시가 떨어진 후 실무진은 사업성 검토에 나섰다.

급기야 1월에 신세계와인컴퍼니가 탄생했다. 신세계 측은 “이제 겨우 와인사업부가 꾸려졌기 때문에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와인 업계에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통망이 국내 와인 시장의 20%가량을 차지하는 신세계가 직접 와인을 수입한다면 국내 와인 시장의 지각 변동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와인21닷컴의 최성순 사장은 “국내 와인 시장 전체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부회장은 와인 감별 능력부터 양조장에 대한 배경 지식까지 두루 갖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정 부회장처럼 와인에 대한 애정과 전문성이 와인 사업으로 이어진 경우가 과거에도 더러 있었다.

와인 수입업체인 나라식품을 세운 이희상 한국·동아제분 회장과 수석무역을 만든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신동와인을 설립한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이 주인공이다. 이들 중 이희상 회장은 와인 수입을 넘어 미국 나파밸리에 포도원을 조성해 현재 특급 와인 ‘온다도로’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미국 와인 칼럼니스트 맷 크레이머는 이 와인을 마신 후 “캘리포니아의 최고급 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치켜세웠다.

오너 따라 와인 사업도 각양각색


국내 와인 시장에 뛰어든 1세대 오너들. 왼쪽부터 김영호 회장, 이희상 회장, 강신호 회장
과거 중견기업 오너의 와인 사랑이 요즘은 대기업 오너로 이어지는 추세다. 와인하면 정 부회장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최태원 SK 회장이다. 최 회장과 정 부회장은 평소에도 만나 가끔씩 와인잔을 함께 기울이는 막역한 사이.

하지만 와인 사업에 있어서는 최 회장이 정 부회장보다 관심이 더 많았다. 평소 와인을 즐기던 최 회장은 2000년대 초부터 와인 사업을 직접 추진했다.

당시 워커힐호텔이 있는 서울 아차산에 지하 동굴 형태의 와인 저장고를 조성할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SK글로벌 분식회계’와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와인 프로젝트는 지지부진해졌다.


3월 1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모임. 전경련 만찬 때마다 등장한 와인이 화제를 모았다. 이날엔 프랑스 마고에서 생산되는 ‘샤토 브랑 캉트냑 2004년산’이 등장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SK의 와인 사업은 최근 투자에 초점을 맞추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 특급 와인을 미리 거래하는 선물(先物) 시장에 참여해 와인을 사둔 후 나중에 되팔아 수익을 올리는 것. SK네트웍스가 국내 최초로 선보인 와인 펀드의 경우 이를 통해 운영된다. 지난해엔 LG가(家)도 가세했다.

와인 애호가인 LG상사의 구본준 부회장 주도로 LG트윈와인을 설립한 것. 구 부회장은 해외 출장에서 맛본 와인을 실무진에게 직접 추천할 정도로 열정적이다. 트윈와인은 지난해 말부터 인기 만화가 허영만 화백과 함께 다양한 와인 행사를 벌이고 있다. 트윈와인이 허 화백을 내세우게 된 것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작품. LG 관계자는 “구 회장이 평소 허 화백과 남다른 친분을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했다”고 귀띔했다.

와인에 대한 오너들의 적극적인 관심은 그룹 내 다른 사업과의 시너지로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LG전자는 국내 와인 냉장고 시장에서 점유율 40%를 돌파하며 처음 1위에 올랐다. 와인 냉장고 시장은 2007년까지 중국 하이얼이 30%대 점유율로 1위를 지켜 왔다. 하이얼의 독주가 무너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LG전자는 지난해까지 백화점 위주로 팔던 ‘디오스 와인셀러’를 올해부터는 전문점, 직영점, 할인점까지 유통을 확대했다. 또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에 있는 LG의 곤지암 리조트에도 9만 병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는 인공 동굴 방식의 와인 저장고를 만들어 하반기에는 와인 레스토랑과 연회장 사업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각종 와인을 검색할 수 있는 ‘와인 백과사전’이란 메뉴가 들어 있는 LG전자의 ‘와인폰’도 중겴約?세대를 주요 고객층으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CEO들의 애정으로 시작한 와인 사업이기에 추구하는 방향도 제각각이다. 신세계는 유통 과정에서 생기는 가격의 거품을 빼고 와인의 대중화를 강조한다.

신세계 측은 “와인 수입회사 설립은 유통으로 생기는 비용을 최소화해 소비자들에게 공급하겠다는 신세계 경영 방침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SK는 내수 시장을 겨냥한 와인 수입과 함께 글로벌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와인을 산지에서 직접 구매하고 되파는 방식을 택했다. 이를 통해 소비자에게 보다 저렴하게 와인을 공급하겠다는 전략이다.

LG는 가전이나 휴대전화처럼 와인을 라이프 스타일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급 호텔의 한 소믈리에는 “LG는 와인 사업도 가전 사업처럼 저돌적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현재 와인 업계에 뛰어든 대기업은 신세계, SK, LG뿐만이 아니다. 기존 롯데아사히주류를 통해 와인을 수입하던 롯데는 지난해 말 두산주류BG까지 인수하며 와인 업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이 밖에도 한진, 하이트맥주, 동원, 매일유업, 대한제분, 국순당 등도 최근 와인을 직접 수입하거나 와인 수입업체를 자회사로 두고 있다.
그동안 국내 와인 시장은 대기업을 제외하고 금양인터내셔날, 아영FBC, 대유와인, 나라식품, 신동와인 등 상위 몇 개 업체들이 전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최근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맞으며 주춤하고 있는 상태다.

최근엔 대기업의 적극적인 행보로 시장이 활기를 띠는 모습이다. 최성순 사장은 “시장이 작고 수익을 거두는 데 시간과 투자가 많이 필요한 와인 사업의 특성상 오너의 강력한 지원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들다”며 “기존 시장을 뺏기보다는 새롭게 시장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조석래 회장은 ‘와인 스토리’ 대화 즐겨

CEO들의 와인 사랑이 각별한 것은 이들 중 해외 유학파들이 많아 와인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와인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과 VIP 접대에 유용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말 두산주류를 롯데에 매각한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사석에서 “두산주류를 판다니까 소주는 팔아도 와인만은 남겨두라는 친구들이 많더라”며 웃었다.

그렇다면 CEO들은 어떤 와인을 좋아할까. 정용진 부회장은 와인에 대한 식견이 높은 만큼 다양한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프랑스 부르고뉴와 보르도 와인을 즐기지만 샴페인에 대한 조예도 남다르다고 한다. ‘서민형 총수’를 지향하는 최태원 회장은 고급 와인을 사고 파는 사업과는 별개로 와인은 부담 없이 즐기는 편.

평소 캐주얼하게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선 4만 원대 호주 울프블래스의 옐로 레이블처럼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와인을 선호한다고 한다. 지난해 말 최 회장은 자신이 주관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만찬에서 국산 와인 마주앙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와인 업계 한 관계자는 “침체된 경기 상황을 의식한 것도 있겠지만 평소 소탈한 와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이라고 설명했다.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조석래 효성 회장은 ‘스토리’가 있는 와인을 선호한다. 와인을 주문할 때마다 와인과 관련된 ‘스토리’를 첨부해 달라고 수입업체에 요청할 정도다. 그래서 모임이 있을 때면 종종 와인에 얽힌 다양한 스토리로 대화를 풀어간다.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 역시 소문난 와인 애호가.

직접 와인 사업에 뛰어들기도 한 강 회장은 프랑스 보르도 와인보다는 부르고뉴 지방 와인과 칠레 와인을 즐긴다. 그는 아들인 강문석 수석무역 부회장과 갈등을 겪을 때도 와인만은 줄곧 수석무역이 수입하는 부르고뉴 와인과 칠레 와인을 마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 회장이 좋아하는 칠레 와인은 발디비에소가 포도 품질이 좋은 해에만 생산하는 카발로 로코다.

그 아래 등급인 발디비에소도 즐겨 마시는 편이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술이 약한 편이라 와인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소장하고 있는 와인 컬렉션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인으로 엿보는 경영 스타일
국내 와인 수입 시장에 뛰어든 기업은 LG, SK, 신세계, 롯데, 한진, 동원, 매일유업, 하이트맥주, 국순당 등이다. 이들의 와인 판매 방식을 보면 기존 경영 스타일이 보인다.

LG 가전이나 휴대전화처럼 와인도 라이프 스타일 문화로 해석
SK 와인 수입과 함께 글로벌 역량 활용한 와인 투자에 집중
신세계, 롯데 막강한 유통망을 통해 가격 거품 빼고 와인 대중화 선도 동원, 매일유업 식음료 시장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와인 진출
하이트맥주, 국순당 기존 주류 유통망으로 시너지 구축


200904호 (200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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