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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대기자의 ‘역설의 리더십’(8) 

절대 권력일수록 쉽게 무너진다 

권력이 달라졌다. 무소불위의 시대는 끝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권력은 영향력이란 이름으로 포장됐을 뿐 그 힘은 여전하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보다 지켜내기가 더 어렵다는 얘기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된다.

▎사진:이정권 기자
‘권력의 역설(power paradox)’이란 말이 있다. ‘권력이란 나눌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다른 버전도 있다. ‘절대 권력일수록 쉽게 무너진다.’ 제왕적 권력이란 말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진시황이나,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聖人) 군주의 ‘철인(哲人)정치’ 같은 뻔한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오늘날 진시황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도 존재할 수 없고, 이상적인 통치를 기대할 만한 성인군자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 또한 역설이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민주주의 시대인 까닭이다.

물론 민주주의 시대에도 권력은 존재한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권력이다. 그걸 모르고 지나치게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다 보면, 그것이 흔히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돌아오곤 한다. 그래서 권력의 역설이 더욱 현실적인 이야기가 된다. 권력이란 적당히 나눠야 위험하지 않은 양날의 칼인 것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미투(me too·나도 당했다)’나, ‘갑질’ 같은 것도 다른 게 아니다. 그 바탕에는 권력에 대한 시대착오적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성추행이든 갑질이든 가해자는 권력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이 같은 시대에 머물러 있으면 문제가 없다. 성추행이나 갑질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피해자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가해자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그것이 ‘절대반지’와 같은 권력의 속성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시대착오를 일으킨다. 어떤 분야든 크고 작은 권력은 남용될 위험이 있으며, 필연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비극을 내재하고 있다.

다른 예를 보자. 미국 정치인 존 에드워즈는 2004년 초선이라는 짧은 정치 경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세네카에서 직물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우체국 직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가 근무하는 공장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섬유공학과에 진학함으로써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이어 같은 대학 채플힐 로스쿨을 졸업한 뒤, 1977년부터 소송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날려 재산을 모았다. 21년 변호사 생활을 청산하고 1998년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예비선거 과정에서 그는 미국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두 개의 미국’으로 갈라져 있다며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을 내세워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결국 대선 후보 자리는 4선 경력의 존 케리 의원에게 내줘야 했지만, 그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돼 부통령 후보가 됐다.

2008년 대선에서도 그는 민주당 경선 후보로 나섰다. 이번에는 4년 전보다 더 강력한 후보였다. 하지만 암 투병 중인 아내를 놔두고 선거캠프에서 일하던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다.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고 끝내 경선을 포기해야 했다. 나중에 그는 ABC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젊은 나이에 상원의원이 되고 부통령 후보에 이어 대통령까지 바라볼 수 있는 전국적 인물로 명성을 얻었는데, 그것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아도취적 인간이 되도록 자양분을 공급했다.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나를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권력의 본질 모르면 한순간 추락

존 에드워즈의 예는 단순한 불륜의 문제가 아니다. 그 스스로 고백하듯, 잘못 사용한 권력의 문제다. 권력의 본질을 착각하고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일순간 신뢰와 존경을 잃고 추락하고 만 것이다. 『선한 권력의 탄생』의 저자 대커 켈트너 UC 버클리대학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에드워즈가 생각했던 권력의 본질은 ‘마키아벨리식 권력 개념’이다. 즉 억압, 무자비, 기만, 권모술수, 전략적 폭력 등으로 강압적으로 남을 복종시키고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권력인 것이다. 에드워즈가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더라도 자신에게는 선거캠프에서 일하는 여성쯤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 여성이 에드워즈를 유혹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유혹한 것이 자신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만큼 매력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매력이 넘치는 자신은 어떤 여성과 관계를 가져도 문제가 없다는 오만이 싹텄던 것이다. 권력은 이처럼 자기기만을 초래하는 약물이기도 하다. 그것이 ABC 방송이 에드워즈를 예로 다뤘던 기획, [왜 권력자들은 유혹을 이기지 못할까(Why powerful man can’t resist temptation)]의 주제였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정상에서 한순간에 추락한 것 역시 그처럼 잘못 사용한 권력 탓이었다.

권력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결정하는 힘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켈트너 교수는 말한다. 개인들이 알게 모르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같은 다양한 사회연결망에 속해 있는 이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 마키아벨리식 권력은 ‘과거의 유물이거나 허구’에 가깝다. 개인이 자기중심적 사고에 의해 권력을 그릇되게 사용하면 한순간에 권력자의 평판이 나빠져 결국 권력을 잃고 마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3년 전 ‘촛불 혁명’이 바로 그것이다. (분명 과장이지만) ‘제왕적 권력’을 가졌다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 권력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국민에 의해 탄핵돼, 파면되는 것도 모자라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나 말이다. 그런 잘못된 권력 인식의 뿌리는 너무도 깊다. 전임자에게 배우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대통령 탄핵으로 거저 줍듯 권력을 획득한 정권 역시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권력의 오남용을 일삼다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게 오늘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단언컨대 권력이란 얻는 것보다 사용하는 게 더 어렵다. “무슨 소리야?”라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다. 명검을 만들고 벼리는 게 어렵지, 만든 칼을 휘두르는 게 무에 어렵냐는 것이다. 물론 휘두르는 건 쉽다. 하지만 자신에게 흉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휘두르는 건 어렵다. 그것은 명검의 예리한 칼날을 벼리는 지난한 작업보다도 훨씬 어려울 수 있다. 제왕학의 교본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정요』가 당 태종이 건국 10년을 맞아 위징, 방현령 등 신하들과 ‘창업(創業)과 수성(守城),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라는 주제로 논의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태종이 묻는다.

“창업과 수성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어렵소?”

이에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자만 취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압니다.”

태종이 위징을 바라보자 위징이 말했다.

“예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艱難)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 속에서 쉽게 잃는 법입니다. 따라서 수성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태종이 웃으며 모범 답안을 내놓는다.

“방공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을 이루기 위해,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驕奢)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禍亂)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오.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짐은 앞으로 제공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

권력은 얻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창업과 수성이 모두 어렵다고 얼버무리고 있지만, 창업보다 수성이 더욱 어렵다는 뉘앙스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권력을 잡기도 어렵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것, 즉 권력이 유지되도록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얘기와도 뜻이 통한다. 당 태종 때처럼 절대군주제 아래서도 그랬는데, 오늘날처럼 민주적인 시대에서는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지금은 지배와 복종을 결정하는 힘이 아니라,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권력인 시대 아닌가. 사회연결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각각의 권력이 도처에 상존한다. SNS의 작은 권력이 정부라는 큰 권력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권력을 잡기보다 권력을 행사하기가 더 어렵다는 게 진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올바른 권력 행사가 될 것인가. 그 답을 『정관정요』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역설일까. 위징은 말만 하고 그치는 사람이 아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이듬해, ‘십사구덕(十思九德)’이라는 계율을 제시한다. 창업한 군주가 수성을 위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 다시 말해 권력자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지켜야 할 마음가짐이다. 1400년 전의 말이지만, 오늘날 들어도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란 게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까닭이다.

우선 ‘십사’, 즉 열 가지 마음가짐은 이렇다.

1. 탐나는 것이 있을 때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큰 사업을 벌일 때는 적정한 선에서 그칠 줄 알아야 하며, 늘 백성(부하직원)들의 안위를 생각해야 한다.

3. 자신의 힘을 과신해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일 없이, 겸허하게 자제해야 한다.

4. 다른 사람 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흘러넘치는 바다가 모든 강보다 낮음을 명심하고 겸허해야 한다.

5. 사냥할 때 사냥감을 막다른 길로 몰지 않고 한쪽을 터주듯, 유희를 즐기고 싶을 때도 반드시 한도를 정해야 한다.

6. 게으른 마음이 생길 때면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결의를 다져야 한다.

7. 눈과 귀가 가려지는 것이 두려워질 때는 마음을 비우고 신하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8. 중상모략이 두려울 때는 스스로 바르게 해 사악한 마음을 쫓아내야 한다.

9. 은혜를 베풀 때는 순간적인 기분으로 그릇되게 상을 주지 않을까 염려해야 한다.

10. 벌을 줄 때는 일시적인 노여움으로 지나치게 벌을 주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열 가지 마음가짐 중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이 탐욕이다. 그만큼 권력을 쥐게 되면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것이 지나치면 결국 자기 발등을 찍게 된다는 경계인 것이다. 나머지 아홉 가지 역시 결론은 매사에 ‘지나치지 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구덕’, 즉 아홉 가지 덕목은 권력자가 아랫사람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키워줘야 할 내용을 말한다. 아랫사람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 공을 세운다면 그 결과는 윗사람, 즉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권력이 나눌수록 커진다는 게 바로 이것이다. 그때도 중용의 도를 지켜야 한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것이다. 내가 나눠준 권력도 언제나 지나치지 않고 바르게 행사되도록 일러야 하는 것이다.

1. 관이율(寬而栗), 즉 너그러우면서도 소홀하지 않고 엄격해야 한다.

2. 유이립(柔而立), 즉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똑부러져야 한다.

3. 원이공(愿而恭), 즉 성실하면서도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

4. 난이경(亂而敬), 즉 어려운 일을 수습할 능력이 있지만 평소 잘난 척 나서지 말아야 한다.

5. 요이의(擾而毅), 즉 온순하면서도 내면의 심지가 굳어야 한다.

6. 직이온(直而溫), 즉 대쪽같이 곧으면서도 사람들에게 온화해야 한다.

7. 간이염(簡而廉), 즉 대범하면서도 대강대강 하지 않고 정확해야 한다.

8. 강이색(剛而塞), 즉 강직하면서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사려깊어야 한다.

9. 강이의(彊而義), 즉 추진력이 있으면서도 분별력 있어야 한다.

위징은 ‘십사구덕’을 제시하며 “군주가 십사를 지켜 스스로 통제하고 부하의 구덕을 키워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력에 손 베지 않도록 늘 돌아봐야

사실 말이 쉽지 실천하려면 하나도 쉬운 게 없다. 세상에 지나치지 않는 것처럼 어려운 게 또 어디 있겠나. 당 태종도 늘 적당한 순간에 멈추지 못하고 더 가고는 했다. 그때마다 위징이 나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했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매일 들으면 지겨울 법이거늘, 허물을 콕콕 짚어내는 잔소리가 얼마나 듣기 싫었겠나. 정사를 마치고 침전으로 돌아와서는 “내가 이놈의 늙은이를 꼭 죽이고 말리라”라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장손 황후가 “직언을 들어야 한다”고 일깨워줘 마음을 돌리곤 했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크게 슬퍼하며 묘비석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일부 간신들이 위징의 행동이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고 참소하자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위징을 의심해 비석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이후 태종은 점점 자신이 무오류의 존재라고 믿기 시작했다. 권력에 도취해 자만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끝내 치명적인 결정을 하고 만다. 고구려 원정에 나선 것이다. 신하들이 극구 말렸지만 태종은 원정을 감행했고 결과는 누구나 아는 대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전쟁에 패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명도 재촉하고 말았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맞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나, 그때 얻은 병에 시달리다 한창 나이인 51세에 죽고 말았다. 그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뒤 회군하면서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끝까지 막았을 텐데…”라고 후회하며 위징의 비석을 다시 세우게 했다는 얘기가 『신당서』 [위징열전] 편에 전한다.

당 태종이 누군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도 끝내 권력의 칼날에 손을 베고 말았다.


※ 이훈범은…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되었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이고 있다.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1989년 중앙일보에 얽매여 기자로 산 지 30년째, 그중 10년 이상을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 경영에 답하다』(2009), 『대한민국 국격을 생각한다』(2010, 공저),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2014), 『품격』(2019)이 있다. 파리10대학 문학박사 과정 수료.

201912호 (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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