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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낭만적 음식기행 - 오랜 기억 속의 맛, 호시절의 성찬 

추석 음식의 기원을 찾아서 

박찬일 이태원 ‘인스턴트 펑크’의 주방장
추석 음식 장만하는 모든 손길에는 신기(神氣), 경건한 에너지가 응축돼…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제사상 음식이 한식의 원형 살뜰히 보존하는 울타리

▎추석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은 일반 음식과 명칭과 요리법이 달랐다. 제사음식에는 향신채를 쓰지 않는다는 금기를 넘어 양념 사용이 극도로 자제된다.



올 추석은 시절이 아주 절묘하다. 한여름 끝에 걸쳐서 산물이 익기도 전에 풋 추석을 쇠게끔 만들지도 않고, 태풍도 없어서 낙과 피해도 적다. 그런데 추석은 역시 한국이 제대로 지낸다. 추수감사절을 지내는 미국 외에 가톨릭의 세시풍속을 가진 유럽은 추석에 비견되는 명절이 없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중시한다. 그래서 추석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최고 명절이 아닌가 싶다. 중국은 춘절이 최고이고 한국은 중추절, 즉 추석이다. 일본도 추석보다는 새해맞이가 더 센 명절인 듯하다. 미묘한 문화차이가 있다.

도시에서 자란 내 기억에도 가을 추석이 더 흥청거리고 푸근했던 것 같다. 설날은 뭔가 추운 날씨에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느꼈다. 가을걷이가 막 끝난(한창 하고 있거나) 계절적 감각 때문일까. 울긋불긋한 새 옷도 오히려 설빔보다 더 많이들 해 입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남선이 우리의 물산과 풍습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한 책 <조선상식문답>도 그렇게 추석 음식 장만하는 모든 손길에는 신기(神氣), 경건한 에너지가 응축돼… 좀처럼 변하지 않는 제사상 음식이 한식의 원형 살뜰히 보존하는 울타리 오랜 기억 속의 맛, 호시절의 성찬 추석 음식의 기원을 찾아서 추석에 대해 설명한다.

“조선의 허다한 명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은 8월 가위입니다.… 과실이 살찌고 채소가 갖추어졌는데 날씨는 덥지도 않고….” 그러면서 가위(한가위)가 최고의 명절인 이유를 몇 가지 덧붙인다. 하나는 신라 초부터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공주가 주관하여 나라의 여자들이 두 패로 나뉘어 길쌈 대회를 열었던 데서 기원을 찾는다. 다른 하나는 신라의 전쟁승전 기념일이 바로 그날이었다는 기원설을 제시하고 있다.

추석은 풍만한 음식을 준비한다. 설 떡국 제사가 단출하게 차려지는 것과는 구색부터 다르다. 요즘이야 설이라고 해도 물산이 넘치니 얼마든지 울긋불긋 차릴 수 있겠지만, 옛날에는 설에 쓰려고 일부러 남겨둔 몇 가지 제물이 고작이었다. 아니, 대부분의 민초는 설 치레를 위해 남겨둘 만한 것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송편은 솔잎과 함께 쪄내야 제 맛을 내는 섬세한 추석 음식이다.
추석의 고유한 음식은 송편이다. 한반도는 밀가루가 흔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쌀로 송편을 빚었다. 쌀은 곧 생명이던 시절이 있었고, 그런 쌀로 빚는 떡은 더욱 귀중한 음식이었다. 추석의 여유와 큰 명절이라는 이유가 쌀로 감히(!) 떡을 빚는 배경이 되었다. 경성제대를 나온 의사로 미식가였던 신태범 선생은 자신의 저서에서 송편을 이렇게 추억한다.

명절 의의는 제사, 제수 선택 까다로워

“추석 전날 행랑아범이 절구로 쌀을 찧고 근처 야산에 올라가 솔잎을 뜯어온다. 어머님이 행랑어멈과 만든 반죽을 할머님과 함께 세 사람이 손으로 빚는다.

반죽을 떼어 손바닥으로 둥글게 만든 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우물을 판다. 우물 안에 햇콩, 밤, 대추 등 소를 넣고 주둥이를 맞물려 예쁘게 입술을 만든다….


▎1 굴비는 추석 제사에 가장 중요한 재료 중의 하나다. 석쇠에 얹어 연탄불에 구워야 제 맛을 낸다. 불땀이 세도, 약해도 잘 구워지지 않는 까다로운 식재료다. 2 추석 음식의 주인공 중 하나가 전이다. 맛은 좋지만 추석상을 차리는 여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음식으로 ‘악명’이 높다.
시루에 솔잎을 한 켜씩 깔고 송편을 얹어 쪄낸다. 익은 송편은 찬물에 담가 솔잎을 떼어낸 후 참기름을 살짝 발라 큰 그릇에 담아둔다.”(<우리맛 탐험>·1997·강천)

송편을 만드는 장면이 아주 생생하다. 읽고 보니 나도 아, 이렇게 만드는구나 하고 겨우 생각이 들만큼 이젠 송편을 직접 만드는 집이 드물어졌다. 신태범 선생조차 책 속에서 송편을 안 만든 지 20여 년이 되었다고 섭섭해 하신다. 시장 떡집에서 사거나 심지어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온다.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우면 그만이다.

송편을 만들려면 이름에서 알려주듯이 소나무 잎을 써야 한다. 그러나 솔잎혹파리 때문에 도처에 방제를 해대니 마음 놓고 솔잎을 구할 형편도 아니다. 물론 쌀을 가루 내고 익반죽하고 소를 따로 마련하고…. 누가 이런 일을 할 것인가. 겨우 전이나 부치면서 기름내를 집안 가득 풍기는 것 말고는 이제 추석 차림이 사람의 손을 떠나고 있다.

추석 음식은 기본이 제사다. 우리 민족은 제사를 잘 모시는 것을 명절의 의의로 알았다. 그래서 제수의 선택이 까다로웠다. 내 기억으로는 큰집에서 보내는 추석이 제법 컸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보광동의 저택 마당에서 푸른 하늘로 흰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가던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신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굴비를 구웠던 것이다. 굴비는 조기 철에 말려두었다가 여름의 별미로 먹었다. 서울내기들의 오랜 풍습이다. 굴비 장수가 굴비 두름을 메고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굴비를 파는 이들은 새우젓 장수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늘 우리 동네를 다니던 코맹맹이 소리를 내던 그 굴비장수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서울의 새우젓 장수는 그저 ‘사려 사려’ 하지 않고 코에 바람을 넣고 특유의 소리를 냈다. 간혹 굴비만 팔던 전문 장수(?)가 우렁차게 ‘굴비 사’(왜 그렇게 반말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정인보 선생의 따님이 서울의 장수들이 반말로 물건을 팔러 다닌 건 서울내기 특유의 자존심이라고 하신 적은 있다)라고 외치다가 둘이 마주치는 어색한 장면도 있었으리라.

어쨌든 굴비는 추석 제사에도 여전히 짱짱하게 쓰였다. 굴비 꼬리를 자르고 석쇠에 얹어 연탄불에 구웠다. 불땀이 세도, 약해도 안 되었다. 세면 겉은 타고 속은 설익으며, 약하면 언제 굴비가 다 익을지 알 수 없었다. 그 굴비 굽는 아주머니들 곁에서 나는 고소한 굴비 타는 냄새를 맡았다. 지금도 그 냄새가 코끝에 살랑거린다.

추석 제수에서 가장 값비싼 건 역시 쇠고기다. 산적(散炙)이라는, 어떠면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다시피 한 요리가 여전히 추석상에는 남아 있다. 제사야말로 조상을 모시던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음식의 유행과 맛은 변해도 제사상의 음식은 오래도록 불변한다. 간혹 과일상에 바나나가 올라가지만, 보수적인 집안에서는 굳이 옛 과일처럼 구색을 갖춘다. 특히 산적은 제사가 왜 조상과 후손들을 잇는 끈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산적이 제사라는 인류의 문화에서 원형질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전이야 농경사회의 산물이고, 밥이며 국도 그렇다. 송편은 훨씬 후에 나온 음식일 것이다. 반면 산적은 사냥하던 시절부터 살아남은, 한반도와 그 북쪽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처음 제사를 올리던 아득한 옛날부터 상에 올랐을 것이다. 희생물을 잡아서 대충 꼬치에 꿰어서 상에 올리고, 제사를 모셨을 것이다.

요즘은 희생물을 올리는 풍습이 조금 더 세련되게 표현되었을 뿐이다. 산적은 굳이 필요도 없으면서 나무 꼬치에 꿴다. 그걸 들고 뜯어먹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꼬치를 쓴다. 먹는 방법은 바뀌었는데, 꼬치라는 형식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옛 조상의 풍습을 유지하려는 우리들의 심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식 세계화의 난맥상, 제사상 음식으로 풀어야

그래서 이 산적을 보면 우리 조상이 농경 이전에 북방을 누비던 민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나올 만하다. 고기를 꼬치에 꿰는 건, 유목이나 사냥하는 민족의 풍습이다. 사냥물을 즉석에서 굽기 위해서는 나무 꼬치에 꿰어 불을 피워 돌려가며 구웠을 것이다. 농경사회는 고기가 흔하지 않았고, 산적을 만드는 소고기는 거의 구경할 수 없었다.

농사짓는 소를 잡아먹는 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양이나 야생고기가 없으니 대체물로 소를 선택했고, 우리 선조들은 옛 희생 제사의 흔적을 그대로 유지한 것은 아닐까. 제사는 유교적 전통으로 모시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에도 제를 지내는 것은 자주 벌어지는 일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어려서부터 추석 제사상은 아주 흥미로웠다. 국과 밥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갱과 메라고 하는 것이 특이했고, 요리법도 달랐다. 갱은 실제 밥상에서 먹는 방식으로 끓이지 않는다. 누가 요새 무와 조선간장에 쇠고기를 넣고 끓이는가(이런 방법은 우리 집 안의 오랜 전통이다). 국에 양념을 별로 치지 않고 간결하게 끓인다. 제사에는 향신채를 쓰지 않는다는 걸 떠나서도 양념을 극도로 제한한다.

이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전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선친의 고향에서는 과거에 식용유가 귀해서 기름을 살짝 발라 전을 부쳤다. 식용유가 흔해진 지금도 어머니는 제사상에만은 기름을 거의 바르지 않고 전을 만드신다. 전통의 레시피를 고수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조상을 위한 상에는 현대의 우리가 거의 먹지 않는 요리와 요리법으로 가득하다. 한과를 요새 누가 일상에서 그렇게 먹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어떤 통일된 감정을 발견하게 된다. 제사 음식은 여간해서는 요리법을 바꾸지 않는다. 새 며느리가 제멋대로 그랬다가는 큰일난다. 요리하는 모든 손길에 신기(神氣)랄까. 경건한 에너지를 모은다.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조상을 잘 받드는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뜻밖에도 오래전 우리 음식의 원형을 지금까지 남겨놓게 됐다는 작은 발견이다. 유서 깊은 가문의 큰 제사와 시제를 보면, 한식의 원류라 할 전통적인 요리가 등장한다.

난맥에 뒤엉킨 한식 세계화, 어쩌면 제사상에서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각 지역의 오랜 가문의 제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음식 역사학자도 있다. 마치 사투리에서 우리 고어의 흔적을 발견하는 연구를 하듯이 말이다. 지금은 먹지 않는 별난 김치와 나물, 과자, 생선요리가 그들이 주로 발견하는 옛 음식의 유전적 상징이다.

예를 들면, 요새는 사실상 사라진 생선껍질을 만두피 삼아 만드는 생선만두도 제사상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밀가루가 귀한 시절, 생선껍질은 만두피 대용으로 쓰였다. 조선 후기의 음식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에도 생선만두가 나온다. 제사상에서 우리 음식의 원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전설인지도 모른다.

“신도주 올벼송편 박나물 토란국을 선산에 제물하고 이웃집 나눠 먹세.” 농가월령가 8월령의 한 대목이다. 한가위 명절에 오르는 제수다. 토란은 남방계 식물이다. 잎이 아주 크고 축축한 땅에서 자란다. 토란은 한반도에 감자와 고구마가 들어오기 전 널리 먹었던 식물이다. 일제가 쌀 공출에 따른 조선 반도인들의 식량 보충, 전쟁물자인 알코올 확보를 위해 감자와 고구마를 많이 심기 전에는 땅속에서 자라는 유일한 식량이었을 것이다.


▎배추전은 약간 단맛이 전부인 소박한 음식이지만 나이 든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약간의 단맛이 전부인 배추전에 끌리는 이유는?

토란은 평소에 먹는 이가 드물다. 미끈거리는 식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까. 이웃 일본은 토란을 우리보다 훨씬 더 즐기는 것 같다. 간이 술집(이자카야)에서 토란구이를 본 적도 있다. 아, 토란을 구워 먹을 수도 있구나 하고 알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추석 제사에나 토란국을 끓이는 게 고작인–그리곤 대부분 외면받는–경우와 사뭇 달랐다. 맛도 썩 괜찮았다. 간장을 발랐는지 짭짤하고 구수했다.

나는 이탈리아식 요리사이지만, 한국의 식재료를 많이 쓴다.

고등어, 소곱창, 고구마, 배추 같은 것들이 내 요리의 주재료다. 그러나 토란은 써볼 생각을 못했다. 토란국에 대해 약간의 트라우마랄까 싫어하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그 문제는 미끈거리는 식감 때문이다. 밍밍한 국에 넣은 미끈거리는 토란알. 또 시골집에서 본 커다란 잎의 토란이 무서웠던 기억도 한몫한 듯하다. 소설가 공선옥은 토란이야말로 친근한 존재라고 밝힌다. 다정한 이웃집 동생의 이름 같다고 말한다.

추석에는 전이 주인공 중의 하나다. 언젠가 식구들을 도와 전을 부쳤다. 바닥에 앉아 전기 프라이팬을 깔고 전을 부치는데, 이게 보통 중노동이 아니었다. 양이 많다기보다 전을 부치는 방식이 문제였다. 낮은 불에 천천히 익혀서 겉과 속을 바싹 익힌다. 그러니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서서 가스레인지에서 익히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닥에 주저앉아 지져야 하는데, 서너 시간을 그렇게 하고 나면 웬만한 사람들은 허리가 아파 지속하기 힘들다. 이런 걸 여자들에게 맡기고 술추렴이나(그것도 막 부친 전으로) 하는 남자들은 반드시 한번 전을 부쳐보시라. 전 부치기 노동의 강도는 요리에 이골이 난 내가 치를 떠는(?) 정도이니까 알아서들 판단하시기 바란다.

남쪽에서는 고기도 전으로 부치는데, 부모님 고향은 주로 배추로 전을 부쳤다. 가난하고 먹을 거 없는 집안의 살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무미하다고 할, 찍어먹는 간장의 맛이 고작인, 어쩌면 배추가 지져져서 약간의 단맛을 내는 게 전부일 수도 있는 배추전이 은근히 당기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고서야 그 맛을 알게 된 것이다. 그쪽 지방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나의 그 배추전에 대한 식욕은 나로서도 좀 뜻밖이었다.

지금은 배추전을 부치면 어머니는 내 몫으로 든든하게 떼어놓는 정도다. 그런데 배추전 맛을 보면서 머리를 때리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우리는 결국 핏줄의 내림으로 사는 것이라는 소박한 울림.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유전하기 위해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기도 모두 대를 물리기 위해 생겨난 중간 매체다. 이 얼마나 엄정한 인간의 운명이란 말인가. 그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맛의 기억도 내림한다.


▎갈비찜은 낮은 온도로 요리하는 대표적인 명절 음식이다. 질긴 고기를 낮은 온도로 익혀 단단한 단백질의 결합을 느슨하게 만드는 과학적 원리가 적용된다.
생각해보라. 함경도라고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갈래야 갈 수 없는, 아랫대의 어린자식들이 함경도 출신 할머니의 음식 맛 덕으로, 분단되어 있는 ‘함경도’의 유전자를 이어간다. 지역이라는 분명한 국토지리적 공유는 완전히 사라져도, 맛으로 내림하는 이 놀라운 유전의 법칙. 그래서 멀리 옛 소련 카자흐스탄에 사는 고려인 혼혈도 김치라는 음식으로 우리 핏줄로 엮이지 않는가.

‘저온요리’의 전형 갈비찜의 매력

추석 음식 가운데 인기 있는 것은 오히려 제사상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갈비찜이다. 집안마다 풍속이 다르지만, 갈비찜을 메인으로 먹는 집안이 꽤 많다. 갈비찜은 아주 과학적인 요리다. 오랜 시간 끓여서 먹기 힘든 부위의 단단한 살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걸 ‘저온요리’라고 할 수 있다. 낮은 온도로 요리하면 단단한 단백질의 결합구조가 쉽게 느슨해진다. 질긴 고기를 맛있게 먹기 위한 방법으로 이만한 것이 없다. 간혹 양파와 키위 등 단백질 분해효소가 많은 양념에 재워서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데 저온요리와 함께 응용하면 확실한 효과가 있다.

선물세트로 들어온 갈비세트가 질길 수 있으므로, 두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요리하면 확실하게 부드러운 요리를 즐길 수 있다. 보통 크기로 잘라진 소갈비 토막은 먼저 찬물에 하룻밤 담가 피를 빼고 건져서 센 불에 5분 끓이고 보글거리기 직전의 낮은 불로 천천히 두 시간 끓이는 게 기본이다. 젓가락이 쑥 들어갈 정도가 되면 추가로 20~30분 더 끓여야 뼈에서 살점이 술술 빠지도록 뭉근하게 잘 익는다.

201310호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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