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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소설가 이호철의 원산 

후한 인심에 풍광 좋은 도시…명사십리 눈부신 해변은 언제 거닐까 

글 이호철· 사진·지미연 월간중앙 기자
주문진과 강릉, 삼척의 해산물 집산지와 교통요지로 급성장…1920년대 조선에서 처음 설치된 신풍리 스키장 터에 ‘마식령스키장’ 들어서

▎경기도 연천군 신탄리역에서 북녘을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는 작가 이호철. 신탄리 역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열차가 운행을 멈춘 남측 마지막 역이다.



일제시대 품팔이 일꾼들이 가장 좋아했던 곳이 바로 원산이다. 해산물이며 농산물이 늘 넘쳐나서, 인심 후한 고장으로 원산은 원근에 소문이 나 있었다. 6·25 때 원폭 투하설에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은 원산의 그 풍요한 아름다움을 꿈에도 잊지 못한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첫째 원산(元山), 둘째 전주(全州), 셋째 박천(博川)을 꼽곤 한다. 이것이 언제부터 내려오는 속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밖에도 주택가로 가장 좋은 곳으로는 강릉(江陵)과 해주(海州), 그리고 함흥(咸興)을 친다고 한다. 한데 원산은 함경남도의 남쪽 끝이고(현재의 북한 체제에서는 강원도에 속해 있다), 박천은 평안북도여서 북한 쪽에 있고, 전주만 우리네 남한 쪽이다. 주택가인 경우도 강릉만 남쪽이고, 함흥·박천 두 곳은 북한 쪽에 속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열아홉 살 때까지 원산에서 살았지만 박천이나 해주, 함흥을 가본 일은 없고, 전주와 강릉은 지난 60년간을 이남 쪽에서 살아오면서 수시로 가봐 잘 알지만, 전주라는 곳은 언제 가보아도 주위의 산천이 생긴 것이며, 사람들이며 거리 전체가 꽤나 품격이 높게 느껴지곤 한다. 강릉도 그렇다. 언제 보아도 주택가로서는 그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안정감이 감돈다.

하지만 어릴 적에 내가 19년 동안 살았던 원산에 비하면, 우리네 원산 쪽이 사람들의 품격이며 농산물·해산물이 풍부한 것이며 주위의 명승지가 한 수 더 높게 느껴지곤 한다. 우선 동해바다를 끼고 있고, 바로 남쪽으로는 안변평야가 있어 질 좋은 쌀과 사과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 석왕사와 금강산, 총석정, 송전(松田)이며 어디며, 가까이에 명승지가 많고, 태백산맥의 시작인 황룡산도 저만큼 둥그러니 솟아 있다.


1 원산의 명물 ‘명사십리’의 2013년 6월 모습. 작가가 태어난 곳은 명사십리에서 10리가 못 되는 지척의 농촌마을이었다.
티끌 하나 없던 명사십리 모래밭의 추억

그뿐이 아니다. 명사십리와 일찍부터 해수욕장으로 첫손에 꼽히던 송도원이 자리해 있다. 그러니 일제식민지 시절부터 서울서 돈푼이나 있다는 사람들은 여름이면 경원선 기차로 여덟 시간이나 걸려 원산에 닿아 송도원 해수욕장과 동해선 기차로 총석정, 금강산과 석왕사를 다녀가곤 했다. 그래서 30∼40년 전의 언젠가, 나는 ‘내 고향 명사십리’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짤막한 수필까지 써서 발표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은 명사십리에서 불과 십 리가 못 되는 농촌이었다. 흔히 이야기되는 원산의 명사십리란 갈마반도 아래 연두도리와 두남리로부터 명사리를 거쳐 성북리까지 이르는 이십 리가 넘는 해안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 마을들은 내가 태어난 마을과 함께 본시 덕원군(德源郡) 현면(縣面)에 속해 있다가, 일제 말 행정개혁으로 원산시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 명사십리가 그렇게까지 유명해진 것은 본시 평안도 정주 사람이었던 모윤숙 시인이 호수돈 고녀에 다니면서 여름방학 때면 그 두남리의 고모 집에 와서 지내곤 했었는데, 그 무렵 몇 번에 걸쳐 그 명사십리를 두고 시를 써냈던 것으로 그곳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현면 면사무소 소재지였던 갈마의 초등학교에 다닌 덕분에 곧잘 성북리 해수욕장에 다녔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으레 해안이란 어디나 이렇게 생겨 있겠거니, 바닷가 모래밭은 이런 모양이겠거니 하고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직 다른 바다, 다른 해안은 본 일이 없었으니까, 그 성북리에서 다시 낭성까지 이르는 아득하게 뻗은 티끌 하나없던 그 모래밭이 이렇게도 유명한 곳인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으니까.

안변평야의 특미 쌀도 원산의 자랑

좀 더 커서 북쪽 끝에 있던 원산중학교에 다니면서 그 근처의 송도원 해수욕장엘 가보고 나서야, 그 송도원 모래밭이 명사십리 쪽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을 느꼈던 터다. 그러니 내 마음속 끝머리에 자리해 있는 바다라는 것은, 7∼8세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다녔던 성북리 바다, 곧 명사십리 앞바다였다.

더구나 그 성북리 바로 옆 동네인 길명리에 이모집이 있어 여름이면 그곳에서 지내기도 했다. 한데 명사십리라는 곳이 이렇게까지 유명해진 것은 모윤숙 시인의 그 시 덕분이기도 하였지만, 그 밖에도 사실은 서양 사람들의 별장이 그 명사십리 해안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50∼60호나 들어서면서였다.

그곳에는 한 번도 직접 가본 일은 없었다. 성북리 해안 바로 북쪽의 솔밭 깊숙이 널려 있던 그 아롱아롱 색깔 있는 아담한 지붕들을 그저 먼발치에서 건너다보았을 뿐이었다. “저게 대체 무엇 하는 족속들인고?” 하고 매우매우 궁금해 하면서.

여름 석양녘 이모집에서 오이소박이 반찬에 저녁 밥을 맛있게 먹고 나서, 누나랑 같이 갈마 차량공장 옆을, 우리 마을 앞을 지나 흘러 내려오는 산기천(山崎川) 하류의 긴 방죽을 타박타박 걸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던 그 해안 숲 속에 불빛이 휘황하던 광경은 지금 떠올려도 그다지 따뜻한 추억은 아니다.

그나마도 일제 말 군국주의가 끝내 광적인 기승를 부리면서 명사십리 해안에도 일본군 항공부대가 자리 잡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전투기의 요란한 소리만 시끄러웠고, 격납고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고 중학교 3학년 선배들은 그쪽으로 근로봉사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이틀인가는 나도 동원되어 간 적이 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그 명사십리에 직접 가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같은 명사십리라도 성북리 앞바다는, 그 뒤 내가 남쪽으로 나올 무렵까지도 여전히 조금도 다름없는 그 바다였다….”

그렇다면 원산이 우리나라에서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으뜸을 차지할 정도인 이유는 무얼까. 우선은 물산이 풍부하다는 점이었다. 원산에서 동해안 남쪽으로 고성(高城)까지가 300리, 다시 그 고성에서 강릉까지가 300리, 그 600리 해안이 기가 막힌 명승지임은 옛날부터 소문이 나 있다. 다시 북쪽으로 두만강 초입까지의 동해안도 절경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그곳에서 나는 모든 해산물이 일단 원산으로 모아져서 기차에 실려 서울과 평양으로 운반되었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그 무렵에는 주문진·강릉·삼척 등의 해산물도 양양(襄陽)에서 원산까지 통하던 동해선 기차편을 이용해 일단 원산에 모아졌다. 그 동해선 기찻길은 1945년 광복 후 1착으로 들어온 소련군이 선로를 죄다 뜯어가서 지금은 아예 없어졌다.

고성 거리도 저 6·25 전쟁 때의 격전으로 지금은 허허벌판으로 바뀌어 종적조차 없어졌지만…. 그 무렵엔 속초·양양, 심지어 주문진이나 강릉까지도 물산이나 사람살이도 첩첩이 산이었던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옮겨가기보다 원산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1 2013년 6월 원산 앞바다에서 바라 본 원산시 전경. 지금은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아담했던 과거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2 2000년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 때 적십자사의 자문위원으로 평양에 들어가 헤어진 지 50년 만에 누이동생을 만났다. 그가 홀로 고향을 떠나올 때 원산에 남은 할아버지와 부모, 누나 둘, 남동생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원산에 정착했던 화가 이중섭의 친형

북쪽 동해안도 마찬가지였다. 함흥이며 청진이며 북청이며 나진이며 회령이며 웅기며, 그쪽의 해산물이나 농산물들이 함경선 기차로 일단은 원산에 내려왔다가 서울이나 평양으로 가 닿았던 것이다.

심지어 품팔이 막일꾼들도 하루하루 품팔아 먹기로 가장 좋아했던 곳이 바로 원산이었다. 그렇게 해산물이며 농산물이며 늘 넘쳐나서, 우선은 인심이 후한 고장으로 원산은 원근에 소문나 있었다.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남쪽으로는 안변평야를 끼고 있어 임금님이 드시는 진상 쌀로도 이름이 난 쌀 생산지인데다, 과수가 풍부하였다. 원산의 우리집도 아버지께서 배 과수원을 경영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원산리라는 전혀 보잘것없었던 자그마한 포구가 일본인들의 내왕과 우리나라 곳곳의 개화 바람에 휩쓸려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인구가 대거 늘어나기 시작했다. 농산물과 해산물이 넘쳐나면서 윗 원산 아래 원산 할 것 없이 조선인·일본인들이 새 시류를 좇아 몰려들면서 해안통의 어시장을 비롯, 시장부터가 극성맞게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본래의 덕원 사람들은 갈마 쪽의 변두리 현면 사람들이나 북쪽 적전면 쪽 변두리의 당상리와 당하리, 일명 당모루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 일어나는 장사꾼들 등쌀에 어정쩡하게 날로 뒤로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이나 본토 조선인들 중 장사꾼들이 원산이라는 곳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래는 덕원군 현면 원산리였는데, 1942년인가 행정개혁으로 통째로 원산리가 원산시로 승격하면서 아예 덕원군은 없어져버리고 덕원리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1880년인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부산·원산·인천항이 개항하면서 그렇게 원산리는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윗 원산 쪽에 아예 왜놈 거리가 생겨나고, 원산 앞바다인 동해를 건너 일본 상품이 밀려들면서 눈썰매·스키 같은 것이 처음 들어온 것도 원산이었다. 그렇게 일찍부터 신풍리 언덕에는 스키장이 생겨나고, 나중에는 석왕사 아래 쪽 삼방이란 곳에 자연 슬로프의 제대로 된 스키장까지 생겨난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국 곳곳의 개화 바람에 들떠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산으로 몰려들었고, 원산역을 사이에 두고 윗 원산에는 날로 일본인들 거리가 커져가며 신식 은행들이며 3층짜리 빌딩 백화점도 생겨나고, 일본인들 자제의 초등학교며 중학교도 생겨났다. 아랫 원산 쪽에도 기독교계의 루씨 고녀가 문을 열었고, 카톨릭 계의 해성학교라는 것도 생겨났다.

4·19 뒤에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씨가 그 학교의 교장으로도 부임해 있었다. 이쪽에도 명석초등학교며, 용동초등학교도 문을 열었고, 아랫 원산 거리에서 3㎞쯤 떨어진 농촌 출신의 나 같은 사람도 변두리 초등학교 격인 갈마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어느새 슬슬 촌뜨기, 시골 아이로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1980년대의 언젠가 중국 옌볜에서 모처럼 서울을 방문하셨던 소설가 김학철 옹을 만나면서 인상 깊게 겪었던 한 가지 일이 새삼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그이가 본시 원산 사람이라는 소리는 들었었지만, 십중팔구는 순종의 덕원 사람은 아닐 것이려니 하고 지레짐작하면서 만나는 즉시 이렇게 물었다.

“김 선생님 선대께서는 어디서 사셨나요?” 그러자 김학철 옹은 즉각 받으셨다. “으음, 내 조부께서 덕원군 군아(郡衙)의 아전이었어. 창피하게 말이지. 그렇게 용동이 바로 내 조상 대대의 고향이었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습니까? 저도 본시 용동 남쪽 아래의 현동리 태생이었지요만,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정말 선생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는 북에서 이 남쪽으로 나와서 4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이 남쪽에서는 그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보았지요. 그렇게 아전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자제들 태반이 노론이었다느니, 소론이었다느니, 남인이었다느니, 그런식으로 위장하던데 선생님처럼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분은 아무도 못 보았습니다.” “으음, 보매기 올라가는 그 현동, 알다마다. 우리네 용동에서 빠안히 건너다보이던…” 하며 김 옹은 피시시 웃으셨다.


▎끊어진 경원선의 남쪽 종착지 신탄리역. 경원선은 223㎞에 달하는 철길로, 일제가 북부지방의 물자를 일본과 서울지역으로 반출하기 위해 1914년 완공했다.

▎신탄리역에서 북녘 하늘을 바라본 후 서울로 돌아오는 열차 안 작가의 표정이 착잡하다. 작가는 1950년 12월 중공군이 개입해 들어올 때 피란해 남쪽으로 넘어왔다.
또 한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이중섭 화가의 경우다. 그이는 본래 평안도 정주(定州) 쪽 사람이었는데 그이의 형님께서 일찍이 원산 쪽으로 와서 문방구 겸 백화점이었던 ‘백두상점’을 경영했다. 그 아들이자 이중섭 화가의 조카인 이영진은 나와 동갑내기로 원산에서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와 한 학급이었다. 그이도 월남했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이중섭 씨 살아 생전에는 을지로2가의 ‘문학예술사’에서 1956년인가, 두어 번 반갑게 만나 원산 이야기를 나눈 일도 있다.

당모루 강씨네와 박씨네의 이념갈등

그리고 시인 구상 씨. 그이는 친형님께서 덕원 수도원의 신부님으로 계셔서 그 무렵 한때는 원산 근처에 사시면서 원산 사람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때의 덕원군 현면과 적전면이었던 원산시는 현면의 원산리가 아랫 원산 남쪽 해변의 그야말로 볼품없는 초라한 포구였던데 비해, 원산 북쪽의 송도원에서 서쪽에 자리했던 당상리나 당하리, 속칭 당모루 마을은 강씨네와 박씨네가 반반 섞인 큰 마을이었다.

바로 1919년 3·1운동 때의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로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강강덕 씨는 내 친할아버지의 외가쪽 6촌 간으로 언젠가는 그이께서 우리 집에 들러 하룻밤을 묵으시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증조모는 바로 그 댁에서 우리 집 증조부님께 시집을 왔던 것이다. 그리고 저어 아득한 웃대인 조선조 태조의 강비(康妃)도 종국에는 태종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바로 그 강비가 내 증조모의 아득한 선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당모루 마을에서의 강씨네와 박씨네의 뿌리깊은 다툼도 새삼 기억이 새롭다. 마침 내 외가는 그 박씨네여서 1945년 마악 이 나라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던 그때에는 외삼촌 둘과 외6촌 형이 함흥형무소에서 풀려나왔다. 그때 열네 살이던 나는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엘 갔는데, 바로 그날 저녁 그 마을 공회당에서 민족주의 진영이던 강씨네와 사회주의 진영이던 박씨네가 정면으로 맞붙어 열띤 논쟁을 벌이던 광경이 지금 이 순간에도 새삼 약여하게 떠오른다. 결국 그 얼마 뒤에는 초대 원산시장이던 강기덕씨가 서울 쪽으로 내려가고, 그날 저녁 열렬하게 논쟁에 가담했던 강씨네 젊은 사람 여럿도 하나같이 월남을 감행했던 것이다.

원산은 본시 고조선의 옥저(沃沮)의 일부 지역으로 고구려 때와 신라 시대에는 정천(井泉)군으로도 불렀다가, 고려 시대에는 용주(湧州)로, 조선조 세종 19년에는 덕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산항은 본래 덕원부의 해안가 작은 마을이었다. 부산·인천과 함께 개항된 뒤에 일본인들의 거류지였던 지역은 물론이고 명석동(銘石洞)·상동(上洞)의 바닷가와 원산역 일대가 갈대가 무성한 황무지였다. 그런데 경원선·함경선·평원선 등의 철도 개통으로 한반도 내륙은 물론이려니와 압록강·두만강 너머의 중국이나 러시아 쪽으로의 교통 요충지가 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나는 1950년 12월에 중공군이 우리 전쟁에 개입해 들어올 때 피란해 남쪽으로 넘어왔다. 그때는 기껏 길어본들 일주일이나 한 달이면 너끈히 원산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때의 분위기나 정황이 대강 그러했다. 원산 근처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게 되고, 최소한 90리 바깥으로 피신해야 살아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온 원산 거리가 난리법석이었던 터였다.

그 뒤 몇 십 년이 지나 미국 고문서관에서 발견된 당시 극비문서에 따르면, 그렇게 중국이 개입해 들어온 그해 10월 이후 ‘긴급’이란 암호로 원폭 투하가 실제로 적극 검토되었다. 특히 12월의 긴급 보고서에는 북한의 평강(平康) 근처가 원폭 투하 후보지로 검토되었으며, 오키나와 등의 미 공군기지에서 폭격기가 발진하는 방법까지 논의되었다고 한다. 그때 사용되려던 원폭은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던 원폭의 서너 배 수준이고, 당시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는 “전쟁을 금방 끝낼 수 있고, 대통령 선거에도 유리할 것”이라고 트루만 대통령에게 적극 건의했으나 검토에 참여한 대다수는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1 실향의 작가에게 깊은 회한으로 각인된 신탄리 철도 중단점의 표어 ‘철마는 달리고 싶다’. 2 신탄리역 광장에서 통일을 희구하는 마음을 담아 ‘소원의 돌’을 얹는 작가의 손길이 가늘게 떨렸다.



민초들 특유의 후각이 치명적인 위험 감지

아무튼 그렇게 원폭 투하가 검토됐던 평강은 원산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원산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원산 시민 대부분이 피란길에 나선 것은 그냥 낭설에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그 비밀문서를 통해 거의 반세기가 지나 실제로 확인이 된 셈이다.

그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원산 시민들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당시 참모회의에 참여했던 미군의 고급 장성 하나가 주위에 슬쩍 흘리기라도 했을까? 당시로서는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본다. 설령 그랬다손 치더라도 그 소식이 원산 시민들에게 그렇게도 빠르게 알려졌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민초들, 백성들 특유의 감각, 그 무슨 냄새 맡음이 아니었을까? 백성들은 자고로 바로 이 눈치 하나로 그때그때의 위기를 견뎌왔던 것이다. 더구나 이 경우는 놀라운 후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렇게 나도 허둥지둥 피란 대열에 섞여들어 중청리 집을 나섰던 것인데, 그때 나는 조부님과 함께 쓰던 방 한구석의 가난한 고 3짜리 책꽂이에서 대강 급하게 눈에 뜨인 작은 문고본 하나를 빼내 뒤 포켓에 찔러 넣었던 것이었다.

그 책꽂이 옆 벽면에는 <로마에서의 괴테> 책 표지의 원색사진 하나가 붙어 있었고, 그 바로 아래에는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가 늘 스스로 다짐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내가 펜으로 휘갈겨 쓴 그 문구는 “너는 너 자신이 당장 쓰려고 하는 소설의 등장인물을 과연 얼마만큼 속속들이 온 몸으로 느끼고 있는가”라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그때부터 나는 열렬한 문학소년이었던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자연만을 벗삼아 평생을 살았던 한 파파 늙은이가 난생 처음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그 높은 산속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가 어디쯤에선가, 강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 강에는 다리 하나가 걸쳐 있었다. 늙은이는 마침 지나가던 사람에게 물었다. “대관절 저것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은 한창 젊은이로 이를테면 지식인이었다. “네, 저거요. 저건 철근과 콘크리트의 복합구조물이지요.”

그 젊은이의 이 대답은 그 다리에 대한 매우 정확한 설명이었지만, 늙은이는 그게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서만 머리를 굴려보다가, 다음에 또 만난 사람에게 거듭 물어보았다. “저게 대체 뭣 하는 겁니까?” 질문을 받은 사람은 초로에 접어든 나이로 인생 경험이 풍부해 보였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거 말입니까? 이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든 것이지요.”


▎2014년 12월 31일 원산시 신풍리 마식령스키장의 개장 행사. 최룡해 총정치국장 등 주요간부들이 참석했고, 김정은은 직접 리프트를 타면서 스키장을 시찰했다. 신풍리는 1920년대에 조선 최초의 스키장이 건설된 곳이다.
꿈속의 김일성이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이 자그마한 삽화 한 토막은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그 저자는 다음과 같은 한탄을 덧붙였다. “오늘 이 세상에는 그 젊은이의 설명처럼 불친절한 대답이 도처에 너무 많이 널려 있다. 특히 지식인의 세계라는 것이 그러하다.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새로운 지식의 편린들. 그것에 대해 쓴 책가게에 쌓여지는 서적들. 그 책을 사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하지만 그 책 속에는 세세한 지식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정작 분명한 행동지침은 얻어질 수 없다.”

가령 남북관계를 두고도 흔히 ‘동질성의 회복’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그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물론 그 말뜻을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제는 그 소리가 듣기 싫다. 입만 뻥끗 하면 ‘동질성의 회복’이라니, 와락 지겨워진다는 말이다. 그 용어는 이제 닳고 닳은 상투어가 되어버렸다. 그런 상투어 속에서 진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말은 풍성하지만 남북관계의 고착된 현실은 아예 끄떡도 안 하고

있다.

나는 지난 1998년 8월 26일부터 9월 3일까지 8박9일간 국내 모 신문사의 초청으로 48년 만에 처음으로 북한을 다녀왔지만 평양과 백두산, 그리고 묘향산만 갔을 뿐 그리운 내 고향 원산은 가보지 못하였다. 백두산에 들렀던 첫날밤을 ‘베개봉 려관’이라는 곳에서 잤는데, 새벽녘에 막 잠에서 깨어날 무렵 문득 상체 모습이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김일성 주석이 바로 내 앞으로 걸어오며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자는 것이 아닌가.

사사로운 정서로는 그는 오로지 무서운 사람으로만 각인되어 있었던 사람인데, 기묘하게도 그 꿈속에서의 그는 털끝만큼도 무섭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의 꿈일까? 한참 골똘하게 생각해 보았지만 그 꿈의 의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낮이었다. 장군봉 앞 어느 근처에선가, 소위 구호나무를 참관한다고 칠흑으로 어두운 공간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큰 주황색 나비 한 마리가 나타나, 내 왼쪽 팔 중간 쯤에 붙어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지 않은가. 그 정경을 북쪽의 안내원이라는 사람들도 바로 곁에서 보았던 터였다.

나는 “어? 이게 웬 나비지?” 하곤 다시 그 나비를 내려다보며 “너도 같이 들어가고 싶거든 같이 들어가자꾸나” 하고 일부러 큰소리로 한마디 지껄이기까지하며 곧장 그 캄캄한 공간 속으로 들어가 참관을 마치고 도로 나왔을 때, 그 주황색 나비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아, 이건 또 대체 무슨 뜻일까? 이 두 가지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 뒤 서울로 돌아와서 우연히 꿈해몽 책이 하나있어 심심풀이 삼아 뒤져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반드시 꿈속이 아니라 생시에도, 주황색 나비는 바로 ‘저승사자’로 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날 새벽의 그 비몽사몽 간의 김 주석의 꿈도, 분명 나를 향한 간절한 메시지가 있을 터였다. 나는 아예 그 꿈의 해몽까지를 내 방식대로 시도하고야 말았다. 그 내용을 이 글에서 죄다 털어놓지는 않겠다.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다만, 그럭저럭 2014년에 와 닿아 있는 오늘의 남북관계며, 현재 북한의 실상을 보고 겪어내면서, 그때 그 꿈속에서 김일성이라는 혼령이 저승에서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저 70년 가까이 철통으로 이어져 왔던 독재체제, 3대로 이어진 유일체제에 대한 김일성 나름의 뜨거운 반성과 회한이 아니었겠는지….

그리하여 남쪽에서 글을 쓰며 고향 원산을 그리는 나를 통하여 그런 의지를 북의 지도자가 된 손자 김정은에게 전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자락에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뜨겁고 골똘한 성심(誠心), 사특한 욕심이 아닌 지극하고 맑고 상서로운 것의 올곧은 지향이다. 그것이야말로 남북 대결시대의 모든 흉악한 장벽을 허물고 관통하는 마지막 힘이 되어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01404호 (201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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