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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08 15 그날 무슨 일이 … 

스페셜리포트 - 광복절 특집 - 해방 그날의 진상 

글 강준식 작가
광복절(光復節), 8·15는 올해로 64년째. 광복절은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그 광복절에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작가 강준식이 1945년 8월15일 일어났던 일을 정밀 추적했다.

■ 8·15는 무엇이었나?

8월16일 낮, 소련군 경성 입성의 유언비어에 따라 서울역 광장에 모여든 10만여 명의 서울 시민들.
어떤 사건을 다시 본다는 것은 시간의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사건이 일어난 것과 같은 시간대를 뜻하는 지상에서는 개별 사건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사건 전체의 윤곽과 의미를 발견하는 데는 시간의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것만 못하다.

8·15는 올해로 64년째다. 10년을 1층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지금 6층 정도의 옥상에서 8·15 광복절을 내려다보는 조감도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광복절이라고 하면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는 뜻인데, 우리는 정말 우리가 기념해온 그 광복절에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았던 것일까? 앞으로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조선총독부의 통치는 8월15일 이후에도 엄연히 계속됐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 땅에서 일제의 통치가 끝난 10월25일을 광복절로 삼는 대만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의 광복절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본의 항복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의 수락이 결정된 8월14일 또는 일본군에 대한 정전명령이 하달된 8월16일을 그 기점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이 포츠담선언에 조인한 것은 9월2일이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일전승기념일은 9월2일로 되어 있다.

일본과 싸웠던 옛 소련의 ‘대일전승기념일’과 중국의 ‘항일투쟁승리기념일’은 그 다음날인 9월3일이다. 만일 광복절이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땅을 통치해온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항복조인식을 거행한 9월9일을 그 기점으로 삼아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8월15일은 어느 시각에서 보더라도 국제법상으로는 우리의 광복절 또는 해방일이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8·15는 대체 무엇이었나? 이날은 단지 포츠담선언의 수락 결정을 전하는 일왕의 조서(詔書)가 라디오로 방송된 날짜에 지나지 않는다. 일왕의 조서는 전쟁을 끝낸다는 ‘종전의 조서’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날을 ‘종전기념일’로 삼게 된 것이지만, 우리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날을 광복절로 삼은 것일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라면서도 사실은 황국신민적 정신자세를 완전히 벗지 못해 그날 발표된 일왕의 조서를 높이 받든 역설적 행위는 아니었을까?

■ 일왕의 방송


흔히 8·15 자료로 많이 이용되지만 이는 미군이 진주한 9월9일 이후의 사진이다. Welcome이라는 플래카드는 미군을 환영한다는 뜻이다.
1945년 8월15일 아침 서울 시내에는 “본일 정오 중대방송, 1억 국민 필청”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리고 12시에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 라디오로 중계됐다. 실제로는 14일 밤 도쿄(東京) 황궁에서 78회전의 아세테이트 SP판에 녹음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육성을 일본 NHK가 15일 경성방송국을 통해 조선에 중계한 것이었다.

정오에 한 번, 오후 2시에 다시 한 번 내보낸 이 방송을 직접 들었던 조선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라디오가 귀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고급 라디오로는 RCA빅터 같은 것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나무상자로 된 ‘(방송)국형123형’ 수신기를 썼는데, 이마저 조선에는 그렇게 널리 보급돼 있지 않았다.

요행히 라디오가 있어 방송을 들었다 하더라도 조서를 단조롭게 낭독한 히로히토의 코맹맹이 소리는 발음 자체도 명료하지 않은 데다 잡음마저 심해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경성일보종전시말기>라는 책에는 <경성일보> 사장 요코미조 미쓰테루(橫溝光暉)가 “옥음방송이 잡음으로 똑똑히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강단에 올라가 동맹통신을 통해 입수하고 있던 ‘종전의 조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고 쓰여 있다.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은 비단 조선에서만이 아니고, NHK가 소재한 일본 도쿄에서도 청취하기 어려웠다고 기억하는 일본인의 회고물이 많다.

왜 그렇게 잡음이 심했던 것일까? 당사자인 NHK는 <방송 50년사>에서 “옥음방송에 잡음이 많고 내용을 청취하기 매우 어려웠던 것은 중계선의 감쇄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술적 이유를 대고 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방송된 대본영 발표 전황 뉴스 등은 아무런 잡음 없이 잘 들렸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당일 일왕의 항복방송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한 방송국 관계자가 의도적으로 잡음을 집어넣어 일반인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는 설도 있다. 설령 잡음 없이 잘 들렸다 하더라도 이날 일왕이 낭독한 조서는 한학자 가와다 미즈호(川田瑞穗)가 기초한 한문투 문어체여서 일반인들로서는 해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왕의 녹음이 방송된 뒤 와다 노부카타(和田信賢) 방송원이 경과를 설명하고 조서를 다시 낭독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고 일본 측 자료들이 전하는데, KBS가 발간한 <한국방송 60년사>에 따르면 조선에서도 경성방송국의 민자호 방송원(아나운서)이 일왕의 방송을 요약 해설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방송원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이 조서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깨달은 조선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째, 당시는 오늘날처럼 일왕의 조서를 ‘일본이 패전한 것’이라고 분명히 짚는 ‘방자한’ 해설이 용납되지 않는 삼엄한 군국시대였다는 점이다.

둘째는 800여 자의 조서 가운데 패전을 암시한 대목은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하였노라”라는 단 한 줄뿐으로, 조서 어디에도 패전이나 항복을 나타낸 부분이 없다. 조서는 자기들이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싸움으로 인한 고통과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생각해 스스로 싸움을 끝내기로 했다는 종전(終戰)의 변으로 일관했다.

따라서 일왕의 녹음방송이 싸움이 끝난 것을 알리는 무엇이라는 정도는 파악하면서도, 전시의 언론통제하에서 히로히토가 미·영·중·소 4국에 그 수락을 알리게 했다는 ‘공동선언’이 바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이었다는 사실을 뚜렷이 인식한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패전과 종전은 사뭇 다른 것이다. 패전은 일제의 통치가 끝난다는 의미지만, 종전은 일제의 통치가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렇듯 방송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조선인들의 반응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 조용한 8·15


그런데도 우리네 회고록이나 영화 또는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은 방송을 듣자마자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달려나가 태극기를 휘둘렀던 것으로 묘사해 왔다. 이는 사실이었을까?

해방 전 경성방송국 방송원으로 있다 해방 후 방송기자 제1호가 되었던 문제안 씨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증언했다.“요즘에 와서는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8월15일 서울 거리에는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물결치듯 휘날렸다’고 떠벌리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그날 서울 큰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문제안, <이제부터 한국말로 방송한다>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서울 거리가 조용했다는 위 증언은 내가 <적과 동지>라는 작품을 쓰기 위해 1980년대 8·15 유경험자들을 널리 취재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해방 당시 서울 교외의 한 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했다는 일본인 미즈모토 마사카즈(水本正和)도 “15일 저녁 나는 황금정 6정목(을지로6가) 부근을 전차로 지나갔지만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正論>, 2004년 8월호, 도쿄, 일본)고 회고했다.

‘혼란’이란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 조선인의 소요 같은 것을 가리킨 단어로, 그는 평시와 같이 운행되는 전차를 타고 을지로를 지나갔지만 거리는 평온했다는 것이다. 해방됐는데 왜 거리는 그처럼 조용했던 것일까?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일왕의 방송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는 점이다.

둘째는 혹 그 의미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36년 동안 일제 치하에 억눌려온 조선인들로서는 선뜻 거리로 나설 만한 용기를 가질 수 없었다. 조선에는 아직도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이 엄존해 있었고, 그 뒤를 받쳐주는 육군이 35만 명, 해군이 2만5,000명, 도합 37만5,000명의 일본군이 남북 조선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행동하다가는 신경이 곤두선 왜놈들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두려웠던 것이다. 일왕의 방송이 나온 8월15일이 오히려 평시보다 더 조용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직장이나 일터에 나갔던 사람들은 동태를 살피다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 저녁부터 동족끼리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 시작했다. 아까 낮에 나온 방송이 대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 치안권 이양


(왼쪽부터)1945년 8월15일 정오 일왕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왔던 당시의 라디오 ‘국형 123형 수신기’. 흔히 8월15일 일왕의 항복 방송 직후 광화문에 나와 환호하는 서울 시민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8월15일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극소수였지만 조선인들 가운데는 그날 아침 8시 여운형(呂運亨)이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이양받았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도 있었다.

일왕의 녹음방송이 나오기 전에 이미 총독부에서 치안권 이양 같은 대담한 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그해 8월6일과 9일 미군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한 2발의 원자폭탄이었다.

일본이 재생불능의 마비상태에 들어가자 협심증을 앓던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정무를 위임받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8월11일 아침 총독부 관방농상과장 최하영(崔夏永)을 불러 조선인으로서 솔직한 소감과 대책을 물어보더니 그날 점심 때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그에게 보냈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정책수석 정도에 해당하는 요직에 있던 최하영은 점심을 함께하며 니시히로 경무국장과 나눈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경무국장은)점심을 들면서 ‘오늘 정무총감께서 최 과장과 중대한 이야기를 했다면서? 지금 총감의 명령을 받았는데 그 구체적 방법을 최 과장과 의논하라는 거야’라고 말을 꺼내고는 ‘통치권을 조선인에게 어느 정도 이양한다면 누구에게 이양하는 게 좋겠느냐? 최 과장이 그 중간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어’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박석윤(朴錫胤) 씨 같은 사람이 적당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분을 추천하니 그 사람을 통해 교섭해 보십시오. 저로서는 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박씨는 여운형 씨를 설득해 건준이 조선의 치안권을 이양받도록 했다.”(최하영, ‘정무총감, 한인 과장 호출하다’, <월간중앙> 1968년 8월호)

최하영의 도쿄제대 선배이기도 했던 만주국의 폴란드 영사 출신 박석윤은 8월11일 경기도 봉안에 내려가 있던 몽양 여운형을 만나 총독부가 치안권을 이양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전했다. 곧 상경한 여운형은 측근인 이여성(李如星)·김세용(金世鎔) 처남매부지간을 불러 “이제 일본은 곧 항복한다.

그러니 우리가 세울 새 나라의 국호와 국기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고, 친구 이만규(李萬珪)를 불러서는 “야자(也自), 이제 일본은 곧 항복선언을 하게 되었네. 그러니 제2차 독립선언문은 자네가 지어 보게” 하고 당부했다. 그리고 가까이 지내던 정백(鄭栢)을 불러 총독부에서 치안권 이양을 교섭받았다는 점을 밝히면서 “나라를 세우자면 <동아일보>·보성전문·중앙학교·방직회사·직뉴회사를 거느린 김성수(金性洙) 그룹과 손을 잡아야 하겠는데, 송진우(宋鎭禹)를 끌어들일 방법이 없겠나” 하고 물었다.

이에 정백은 제3차 공산당(ML당) 시대에 같이 활동했던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준연(金俊淵)을 만났던 것으로 해방 직후의 한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여운형 측에서는 정백, 송진우 측에서는 김준연이 8월12, 13일 양일간 만나 민족 역량 총집결에 대하여 비밀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협상은 다음과 같은 의사대립으로 결렬되었다.”(민주주의민족전선, <조선해방1년사>, 문우인서관, 경성, 1946)

즉, 정백은 “일본이 곧 패망하니 국내외 혁명단체를 망라해 독립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으나, 김준연은 “총독부가 연합군에 정권을 넘기기까지 조선의 독립정권은 인정되지 않으니 헛된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충칭(重慶) 임시정부가 들어오면 이를 정통으로 받들어 모시면 된다”고 임정봉대론을 주장해 1차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8월14일, 용산의 제17방면군 참모부로부터 정훈(鄭勳) 육군 중좌가 나와 총독부가 치안권을 이양하는 일에 대해 군부가 양해했다는 사실을 여운형에게 알렸고, 그날 저녁 다시 니시히로 경무국장의 부탁을 받은 권태석(權泰錫)이 계동집에 나타나 8월15일 아침 7시 엔도가 정무총감 관저에서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 여운형 - 엔도 회담


8월15일 아침, 여운형은 대화정(필동)의 정무총감 관저(한국의집)에서 엔도를 만났다. 이날 두 사람의 회담에 대해 일본 측 자료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엔도 총감은 여운형 씨를 제2면회실에서 만나 ‘오늘 12시 포츠담선언 수락 조칙이 내린다. 적어도 17일 오후 2시까지는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올 것이다. 소련군은 먼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한다. 그런 뒤 형무소에 있는 정치범을 석방할 것이다. 그럴 때 조선 민중이 부화뇌동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양 민족이 충돌할 우려가 있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형무소의 사상범과 정치범을 석방하고 싶다. 연합군이 들어오기까지 치안 유지는 총독부에 있지만 측면에서 협력을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여운형 씨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방으로 들어온 니시히로 (경무)국장도 가세해 석방을 앞두고 사상범·정치범에게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미리 말해두고 싶다는 것과, 민중 가운데 특히 청년·학생이 폭동의 중심이 될 우려가 있으니 그들에게 냉정함을 갖도록 설득해 달라고 여운형 씨에게 부탁했다. 또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 씨로부터 안재홍(安在鴻) 씨에 대하여 ‘함께 치안유지에 협력하도록’ 전언을 부탁하고 자리를 물러났다. 그 후 니시히로 국장은 여운형 씨에게 ‘치안유지 협력에 필요하다면 조선인 경찰관을 당신 밑으로 옮겨도 좋다’고 말했다. 여운형 씨로부터 식량문제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니시히로 국장은 ‘10월까지는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또 ‘치안유지법에 걸려 경찰서·헌병대에 유치된 사람들을 석방해 달라’는 요구에 ‘그건 말할 것도 없다. 형무소에 있는 자들마저 석방할 테니까’라고 대답했다. ‘집회 금지를 해제해 달라’는 여운형 씨의 말에 니시히로 국장은 집회의 자유를 약속했다.”(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도쿄, 1964)
이에 반해 한국 쪽의 기록은 여운형이 그 자리에서 ①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②집단생활지인 경성의 식량을 8·9·10, 3개월 분을 확보하라. ③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 구속과 간섭을 말라. ④조선에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 말라. ⑤전 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는 5가지 조건을 제시했던 것으로 돼 있다.(이만규, <여운형투쟁사>, 총문각, 경성, 1946)

회담이 끝난 뒤 계동집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15일 낮 1시30분께 조선헌병사령부(남산골 한옥마을)로 찾아가 측근인 이임수(李林洙) 등 10여 명의 수감자를 석방시킨 다음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오후 4시까지 석방해주겠다는 엔도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장 아이요시 하루오(相吉春雄)는 아직 법적 절차가 끝나지 않아 기결수는 내일 오전 10시에 석방하게 되었노라고 사과하면서 대신 유치장에 억류돼 있던 일시 구치자 20여 명을 풀어주었다. 이들 구치자는 출감 후 독립문 쪽으로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누군가의 제창으로 ‘만세’ 소리를 한번 외친 다음 모두 흩어졌고 그 이상의 소요는 없었다. 그날 저녁 6시, 여운형은 측근들과 함께 계동 입구에 있는 갑부 임용상(林龍相)의 2층 양옥집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 열리는 옥문


(작은사진)8월16일 오전 11시께, 여운형이 석방시킨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들이 독립문 전차 정거장에서 두 손을 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다. (큰사진)일왕 히로히토.
8월16일 오전 10시, 예정대로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한 여운형은 그곳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사상범·경제범을 석방시켰다. 이날 서대문형무소를 위시해 서울 시내의 각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난 출감자들은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미군 자료는 기록하고 있다.

출감자들은 독립문 전차 종점 쪽으로 언덕길을 내려가 광화문통 쪽으로 나아갔다. 수감자들의 석방을 목격한 조선인들은 비로소 어제의 일왕 방송이 조선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용기백배한 그들은 석방자들의 시위 대열에 합류한 뒤 광화문→종로→남대문으로 행진하며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날의 광경을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목격한 한 좌익인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치범을 석방하던 16일 날 아침 6시 반에 예정시간보다 두서너 시간 앞서 나는 서대문형무소 앞으로 갔다…. 예정시간이라던 9시가 지나고 10시가 가까워져갈 때 전차 내리는 데서 형무소 문 쪽으로 오르는 그 길에는 이럭저럭 모여든 사람들이 구경꾼들에 섞여 가득 찼다. 혁명동지를 맞이하러 오는 여운형 씨, 최용달 씨에게 군중들은 산발적이나마 박수를 보냈다. 차차 석방되어 나오는 듯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거리로 자동차가, 전차가, 또 트럭이 사람들을 넘치도록 싣고 달리고 또 달리고 만세를 부르고 외치고 뒤끓는 군중이 또 깃발이 저 종로로 남대문으로 차서 밀렸다.”(全厚, ‘혁명자의 私記-혁명에의 길’, <신천지> 1946년 3월호)

출옥자들을 보고 시민들이 합세해 도심에서 벌인 시위에 대해 총독부 관방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8월16일, 경성부 안의 눈에 띄는 장소를 중심으로 하여 다중민의 가두시위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다. 즉, 미국 깃발과 구 한국기를 함께 들고 ‘조선독립만세’ ‘연합군 환영’을 외치며 다중시위운동을 벌이고, 공기업의 승용차 및 트럭 등도 운전수가 조선인인 경우는 이 시위행렬운동에 참가하여 흡사 공기업 자체가 행렬과 행진에 참가하는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다.”(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변화는 가두시위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매일신보> 문화부장이었던 조용만(趙容萬)은 “해방은 배불리 먹는 것부터 찾아오더군. 전시 중 거리에서 사라졌던 노점상들이 16일 오후부터 일제히 나타나 종로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어”라고 필자의 취재에 응했던 기억이 난다.

배급제의 궁핍시대를 겪은 서울 거리는 갑자기 먹는 노점상 천지가 되었고, 거리에는 쓰레기더미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관공서나 일터로 출근하지 않는 장기무급휴가 조선인 가운데는 청소부들도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 해적방송


이날 옥문을 연 여운형의 이름 석 자는 경성 전체를 흔들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계동집으로 돌아온 뒤 측근들과 향후 문제를 의논하던 여운형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여든 5,000여 군중이 “여운형 선생은 나오시오!” 하고 외치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은 군중의 함성소리를 들으며 연단에 올라 그 특유의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소이다! 어제 15일 아침에 원등이가 나를 불러가지고 ‘과거 두 민족이 합했던 것에 대하여 그 잘잘못을 조선에 다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날 나누는 때에 서로 좋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상호간에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해 주기 바란다’고 했소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원등이에게 다섯 가지 요구를 내놓고 그 자리에서 무조건 승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민족 해방의 제 일보를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인 이상낙원을 건설해야 합니다….”

연설 도중 청중들 사이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오후 2시에 소련군이 경성역에 온다!”

청중의 일각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운형은 연설을 이어나갔으나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은 순식간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이에 흥분한 군중의 일부가 아우성치면서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래서 기록으로 전하는 연설문도 반토막뿐이다.

연설이 중단된 원인은 흔히 소련군의 경성 입성 소문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진상을 조사한 미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15일, 경성방송국의 JODK의 전파로 작동되어 적어도 그 방송을 듣는 사람들에게 소련 점령하의 자유 조선에서 송신된다고 믿어진 한 해적방송은 곧 임시정부가 경성에 수립될 것이며, 임시정부의 수뇌 3명이 다음날 열차 편으로 수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8월16일 조선 군중은 그 세 사람을 보려고 경성역에 나갔으나 경찰에 의해 쫓겨났으며 기대했던 관리 3명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Part1, Chapter3 ‘The Russian Scare’, , 1948)

위 기록에 따르면 10만여 명의 군중이 경성역으로 몰려간 것은 열차편으로 도착할 임시정부 수뇌 3명을 보기 위해서였고, 그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달된 것은 정체불명의 한 해적방송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미군자료가 기록한 해적방송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미스터리다.

소련 점령의 북한지역에서 송출되는 느낌을 주었다지만, 소련군이 청진을 점령한 것은 8월12일, 함흥·원산을 점령한 것은 8월21일, 그리고 평양을 점령한 것은 8월22일 이후다. 따라서 해적방송을 내보냈다는 8월15일 밤은 소련군이 청진을 점령한 지 불과 3일째 되던 날인데, 다른 지역을 점령하기에도 눈코 뜰 새 없었을 군대가 대민방송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설령 방송했다 하더라도 이를 서울에서 듣게 하려면 송신소의 중계가 필요한데, 8월15일 시점에서 각처의 송신소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총독부다. 그렇다면 역으로 해적방송을 내보낸 주체는 소련군이 아니라 총독부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임시정부의 수뇌 3인과 관련하여 미군자료가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은 직후 전단지와 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 중 하나인 작은 전단은 공산주의자나 소련 출처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경축 조선독립! 동진(東震)공화국 선포! 대통령 김구(金九), 총리대신 이승만(李承晩), 외무대신 여운형,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참모총장 황운(黃雲)’”(Part1, Chapter3 ‘The Russian Scare’, , 1948)

전단지에 적힌 여운형과 황운은 서울에 있었으니 열차로 온다는 임시정부의 수뇌 3인이란 결국 김구·이승만·김일성을 가리키며, 해적방송이 언급한 임시정부란 ‘동진공화국’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해적방송과 전단지 사이에 어떤 연계성을 엿볼 수 있다. 8월16일 약 10만여 명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경성역으로 몰려간 것은 이들 동진공화국 수뇌 3명을 마중 나갔던 셈이다.


1945년 8월16일 낮 12시께, 시민 5,000여 명의 요청으로 휘문중학교 교정에 나타난 몽양 여운형. 그러나 여운형의 이날 연설은 소련군이 경성에 입성한다는 유언비어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김구·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념적으로 같이 일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아마도 김일성의 이름 때문에 미군 자료는 이 명단의 출처가 소련이나 공산주의자일 것으로 보았으나,

이 무렵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느라 경황이 없었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또한 8월15에는 그런 작업을 벌일 만한 세력을 결집하고 있지 못했다.

이를테면 김일성은 아직 입국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박헌영은 은신해 있던 전라도 광주에서 아직 상경도 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정백은 여운형의 건준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별도의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전단지의 살포자는 해적방송의 경우와 같이 총독부 경찰 또는 헌병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해방 직후 영향력이 있던 <신천지>라는 잡지에 그같은 견해를 보인 신문기자들의 좌담회 기사가 실려 있어 해방 부분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봉구(서울신문) : 또 별안간 16일에는 소련군이 서울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나서….

정광현(합동통신) : 정말! 그거 굉장했습니다. 그날 덕성여학교에서 열성자대회가 있었는데 갑자기 그 소식이 들어오자 ‘와’ 하고 역으로 몰려갔는데, 역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고, 대중은 지금 복계를 왔느니 철원에 왔느니 어디를 왔느니 하고 시시각각으로 온다는 소문이 돌았었습니다.

본지기자(신천지) : 그것이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 소문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정광현(합동통신) : 왜놈들의 모략이었다는데요.”(좌담회, ‘신문기자가 겪은 8·15’, <신천지> 1948년 8월호)
해방 직후의 신문기자들은 8월16일 군중들이 대거 서울역으로 몰려간 사건을 일본인의 모략으로 인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8월15일 여운형에게 치안권까지 이양한 일본인들은 왜 그런 모략을 벌인 것일까?

■ 관심분산작전


8월15일 아침 여운형이 정무총감 관저를 찾아갔을 때 엔도는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16일 낮 소련군이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서울 전역에 나돌았다.

엔도의 발언은 임시정부 요인 세 사람이 경성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해적방송이나 동진공화국 선포를 알린 전단지와 무슨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이 발언을 조사해 정리한 미국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총독(정무총감)은 미군이 코리아를 점령하지 않을 것이며, 점령은 순전히 소련군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건준(여운형)에 알려주었다.”(Part1, Chapter3 ‘The Koreans’ First Taste of Freedom’, , 1948)

여기에 자극받은 여운형은 회담 직후 계동집에 돌아왔을 때 간밤에 자기에게 접수하라 했던 방송국은 어찌하면 좋겠는가 동생 여운홍이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기 때문에 사정이 달라졌다”고 말했던 것으로 여운홍은 회고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61년, 여운홍은 도쿄에 갔을 때 엔도를 만나 해방 당시 왜 소련군이 경성에 진주한다고 했는가를 물어보았더니 “도쿄 내무성에서 온 전보에 조선이 분단점령된다고 해서 그랬다”고 대답했다고 한다.(여운홍, <몽양여운형>, 청하각, 서울, 1967)

그러나 총독부 관방총무과장 야마나 미키오는 그같은 내용이 내무성으로부터 조선총독부에 타전된 것은 8월22일이었다고 자신의 수기에 썼다.

“8월 22일, 내무차관으로부터 조선에 있어서의 군의 무장해제 담당구역은 북위 38도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으로 할 것으로 본다는 예고전보를 받았으나….”(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그렇다면 왜 엔도는 전보도 받지 않은 8월15일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일까? 당초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넘기기로 한 것은 조선에 있던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총독부가 비행기를 동원하여 8월16일 공중에서 살포한 “조선동포여! 중대한 현단계에 있어 절대의 자중과 안정을 요청한다…”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명의의 삐라도 결국 조선인들에게 경거망동해 날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폭동을 일으킬지 모르는 조선인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소련군 경성 입성의 거짓말을 했으리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일제의 반동

(왼쪽)일본의 항복 원고.. 1945년 9월9일,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게양되는 미국의 성조기.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준 것이다. 일본인들은 8월15일 아침 치안권을 이양해 조선인의 폭동화에 대한 안전장치를 설치한 다음 8월15일 밤에는 임시정부 수뇌 3인이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해적방송을 내보내고, 8월16일 낮에는 다시 소련군 경성 입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공작에 의해 10만여 명의 군중이 경성역으로 달려나가는 소동과 시위를 벌이자 일본 군경은 이를 조선인에 대한 강경책을 취하는 빌미로 삼았다.

“다수의 일본인은 생각지도 않은 다수 조선인의 대일본 시위운동에 격분해 이 같은 시위운동을 묵인하는 당국의 태도가 어딘가 느슨하다고 비난하는 소리를 높였지만, 생각하건대 이와 같이 가두에 운집하는 군중을 해산시키고 집에 있도록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강력한 군·관·헌(軍官憲) 공동의 권력행사를 필요로 하며….” (山名酒喜男 手記, <朝鮮總督府終政の記錄1>, 友邦協會, 도쿄, 1956)

더구나 16일 오후 3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이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담화문을 발표했는데, 일본인들은 그 내용이 건준의 본래 목적인 치안을 넘어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불온한 방송이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건준의 재가를 받은 장권(張權)의 치안대 등이 활동하는 가운데 건준의 인준을 받지 않은 경위대·무위대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건준’ 이름으로 경찰서나 파출소를 습격해 일본인 경찰관을 쫓아내고 무기를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경찰서’라는 간판 대신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위대’로 바꾸어 달기도 했다.

또 해방 전부터 <매일신보>나 경성방송국 정도는 여운형이 접수할 생각을 갖고 접수위원들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이를 전해들은 각 언론기관의 조선인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경성일보> 동맹통신 등을 접수했으며, 또한 각 회사·공장·대상점·대학·전문학교 등 주요 기관시설에 대한 조선인들의 접수 요구가 빗발쳐 일본인들 가운데는 인도서류에 날인하고 인감이나 금고의 열쇠를 넘겨준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예전의 엄격한 질서의 기준이 상실되었다는 것에 격분한 일본인들은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과 관과 헌병이 공동으로 치안권을 다시 확보한다는 결정을 보고 곧 반동적 행동에 들어갔는데 이 점에 대해 미군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월17일 반동이 시작됐다. 조선인 경찰관들은 거의 일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당국은 전에 경찰이었으나 그 후 군에 징집된 일본인 3,000명을 소집했다. 따라서 질서회복 담당을 위해 소환된 자들의 다수는 경찰복이나 군복을 혼용하고 있었다.”(Part1, Chapter3 ‘The Japanese Retain Control’, , 1948)

일본 측 자료는 3,000명이 아니라 9,000명의 병사가 경찰관으로 전속돼 ‘특별경찰대’에 편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森田芳夫, <朝鮮終戰の記錄>, 巖南堂書店, 도쿄, 1964)

군·경 합동 강경책이 실시됨에 따라 거리는 다시 해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조선인이 ‘해방’의 자유를 누린 것은 여운형이 수감자들을 석방시킨 8월16일 단 하루뿐이었다.

이미 17일부터 조선군관구 사령부는 “인심을 교란하고 적어도 치안을 해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문을 발포하고 탱크와 장갑차와 트럭 위에 기관총을 설치한 위장 장갑차를 동원해 도심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반동정책의 연장선상에서 건준이 접수했던 <매일신보>·경성방송국 등의 언론기관도 일본군과 경찰에 의해 다시 빼앗겼다. 8월17일 밤, 엔도 정무총감은 나가사키 유조(長崎祐三) 보호관찰소장을 통해 건준위원장 여운형에게 “접수는 연합국의 몫이니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은 치안유지 협력에 국한하도록 자제해 달라”고 말했다.

한편 니시히로 경무국장은 18일 오후 3시 아사히마치(회현동)의 요정 ‘기쿠이(喜久井)’에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을 만나 16일의 방송 내용은 궤도를 벗어났다고 지적하며 건준을 없애라고 종용했다. 그들의 시각에서 건준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프랑켄슈타인 괴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맛본 조선인들의 마음을 8·15 이전으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안재홍 이하 건준 간부들은 총독부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치안대를 그 산하에 발족시킨 건준은 신정부를 수립할 모체로서의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기는 하지만 일본인의 강력한 반동정책이 실시된 8월17일부터 조선인의 행동은 거리로 표출되지 못했다.

총칼을 든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태세로 임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강압통치가 이어진 거리에서는 16일과 같은 군중시위나 만세소리나 태극기 같은 것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되찾은 것은 미군이 진주한 9월9일부터다. 그날 오후 4시35분 조선총독부 청사 마당에 오랫동안 게양됐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다.

흔히 8월15일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알려진 거리의 태극기 사진들은 예외 없이 9월9일 미군이 진주한 이후 촬영된 것이다. 자유가 주어졌던 8월16일 단 하루를 제외하면 항복조인식이 거행된 9월9일 오후 4시8분까지 총독부의 강압통치가 계속된 것인데도, 우리는 싸움에 진 것이 아니라 전쟁이 지겨워 스스로 싸움을 끝낸다는 일왕의 조서가 반포된 8월15일을 마치 ‘충량한 반도신민’처럼 우리의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로 높이 받들어 기념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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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호 (200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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