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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 “한·중 수교는 스포츠외교의 결실…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때 도움 준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진·전민규 기자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85년 중국 어뢰정 표류사건이 한·중 수교의 다리 역할…중국 중시하는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긍정적, 민간 차원의 교류확대가 한·중 간 우의 다져

▎‘민간외교 특사’로서 한·중 간 우호 증진과 교류발전에 기여하며 막후에서 노력해온 김한규 21C한중교류협회장이 한·중 외교의 비사를 털어놓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한·중 관계가 한층 가까워졌다는 평가다. 김한규 21C한중교류협회장(전 총무처 장관, 명지대 석좌교수)은 중국 고위층과 친분이 두터운 ‘중국통’으로 꼽힌다. 김 회장은 ‘민간외교 특사’로서 한·중 간 우호 증진과 교류발전에 기여하며 막후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해왔다. 그가 지난 25년 동안 중국에 다녀온 횟수만 350여 차례에 이른다.

김 회장은 최근 자신이 겪은 중국 이야기를 <김한규가 중국을 말하다>라는 회고록으로 내놓았다. 그의 저서에는 1992년 한·중수교 과정에서 있었던 민간부문의 비사 등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마지막 탈고를 앞둔 지난 11월 8일, 김 회장이 <월간중앙>에 중요한 대목을 미리 털어놓았다.


1992년 8월 24일, 한국 외무부장관 이상옥과 중국 외교부장 첸지천(錢基琛)은 베이징 시내 영빈관 댜오위타이(釣魚台)에서 상호불가침, 상호내정불간섭,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원칙 등을 담은 6개항의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교환했다.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이뤄진 날이었다. 한국과 중국은 이로써 1945년 이후 47년 동안 지속해온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한·중 수교는 당시 냉전체제 붕괴라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발맞춰 우리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수교 협상과정에서 양국 사이의 공식 협상채널에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난관도 많았다. 이때는 막후 라인을 통한 물밑 접촉으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수교를 위한 분위기 조성 단계에서도 양국의 막후 라인이 활발하게 움직였고, 양국 국민이 서로 마음을 트기까지 민간외교의 첨병들이 앞장섰다. 김한규(73) 회장은 한·중 수교 하루 전까지 당시 류돈우 국회의원(현 파이낸셜뉴스 경영고문) 등과 함께 베이징에서 최종 점검을 했던 막후의 핵심인물이었다. 그에게한·중 수교를 가져온 민간외교의 비사를 들어보기로 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스포츠외교가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에 이은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이 양국 수교의 계기가 됐지요. 물론 그전부터 관계개선의 징후는 있었습니다.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가 공중 피랍돼 춘천에 불시착한 사건을 계기로 양국 정부관계자들이 접촉하게 됐는데 이는 한·중 간 최초의 공식대면이었어요.

그때 한국은 중국 탑승객들에게 한국의 발전상도 알리고 귀한 선물도 들려 보냈는데 중국이 아주 고마워했습니다. 나중에 중국 고위 인사를 통해 들은 얘기지만 그때 최고 실력자인 덩샤오핑이 측근을 통해 당시 전두환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후 1985년에도 중국 어뢰정이 우리 해상에 표류하는 우발적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우리가 현명하게 대처해 중국을 만족하게 했습니다. 이 두 사건이 중국 지도부에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고, 한국과의 관계개선 필요성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86, 88 스포츠 외교를 통해 한·중 교류의 물꼬가 터진 겁니다.”

한·중 수교의 결정타는 88서울올림픽

중국은 86 아시안게임에 사상 최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는 등 수교 전에도 아주 적극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당시 중국에서 장바이파(張百發) 베이징시 상무 부시장이 86 서울아시안게임을 보러 한국에 왔었어요. 중국의 고위관리인 그는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의 실질적 총책을 맡고 있었죠. 그리고 중국 고위층의 특사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저와 장바이파와의 인연이 그때 시작되었지요.

장바이파는 경기관람보다는 서울아시안게임의 대회 운영과 시스템을 배우는 데 더 열중하더라고요. 못다 배운 것은 88서울올림픽에서 배우겠다면서 돌아가더니 약속대로 2년 후에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민자당 국회의원으로서 88장애인올림픽 실무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저는 그해 동시에 치러질 장애인올림픽 준비로 분주했는데, 민간외교관이 됐다는 자세로 장바이파 등 공산국가에서 온 귀한 손님들을 성심껏 챙겼습니다.

그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하게 다가갔지요. 그들은 ‘구경 잘하고 많이 배우고 간다’며 몇 번이고 제게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장바이파는 이후 올림픽이라는 스포츠를 내세워 한·중 수교를 위한 ‘막후외교’를 담당하게 됐고, 저는 그의 물밑협상 파트너가 됐습니다. 그때의 만남이 저를 중국통으로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지요.”

장바이파와의 그 인연이 ‘관시’로 이어진 것이군요?

“그렇지요. 당시 중국은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88서울올림픽의 모의고사라고 할 수 있는 아시안게임을 보러 왔고, 이것이 한·중 수교의 초석을 다지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한·중 수교의 결정타는 88서울올림픽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무사히 치르면서 서서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있는 한국을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중국은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잘 치르고 싶었지만 대회 진행 방법도 몰랐고, 시설과 물자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중국은 초조해졌고, 그래서 국제대회 참가 사상 가장 많은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당시 덩샤오핑 주석이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적극 참여하고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위해 많이 배워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은 천안문사태(1989년)를 겪은 후, 코앞으로 다가온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한다는 초조함과 절박함을 갖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은 안으로는 국민화합을 위한 계기로, 밖으로는 국제여론을 전환시키기 위한 이벤트로 적절한 행사였다.

중국 지도자들은 아시안게임을 통해 국제적인 위신도 회복하고 국민들의 민심도 바로잡아보려는 복안이 있었지만 처음 치르는 국제행사를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1990년 여름, 중국은 결국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서 대국의 체면을 무릅쓰고 한국 측에 공식자문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따라 김 회장 일행이 한국 측 베이징아시안게임 지원단 단장자격으로 90년 7월 중국으로 특파된다.

직접 가서 둘러본 당시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경기장 시설 등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미진한 부분이 많았어요. 중국은 우리의 올림픽 운영시스템을 그대로 전수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은 당시 우리의 방문을 비밀로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아무래도 북한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죠.

덩치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에 대놓고 지원을 요청해야 되는 입장이었으니 그 사정을 이해할 만했지요. 지금은 중국이 세계경제를 호령하는 G2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자동차를 대량으로 만든다거나 IT산업과 같은 첨단 과학기술 분야는 미진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중국 측 관계자들과 밤낮으로 대회 시스템 점검, 경기장 시설 점검, 경기장 밖의 분위기 파악에 이르기까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쓰며 성의를 보였줬습니다. 당시 저와 날마다 만나다시피 한 장바이파는 왕성한 활동력과 결단력의 소유자였어요. 행사와 관련한 수많은 업무를 달리는 차 안에서나 회의 도중, 어떤 때는 식사 중에 논의했는데 그때그때 즉석에서 결단하고 지시하더군요. 장바이파를 통해 당시 중국 지도자의 막강한 파워를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중국 당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요청했었나요?

“우리에게 협조품목을 아예 지정해서 요청하더라고요. 구체적으로는 경기 운영에 필요한 컴퓨터 프로그램과 자동차 200대, 복사기 100대를 요구했습니다. 자동차는 넓은 베이징 시내곳곳에 흩어져 있는 경기장을 오가기 위해서 필요하고, 복사기는 경기 결과 등을 신속히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봐도 불과 3개 월 후 열릴 아시안게임의 성공개최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걱정 말라, 돌아가서 이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고 적극 지원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단은 시름을 놓으라는 위안이었지요”.


1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이 열리는 메인스타디움을 찾은 김한규 회장. 2 1990년 당시 강영훈 총리(사진 가운데)는 중국이 요청한 자동차와 복사기 지원을 책임지고 도왔다. 사진 왼쪽이 김한규 회장.



중국에 비밀리에 자동차, 복사기 지원해

중국 정부로서도 자존심이 있는데, 쉽지 않은 요청이었을 것 같습니다.

“중국측에서도 제 말을 듣더니 감사하다고, 은혜를 꼭 잊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아울러 이번 협력이 양국이 화합·발전해 나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저와 친분이 깊어진 장바이파는 “한동안 고생하셨으니 한 사흘 푹 쉬었다 가십시오. 저희들이 성심껏 모시겠습니다”라면서 우리 일행을 장백산(백두산)으로 안내하더라고요.

그때 베이징에서 장백산까지는 이동하기가 쉽지 않아서 비행기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당시 중국의 국내선은 에어컨이 잘 가동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공항에 갔더니 장바이파 상무부시장을 비롯해 공항관계자들이 우리 일행을 환송하기 위해 나와서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에어컨은 물론 최신 시설을 갖춘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고요. 국빈수준의 예우였지요. 그때 중국의 요청을 꼭 들어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자동차와 복사기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중국에서 돌아온 뒤 당시 강영훈 국무총리와 상의하면서 ‘어차피 도와줄 바엔 화끈하게 도와주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강 총리의 노력으로 자동차회사와 기업체들을 통해 200여 대의 승용차를 중국 측에 제공했고, 100대의 복사기는 서울시 예비비로 신도리코에서 구입해 보내주었습니다. 기업들도 그런 기회를 통해 중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요.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한국의 그런 도움으로 중국은 그해 10월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성사시킨 저는 특별귀빈으로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초청받았습니다. 이후 수많은 중국 고위인사와 만나 친분을 쌓게 됐지요. 아, 중국 사람은 은혜를 입었으면 몇 곱절로 갚으려고 노력하는 민족이구나! 그때야 제가 비로소 중국인의 ‘관시(關係)’ 문화에 대해 눈을 뜨게 됐습니다.

당시 한·중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과정에서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어요. 장바이파 베이징시 상무부시장과 그의 비서겸 통역이었던 김홍연 여사, 그리고 김 여사의 부군인 민봉진 사장입니다. 이 세 분은 수교 이전인 1980년대 후반부터 수교가 이뤄질 때까지 한국과 중국의 국익을 위해 민간 차원에서 비공식적인 교량 역할을 성심껏 해주신 분들입니다. 지금도 세 분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민간 차원의 그러한 도움이 한·중 간 수교로 이어졌으니 감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도 잊을수 없는 건,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던 날 베이징시가 별도로 저를 특별 초청했던 기억입니다. 천시퉁(陳希同) 당시 베이징시장이 저를 시청으로 초대해 듣기 민망할 정도로 감사 인사를 건네더군요. ‘중국과 한국이 친구가 되는데 민간 차원에서 가장 노력하신 분의 우리 시청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국 사람이 이곳에 초청돼 온 것은 김한규 의원이 처음입니다’라고요.

전인대의 차오스(喬石) 상무위원장으로부터도 초청을 받아 서로 기뻐하고 축하 인사를 나눴습니다. 중국은 제가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때 큰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회만 되면 초청해 항시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21년 전 한·중 수교 비사를 털어놓는 김 회장의 얼굴이 다소 상기된 표정이었다. 당시 한·중 수교는 그동안의 동북아의 외교지형을 바꾸는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한국은 후속조치로 대만과 단교했고, 그해 9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한반도 비핵화문제 등을 논의하며 동반자 관계를 형성해가게 된다. 김 전 장관에 따르면 당시 중국은 한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은 것을 두고두고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수교 직후인 1993년에 김 회장의 주선으로 중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텐지윈(田紀雲) 전국인민대회 제1부위원장이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 일이 양국간 의회교류(한국 국회-중국 전인대)의 시작이었다. 뒤이어 장쩌민(江澤民)주석, 리펑(李鵬) 총리, 차오스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중국의 지도자들이 연달아 한국을 초청방문하면서 두 나라는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김 회장도 13대, 14대 의원을 지낸 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에는 민자당 총재 비서실장, 1996년에는 총무처장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면서도 한·중 외교의 끈을 놓지 않았다.


▎1 2 김한규 회장은 중국 지도자들과 친분이 깊다. 사진은 후진타오 전 주석(위 오른쪽), 리커창 총리(아래 오른쪽)와 만나 악수하는 김 회장.
중국, 全·盧 두 전직 대통령에게 감사 표시

한·중 수교 이후 양국 간 지도자들의 교류도 많았지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중국인은 ‘음수사원(飮水思源)’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음수사원은 ‘우물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중국의 국민성도 그렇지만 최고위 지도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은혜를 잊지 않고, 한 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간직합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한·중 수교는 92년 노태우 대통령 재임때 이뤄졌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중 수교의 우물을 팠다고 생각합니다.

1983년 민항기 불시착 때 한국의 현명한 대처, 86서울아시안게임 때의 도움이 수교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중국은 전 전 대통령이 퇴임하고 10여 년이 지난 2001년에 중국으로 초청해 국빈 수준으로 예우했지요. 지금도 중국 측 인사들은 한국에 오면 늘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하여 인사하고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중국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깊이 갖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퇴임 10년 후인 2002년 11월에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아 중국 정부 초청으로 다녀왔지요.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을 비롯해 첸치천 부총리, 다이빙궈(戴秉国) 공산당 연락부장, 탕자쉬안(唐家璇) 외교부장, 쪼우난치(趙南起)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을 만나고 최고의 환대를 받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장쩌민 주석도 ‘한·중 수교는 대단한 성공작이었다. 수교의 공로자는 감히 수교를 결정한 덩샤오핑 주석과 그것을 실행한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이었다’고 회고록에 적을 정도로 고마움을 표시했고요. 하지만 한·중 수교는 북한에는 큰 충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이 중국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요.”

그 이후 중국 지도자들과 4반세기의 인연을 쌓아오시면서 인연도 깊어진 것으로 압니다.

“장쩌민, 리펑, 주룽지(朱鎔基),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强) 같은 중국의 전·현직 최고 지도자들과 깊게 교류했습니다. 시진핑과 리커창은 지금 중국을 이끌고 있는 5세대 지도자들이지요. 두 지도자의 영향력에 버금가는 리루이환(李瑞環), 자칭린(賈慶林), 텐지윈, 차오스, 후이량위(回良玉), 리창춘(李長春), 꾸슈렌(顾秀莲), 탕쟈쉬안, 리테잉(李鐵映), 첸치천, 위정성(兪正聲), 천빙더(陳炳德), 양광레(梁光烈), 쪼우난치, 천즈리((陳志立), 주량(朱良), 다이빙궈, 왕자루이(王家瑞), 리잔수(栗戰書) 등 수많은 고위층 인사도 저의 오랜 친구입니다. 이들은 언제라도 제 창구가 되어줄 수 있는 분입니다.”


▎앞으로 미국·중국과의 균형외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한규 회장. 그는 21C한중교류협회를 이끌면서 21C형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일하겠다고 했다.



장쩌민은 한·중 교류의 막후 지휘자

그분들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과의 일화도 있을 듯 합니다만.

“장쩌민 주석과의 만남을 떠올릴 적마다 그의 뿔테 안경 속의 너그러운 모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해맑은 웃음 속으로 내비치는 대국 정치인의 소박함과 소탈함에는 알게 모르게 끌리는 진지함과 친절함이 배어 있습니다. 장 주석은 한·중 수교 원년의 국가주석이기도 하고, 한·중 교류의 막후 지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상하이 당서기였던 장쩌민이 베이징에 입성하게 된 일화가 생각납니다. 장쩌민은 상하이 당서기를 맡고 있던 상황에서 89년에 덩샤오핑으로부터 중국의 차기 당총서기 제안을 받았습니다. 덩샤오핑이 군부의 실력자 양상쿤(楊相昆) 등 원로들의 내락까지 치밀하게 받아낸 상황이었습니다. 장쩌민에게 파벌이 없었기에 덩샤오핑의 선택을 받은 것이죠.

덩샤오핑은 당시 진행 중인 천안문사태를 보면서 장쩌민을 염두에 두었고, 장쩌민은 그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장쩌민에게 인민의 신뢰를 얻는 시간을 6개월밖에 주지 않았어요. 장쩌민이 합격되지 않으면 덩샤오핑은 후계자를 바꿀 생각이었지요. 장쩌민은 그때를 ‘벼랑끝에서 걷는 기분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장쩌민은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했고, 이후 1997년 덩샤오핑의 죽음이 장쩌민에게 절묘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정쩌민은 홍콩의 중국 반환과 15기 전국대표대회 개최, 미국 방문에 따른 정치적 소득을 올릴 수 있었고, 탄탄대로를 걸으며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중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지요.”

후진타오 전 주석과도 인연이 깊으시다죠?

“후진타오는 부드러우면서도 분규가 있으면 항상 신속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 원만히 해결책을 찾는 뛰어난 지도자입니다. 후진타오는 한반도의 남과 북을 다 감싸 안으며 이른바 ‘실익외교’를 펴왔다는 평을 받고 있지요. 후진타오를 키운 멘토는 쑹핑(宋平)입니다. 쑹핑은 90년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당무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후진타오를 제4세대 후계자로 만들었지요. 이 무렵 후진타오에게 뜻밖의 귀인이 나타나는데, 덩샤오핑의 딸 떵난(邓楠)의 남편 장싱(張興)입니다.

그는 후진따오의 고교 동기인데, 제14기 당대회 전에 덩샤오핑과 인사문제를 이야기하다가 후진타오를 거론해 강한 인상을 주게 되지요. 그 이후에 장쩌민·차오스·쑹핑 등이 덩샤오핑에게 인재양성 보고를 하는데, 덩샤오핑은 여러 이름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내가 보기에도 후진타오, 이 사람 괜찮은 거 같군’하면서 후진타오를 옹호합니다. 막후의 실력자인 덩샤오핑의 그 말 한마디로 후진타오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등극하게 되었지요.

후진타오는 이후 장쩌민의 마음에 쏙 드는 한 사건을 깔끔하게 처리하는데, 바로 천시퉁 베이징 시장을 잡아들인 일이죠. 후진타오는 평소에 온건하고 신중하다는 평을 들어왔는데, 천안문 시위를 강경 진압한 천시퉁사건을 처리하면서 자신에게도 과감하고도 명쾌한 결단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지요. 그리고는 2002년 11월에 장쩌민 주석으로부터 권력을 승계받아 중국의 국가주석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냈고, 중국을 미국과 겨루는 지금의 G2국가로 성장시킨 휼륭한 지도자입니다.”

김 회장이 출간할 회고록에는 주룽지 총리와 친한파 지도자인 주량, 장바이파 등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를 담고 있다. 그는 지난 2000년부터는 ‘21C한중교류협회’를 이끌면서 민간외교에 매진하고 있다. 그가 한중교류협회를 만들게 된 계기는 2000년 10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기 위해 탕자쉬안 외교부장과 함께 방한 중이던 주룽지 총리의 제안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주룽지 총리는 “한·중 양국의 미래를 위해 민간 차원에서 친선단체를 만들자”며 우다웨이(武大偉) 주한 중국대사(현 6자회담 중국측 수석대표)에게 민간 차원의 양국 교류협력 단체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특별기의 출국시간을 늦추면서까지 창립회의에 참석했다.

현재 김한규 회장이 이끄는 21C한중교류협회는 중국의 ‘제2외교부’로 불리는 인민외교학회가 파트너다.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상임고문을 맡고 있으며,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부겸 전 국회의원, 박재윤 전 통상산업부 장관, 이태식 전 주미대사,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등 각계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화기애애한 만남은 박근혜 정부 들어 강화된 대중외교를 보여준다.
21C한중교류협회는 지난 13년간 정치·외교·경제·국방안보·언론 등 모든 분야에서 양국 민간교류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6월에는 한·중 수교 20돌을 기념해 6월 밀레니엄서울힐튼에서 제12차 한·중 지도자포럼을 성대하게 열기도 했다.

한·중 수교 이후 양국 사이에 중요한 현안이 일어났을 때 21C한중교류협회가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미국과 중국, 북한의 3자회담이 열렸을 때 일입니다. 제가 그해 1월 중국 고위층의 요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3자회담의 필요성에 대해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당시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칭했을 때인데, 제가 90년 아시안게임 때의 기억을 살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중국이 중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안정과 미국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다’며 설득했습니다.

2004년에는 동북공정 문제가 양국의 현안이 됐었지요. 그해 김수한 전 국회의장과 함께 인민외교학회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자칭린 전인대 정치협상회의 주석과 면담을 갖고 역사문제는 현실화할 수 없고, 정치 문제화할 수 없는 만큼 학술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지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천즈리 전인대 상임부위원장 등 고위 지도자를 만나 협조를 요청하고 중국·일본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으로 한반도 주변정세가 긴박한 시기에는 중국 인민외교학회와 민간외교 차원에서 양국의 이해증진을 위한 역할을 수행했고요. 이 모두가 21C한중교류협회가 민간외교의 진가를 발휘한 일들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박근혜 정부, 미·중과 균형외교 펼쳐야

전임 이명박 정부는 중국보다 미국 친화적인 외교정책을 펴왔지만,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를 강화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국통인 그는 박 대통령의 중국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박근혜 정부시대의 한·중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박 대통령이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방문국으로 중국을 택했던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제가 지난해 대선 직후인 12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을 급히 찾은 적이 있습니다. 베이징에서 1992년 한·중 수교의 중국 측 실무주역들인 공산당 대외연락부와 외교부의 전직 고위 지도자 4명과 마주앉아 향후 한·중관계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요. 20년이 지났지만 당시 한·중 수교의 중국 측 실무주역들은 박근혜 대통령 집권 기간 중에 한·중관계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며 많은 기대를 하더군요.

지금 한·중이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체제가 출범한 만큼 양국은 동반성장의 속도를 한층 높일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고 봅니다. 북한의 핵문제가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있지만 북한의 무모한 도발을 통제하고 국제사회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고, 다행히도 지금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시진핑입니다. 중국에 시진핑 체제가 완성된 것은 한·중관계의 미래 발전 비전과 한반도 평화통일 준비에도 상당히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 대중(對中) 외교에 대해 조언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을 통치할 시진핑 체제를 맞아 미국·중국과 균형외교를 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은 중국에 한반도 통일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며, 특히 북한보다 남한과 더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 주변 4강국 외교에 좋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통일외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박 대통령은 중국이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한·중 양국의 국익 차원에서도 한·중관계가 한·미관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다 알다시피 미국은 안보라는 측면에서, 중국은 경제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생존과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지난해 한국과 중국의 교역량은 2500억 달러 규모입니다.

우리나라와 미국·일본의 교역량을 합친 1900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아요. 양국간 풀기어려운 껄끄러운 문제도 ‘막후 채널’을 가동하면 원만히 풀 수 있는 것이 중국이라는 나라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양국 간 수시로 대화할 수 있는 ‘핫라인’ 같은 전략적인 대화채널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의 권력 시스템에서도 우리가 참고해 배울 만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국은 최고 권력이 분산돼 있습니다. 국가주석이 국가를 대표하고 당 총서기가 공산당을 대표하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군을 통솔합니다. 중국의 정치 리더십은 개혁·개방 이후 장쩌민 시대부터 집단지도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진핑도 동급자 중 첫째일 뿐 모든 결정은 9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토론과 협상을 통해 이뤄집니다. 파벌 간 투쟁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우리와는 대조적이죠.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예로부터 중국 지도자들이 추구하는 덕목인데, 서로 다투는 것보다 협력하는 것이 실용적이며 이익이라는 정신입니다. 정치에 관한 한 더욱 그렇습니다. 일당체제·집단지도체제이면서 한국보다 더 민주적이고 부드럽습니다. 투쟁과 갈등을 버리고 협력과 공존하는 것이 일당체제인 중국이 잘 굴러가는 이유입니다. 권력이양을 보더라도 예고해놓고 그대로 진행됩니다. 중국은 예측 가능한 정치를 하지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정치를 합니다. 우리가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중국과의 민간교류에 첨병 역할을 해온 김 회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핵문제를 풀고 평화통일 외교를 펼칠 수 있는 대중(對中)외교의 적임자라며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대중외교의 막후에서 활동해온 그의 노하우가 사장되지 않고 활용된다면 정부의 통일외교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21C한중교류협회를 통해 어떤 활동들을 벌일 계획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 공산당 고위층과 잦은 접촉을 해오는 과정에서 양저우시(揚州市)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귀빈’ 칭호를 받았고 하얼빈시(哈爾濱市)에서는 명예시민으로 위촉되는 영예도 누렸습니다. 2010년 8월에 중국 인민외교학회는 제게 과분하게도 ‘중한우호사자(中韓友好使者)’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도 저는 오랜 관시를 활용해 ‘21세기형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막후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

201312호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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