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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호 전 ㈜LG 대표 

내 인생에 은퇴란 없다 

노유선 기자
다년간 기업의 수장으로 일했던 조준호 전 ㈜LG 대표는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 그저 일하는 것이 재미있을 뿐이다. 조 전 대표와 함께 35년 직장 생활과 일의 재미를 살펴봤다.

▎조준호 전 ㈜)LG 대표는 “일은 곧 재미”라고 말했다.
1986년부터 2021년까지 35년간 LG에 몸담았던 조준호(65) 전 ㈜LG 대표는 지금도 LG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LG전자가 만든 마지막 스마트폰이었다. 어렵게 개발했지만 정작 판매하지 않은 폰. 그는 젊은 날의 열정을 모두 모바일폰에 쏟았다. ‘초콜릿폰 신화’로 불리기도 했지만 LG의 스마트폰 사업을 심폐 소생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조 전 대표가 지금도 신화로 불리는 이유는 ‘초고속 승진’과 ‘최연소 임원’이라는 타이틀 덕분이다.

조 전 대표는 LG 입사 9년 만에 임원직(상무보)에 올랐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당시 LG 역사상 최연소 임원이었다. 이후 그는 2000년 LG정보통신(LG전자로 합병) 단말사업본부 단말기획담당 상무, 2002년 LG전자 정보통신 전략담당 부사장, 2010년 ㈜LG 대표이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그러다 2015년 LG전자 MC(Mobile Communications)사업본부장으로서 LG그룹 최대 난제였던 스마트폰 사업을 전담하게 된다. 조 전 대표는 당시를 회고하며 “LG는 스마트폰 사업에 주춤하다 3년 정도 때를 놓쳤다”며 “연구실에 있던 스마트폰을 발 빠르게 시장으로 옮겼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다사다난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조 전 대표는 작가로서 인생 2막을 열었다. 지난해 『내향인 개인주의자 그리고 회사원』에 이어 올해 『그대들의 불안에 바치는 서』를 출간했다. 특히 『내향인 개인주의자 그리고 회사원』은 내향인이자 개인주의자인 회사원이 ‘샐러리맨의 신화’를 쓴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조 전 대표의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표하며 화제가 됐다.

지난 11월 11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빌딩에서 조 전 대표를 만났다. 매일 아침 운동 후 오전 10시쯤 작업실에 가는 일과가 루틴이라고 했다. 그는 2016년 LG전자 대표일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지난 7월 내놓은 에세이 『그대들의 불안에 바치는 서』는 불확실한 미래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을 위해 썼다. 조 전 대표는 “청년들에게 세상에 너무 흔들리지 말고 나다움을 지키라고 전해주고 싶었다”며 “후배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는 기업인을 위한 조언을 물었다.

일은 자존감과 재미의 원천


▎조 전 대표는 자신이 ‘비관적 낙관주의자’라고 밝혔다.
조 전 대표는 2021년 은퇴 후에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요즘에는 로봇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어릴 적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서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비서 같은 로봇을 만들고 있다. 로봇에 로비(Robie)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조 전 대표는 “한 10년 안에 나를 따라다니며 말동무해주는 로봇을 완성하는 게 목표”라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일이 좋은가. 조 전 대표에게 일은 무엇인가.

일 자체가 주는 재미가 있다. 특히 체계적인 문제해결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팩트를 수집하고 가설을 세운 뒤 가설을 수정해가면서 점차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굉장히’ 재미있다. 직장 생활 초반 글로벌 컨설팅 기업과 3~4년간 협업할 일이 생겼다. 그때 이른바 ‘Problem-solving(문제해결) 스킬’을 배웠다.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던 중 내가 프로젝트를 주도할 기회가 주어졌다. 막막해 보이는 상황에서 ‘이걸 어떻게 헤쳐가야 하지?’ ‘어떤 방향으로 어떤 가설을 세워야 하지?’ ‘가설을 어떻게 바꿔볼까?’ 등 자문하면서 차근차근 접근했다.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일에 대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학창 시절에는 일이 공부이지 않나. 당시에 공부는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어머니께서 워킹맘인 탓에 잘 돌봐주지 못하셨는데 주변에 머리가 좋거나 금수저 출신인 아이들을 보면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처음으로 자존감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다. 그러자 주변에서 나를 인정하기 시작하더라. 성과를 내면 칭찬받을 수 있고 자존감도 향상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안 날 경우엔.

아무래도 성과가 안 나는 좌절의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 희망하는 대로 큰 성과를 낸 적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크게 실패한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해도 성과가 안 날 때 계속 달려들었다가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진 경우도 있었다. 특히 입사 초반 영업 부서로 발령받았는데 그 시절 내 성과는 바라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기획 부서로 이동한 뒤에는 일하면 일한 만큼 성과가 팍팍 눈에 띄게 나왔다. 영업 부서에서 현장 경험을 해봤기에 다른 사람보다 기획을 잘할 수 있었다. 어떠한 경험도 버릴 것은 없더라. 좌절과 시련의 기간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며 버티면 언젠가 나와 맞는 부서에서 일할 기회는 온다.

내향인인데 직장 생활이 편했나.

내향인인 데다 개인주의자라 사회생활에서 유리하진 않았다. 부장 시절 내 별명이 ‘슈퍼 드라이’였다. 심플한 라이프를 선호해서 주변 돌아가는 상황에 무감했다. 유연하지도 못해서 소위 사내 정치도 내 성정엔 안 맞았다. 사람들과 쉽게 관계를 맺지 않다 보니 내 실력 향상에 집중할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자기 계발에 전력투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랬기에 남보다 승진이 빨랐다.

어떻게 자기 계발을 했는지 궁금하다.

스스로 성과관리 포트폴리오를 작성했다. 매달 프로젝트 성과를 정리하고 개선할 점을 파악했다. 작은 성과도 꼼꼼하게 적고 포트폴리오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했다. 이러한 나만의 훈련 덕분에 조직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당시 LG는 제조업체 특성상 6개월~1년 안에 눈에 보이는, 실체가 있는 성과를 내도록 했다. 준비도 안 돼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보고하면 쉽게 믿음을 주지 않았다.

조 전 대표는 어떻게 신뢰를 얻었나.

난 좀 다른 의미에서 정치를 했다. 프로젝트가 통과·운영·관리되기 위해선 사내 ‘입지’가 중요하다.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내려면 사람과 자원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신뢰에 기반한 입지가 없으면 주목받지 못한다. 일단 신뢰를 얻어야 회사에서 자원을 지원해주고 기다려주는 등 팍팍 밀어준다. 난 처음부터 프로젝트 기대 수준을 높여서 보고하지 않았다. 말이 앞서기보다 웬만큼 준비가 됐을 때,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 때 확 치고 나갔다. 난 이런 방식으로 신뢰를 받는 법을 터득했다.

희비가 엇갈린 전기차 배터리와 스마트폰

다사다난했던 직장 생활을 마친 뒤 막막함은 없었나.

퇴사하기 몇 년 전부터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주로 아주 까다롭고 어려운 사업을 맡아오다 보니 심신이 모두 지친 탓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두 달간 정말 당황스러웠다. 주변에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조언하더라.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한 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작업실에서 로봇 연구나 글쓰기, 독서 등을 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또 퇴사 후 좋은 점도 있었다. 난 일 때문에 사람을 만날 뿐 넓은 인간관계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을 마음껏 가질 수 있어 좋다. 내향인이어서 그런가 보다.

LG에서 가장 보람찼던 순간이 있다면.

2000년대 중반 미래 먹거리를 모색하는데 그중 하나로 전기차 관련 사업을 꼽았다. 당시만 해도 전기차의 미래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대다수가 10년, 20년이 지나도 될 리가 없다며 부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나는 ‘왜 (전기차 관련 사업이) 될 리가 없는데? 우리가 한 번 해결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때 연구실에서 온갖 시도를 하며 쌓은 노하우는 4~5년 뒤 타사와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미국 자동차기업 제너럴모터스(GM)와 협력해 1회 충전에 200마일(320km) 이상 갈 수 있는 배터리를 개발했다. 이후 전기 장비와 모터 등 다양한 솔루션을 독자적으로 개발해냈다. 덕분에 LG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초기에 선점할 수 있었다.

난제를 앞두고 낙관하는 편인가.

아니다. 난 비관적 낙관주의자다. 현실적인 방어선을 친 다음 사업을 밀어붙이는 편이다. 방어선은 회사 자원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한다. 방어선을 치기에 앞서, ‘바닥’부터 먼저 생각한다. 얼마나 나빠질 수 있는지 알아야 어디까지 방어선을 치고 사업을 얼마나 밀어붙일지 판단할 수 있다. 방어선을 치고 난 뒤에 비로소 사업을 강하게 추진한다. 이건 심리적인 방어선이기도 하다. 심리적 방어선이 있어야 평정심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다. 평정심이 있으면 뿌연 안개 같던 문제가 선명하게 보인다. 평정심을 잃은 상태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대개 나중에 후회하게 되더라.

모바일 사업에 대해선 여러 생각이 교차할 것 같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기 전 프리미엄 폰의 선두 주자는 LG였다. 2000년대 초반 초콜릿폰과 샤인폰, 프라다폰 등을 연이어 출시해 프리미엄 폰 시장을 이끌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사업에 늑장 대응하는 바람에 초기 시장에 진입하지 못했고 결국 뒤처지고 말았다. 그러다 위기에 처한 스마트폰 사업을 구하라는 과제가 떨어졌다. ‘아, 이거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일단 승부수를 던져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경쟁사가 3~4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노하우를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거듭된 도전에 심적으로 많이 지쳤겠다.

원래 주변 상황에 쉽게 흔들리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사업이 한창일 때는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많이 노력했다. 일례로 앞이 하나도 안 보이고 도대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어쩌다 집에서 영화 [이집트의 왕자]를 보게 됐는데 그중 한 장면이 굉장히 위로가 됐다. 영화 속에서 앞에 길이 쭉 뻗어 있는데도 보이는 건 앞에서 100~200m 정도 거리일 뿐이었다. ‘인생도 이렇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불확실해도 내 길을 걸어가자’고 다짐했다.

다년간 기업의 수장이었다. 기업가정신과 리더십의 비결이 궁금하다.

기업가는 항상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플러스 알파’를 묻는 사람이다. 문제해결에 앞서 근본적인 전제를 의심해보고 이를 회사가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물어본 뒤 해결 방안을 실행에 옮긴다. 물론 새로운 시도에는 리스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업을, 조직을, 기업을 책임지는 기업가라면 상황을 살펴 리스크 테이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리더를 믿고 따르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려면 기업 목표와 사업 방향에 대해 리더가 내린 판단을 구성원들이 믿어야 한다. 믿음직한 리더는 정세를 잘 파악해 사업을 밀어붙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판단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이다. 이 전략이 성과로 연결돼 구성원에게 기여도만큼 공정하게 보상하면 금상첨화다.

끝으로 오늘날 집중해야 할 기술·산업 분야가 있다면.

저서 『그대들의 불안에 바치는 서』에 언급했듯이 아무리 불확실성과 불안함으로 점철된 시대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코 나쁘지 않다. 로봇 기술의 발전과 인공지능의 상용화 시기가 저출생·고령화 시점과 맞물려 있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기술혁신이 때맞춰 이뤄졌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혁신 기술을 가장 잘 소화하는 국가가 되길 바란다. 그러면 생산성이 향상되고 일손 부족이 해결되며 1인당 소득은 높아질 것이다. 이 같은 미래를 염두에 두고 오늘날 청년들은 일부 기업과 계층이 혁신 기술의 혜택을 독점·독식하지 않도록 노력하길 바란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202412호 (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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