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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경 글로지 대표 

넷플릭스가 인정한 번역업체 

노유선 기자
국내 번역업체 다수가 대기업, 정부,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경쟁할 때 글로지(GloZ)는 스트리밍 동영상, 영화, 드라마, 웹툰·웹소설, 게임 등을 공략했고 서비스 지역은 190여 개국으로 늘어났다.

인터뷰 내내 이국경 글로지(GloZ) 대표는 ‘트랜스레이션(translation)’을 ‘트랜스크리에이션(transcreation)’이라고 말했다. 또 ‘번역사’는 ‘번역작가’라고 불렀다. 이 대표는 “미디어 콘텐트 번역에서 직역(direct translation)은 지역별 문화코드를 반영하지 못한다”며 “이야기의 감동과 재미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선 현지 문화를 고려한 번역 창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누군가를 놀릴 때 쓰는 말인 ‘돼지야’가 아랍권에서는 전혀 짓궂은 표현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를 직역한다면 이야기는 산으로 가기 쉽다.

글로지는 ‘현지화된 번역’을 무기로 글로벌시장에서 활동 중인 미디어 콘텐트 전문 번역업체다. 최근 3년간 기록한 연평균 매출 증가율은 161%. 2016년 12월 설립 후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결과, 어느덧 서비스 지역이 190여 개국으로 확대됐다. 국내 번역업체 다수가 대기업, 정부, 공공기관 등을 상대로 경쟁할 때 글로지는 스트리밍 동영상, 영화, 드라마, 웹툰·웹소설, 게임 등을 공략했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미국 드라마 [루시퍼(Lucifer)] 등이 글로지 번역을 거쳐 전 세계에 전파됐다. 주요 고객사는 넷플릭스, 구글, 아마존프라임 APAC 등으로, 국내에서는 네이버 웹툰과 JTBC 등이 글로지의 도움을 받는다.

글로지는 올해 ‘Inc.5000’ 명단에도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다. ‘Inc.5000’은 미국 경제지 잉크(Inc.)가 선정하는 ‘높은 성장세를 보인 민간기업 5000곳’을 말한다. 잉크는 1982년부터 매년 ‘미국 전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민간기업(Fastest Growing privately held Companies in America)’들을 선정해 발표한다. 올해 명단에 오른 언어 서비스 제공업체(Language service providers)는 10여 곳으로 전체의 0.3%에 불과하다. 글로지는 2016년 미국 법인, 2019년 싱가포르 법인에 이어 최근 일본 법인까지 설립했다.

글로벌기업 넷플릭스가 제안한 창업

2010년대 초중반 전문 통번역사였던 이 대표는 퇴근 후 [스탠드업 코미디]를 번역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루 종일 의학, 법률, 보험 등 딱딱한 문서와 씨름한 후 밤늦게 녹초가 돼 귀가한 이 대표에게 유일한 낙은 [스탠드업 코미디]였다. 영상을 보며 깔깔 웃던 그는 문득‘이 웃긴 걸 번역하면 어떨까?’라는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웃긴 걸 진짜 웃기게 번역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며 “아무도 안 볼 거라 생각해 부담이 없어서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직역을 뛰어넘는 ‘초월 번역’의 재미를 그때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자신의 초월 번역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는 부업으로 미디어 콘텐트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미국 온라인 미디어 업체 버즈피드(Buzzfeed)의 영상 클립이었다. 그는 “너무 짧아서 이야기의 맥락이 없는데 한마디로 웃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버즈피드 이후 넷플릭스 작품도 번역하게 되면서 취미로 시작한 일이 생각지도 않게 커져버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넷플릭스가 저를 믿고 물량을 많이 주다 보니 프리랜서로는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넷플릭스가 저를 대신할 번역작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죠. 통번역대학원 선후배를 수소문해 지원자들을 모았지만 문제는 미디어 콘텐트 번역은 모두에게 생소하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그들을 위한 가이드북을 만들고 직접 트레이닝에 나섰죠. 일종의 봉사활동이었어요.”

넷플릭스가 이토록 이 대표를 신뢰한 이유는 그의 세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가령 그는 국내 뷰티 프로그램을 번역할 때 화장품을 직접 구매해 써보면서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 출연진이 아이섀도가 부드러운 크림 느낌이라고 말하면 이 대표는 정말로 크림 같은지 테스트해봤다. 그는 “미국에서 크림 같다는 말은 꾸덕꾸덕하다는 뜻인데 그 아이섀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직역하면 의미가 잘못 전달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에도 넷플릭스의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이 대표의 트레이닝 덕분에 번역체계가 잡히자 이번엔 한국어 외 다른 언어도 번역할 수 있는 작가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대표는 거절했다. 부업의 비중이 본업보다 배로 커진 탓이었다. 하지만 3개월 뒤 넷플릭스는 또다시 그를 찾았다. 모든 언어를 다룰 수 있는 번역업체를 직접 만들어보라는 제안이었다. 글로지 창업의 시발점이었다.

“당시에는 미디어 콘텐트 번역작가의 위상이 낮아 처우가 열악했어요. 그야말로 열정페이였죠. 콘텐트 번역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마땅하지 않아 번역작가들의 실력도 천차만별이었고요. 콘텐트 번역의 체계화와 퀄리티 높은 번역작업, 번역작가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판단하에 글로지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정답은 없어도 정성은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한 글로지는 올해 서울로 본사를 옮겼다. 대다수 번역업체가 국내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글로벌시장에 진출하는 것과 반대로, 글로지는 넷플릭스 본사에 이어 넷플릭스 APAC, 넷플릭스 코리아로 고객사를 늘려나갔다. 기존 고객사를 유지하면서 국내 미디어 업체를 새롭게 유치하는 전략이다. 최근에는 웹툰·웹소설, e스포츠, 유튜브 영상 등으로 번역군을 확대했다.

글로지에는 영업팀이 없다. 그럼에도 글로지는 대형 번역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 이른바 공룡기업은 인력이 많기 때문에 물량 확보에 적극적이지만, 글로지는 물량이 적을지라도 퀄리티 높은 작품에 집중한다.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됐던 영국 드라마 [블랙 미러]의 번역도 글로지가 맡았다. [블랙 미러]는 시청자의 의견에 따라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인터랙티브 작품으로, 넷플릭스의 신선한 시도였다.

“대부분의 고객사가 창업 초반부터 현재까지 글로지와 협력하고 있어요. 입소문을 듣고 먼저 찾아온 글로벌 기업도 있습니다. 번역 퀄리티가 좋을 때까지 서비스하는 글로지의 진정성을 알아봐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글로지는 고객사의 피드백을 꼼꼼하게 살핍니다. 사실 번역은 주관적 측면이 강해서 정답이랄 게 없어요. 대신 정성이 있죠. 글로지는 최상의 퀄리티를 보장하지는 못해도 최선의 퀄리티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글로지에 등록된 번역작가는 약 8000명. 한국어, 영어, 번역 등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자격이 주어진다. 이 대표는 “한국어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어휘력이 풍부해야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가령 영어로 죽음을 뜻하는 ‘die’라는 단어가 맥락에 따라 희생, 사고사, 전사 등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역 실력도 중요하지만 책임의식도 막중하다는 게 이 대표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통용되는 바둑 용어는 일본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은데, 미국으로 수출 예정인 한국의 바둑 콘텐트를 어떤 언어를 기초로 번역할지 고민하는 것도 번역작가의 숙제다.

그에게 경영 철학을 묻자 “손해를 보더라도 먼저 ‘기버(giver)’가 되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창업 전 손수 미디어 콘텐트 번역 가이드북을 만들었던 이 대표다. 그는 경영팀에도 “손해 봐도 괜찮다. 고객을 먼저 배려하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 대표는 “꼭 경영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타인을 먼저 섬기면 그 진정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며 “진정성이 쌓이면 시너지가 돼 되돌아오기 마련”이라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이 대표는 효율적인 번역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2020년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번역 전 데이터 가공을 위한 태그 시스템(Tag System) 개발이다. 그는 “번역업계에도 머신러닝 바람이 불지만 제대로 된 인풋(input)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며 “태그 시스템을 이용해 원자료(raw data)를 정제된 데이터로 변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같은 말이어도 발화자에 따라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8세 어린이와 80세 노인의 말은 뉘앙스가 다르지 않나”며 “발화자의 나이, 성별 등을 태깅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먹히는 콘텐트는 ‘이렇게’ 다르다

수많은 콘텐트의 흥행 성패(成敗)를 목격한 이 대표에게 콘텐트는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콘텐트에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힘이 있다”며 “유럽이든 태국이든 아랍이든 간에 인류는 모두 슬플 때 울고 신날 때 웃는데, 이때 여러 문화권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콘텐트”라고 힘주어 말했다. 콘텐트를 매개로 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면 각종 차별과 오해를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글로지는 ‘인류가 함께 울고 웃을 때 세상은 하나가 된다’라는 말을 비전으로 삼고 있다.

미디어 콘텐트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시기에 더 나아가 콘텐트의 홍수 속에 있다 보니, 콘텐트의 작품성을 판단하고 흥행성을 내다보는 안목도 자연스럽게 생겼다는 것이 이 대표의 고백이다. 그는 “망할 것 같은 작품은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며 “일관된 메시지 없이 연출 실력만 자랑하거나 자극적인 장면으로 눈길을 끄는 데 몰두하면 이야기의 울림이 꺼져버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출이나 연기가 조금 미흡하더라도 확고하고 일관된 메시지가 있는 콘텐트는 항상 먹힌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인의 화합을 위한 글로지의 여정은 현재 진행 중이다. 올해 설립한 일본 법인에 대해 이 대표는 “예기치 않게 국내 웹툰 작가와 제작사들의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한국에서 검증된 이야기가 해외에서도 흥행하도록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디어 콘텐트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시기에 글로지의 출발은 우연이었을지 몰라도 이후의 모든 여정은 줄기찬 노력이었다. 그는 글로지의 향후 발걸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에서 콘텐트 수출입이 잘될 수 있도록 윤활유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어떤 콘텐트든 국경과 문화권을 넘어 언어장벽을 극복할 수 있도록 글로지가 다리가 되어주는 거예요. 글로지는 번역작가와 번역 에이전시, 콘텐트 제공사 등 콘텐트 업계의 다양한 플레이어가 모두 참여하는 플랫폼을 구축할 계획입니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사진 정준희 기자

202212호 (202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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