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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취재 | 대한민국 ‘관료 마피아’의 세계 - 정치권력 위의 권력, 관권은 영원하다? 

 

공직생명 짧은 고시 출신들의 ‘정년 보장용’으로 독식…재취업 제한으론 부족, 공무원 임용·복무제도 근본부터 뜯어고쳐야

▎세월호 참사는 민간을 옥죄어 조직의 이익을 챙기는 관료사회의 맨얼굴을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도 관료조직을 향해 개혁의 칼을 뽑아들었다. 5월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이 ‘관피아’ 근절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2007년 초였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정권 중 처음으로 공무원연금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겠다며 수술대에 올렸다. 연금제도 개혁은 공무원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정책의 연장선이었다. 공무원들의 반발이 거셌다. 공무원들끼리 모인 사석에서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이 쏟아지곤 했다. 평소 친분 있는 한 고위공무원은 “아무리 용을 써도 안 될 걸”이라고 했다. 그가 툭 던진 한 마디는 이랬다. “왜 안 되냐고? 정권은 유한하고, 관권(官權)은 영원하거든.”

대한민국의 공무원 조직은 스스로 몸집을 불리고 힘을 키워왔다. 역대 대통령 중 이 조직을 대수술하는 데 성공한 이는 없다. 조직의 힘은 기수문화, 연공서열식 인사제도에서 비롯된다. 승진 적체가 심할 때 선배들의 용퇴는 후배들의 귀감이 된다. 후배들은 조직의 숨통을 터준 선배들의 취업을 도와 예의를 갖춘다. 이게 정권이 바뀌어도 공무원 조직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이렇게 틀어쥔 권력은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무원들이 독점한 권력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보호하는 데 쓰인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간의 영역을 통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관피아(관료 마피아)’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세월호 참사는 관료사회의 복지부동과 탐욕을 여실히 드러냈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민간업종별 이익단체인 각종 협회까지 관피아의 세력이 뻗어 있다. 마치 조직폭력배들이 일정 구역을 정해 관리하며 이권을 챙기는 것과 같은 형태다.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의 행태는 충격적이다. 경실련이 2009년부터 최근까지 해양수산 관련 공무원의 민간협회 취업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국해양구조협회 등 민간협회와 단체 9곳에 47명의 등기임원이 해양수산 출신 공무원으로 확인됐다. 협회당 5명 꼴이다.

이번 조사에는 세월호 검사를 허술하게 해 참사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한국선급은 빠져 있다. 법인등기부등본 발급이 불가능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월간중앙>의 자체조사 결과 한국선급의 역대 회장 11명 중 8명은 해수부 고위관료 출신이었다. 한국해운조합도 역대 이사장 12명 중 10명이 해수부 출신이다. 해수부와 해양경찰청은 퇴직관료들의 자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해당 협회에 위탁·대행사업 명목의 일감을 몰아줬다. 해양수산 관련 법률 15개에는 한국해운조합·한국선급·한국해양구조협회 등 12개 단체에 독점적 사업을 위탁하고 있었다.

퇴직 후 자리보장 대가로 일감 몰아줘

항만법 제92조는 ‘해수부장관 권한의 일부를 해운조합에 위탁 가능하다’고 명시하면서도 위탁업무에 대해서는 적시하지 않았다.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언제든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독점적으로 위탁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의원이 아니라 정부가 입법 발의해 2012년 12월 18일 개정됐다. 당시 해운조합 이사장은 이인수 전 중앙해양안전심판원장이었다. 이 전 이사장은 부산지방해양수산청장과 해수부 해운물류본부장 등을 지냈다. 직전 이사장인 정유섭 씨도 국립해양조사원장과 인천지방해양수산청장을 지낸 해수부 출신 관료다.

한국선급에 선박검사 업무를 위탁하도록 규정한 어선법·선박법·해사안전법·선박안전법·선박관리산업발전법도 어선법과 선박관리산업발전법을 제외한 나머지 4개 법령이 정부 입법을 통해 개정됐다. 이런 식으로 19번에 걸쳐 위탁·대행 규정이 개정됐는데 그중 11번이 정부입법으로 이뤄졌다. 경실련 관계자는 “정부 입법은 해당 부처 공무원이 입안하기 때문에 관련 협회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크다”며 “각 협회에 포진해 있는 관료 출신 임원들이 협회 이익을 위한 대정부 로비에 나섰을 개연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이 비단 해양수산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행정권이 미치는 모든 분야에서 관행처럼 굳어져 있다. 새누리당 이정우 의원이 5월 11일 발표한 17개 정부 부처 산하 공공기관 및 관련 협회 재취업 공무원 현황에 따르면 17개 부처의 4급 이상 고위공무원 출신 384명이 업무와 관련성 있는 기관·단체의 임원·간부로 취업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취업자가 가장 많은 건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이다. 모두 64명 중 34명이 민간협회의 임원(회장·부회장·이사)으로 취업했다. 국토교통부와 농림축산식품부가 각각 42명으로 뒤를 이었고, 해수부 35명, 문화체육관광부 32명, 보건복지부 31명의 순으로 많았다. 각 부처에서 차관을 지낸 뒤 관련 공기업 등의 대표로 자리를 옮긴 이들도 13명이나 됐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산업부)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지식경제부) ▷오영호 코트라 사장(산자부) ▷김영학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지경부) ▷안현호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지경부) ▷김재수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농식품부) ▷이상길 농림수산식품기술기획평가원장(농식품부) ▷김주수 한국단미사료협회 회장(농림부) ▷최재덕 해외건설협회장(건교부) ▷박덕배 한반도수산포럼 대표(농식품부) ▷안양호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행정안전부) ▷정창섭 한국지역정보개발원장(행안부) ▷홍양호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통일부) 등이다.

이번 집계는 현재 재직 중인 인사들에 한해 이뤄졌다. 감사원과 경찰청, 해양경찰청, 소방방재청 등 독립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간부,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등 정부 위원회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퇴직공무원들이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낙하산 병폐는 모든 분야에 걸쳐져 있다.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안전관리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조직의 퇴직자를 위해 새로운 자리를 만드는가 하면 감독 기관의 지위를 이용해 민간단체 내부 직원이나 외부 전문경영인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조직폭력배의 ‘구역 관리’ 방식을 쏙 빼닮았다. ‘마피아’라는 말 그대로다.


▎국토부와 농식품부 공무원들이 2012년 12월 개청한 정부세종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안전관리와 재취업자리 맞바꿔

<월간중앙>은 대형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는 소방·교통·건설·해양 분야 민간단체의 역대 임원을 집중 추적했다. 대상이 된 모든 단체에 퇴직 공무원이 포진해 있었다. 퇴직 공무원을 위한 자리가 고정돼 있었다. 퇴직 당시 직급에 따라 기관장(장·차관·고위공무원), 임원(1~3급), 고위간부(3~4급) 등으로 퇴직 전 직급보다 한 단계 높여서 자리를 마련해주는 게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미래부 산하의 한 진흥회에는 3개의 본부장 직급이 있는데 각각 내부 승진자용, 정치인용, 퇴직공무원용으로 정해놓고 인력을 운용한다. 2012년에는 새누리당 출신의 정치인이 임용됐고, 지난해에는 미래부 산하기관에서 퇴직한 고위공무원이 임용됐다. 다른 단체들도 이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인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한국소방안전협회는 2011년 8월 신현철 전 부산소방본부장을 회장으로 선출됐다. 소방안전협회는 1980년 대한소방협회와 한국주유소협회·위험물관리기술협회·소방공사협회·방염협회를 통합한 국내 최대 소방 관련업 종사자의 이익단체다. 소방시설 관리유지사업과 소방안전관리자 등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회장직은 대대로 소방직 고위 관료 출신이 도맡아왔다.

협회 대의원들의 비밀투표로 선출하지만 실제로는 소방방재청에서 퇴직자들 중 회장으로 보낼 인물을 미리 정해 통보하는 식으로 인사가 이뤄진다고 한다. 김한용(전 중앙소방학교장), 박창순(전 소방방재청 차장), 이학기(행자부 소방국장), 최재홍(내무부 소방국장) 씨 등 역대 회장 대부분이 퇴직 후 재취업했다. 협회 회원인 소방설비업체 대표는 “회장 선출 결과를 소방방재청이 승인하기 때문에 다른 인물을 내세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2010년 7월 창립한 한국소방시설협회에는 김준규 전 중앙119구조단장이 이사로 재취업했다. 김 이사는 2012년 10월 소방방재청이 설립을 승인한 협회 산하 소방산업전략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소방시설협회는 소방시설공사업법에 따라 소방시설공사업체의 시공능력평가업무와 소방기술자·감리원 의 경력관리 등을 주업무로 하고 있다. 연구소 설립은 곧 퇴직 공무원의 자리가 하나 늘었음을 의미한다. 신생협회의 조직 확대를 승인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장받는 거래인 셈이다.

화재예방 및 소화시설 안전점검 등의 안전 관리업무를 맡고 있는 한국화재보험협회에서도 이런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2월 협회 상무이사(경영지원본부장)로 취업한 김동윤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원회 상임위원은 올해 4월에 신설된 부이사장으로 선임됐다. 화재보험협회는 그동안 부기관장이 없어서 회원사인 보험업계와 금융감독원 등 관료 조직 사이에 이사장 자리를 놓고 암암리에 다툼이 벌어졌다.


협회는 그동안 추대 형식으로 뽑았던 이사장을 2012년 8월 공개모집으로 전환했다. 협회 창립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를 통해 이기영 LIG손해보험 대표이사가 선출됐다. 금융감독원과 소방방재청 등 상위 기관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이번에 부회장직을 신설한 것이 이사장직을 공개모집으로 전환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업계에선 보고 있다.

정치권과 관피아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

전기공사업체의 시공능력을 평가하고 기술자 경력 관리업무 등 정부 위탁사업을 하는 한국전기공사협회도 회장은 회원업체 대표가 맡고 부회장을 관료 출신이 맡는 룰이 정해져 있다. 2011년 부회장직을 신설한 뒤부터다.

신임 이유종 부회장은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 생활을 시작해 중소기업청 감사담당관, 한국산업기술시험원장 등을 거친 산업자원부 관료 출신이다. 그동안 회장 직을 두고 관료 조직과 회원업체의 경쟁이 치열했다.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고 위탁사업을 수행하는 협회로서는 ‘갑’인 해당 부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결국 퇴직 관료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전관을 예우하는 것으로 타협을 본 것이다.

1997년 국토부로부터 감리전문교육기관으로 지정된 한국건설감리협회는 상근부회장이 국토부 3급 공무원 출신인 김태호 씨가 지난 해 7월부터 재직 중이다. 2010년 6월에 취임했던 박성호 전 부회장도 국토부 서기관 출신이다. 2006년과 2008년에 취임한 용영준·김상욱 전 부회장도 모두 건설부처출신이다. 이 협회의 상근부회장직은 국토부 3·4급 출신 퇴직자의 자리로 굳어져 있다.

대부분의 협회와 단체들이 별 문제가 없는 한 퇴직관료 출신들의 임기를 보장해준다. 대체로 2~3년마다 후임자로 교체된다. 정년보다 앞당겨 퇴직한 것에 대한 보상차원이다. 이렇게 관직을 벗고 얻은 첫 사회 경력을 발판삼아 유관기관이나 단체의 한 단계 높은 임원으로 가거나 정치권에 입문하는 게 공식처럼 굳어져있다. 정치에 입문한 뒤에는 정권의 배려를 받아 새로운 낙하산으로 공공기관을 침투한다.

역대 이사장 12명 중 10명이 해수부 출신인 한국해운조합의 경우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4월 25일 사퇴한 주성호 전 이사장(전 국토부 2차관)을 제외하고 나머지가 모두 최소 3년의 임기를 채우고 후임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해수부 차관보와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김성수 전 이사장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6년간 자리를 지켰다.

김병훈 전 이사장(전 인천지방해운항만청장)도 한 차례 연임해 6년의 임기를 채웠다. 미래부와 관련된 한 협회 관계자는 “고위공무원들은 대부분 퇴직 후에 일할 자리와 임기가 보장돼있기 때문에 일반 국민보다 적어도 2년 이상 정년이 늘어나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관피아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게 관례다. 정치권은 정부 산하 공공기관과 공기업을 차지하고, 관피아는 민간단체와 협회를 주로 제물로 삼는다. 양대 권력이 충돌하지 않는 이유다. 오히려 서로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생을 택한다.


▎‘관피아’의 행태가 낱낱이 공개되면서 관료조직을 장악한 행정고시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2013년 4월 29일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열린 5급 공채 신임 사무관 입교식에서 신임 사무관들이 임용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조기퇴직자의 재취업 도와 인사적체 해소도

2002년에 출범한 한국바이오에너지협회는 역대 회장 5명 중 비상근직이었던 유병직 전 회장을 제외한 4명 중 3명이 관료 출신이다. 초대 회장인 박삼규 전 회장은 옛 상공부(현재 산자부) 차관보와 공업진흥청장,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등을 지낸 뒤 협회로 옮겼다. 이어 협회 회원업체 대표가 잠시 비상근직으로 회장을 맡았다가 상근부회장이었던 이수원 씨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전 회장은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정책보좌관, 제17대 대통령선거 손학규 후보공보특보 등을 지냈다. 그의 뒤를 이어 다시 관료 출신인 신종은 전 국무총리실 농수산국토정책관이 내려왔다. 이 전 회장은 국무총리실 정무운영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사정에 밝았던 한 정치인은 “정치권과 관료 조직 사이에 일종의 거래였다”고 말했다.

방재전문인력 교육 및 안전관리 전문기관인 한국방재협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취임한 김진영 회장은 건설부 공무원 출신으로 인천시 정무부시장과 인천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거쳐 6대 방재협회장으로 취임했다. 관료 출신이지만 퇴직 후에는 정치에 입문했다. 전임자는 강병화 씨로, 소방방재청 방재관리국장으로 퇴직한 관료 출신이다. 역대 회장 6명 중 3명이 관료 출신이다.

퇴직관료를 받지 않는 협회는 감독 기관으로부터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 해양업계에서는 한국선급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지난해 3월 한국선급 회장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내부 인사인 전영기 기술지원본부장이 주성호 전 국토부 제2차관을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창립 5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급의 회장직은 정부 관료가 관행적으로 맡아왔다.

3개월 뒤 해수부는 한국선급에 대해 특별 지도감독을 벌였다. 업계에선 이를 두고 관행을 깬 것에 대한 보복성으로 받아들였다. 인천의 선박부품업체 관계자는 “전 회장이 선출된 뒤 해수부가 장관배 축구대회 주관 기관을 한국선급에서 부산항만공사로 바꾸는 등 불만을 표시했다”며 “선급이 해수부와 관계를 복원하려고 퇴직관료용 부회장직을 신설하려다 여론의 역풍을 맞아 이루지 못했다”고 전했다.

관피아가 생긴 배경에는 적체가 심한 인사구조와 공직사회에 뿌리깊게 박힌 기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업무 성과에 따라 승진과 도태를 결정하는 사기업과 달리 공무원조직은 범법행위를 하거나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한 정년이 보장된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자리가 적어져 인사적체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선배들의 용퇴’에 맡기는 게 현실이다.

2007년 경기도는 한 차례 인사파동을 겪은 적이 있다. 이른바 ‘49년생 명퇴 거부 파동’이다. 1949년생 2~4급 공직자 21명이 관행적인 명예퇴직을 거부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경기도는 정년을 3년 정도 앞둔 고위 공직자들이 후배들을 위해 명예퇴직하는 관행이 내려오고 있었다. 대신 명예퇴직자들은 경기도 산하 공공기관과 지역의 유관단체·협회 임원으로 재취업해 못 채운 정년기간을 채운다. 그런데 김문수 도지사가 단행한 산하기관 경영혁신 조치 때문에 재취업할 자리가 마땅치 않자 대상자들이 퇴직을 거부했다.

경기도청의 한 4급 공무원은 “명예퇴직을 선배의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정년을 채우려다간 자기 욕심만 채우는 사람으로 여겨져 조직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며 “자리가 보장되면 문제될 게 없지만 50대 중반에 실업자 신세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 퇴직을 결심하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후배 공무원들의 용퇴 압박이 거세졌다. ‘강제 명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조직 차원에서 압박을 가했다. 실제로도 강제 명퇴가 공공연히 이뤄져왔다. 명예퇴직을 거부하면 직위를 해제해 업무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퇴직을 유도했다. 일종의 ‘왕따’인 셈이다. 한 퇴직자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윗사람의 압력에 따라 명예퇴직을 한다’는 사직서를 제출한 사실이 공론화해 행정자치부와 감사원의 감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1년가량 버티던 명퇴 대상자들이 줄줄이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것으로 파동이 일단락됐다.

충북 제천시에선 ‘누룽지론’이란 게 한때 공직사회의 유행어가 됐다. 3선 가능성이 높았던 이원종 전 충북지사가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고 갈 수는 없고 후배들 보기에도 자랑스럽지 않아 물러난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를 은퇴한 것을 빗대어 나온 말이다. 2007년 말 엄태영 제천시장은 이 전 지사의 말을 인용하며 “6개월이든 1년이든 용퇴를 해주는 것이 후배 공무원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성취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라며 선배 공무원들의 명예퇴직을 유도했다.

관피아의 뿌리가 된 ‘고시 카르텔’

국무총리실에 근무하는 A사무관은 “민간협회나 단체 등 특수법인을 만들 때부터 퇴직공무원용 자리를 만들어둔다. 자리가 모자라면 협회를 쪼개거나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적체를 해소한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민간단체는 공직사회가 소화할 수 없는 정년을 채워주는 대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1차 베이비붐 세대인 1955~1963년생의 평균 퇴직연령은 53세다. 이들이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8~10년을 기다려야 한다. 소득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은 예외다. 이 공백을 민간단체가 채워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파워엘리트인 중앙부처 고위 공무원은 고시 출신의 주무대다. 올해 3월 기준 국가정보원을 제외한 정부 부처 1급 이상 고위공무원 256명 중 9급 공채 출신은 단 한 명이었다. 장병원(58) 식품의약품안전처 차장이다. 장 차장은 1975년 부산 남구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중앙부처로 자리를 옮겼다. 7급 공채 출신도 4명(1.6%)에 불과하다. 이충재(59)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장, 박영대(59) 문화재청 차장, 이학영(58) 중부지방국세청장, 김용삼(57) 문화체육관광부 종무실장이다. 그중 김 실장은 유일한 고졸 출신이다.

이들은 후배 공무원들에게 전설로 통한다. 하위직급 공채를 통해 고위공무원에 오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경기도청의 한 6급 공무원은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타고난 관운이 없으면 고위공무원에 오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고위공무원으로 꼽는 3급까지 범위를 넓혀도 7·9급 공채 출신에게 등용문은 거의 닫혀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정부 고위공무원 1510명(지난 해 말 기준) 중 행정고시(5급 공채) 출신은 1031명(68.3%)이었다. 7급 공채는 87명(5.7%), 9급 공채는 43명(2.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계약·별정직과 사법고시(판·검사)와 외무고시, 사관학교·경찰대학 등 특수공채 출신들이었다. 대통령실을 비롯해 해경·통일부·조달청·기재부·방통위·공정위·특허청·지경부·특임장관실·금융위·안행부·복지부·과학기술위·경찰청·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위는 고위공무원 중 7·9급 출신이 아예 없다.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에 따르면 9급 출신 공무원이 5급으로 승진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 27년3개월이다. 30세에 9급 공채로 들어왔다면 퇴직을 3년 앞둔 57세쯤 돼야 사무관에 오르는 셈이다. 7급 출신은 16년10개월, 3급까지 오르는 데에도 34년7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곧바로 7급 공채에 합격해 임용되기까지의 과정을 26세 이전에 끝내지 못하면 3급까지 오르기도 전에 정년퇴직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퇴직 후 재취업을 보장해주는 민간단체의 임원직은 모두 고위직을 위해 만들어졌다. 중·하위직은 퇴직해도 재취업할 마땅한 자리가 별로 없다. 경찰청에 근무하는 순경 출신 A경사는 “고위직은 정치적 인맥도 있고 힘이 있어서 재취업에도 유리하다. 골라서 갈 정도다. 하지만 정치적 힘이 약한 중·하위직 실무자들은 민간단체에서 필요로 하지도 않을뿐더러 가봤자 한직에서 겉돌며 찬밥신세가 되고 만다”고 했다.


▎관료조직 개혁의 성패에 따라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의 향배도 결정될 전망이다.



견제·균형 위해 등용문 다양화 필요

기수에 따른 서열과 선후배 관계가 돈독한 고시 출신들만의 문화가 그들의 카르텔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 고시와 비고시의 학력과 능력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상위직급으로 갈수록 고시 출신을 선호하는 문화가 뚜렷하다. 인사와 예산, 정책을 기획하는 힘있는 부서의 장은 예외 없이 고시 출신이 독식해 대물림을 한다. 7·9급 출신은 일반행정·민원처리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정책을 기획하고 조직을 관리할 수 있는 고위 공직자의 역량을 익히고 발휘할 기회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재의 공무원 인사제도는 한 분야에 10년 이상 몸담아 직무의 전문성을 높이는 외국과 달리 고작 1~2년마다 직무를 바꿔가며 경력을 관리하는 개인 위주로 운영된다. 조직관리를 위해 다양한 업무 경험이 필요한 고위직에게 적합한 방식이다. 전문가 공무원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다.

그런데 이 체계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고시 출신들을 위해서다. 5급에서 출발하는 고시 출신들이 고위직이 되기까지 짧은 시간에 다양한 업무 경험을 쌓기 위해선 한 분야에 오래 몸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사람 중심이 아닌 일(직무) 중심의 직위분류제로 인사행정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고시 출신에 편중돼 있는 고위공무원 진출 기회도 다양화해야 한다. 지금도 제도는 있다. 2000년에 도입된 개방형직위제가 그것이다. 중앙부처의 실·국장급인 고위공무원은 정원의 20%, 과장급은 10% 범위에서 민간의 전문가를 임용할 수 있도록 했다. 2006년에 도입한 고위공무원단 제도와 2011년 민간경력자 5급 일괄채용시험 등도 민간 인재를 등용해 공직자들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도입한 제도들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안전행정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동안 고위공무원단과 과장급 공개채용을 통해 신규 임용된 외부인은 한 명도 없었다. 같은 기간 내부 승진자는 각각 195명, 1168명이었다. 반면 임기가 정해진 임기제와 정치적 선택의 여지가 큰 경력직 채용을 통한 임용자 수는 고위공무원 45명, 과장급 179명이었다. 내부 승진에 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외부 전문가를 흡수하겠다며 도입한 개방형직위도 162곳 중 순수 민간 출신은 11명(6.6%)에 불과했다. 나머진 해당 부처에서 이동했거나 다른 부처에서 퇴직한 뒤 재취업한 경우였다. “우리나라 고위 공무원의 민간인 충원 비율은 19.8%로 호주·캐나다·네덜란드 등보다 높다”고 했던 안전행정부의 주장이 무색하다.

한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 김모(7급) 씨는 “옛날에는 학력이 낮고 공무원 처우가 열악해 엘리트를 끌어들이기 위해 고시제도가 필요했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났다”고 말했다. 그도 서울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은 엘리트다. 김씨는 “요즘엔 7·9급 공채와 행정고시 출신의 학력 차이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제도적으로 승진 기회를 주지 않고 고시 출신들의 들러리 역할만 주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하는 최고의 대안은 ‘고시 폐지’다.

고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외무고시는 2013년 상반기에 치러진 47회 시험을 끝으로 폐지됐다. 이후 국립외교원 교육생을 선발하는 외교관후보자시험으로 대체됐다. 사법시험도 단계적으로 합격자 수를 줄여 2017년 폐지될 예정이다. 유일하게 행정고시만 남은 것이다.

행정고시도 폐지하려던 적이 있었다. 2010년 8월 이명박 정부는 행정고시를 폐지하고 ‘5급 공무원 공개경쟁 채용시험’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공채 임용자 수를 줄이는 대신 2015년까지 외부 전문가 임용비율을 50%까지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유명환 당시 외교부장관 딸 채용특혜 논란이 벌어지고 ‘현대판 음서제도’란 비판이 커지자 20여일 만에 폐기됐다. 얻은 거라곤 ‘고시’란 명칭을 없앤 게 전부였다.

세월호 참사가 남긴 ‘소중한 과제’ 풀어내야

그러나 이번에는 적당한 선에서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을 분위기다. 공직사회에서도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는 분위기다. 안전행정부의 한 고위공무원은 “관피아란 이름으로 공무원의 전관예우 관행이 모두 까발려져 이대로 넘어갈 수 없게 됐다”며 “공무원제도를 어떤 식으로든 손대려 했던 정치권에서 이번 기회를 놓치겠느냐”고 했다.

최근 국무회의에선 ‘공무원의 신분보장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나온 발언이다. 또 행정고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퇴임 후 유관단체 재취업 관행을 근절하는 것도 방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현재의 명예퇴직 관행과 고시 카르텔을 그대로 두면 어떤 처방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50대 초중반에 공직을 나가야 하는데 이들의 경력 단절을 막고 경력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또 고시 출신의 수를 줄이는 게 지금의 분위기에선 당장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조직 핵심부서를 장악한 상황에서 카르텔까지 근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경원 서울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관료들은 개혁에 내성이 강하고 웬만한 개혁을 쉽게 무력화한다”며 “관피아 구조를 깨려면 대통령이 직접 인사시스템 전반을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공은 정부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정권도 감히 손대지 못했던 관권(官權)을 개혁의 수술대 위에 올릴 수 있었던 건 ‘민권(民權)’의 힘이다. 세월호가 남긴 해묵은 과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현 정권에 대한 민심이 판가름 날 전망이다.

201406호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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