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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도우미로 나선 3세 경영인 | 정경선 HGI 의장·루트임팩트 CIO 

지구촌 문제 해결의 길을 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은 자본력에 달려 있다. 금수저를 넘어 ‘다이아몬드 수저’라 불리는 재벌가 일원이 자신에게 허락된 행운을 사회문제 해결에 쏟아붓는 모습이 결코 흔한 사례는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체인지메이커는 대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의역할 수 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을 사회는 물론이고 지인들, 심지어 가족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죠. 수십 년 동안 여전히 경영학과가 인기인 사회에서 ‘남 돕는 좋은 취지의 일’이라고 말하면 ‘너나 챙겨라’라는 핀잔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팽배한 성장 서사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일 거예요.”

정경선 HGI 의장(35)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이자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아들이다. 지난 2012년 스물여섯 나이에 사회혁신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루트임팩트를 세웠고, 2년 뒤 2014년에는 본격적으로 소셜벤처에 투자하기 위해 HGI를 창립했다. 다양한 사회문제를 혁신적 아이디어로 풀어가는 이들(체인지메이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재벌 3세의 말은 소외된 혁신운동가들을 향하기보다, 어쩌면 자기 내면을 향한 독백처럼 들린다. 소유한 자본의 크기가 사회적 위상은 물론 기회마저 결정짓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고난 ‘왕좌’ 대신 지속가능한 사회 혁신에서 답을 찾는 길을 택했기 때문일 터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정 의장은 가업승계나 경영 수업 대신 사회 혁신 운동에 뛰어들었다. 현대가 출신답게 아산나눔재단 창립 멤버 및 NPO사업팀장을 거쳐 현재는 비영리단체 루트임팩트 CIO(최고상상책임자)이자 HGI 의장을 맡고 있다. 루트임팩트가 지원하는 체인지메이커란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들을 가리킨다. 소셜벤처를 비롯해 이들에게 법률·회계 등 전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보노(Pro Bono), 교육·연구자, 소셜 섹터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대학생, 기업 CSR 전문가, 가치소비에 앞장서는 소비자 등이 모두 체인지메이커다.

지난 2017년 7월 문을 연 헤이그라운드는 체인지메이커 지원을 대표하는 베이스캠프다. 한국의 체인지메이커 생태계 조직을 구상하며 출발한 헤이그라운드에선 사회 혁신을 꿈꾸는 이들이 적정한 가격에 입주해 쾌적한 업무 환경, 사업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네트워크 강화 같은 이점을 얻고 있다. 1호점인 성수시작점에 이어 지난해 9월에는 서울숲점도 문을 열었다. 지난해 기준으로 성수시작점에는 에누마코리아를 비롯해 67개사가, 서울숲점에는 링크(LiNK) 등 41개사가 입주했다. 헤이그라운드나 카우앤독 같은 소셜 코워킹 스페이스가 자리 잡으면서 성수동은 퇴락한 철물점이 늘어섰던 서울 변두리에서 어느새 ‘소셜벤처의 메카’로 거듭났다. 정 의장은 애초 입지 선정 때부터 “도심지 대신 어떻게든 발전이 더딘 지역을 찾아 지역을 재생하는 것도 목표였다”고 말했다. 수치만 보면 의도는 적중했다. 2014년 루트임팩트가 처음 성수동에 자리 잡을 때만 해도 두 자릿수에 머물렀던 소셜벤처 수는 현재 250~300여 곳으로 늘었다.

소셜벤처 메카 된 성수동 헤이그라운드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에 만난 정경선 의장. 체인지메이커를 지원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다.
헤이그라운드 입주는 영리기업이든 NPO(비영리조직; Non Profit Organization)든 제약을 두지 않는다. 다만 조직의 비전과 미션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 구체적인 해결책을 갖고 성과를 증명해왔는지, 조직 구성원과 이를 공유하는지 등을 인터뷰를 통해 가려낸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지원하는 엑스프라이즈(XPrize)에서 우승해 화제가 된 교육 스타트업 ‘에누마’도 지난해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 둥지를 틀었다.

정 의장은 루트임팩트 설립 초기부터 “체인지메이커들의 사업이나 업무 하나하나를 지원하기보다 그들의 삶과 성장 과정을 지원해왔다”고 설명했다. 현재 루트 임팩트의 주요 사업이 헤이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한 임팩트 성장·지원(Work)과 체인지메이커를 위한 코리빙(Co-Living) 커뮤니티 ‘디웰하우스(Life)’, 체인지메이커를 꿈꾸는 청년과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교육사업(Learn) 등 세 개 카테고리로 나뉘어 진행되는 배경이다.

정 의장은 올해나 내년 중 헤이그라운드 3호점을 열 계획이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돌발변수를 맞아 예상보다 늦어졌지만, 3호점의 무대는 미국 뉴욕으로 잡았다. 코로나 사태는 역설적으로 한 나라의 위기가 전 지구적 위기로 점염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정 의장은 “미국은 지구촌이 안고 있는 사회적 이슈의 집합체 같은 곳”이라며 “임팩트 투자뿐 아니라 자선사업 등 소셜 영역에서 뉴욕이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본고장에서 배워보자고 생각했는데, 요즘 보면 미국도 정말 문제가 많은 나라인 거 같아요. 우리가 입점하려는 브롱크스도 뉴욕에서 가장 가난한 낙후 지역입니다. 유색인종 비중이 90%를 넘고 불법이주민도 많죠. 최근 인종차별 반대 시위까지 번지면서 미국 내 사회문제의 종합판 같은 곳이 됐습니다. 한국의 실험이 미국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우리의 경험을 그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 기대가 큽니다.”

2014년 창업한 HGI는 소셜벤처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임팩트 투자의 발판이 됐다. 임팩트 투자란 단순히 높은 투자수익률 목표를 넘어 사회나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존 사회책임투자와 유사하지만, ‘착한 투자’는 물론 수익률을 증명하는 기업을 찾아 장기투자한다는 점이 다르다. 최근 글로벌 사모펀드(PEF)와 대기업들도 임팩트 투자에 관심을 쏟고 있다. 더욱이 코로나19 같은 전 지구적 전염병 사태, 기후변화가 초래할 환경 재앙 등이 지구적 생존 이슈로 공감되면서 임팩트 비즈니스의 존재가치도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다.

유방암 환자를 위해 기존 제품 대비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면서도 비용은 절반으로 낮춘 유방재건용 의료소재(플코스킨), 심혈관질환자를 위한 인공지능 영상 및 판독 기술(메디픽셀), 플렉시블 배터리 개발을 통한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대중화(리베스트), 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들을 위한 디지털 학습 솔루션(에누마) 등이 HGI가 나선 임팩트 투자 사례다. 이 밖에도 HGI는 산후 여성 건강관리 솔루션을 개발하는 ‘더패밀리랩’, 신진 창작자 기반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 청년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코리빙(Co-Living) ‘MGRV’ 등을 별도 자회사로 둬 임팩트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

정 의장은 자체 자본금을 활용한 본계정 투자에서 벗어나 지난해부터 펀드 조성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자본금 규모에 한계가 있는 만큼, 외부 수혈을 통해 투자 규모와 성과를 확대하기 위함이다. 올해 1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소진한 것을 비롯해 연말까지 두 개 펀드를 더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고, 대기업과 해외 파트너들을 연계해 사업 기반을 더욱 공공히 다지겠다는 게 정 의장이 그리는 그림이다.

“재벌은 사회에 빚진 사람들”

정 의장은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묻는 질문에 펀드 규모나 투자수익률 대신 “지금껏 몰랐던 걸 알아가는 과정이 될 것 같다”는 선문답을 내놓았다. 2018년 이후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실체를 자각한 것이 이런 철학적 담론에 집중한 계기가 됐다.

“얼마 전 『2050 거주불능 지구』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지구온난화가 가져올 기후 재난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류가 지금처럼 번성할 거란 낙관주의가 아직 팽배하지만, 실제로 우리 미래는 ‘이대론 끝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암담한 게 사실입니다. 기후변화가 현재 추세대로 진행된다면 중국, 미국 같은 글로벌 식량 기지가 무너지면서 전 세계적 식량문제가 폭증할 수 있어요. 자연히 취약계층이 먼저 어려워지고 양극화는 더 가속화되겠죠. 한국은 식량의 60%를 수입하면서도 1인당 석탄사용량은 세계 2위입니다.”

정 의장은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자원부족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빈곤, 교육, 의료, 노후 같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에겐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현재를 명확히 진단하고 미래에 대비하는 게 진정한 의미의 낙관주의라는 게 정 의장의 설명이다. ‘몰랐던 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첫 과제는 데이터 확보다. 정 의장은 현재 HGI를 중심으로 ‘임팩트 맵핑’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사안별 연구물들을 훑어보는 작업이다. 최근에는 의료보건 영역에서 4만여 개 논문을 데이터베이스화했고, 여기서 실제 우리 삶에 영향를 미치는 내용들을 다시 추렸다. 당면한 사회문제가 어떤 것이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서다.

소셜벤처와 대기업들을 이어줄 협업 플랫폼 구축도 주요한 과제 중 하나다. 최근 HGI는 기업의 사회적가치를 핵심 미션으로 삼은 SK그룹이 임팩트 유니콘을 공모하는 프로젝트에서 ‘파트너 유니콘’으로 나서 협업도 했다. 기업의 메인 비즈니스에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조언하는 역할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재벌가 3세가 여느 금수저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온 지 올해로 9년째. 정 의장은 이런 자신의 행보가 ‘사회적 부채’와 ‘행운’이 만들어낸 조합이라고 풀어냈다.

“제 이름이 나온 기사를 보면 으레 ‘돈 있으니 할 수 있는 일 아니냐’는 댓글이 따라붙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루트임팩트는 비영리단체다 보니 초기 설립부터 아버지와 친지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성과에 대한 압박이나 기부금 등 운영비용에 대한 간섭이 없었던 건 큰 행운입니다. 다만 돈 있는 사람이 건물 사들이는 대신, 저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하는 길로 유도할 수 있다면 좋겠죠.”

정 의장은 “재벌이 사회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임을 강조했다. 사회·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이 분명하지만, 국가적 성장 과정에서 특혜와 수혜를 입은 것 또한 사실이란 뜻에서다.

“창업주나 2세만 해도 그들의 역량으로 사업을 키워 온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3세로 내려오면 그야말로 ‘출생 로또’죠. 빚을 진 만큼 사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해요.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활용해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죠. 앞으로도 경험과 배움을 통해 한국 사회,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 레벨에서 생존을 위한 발판 마련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습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2010호 (2020.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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