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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비물질 세계를 물질화하다 

조각가 김병호 

글·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사진·전민규 월간중앙 기자
공업용 재료를 사용하고 신기술 적용하며 조각 영역 확장…보이지 않는 생명들의 작은 속삭임을 기계음으로 표현

▎여의도 IFC 몰 앞에 설치한 <조용한 증식>. 김병호는 조각을 전공하지 않았고, 사운드도 특별히 배우지 않았는데도 조각가가 되었고, 사운드를 결합한 대형 설치 조형 작업까지 하고 있다.



신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타 분야의 전문가와 협력하는 퍼포먼스는 작가가 표현하는 또 다른 예술적 표출이다. 그의 조각은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작업이고 퍼포먼스 또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방식이다.

조각은 진화한다. 흙과 돌, 대리석 등 자연재료에서 출발한 조각은 쇠·알루미늄·레진·FRP 등 화학재료로 확장되고 있다. 조각의 개념도 달라져서 전통적인 조각 방식에서 벗어나 조각을 평면화하거나 무겁고 딱딱한 형태를 가볍고 부드러운 것으로 환치한다. 조각과 회화, 조각과 미디어, 조각과 과학의 결합 등 융합적인 방식도 자유롭게 시도되고 있다.

조각가 김병호는 대학에서 판화를, 대학원에서는 영상공학과 테크놀로지 아트를 전공했다. 첫 개인전 역시 그의 전공과 무관한 조각이었다. 그의 작품은 비물질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로 조형화하는 개념작업이다. 그는 조각의 전통적 재료인 흙이나 돌보다는 공업용 재료를 사용한다.

조형물에 그치지 않고 기계음만 사용한 사운드도 작품 특성에 따라 발표하고 있다. 그는 2005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개인전을 7회, 퍼포먼스를 4회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포스코건설 본사, 흥국생명 본사, 독일 프랑크푸르트시 문화부, 프랑스 낭뜨 멜라니리오 갤러리 등 국내외 주요기관이 소장하고 있다.

감성과 이성의 오묘한 조화

그의 작업실은 서울 을지로 3가역 근처, 공구상과 소매상이 밀집한 오피스텔 건물 안에 있다. 작업실에는 각종 공구가 차곡차곡 상자에 담겨 있고 쇠판을 자르거나 구멍을 뚫는 기계도 두 대나 있다. 벽면에 붙어있는, 작품 구상에 쓰인 드로잉과 작품을 설치했던 이미지 출력물만 없다면 조각가의 방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작업실 테이블 위에는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는데, 그가 2012년 여의도 대형빌딩인 IFC몰 앞에 설치한 <조용한 증식(Silent Propagation)>이다. 채도가 맑은 노란색의 유연한 구조물이 꽃의 암술과 수술을 연상케 하는 설치작품이다. 태양광 에너지로 기계음 사운드가 작동하도록 만들었는데, 작품에 가깝게 가면 소리가 들리도록 제작됐다고 했다.

필자는 2008년, 그의 3번째 개인전 때 시리즈에 대해 직접 설명을 듣고 나서 감상한 적이 있다. 그는 작은 알루미늄으로 수십 개의 파이프를 만들었는데, 직선으로 곧게 뻗어 연결된 파이프의 끝을 나팔모양으로 마무리했다. 나팔모양의 끝 부분에 귀를 대면 미세한 기계음이 들렸는데, 그 소리는 숲 속에 있는 새들의 지저귐 같았다. 필자는 가 설치된 벽면 반대 쪽을 찾아 알루미늄 관으로 연결된 작품의 복잡한 구조를 모두 확인한 후에야 그가 의도한 조각과 사운드의 결합이 어떤 방식으로 조형화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조각을 전공하지 않았고, 특별히 사운드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조각가가 됐고, 사운드까지 결합한 대형 설치 조형작업까지 하게 되었을까?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유년 시절부터 평면보다는 입체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알게 됐다. 비물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자연스럽게 사운드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그가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재료와 형태의 자율성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사운드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듯 큰 굉음소리가 들리는 저편에서는 건물이 사라지고, 전쟁이 터지고, 각종 사건·사고의 혼란하고 무거운 소리들이 들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지형이 바뀌고 자연이 사라지고 도시


aluminum, piezo, condenser microphone, microspeaker, mixer, amplifier, 450(h)×600×900㎝
가 생겨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시각적 변화에 의해 가능하다.


1 brass, transparent urethane casting, 228(h)×60.5×89.5㎝ 2 작가 김병호는 0.1㎜라도 수치가 틀리면 완성할 수 없는 정확한 수학적 계산으로 도면을 시뮬레이션한 후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엔지니어를 찾아내 작품을 완성한다. 작품은 3 aluminum, piezo, wiring_60(h)×225 × 43㎝
반면에, 우리는 이른 봄의 나뭇가지에서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소리라든지 계절이 바뀌어 찬란히 빛나던 푸른 나무가 우수수 잎들을 떨어뜨리고 제 알몸으로만 서 있을 때 내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우리는 고요한 수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작은 피라미들이 헤엄치는 소리, 해파리가 움직이는 소리, 갈대의 사각거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바람이 불면 비로소 갈대가 흔들리는 리듬을, 겨울 철새가 갈대 밭에 앉을 때 내는 미묘한 소리를 감지하게 된다.

공업용 재료에 신기술 활용

작가는 꽃씨를 옮기는 새의 날개 짓을, 암술에 닿는 수술의 소리를, 꽃이 피어나는 시각적인 형상을 사운드로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대지에 살아 숨쉬는 생물들의 소리를 찾아 시각화했다.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겨울 철새가 무리를 이루며 이동하면서 내는 ‘짹, 짹, 짹’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는 생명들의 작은 속삭임을 사운드로 표현했는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의 최종적인 표현이 바로 기계음 사운드였다.

작가는 “소리는 눈을 막아도 들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파수의 기본이 되는 ‘픽’하는 소리가 파장력이 크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새소리가 바로 주파수 소리였다”라고 말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스피커가 수십 개 모아져서 한 방향으로 벽에서 뻗어나가는 형상인데 아주 웅장하다. 그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극대화한 조형언어다.

김 작가의 방에는 작품을 만들며 실험한 나사뭉치, 알루미늄 막대, 황동으로 만든 스피커, 그리고 작업하면서 실험한 공업용 부속품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부속품들이 쌓여진 보관함 위쪽에 드로잉과 설계도가 눈에 띈다.

드로잉이 작가의 아이디어를 스케치해 개념적인 작업의 방향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설계도는 수학적 계산과 함께 재료의 특성을 파악해서 제작된다고 했다. 드로잉과 설계도를 마친 뒤에는 도면의 작업을 수행할만한 최적의 엔지니어를 물색한다. 그리고 인천이나 당진에 소재한 공장 등을 찾아가 재료의 적합성이나 가공가능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1960년 후반 미니멀리즘(minimalism) 창시자들이 산업용 재료를 이용해 최소한의 도구로만 작업했던 방식처럼 김 작가 역시 드로잉과 설계도에 주력하고 그 외의 정교한 제작은 공장에서 기술을 잘 다루는 엔지니어를 통해 완성한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은 상업사진가에 의뢰해 사진으로 남긴다. “작품은 상품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예술은 작품 자체보다 기능 속에 판타지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산업화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이루어진 우리 사회의 생산시스템을 적극 이용해서 작업하는 작가다. 이는 작가가 살고 있는 환경을 작업에 반영하는 환경적 조각으로 이어졌다. 인상파 화가 마네가 튜브물감을 들고 자연에서 그림을 그려 명화를 탄생시켰고, 앤디 워홀이 매스미디어와 대중적인 재료를 이용해 팝아트를 만들어 예술의 대중화를 기여했듯이 각 시대에 만들어진 기술과 재료는 작가에게 신개념의 작업을 진행하는 획기적인 방식이고 환경적 작업이다.

김 작가도 현대화된 생산시스템을 찾아서 어떤 작가보다 가장 빠르게 적용하고 차별화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의 명성이 높아가고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면 비슷하게 작업하는 작가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화하는 요즘 가장 비싼 작가로 꼽히는 제프 쿤스나 무라카미 다카시,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도 짝퉁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김병호의 도면은 다르다. 다른 작가가 김 작가의 도면을 손에 쥔다고 해도 동일한 엔지니어와 공장을 모른다면 결코 동일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타 분야의 전문가와 퍼포먼스도

김 작가는 작품의 재료 역시 알루미늄이나 황동만 선택하지 않고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과 작품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달리 사용한다. 그는 재료를 선택할 때 “물성 자체를 드러내기보다는 그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선택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최근에는 콘크리트 거푸집을 만든 뒤 콘크리트 양생과정에 작품을 투입, 작품이 화석처럼 굳기를 바라는 의도를 담은 신작 <의혹(Doubt)>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작업방식과는 개념도 달랐고 재료도 달랐다.

해외에서 어렵게 구입한 투명왁스는 화석(化石)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데 적합한 재료였다. 작품 <의혹>은 예술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온 그가 내놓은 하나의 답변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도면과 재료만 공장에 주면 물건을 완성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0.1㎜라도 수치가 틀리면 완성할 수 없는 정확한 수학적 계산과 건축가의 시선으로 도면을 시뮬레이션한 후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엔지니어에게 제공하는 방식은 김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라 특히 돋보인다.

김 작가는 “예술가가 첨단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2010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속인 고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입주할 당시, 음악가와 협업해 공연을 했다. 신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타 분야의 전문가와 표현하는 퍼포먼스는 김 작가의 또 다른 예술적 표출이다. 그 당시 관람했던 미술분야 전문가들이 줄줄이 그에게 섭외를 요청했다. 그의 조각이 누구나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작업이고, 퍼포먼스 또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과 변화에 대한 관심,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끌어내는 그의 작업은 그만의 튼튼한 주춧돌이 될 것이다.

201401호 (20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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