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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에게 7500만 달러를 기부한 후원자의 정체 

 

티머시 멜런은 도널드 트럼프 측과 케네디 주니어 측 양쪽에서 최대 기부자다. 이는 그가 역사상 모든 정치 기부자와 다른 이유 중 하나에 불과하다.

▎ 사진:SCOTT OLSON/GETTY IMAGES
오늘날 미국 정치계에서 최대의 기부자는 기자들과 많이 이야기하지 않으며, 언론을 “연방정부와 관료들의 선전부”라고 비판한다. 그러니 오늘날의 유력한 주요 인사로 떠오르는 황금 시대의 상속자 티머시 멜런이 가족, 배경, 정치 철학에 관한 일련의 질문들을 무시하는 것은 예상된 일이었다. 멜런은 바이든이 토론 후 기부 행사를 개최하고 있던 햄튼 위를 비행하는 비행기에 관한 기사 URL과 단 한 단어만으로 대답했다.

“바이바이-든!”

바이든의 비참한 토론 성과로 인해 멜런이 기뻐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트럼프를 백악관에 다시 밀어넣기 위해 멜런보다 돈을 많이 쓴 사람은 없다. 트럼프 측에 두 번째로 많이 기부한 사람은 트럼프 내각에서 근무했던 WWE 업계 거물 린다 맥마흔이다. 그의 기부금은 1110만 달러로, 멜런이 기부한 금액의 약 1/7에 해당한다. 트럼프의 주요 슈퍼팩(한도 없이 후원금을 모을 수 있는 정치조직)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 Inc’에 투입된 자금 중 43%는 이 81세 상속인에게서 나왔다.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다. 멜런은 수억 달러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기부할 수 있는 블룸버그나 아델슨 같은 부자가 아닌데도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런 부자들은 현금흐름이 풍부한 수십억 달러 가치 기업의 지분을 가지고 있지만, 포브스의 추산에 따르면 멜런의 상속 재산과 철도 회사 매각 수익은 약 10억 달러 가치다. 멜런은 자신의 재산이 더 적다고 주장한다. “억만장자 아닙니다!” 멜런은 퉁명스럽게 쓴 또 다른 이메일에서 이렇게 답했다. “억만장자였던 적도 없고, 그렇게 될 일도 없습니다.” 어쨌든 이는 멜런이 그동안 기부한 금액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적은 액수다. 멜런은 연방 정치 단체에 총 2억3700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주 의원 후보와 국경 담당자에게 적어도 6000만 달러를 더 기부했다.

은행업계 거물 앤드루 멜런의 손자인 티머시 멜런은 스스로도 놀라운 액수의 돈을 벌었다. 그의 아버지는 가문의 재산으로 귀족 생활을 즐겼으며, 승마에 오랜 시간을 들여 전미 경마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에 비해 티머시 멜런은 1980년대 초 멜런뱅크에서 돈을 빌려 상황이 좋지 않았던 철도 3개를 구매한 뒤 40년 동안 이를 개발해 6억 달러 규모의 제국을 일궜다. 2015년에 쓴 회고록에서 멜런은 “나는 항상 재정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살았지만, 내가 가지고 시작한 것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항상 머리를 써야 했다”고 말했다.


▎티머시 멜런의 할아버지인 앤드루 멜런(가운데)은 캘빈 쿨리지(왼쪽) 대통령과 허버트 후버(오른쪽)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재무장관을 지냈다. 임기 동안 앤드루는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세금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 / 사진:KEYSTONE/GETTY IMAGES
그는 2022년 80세 생일 한 달 전까지 계속해서 열심히 일한 끝에, 마침내 자산을 현금화하고 선거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멜런의 정치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졌지만 항상 일반적인 견해에서 벗어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세 명의 공화당 대통령 밑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했을 만큼 충성파 공화당 가문에서 태어난 멜런은 어린 시절 좌파로 급변했으며, 좌파 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랄프 네이더가 지지하는 사업에 자금을 댔다. 철도 사업에 뛰어든 멜런은 직원들이 노동조합 지지를 요구하자 직원들과 맞서 싸웠다. 최근 멜런은 도널드 트럼프를 지원하기 위해 놀라운 금액을 쏟아부었을 뿐만 아니라, 케네디 주니어의 슈퍼팩에도 전체 후원금의 절반이 넘는 2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요즘 멜런은 질문에 별로 대답을 하지 않지만 36년 전 포브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멜런은 “당신이 뭔가를 믿는다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고 말했다.

상속자의 상속자인 티머시 멜런은 가족에게 돈이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 부는 증조할아버지인 아일랜드 이민자 토머스 멜런에서 시작됐다. 토머스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빠른 시간 내에 피츠버그 은행제국을 설립했다. 토머스는 결국 티머시의 할아버지인 앤드루를 포함한 자신의 자녀들을 사업에 끌어들였다. 앤드루는 셰브론의 전신인 걸프오일 등의 회사에 투자하다가 워런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정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30년대에 약 2억270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5억 달러)를 남겼으며, 이 유산은 티머시를 포함한 그의 세 손자에게 상속됐다. 또 앤드루 멜런은 그의 아들 폴 멜런이 사치스러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충분한 재산을 남겼다. 폴 멜런은 말에 집착하며 『은수저에 비친 모습』이라는 자서전을 썼다. 폴 멜런이 티머시와 그의 누나에게 얼마를 남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고든의 책에 따르면 두 번째 아내에게 1억1000만 달러를 남기고 2억 달러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앤드루 멜런의 자녀는 둘이었다. 티머시의 아버지인 아들 폴 멜런과 딸 에일사 멜런 브루스다. 두 자녀는 1969년에 앤드루 멜런을 기리기 위해 개인 재단을 합쳐 멜런 재단을 설립했다. / 사진:BETTMANN/GETTY IMAGES
집안은 부자였지만, 티머시 멜런은 어린 시절에 어려움을 겪었다. 멜런의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사망했다. 멜런은 그의 누나가 인생 첫 5년 동안 자신과 대화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멜런은 매사추세츠주에서 사립학교에 다녔고, 그 후에는 그의 아버지가 문학을 공부하고 수백만 달러를 기부한 예일대에 진학했다. 티머시는 정치학을 전공하여 1964년에 졸업하고, 그 후 예일 로스쿨로 향했다. 그러나 교수들에게 겁을 먹어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다(자서전에서 이를 “절대적인 공포”였다고 돌이켰다). 그의 대안은 도시계획으로 예일대 학위를 하나 더 받는 것이었다. 멜런은 화려한 파란색 걸프트럭을 운전했지만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같이 학교를 다닌 에밀리 뉴젠트 캐리어는 멜런을 “재미있고 창의적이었다”고 기억하며 “멜런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전혀 그러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티머시가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멜런은 인구밀도를 연구하면서 다이어그램을 만들고 싶어서 코딩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그 기술은 졸업 후에 유용하게 쓰였다. 그는 뉴헤이븐 외곽에 있는 부자 동네인 코네티컷주 길포드에서 자신의 첫 번째 회사인 1인 컴퓨터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멜런은 나중에 농담처럼 첫 직책은 회장, 프로그래머, 설거지 담당이었다고 말했다. 멜런은 그 시기에 찾아온 자신의 첫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에 뿌리를 둔 가족 성향에서 벗어나 린든 존슨에게 투표했다.

‘위대한 사회’(존슨 대통령의 정치 슬로건)의 시기였다. 1969년 멜런은 세이첨 펀드라는 비영리단체를 공동 설립하여 여기에 동참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사회문제에 대한 잠재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기금은 남부 흑인들을 위한 경제발전을 지원하는 재단, 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단체, 시민참여 증진을 위해 랄프 네이더가 후원하는 조직에 기부됐다. 세인트루이스 오리엔티어링(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목표 지점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스포츠) 클럽처럼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활동에도 기금이 투입됐다. 이 단체는 운영 첫 7년 동안 기부금 410만 달러(현재 가치로 2200만 달러)를 받았으며, 보조금 270만 달러(현재 가치로 1400만 달러)를 승인했다.


▎1981년 한 파티에 참석한 티머시 멜런과 그의 첫 번째 아내 수잔 트레이시 멜런. 길포드 트랜스포테이션 인더스트리즈가 설립된 해에 열린 이 파티는 멜런의 할아버지가 설립한 국립 미술관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 사진:GUY DELORT/WWD/PENSKE MEDIA/GETTY IMAGES
세월이 흐른 뒤 멜런은 자신과 첫 번째 아내가 함께 한 일을 약간의 후회가 섞인 자부심과 함께 돌이켰다. 그는 자서전에서 “우리는 나라를 압도하고 있는 빈곤·인종·환경 파괴 문제에 대처했다”며 “코네티컷주 브랜포드에 처음으로 개설된 호스피스 등 일부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 나이대에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인간 본성의 기본적인 속성을 간과한 것 같다. 그래서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때는 큰 정부에 믿음을 갖기 쉽다. 멜런은 1970년대에 업종을 바꿔 컴퓨터 산업에서 규제가 엄격한 철도 산업으로 전환했다. 그는 여성유권자연합 행사에서 만난 제4세대 철도 종사자인 데이비드 핑크와 협력하여 철도 침목 제조업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철로를 소유하기로 결정했고, 멜런이 살았던 코네티컷주의 마을 이름을 딴 모회사 길포드 트랜스포테이션 인더스트리즈를 만들었다. 길포드의 첫 구매 제안에서는 약간의 오만이 느껴진다. 멜런과 핑크는 메사추세츠주의 고전 중인 10마일 구간에 대해 현재 소유주가 8만5000달러를 건네준다면 소유권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멜런은 “그들이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며 우리를 내보냈다”고 돌이켰다.

멜런은 돈을 써야 철도를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멜런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포브스는 그의 순자산을 1억 달러로 추정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멜런의 회사는 두 주요 철도 회사인 메인센트럴과 보스턴 앤드 메인을 인수하기 위해 4250만 달러를 지출했다. 1984년 1월에는 파산 직전인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 철도를 50만 달러에 인수했다. 그 금액의 약 절반은 1988년에 멜런이 포브스에 말한 대로 가족이 소유한 멜런뱅크에서 대출받은 것이다. 멜런은 나머지 금액이 상속금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길포드를 통해 멜런과 그의 파트너는 갑자기 메인에서 버펄로까지 이어지는 약 6400㎞ 길이의 철도를 통제하게 됐다.


▎회사 이름이 1998년에 패넘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구 길포드 트랜스포테이션 페인트가 칠해진 기차가 2021년 6월 메인주의 종이 공장을 떠나고 있다. 종이 산업을 위한 자재 운송은 회사 수익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 사진:HARRISON SMITH / NORTH COUNTRY TRAINS
멜런의 전략은 가능한 모든 곳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었다. 루디 개벌리의 책과 이전 포브스의 보도에 따르면 멜런은 기차가 5명이 아닌 2명으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수익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철로 일부를 버리고, 길포드의 인력을 절반 정도 해고했다. 이 효율 중심적인 접근법은 이제 산업 전반에서 ‘정밀 일정 철도 운영’이라고 불리며 흔히 사용되지만 당시에는 놀랍게 여겨졌다.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더 그랬다.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길포드 직원들은 두 차례의 대규모 파업을 조직했다. 첫 번째는 대규모 해고와 계약 협상 실패 이후에 발생했으며, 두 번째는 조합원들이 방치된 장비로 인해 발생한 사망 사고를 비난하면서 일어났다. 첫 번째 파업 시에 더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멜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고 개인 전용기를 이용해 인력이 부족한 곳으로 보냈다. 직원들은 분노했지만 멜런은 계속 밀어붙였다.

보스턴 앤드 메인 철도는 거의 즉시 손익분기점을 달성했으며, 1984년에는 순이익 7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은 그만큼 잘 운영되지 않았고, 두 번째 파업이 끝난 1988년에 파산을 선언했다. 멜런의 회사는 1998년에 파산한 패넘 항공사 브랜드를 인수하여 패넘 시스템즈로 브랜드를 개편했다. 멜런과 핑크는 잠시 항공사를 운영해봤지만 수익을 내지 못하고 10년도 되지 않아 운영을 중단했다. 멜런은 자신의 책에서 그 원인을 정부에 위조된 재무 문서를 제출한 자문 변호사, 9·11 테러사건 이후의 경제 상황과 노동조합으로 돌렸다.

이때 멜런의 정치적 입장은 바뀌어 있었다. 그는 1980년 이후 어느 시점에선가 ‘위대한 사회’를 촉진하는 세이첨 펀드를 폐쇄하고 마지막 수익금을 헤리티지 재단 등 보수적인 단체들에 나눠줬다. 갈수록 보수화되는 멜런의 이념은 직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던 스티븐 뎀보스키는 “멜런과 핑크는 거의 모든 사람과 대립을 일삼았다”며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 내 정치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2006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열린 새로운 기차역의 기공식에 참석한 티머시 멜런과 그의 사업 파트너인 데이비드 핑크(오른쪽의 두 남성). 두 사람은 1978년부터 2022년까지 함께 일했으며, 철도 회사를 매각한 후에 핑크는 곧 사망했다. / 사진:RYAN/THE BOSTON GLOBE/GETTY IMAGES
멜런은 코네티컷에서 서쪽으로 3200㎞ 떨어진 와이오밍주 래러미 외곽의 래러미강 인근에서 안식을 찾았다. 북동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던 멜런은 플로리다,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을 고려했는데, 모두 소득세가 없는 주다. 플로리다는 너무 붐비고 사우스다코타는 너무 지루해서 멜런은 “아주 친근하고 평화로운” 와이오밍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와이오밍은 경제활동은 적지만 부유한 상속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2005년에 멜런은 두 개의 목장을 다른 땅과 결합하여 27㎢ 크기의 노조 없는 황무지를 형성했다.

여기서 멜런은 최근 자선 활동 기부 중 하나를 수행했는데,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아니라 특이한 관심사에 대한 것이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비행기를 찾는 데 100만 달러를 기부한 것이다. 1만 시간 이상의 비행 경험이 있는 조종사인 멜런은 자신이 소유한 철도 중 두 곳이 항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에어하트와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멜런은 자서전에서 “아멜리아 에어하트와 내 회사의 연결 고리, 항공에 대한 흥미와 내 세계 일주 여행 때문에, 그리고 이 이상한 수수께끼가 (당시에 알고 있던 것이 적었지만) 해결에 가까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내 지원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썼다. 이 자선 활동조차도 결국은 원한으로 끝났다. 멜런은 2013년에 이 비영리단체가 에어하트의 비행기를 이미 찾은 후에도 자신의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 단체를 고소했다. 판사는 이 단체가 비행기를 발견했다는 것은 단지 멜런의 의견일 뿐이라며 이 사건을 기각했다.

멜런은 이 무렵 정치에 더욱 헌신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멜런의 정치 참여는 오래전부터 이어졌다. 2018년 초 멜런은 다양한 후보자와 사업에 4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그 이후에 기부한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2018년 5월, 중간선거 6개월을 앞두고 멜런은 공화당 하원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슈퍼팩에 1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단 한 번의 기부로 멜런은 미국 최대 규모의 정치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비행사 애밀리아 에어하트가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을 완료한 후 북아일랜드에 착륙해 주 영국 미국 대사 앤드루 멜런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사진:NEW YORK TIMES/GETTY IMAGES
멜런은 2020년 대통령선거에서 친트럼프 단체인 아메리카 퍼스트 액션 슈퍼팩에 1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트럼프가 패배하고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폭동이 일어난 뒤, 여러 대형 기업인이 MAGA 운동에서 물러났다. 멜런은 아니었다. 텍사스트리뷴의 보도에 따르면 멜런은 2021년 텍사스 주지사 그렉 애보트가 후원한 국경 장벽 크라우드펀딩에 53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 외의 기부들을 합치면 240만 달러에 달한다.

곧 멜런은 더 많은 현금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철도 사업에서 거의 반세기를 보낸 멜런은 2022년 자신의 회사를 상장기업인 CSX에 6억 달러에 매각했다. 소유 지분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멜런이 정확히 얼마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적지 않은 액수인 것은 분명하다. 수십 년 전의 법적 문서에는 멜런과 핑크만 주주로 표기되어 있다. 멜런이 돈을 가지고 있었고 아마도 대부분의 자본을 투자했을 테니 회사 지분의 대부분을 소유했을 것이며, 따라서 멜런은 그 매각으로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이는 멜런이 정치 기부 규모를 거리낌 없이 키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멜런은 작년에 트럼프의 주요 슈퍼팩에 수표 5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이 돈은 예비선거 기간 동안 계속해서 유입됐다. 한편 멜런은 또 다른 미국 명망가의 후계자인 케네디 주니어를 지원하기 위해 슈퍼팩에 2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케네디 가문은 1960년대 케이프 코드에서 멜런가와 함께 여름을 보내던 옛 친구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여전히 트럼프에게 머물렀다. 트럼프의 슈퍼팩은 지금까지 멜런으로부터 7650만 달러를 받았다. 그중 5000만 달러는 뉴욕의 배심원단이 트럼프를 34개 형사죄로 유죄 판결한 다음 날에 받은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반항을 즐겨온 멜런에게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이는 그의 회고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멜런은 “우리가 성공을 이루기 위해 취한 방향에 관해서는 어떠한 사과도 없을 것”이라고 썼다.

[박스기사] 멜런의 수백만 달러


티머시 멜런은 자신이 억만장자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포브스는 그가 억만장자에 준한다고 본다. 우선 상속받은 돈이 있다. 데이비드 캐너딘의 책 『멜런』에 따르면, 1930년대 중반 할아버지 앤드루 멜런은 티모시와 두 손자에게 상당한 금액을 남겼다. 그 선물의 장부 가치는 당시 2300만 달러였으며,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5억 달러다. 투자를 잘했다면 이 액수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그 돈이 S&P500의 성장률에 해당하는 75% 수익을 내는 투자에 투입되었다면, 지금쯤 2300만 달러는 3600만 달러가 됐을 것이다. 이 경우, 균등하게 나눈다면 성인 손자 1명당 12억 달러가 돌아간다. 사업도 있다. 멜런은 1980년대 초에 약 22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철도를 매입했다. 2022년에 이를 6억 달러에 매각하고 세후 약 3억4500만 달러를 받았다. 이제 멜런은 정치에 돈을 투자하고 있으며, 지난 10년 동안 거의 3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최소 10억 달러도 남겨두지 않고 그만한 돈을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첫 아내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않은 멜런은 정말 그만한 돈이 없다고 주장한다. “억만장자 아닙니다!” 멜런은 이메일에서 밝혔다. “억만장자였던 적도 없고, 그렇게 될 일도 없습니다.”

- Phoebe liu, Zach Everson 포브스 기자

위 기사의 원문은 http://forbe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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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호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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