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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중년남자 탐구 - 남자화장실의 소변기 구조는 왜 안 바뀌지? 

 

김형경
남자에게 경쟁은 삶의 기본 속성이며, 유희이며, 일종의 의식이다. 그들의 놀이나 대화는 경쟁 요소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해 조직 안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남자들은 소변을 볼 때도 옆 사람을 곁눈질하면서 묘한 경쟁심을 느낀다.



“지금도 나는 공공장소, 이를테면 수영장 같은 데 앉아 있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어야 느긋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다 다른 남자가 들어오면 우선 그가 물리적인 해를 가할 사람인지 아닌지, 그가 나를 기습해서 강탈할 사람인지 아닌지부터 점검한다. 어린 시절 이래로 나를 해치거나 강탈한 사람이 전혀 없었는데 항상 그런 식의 반응이 일어난다.

이윽고 그가 나보다 강한 사람인지, 더 나은 옷을 입고 더 건장한 체격을 가졌는지 따져보는 일로 들어간다. 만일 그가 여자와 함께 나타난다면 나는 그녀가 속마음으로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찾아본다. 만일 주차장이 보인다면 내 차와 비교하기위해 그의 차를 유심히 훑어본다. 차를 보면 그 주인의 수입과 지위와 취향 정도는 대충 알 수 있다.

설사 그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바람에 대화가 시작된다 해도 나는 그에게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연출할까 하는 데만 골몰한다. 대화를 하면서도 내적인 경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이고 불안정한 경쟁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1998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출간된 스티브 비덜프와 샤론 비덜프의 저서 <남자의 생(Manhood)>의 한 대목이다. 위 저자가 말한 ‘적대적이고 불안정한 경쟁 강박증’은 비단 그의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남자가 그와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경쟁심을 느끼는 것을 듣거나 목격했다.

좁은 비행기 좌석에서 팔걸이를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남자들을 본 적이 있다. 청년과 중년인 두 남자는 각자의 팔꿈치를 하나의 팔걸이 위에 올려놓고 은근히, 그러나 끈질기게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사소한 일에 혼신을 다해 경쟁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기이해서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는 마주 오는 자동차 차종과 번호판만 보고서도 경쟁심을 발동시키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남자들은 모든 사람이 경쟁 대상

남자에게 경쟁은 삶의 기본 속성이며, 유희이며, 일종의 의식이다. 그들의 놀이나 대화는 경쟁 요소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경쟁을 통해 조직 안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한다. 남자들은 상대가 자기와 비슷한 수준에서 경쟁할 만해야 친구로 삼는다. 경쟁이 너무나 중요한 아버지들은 아들이 친구에게 맞고 들어오면 달래주는 게 아니라 불같이 화를 낸다.

성인이 된 아들이 삶의 어느 시기에 패배나 절망을 경험할 때도 아버지들은 위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아들은 여전히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의 경쟁적 언어의 본질을 잘못 알고 있다. 남자는 특정한 개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경쟁한다. 물론 여자도 포함된다. 여자는 항상 부당하게 공격당했다고 느끼며 모든 것을 성차별로 해석하는데, 실은 남자의 언어를 오해한 것이다. 남자는 모든 타인을 차별하는 것이지 특별히 여자만 차별하는 것이 아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남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남자들의 언어에도 기본적으로 경쟁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 다음에야 오래전, 어느 연애지침서에서 읽은 대목이 이해되었다. “남자와 연애할 때는 모욕당할 준비를 하라. 그들의 말이 황당하고 심지어 모욕적으로 느껴지더라도 당신을 공격할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남자들의 말투가 그럴 뿐이다.”

우리 여자의 눈에는 아무래도 이상해 보이는 남성 문화 중 한 가지는 남자화장실 소변기 구조다. 모든 건축물이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안락함을 보장하는 쪽으로 바뀌어가는 동안에도 그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 역시 남자들의 몸에 밴 경쟁심 때문일 것이다. 얕은 칸막이 너머로 상대의 모든 것이 보이는 상황에서 볼일을 볼 때마다 남자들은 옆 사람을 곁눈질하면서 묘한 경쟁심을 느낀다.

이 세상 어떤 남자도 그 화장실 구조를 문제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경쟁심을 문제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경쟁에서 생의 에너지를 얻으며, 경쟁자의 ‘속사정’을 알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낀다. ‘액션, 스릴, 서스펜스’를 표방하는 영화에서 많은 폭력 장면이 남자화장실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까닭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소변을 볼 때마다 남자들이 느끼는 무의식적 경쟁심, 불안, 공격성이 영화 속에 표현되는 게 아닐까 싶다. 진짜 범죄자가 범행을 계획한다면 화장실처럼 퇴로가 보장되지 않는 공간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영화평론가에 의하면 우리나라 영화에 유독 남자들이 일렬로 서서 오줌줄기를 경쟁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통계가 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도 멈추지 않는 남자의 경쟁심

경쟁심은 남자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첫째 생존법이다. 그들은 유구한 세월 동안 경쟁이라는 기본 법칙에 따라 살아왔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무수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유전자들의 집합체이다. 현대사회가 그토록 경쟁적이고 현대인들이 그토록 공격적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저자 미치 앨봄은 저널리스트로 성공한 30대 남성이다. 책에는 그가 젊은이들에 대해 느끼는 경쟁심을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세대가 고민하는 주제다. 보스턴 공항에서 차를 타고 오면서 젊고 잘 생긴 사람들이 그려진 광고판을 여러 개 봤다. 카우보이 모자를 쓴 미남 청년이 담배를 피우는 광고판, 젊은 미녀 둘이 샴푸병을 들고 미소 짓는 광고판, 야하게 생긴 십대 소녀가 청바지 지퍼를 열고 서있는 간판, 검은 벨벳 드레스 차림의 섹시한 여인이 턱시도를 입은 남자 옆에서 스카치 잔을 들고 서있는 광고판. 그중 서른다섯 살이 넘은 모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미치는 정상에 서있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지만 벌써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에 들어선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의 스승인 모리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한다. “젊다는 것이 대단히 멋지다고 말하지는 말게. 젊은이들은 늘 갈등과 고민과 결핍의 느낌에 시달리고, 인생이 비참하다면서 나를 찾아온다네.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다고도 하지. 젊은이들은 그런 비참함을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현명하지도 못하고,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지. 이 향수를 사면 아름다워진다거나 저 청바지를 사면 섹시해진다고 사람들이 조작해대는데 바보같이 그걸 믿다니!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어디 있어?”

미치는 모리 선생님께 어떻게 젊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지 다시 묻는다. 스승은 눈을 감고 잠시 침묵한다. “아니, 부러워한다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거나 수영할 수 있는 게 부럽지. 혹은 춤을 추러 가거니. 그래, 춤추러 가는 것이 가장 부러워. 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면 난 그것을 그대로 느낀 다음 놓아버린다네. 그건 부러워하는 마음이야. 이젠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런 다음 거기서 걸어 나오는 거지.”

모리 선생님은 늙은이가 젊은이를 질투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이미 인생의 여러 단계들을 살아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이가 경쟁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대간의 경쟁심은 남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에피소드는 여성들과의 대화에서 더욱 자주 만난다. 딸이 사윗감을 소개시킨다고 예고하자 어머니는 피부과에 가서 젊어 보이는 시술을 받았다. 어떤 어머니는 딸의 성공에 대해 대리만족조차 느끼지 못한다.

“너는 교수도 되고 그러는데, 내 인생은 이게 뭐냐…?” 그런 얘기를 들으면 기회가 없었던 어머니 세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딸과 경쟁하는 어머니의 언어 중 내가 들은 가장 강력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너는 늬 아버지 첩년 같구나.” 경쟁심은 출생 직후부터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현대사회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2500년 전에도 부처님과 무한경쟁을 벌였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부처님보다 스무 살 어린 사촌동생 제바달다였다.


▎경쟁심은 남자들의 유전자 속에 각인된 첫째 생존법이다.



부처님에게도 경쟁자 제바달다가 있었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승단을 빼앗기 위해 갖은 음모와 술책을 꾸몄다. 당시 마갈다국 왕자였던 아사세와 결탁하여 빈바사라 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도록 도와주었다. 제바달다는 아사세 왕의 권력을 등에 입고 부처님에게 교단을 달라고 요구한다. 부처님이 거절하자 부처님을 죽이려고 온갖 술책을 부렸다.

산꼭대기에 숨어 있다가 부처님이 지나가는 길 위로 큰 돌을 굴려 부처님을 죽이려 한다. 사나운 코끼리를 며칠 굶긴 후 독한 술을 먹여 부처님을 공격하도록 풀어놓는다. 열 손톱에 독약을 바르고 부처님께 예배할 때 찔러서 해치려고 시도한다. 제바달다는 자신이 부처님보다 수행이 높은 사람이라고 떠버리면서 승단 대중 500여 명을 꾀어 떠나기도 했다.

부모·자식 간의 다음으로 강력한 경쟁심 유발 대상은 형제·자매다. 형제·자매들은 부모의 사랑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에게 더 비싼 옷을 사주는지를 섬세하게 알아차린다. 부모가 다른 형제와 자기를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를 세세하게 몸과 마음에 새겨놓는다. 작고 미묘한 경쟁심이 쌓이고 모여 파괴적인 시기심이 된다. 남자 형제가 사이 좋게 지낸다면 그것은 한쪽의 완전한 복종이거나 기적일 것이다.

<법화경>에는 구제할 수 없는 악인처럼 보이는 예의 제바달다도 마침내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제바달다는 실은 전생에 부처님께 대승경전인 <법화경>을 설해준 스승이었다. 심리적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제바달다가 부처님께 그토록 경쟁심을 느낀 이유는 단지 그가 성공한 사촌형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전생에는 자신을 시봉하면서 가르침을 받던 제자가 자기보다 앞서 수행을 완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의 경쟁심은 전생 인연들까지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다. 그는 어렸을 때 늘 어머니의 하소연을 듣고 자랐다. “내가 늬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 텐데….”

그의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그의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결혼 직후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학교에 사표 낼 것을 종용했다. 남자 선생님들과 어울려 시시덕거리고, 의자에 엉덩이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 피아노를 치는 꼴을 봐 줄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강요에 의해 퇴직한 후 곧바로 일생일대의 실수를 범했음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급기야 자신의 삶을 애통해 했다. 그는 평생 어머니가 “내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났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말을 들었다.

성장기 동안 그는 어머니를 보면서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했다. 결혼한다면 아내의 사회 활동을 적극 지지해주는 남편이 되어야겠다고. 그렇게 마음먹는 것만으로 의젓한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는 전문직 여성과 결혼했고, 아내의 사회생활을 적극 지지했으며, 대화가 통하고 능력 있는 아내를 내심 자랑스러워했다. 아내가 집안 살림을 전담하지 않아 초래되는 불편은 감수할 수 있었다. 대신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재능 있는 한 여성을 지원해준다는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버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의 시간을 자신보다 아내의 상사가 더 많이 사용하는 것에 화가 났다. 남자 직원들 사이에서 활짝 웃고 있는 아내의 MT 사진을 볼 때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곤 했다. 아내가 승진하면서 지방으로 발령이 나자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내의 근무지를 따라 이사하게 된다면 그것은 집안의 기둥이 아내라는 증거 같았다.

그때까지 그는 한 번도 아내를 경쟁 상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내의 직장 생활을 지지할 때도 자기가 아내를 배려하고 보살핀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내의 승진과 지방 이주 앞에서 그는 다른 감정을 느끼고 놀랐다.


▎최근 들어 남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대목은 여자가 경쟁 상대가 된 점이다.
남자들이 난감해 하는 여자와의 경쟁

최근 들어 남자들이 가장 난감해하는 대목은 여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리적인 힘으로 비교하면 흔히 말하는 ‘한 주먹감도 안되는’ 여자,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성적 대상일 뿐인 여자, 얼마 전만 해도 전적으로 남자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여자가 이제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쟁 상대가 된 점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다.

애초에 남자들은 여자를 경기장에 입장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최근 30~40년 사이에 여자들이 남자들의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남자들은 여자와 경쟁하는 것도, 그녀들이 들어와 경기장 분위기를 흐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더구나 여자들이 유연하게 상황에 적응해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가는 현상도 불편하다.

거리에 여성 운전자들이 늘어날 때 남자들은 여자들의 운전 미숙을 비난하고 비웃었다. 실제로는 남자들이 더 많은 교통사고를 내고 그 피해도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말하지 않은 채. 남자들은 그냥 여자들과 같은 도로 위를 달리는 일이 싫었던 것이다.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경쟁자가 된 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여자를 상사로 모시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 상사를 모시고 싶어하지 않는다.

여자가 자기 상사로 오면 어떨까 생각해보면서 지레 진저리 치는 남자도 있다. 실제로 여자 상사와 함께 일하게 되면 남자들은 온갖 고약한 방법을 동원해 여자 상사의 업무 수행에 걸림돌을 놓는다. 권력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여자 상사도 남자 부하를 다루기 어려워한다. 여자들의 승진은 자주 단발성 의례처럼 보인다.

사회에서 여자와 경쟁해야 하는 것보다 더 고약한 일이 남자들에게 또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여자들의 무의식에 있는 ‘페니스 엔비’와도 경쟁해야 한다는 점이다. 페니스 엔비는 서너 살 무렵의 여아들이 자기에게 ‘고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갖게 되는 특별한 감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남아선호사상이 뚜렷한 사회에서 남자 형제와 비교되거나 차별당하면서 자란 여성 내면에는 서양 정신분석 이론이 없이도 이해할 만한 시기심이 쌓이게 마련이다. 성장기에 남자 형제를 향해 품었던, 그러나 표현하지 못한 경쟁심은 결혼 후 남편을 향해 직방으로 터져나간다. 내면에 억압된 페니스 엔비 때문에 어떤 아내들은 남편의 사회적 성공 조차 기뻐하지 못한다.

“남편이 승진하는 것보다 내가 아름다운 문장 한 줄 쓰는 게 더 중요해.” 소설가인 친구의 고백이다. 또 다른 친구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할 때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는 남편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놀란다고 한다. “저 따위 인간을 위해 밥상을 차려야 하다니….”

맞벌이하는 또 다른 친구는 퇴근 후 서둘러 장을 봐서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 남편이 다가와 나름 다정한 말투로 “오늘 반찬은 뭐야?” 하고 물으면 손에 들고 있던 찬거리를 집어던지며 소리치고 싶다고 말했다. “쥐뿔도 없어!”라고. 물론 친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런 마음을 누르며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대답한다고 얘기를 마무리짓는다.

경쟁의 마지막 피해자는 결국 남자

성장기에 남자 형제와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자란 여성은 결혼 생활에서 반복 경험하는 불평등한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성장기 내내 내면에 억압해온 감정들은 일제히 남편을 향해 발산한다. 한 여성은 결국 남편의 뺨을 올려붙였다고 고백했다. 그들 부부는 평소에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아내도 남편 사업에 적극 힘을 보태곤 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부부싸움을 하는데 그때마다 아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분하고 억울하다’는 느낌과 함께 격앙되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리 치료를 통해 내면을 깊이 탐사해본 후에야 그 감정의 뿌리를 찾아냈다. 그것은 3대 독자인 오빠와 매순간, 노골적으로, 부당하게 차별당하며 자란 어린 시절의 감정이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오빠의 옷도 타넘어가지 못하게 했고, 아랫목에 앉은 손녀를 쫓아내고 바로 그 자리에 손자를 앉혔다.

그녀는 내면 아이가 ‘분하고 억울하다’면서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분노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경쟁하는 사회, 남녀 차별의 문화 역시 가장 마지막 피해자는 남자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남녀 차별문화의 맨 처음부터 남자의 경쟁심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201309호 (201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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