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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왕도를 말하다 | 선비 곽재우, 왜적 뒤에 선 임금을 꾸짖다 

 

박종평 역사비평가, 이순신 연구가
준비된 의병 봉기로 경상우도 방어하고 왜군의 호남 진출도 봉쇄… 29차례에 걸친 사직과 직언으로 권력자의 눈밖에 나 귀양살이에 나서기도

▎경남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위치한 곽재우 장군 생가. 2009년 의령군이 생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선비는 크게 문인과 무인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그 경계를 넘나들며 세상의 요구에 따라 변신하기도 했다. 평화로울 때의 문인 선비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크게 세 가지 길을 선택했다. 과거 급제로 ‘사대부(士大夫)의 길’을 걷거나, 산림에 은거하며 제자를 키워 학계와 정계의 정신적 스승이 되는 ‘산림(山林)의 길’을 가거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지내는 ‘은일(隱逸)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국가 존망의 시기에는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선비 연구가인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는 “더욱 강경한 처신법이 있었다. 우선 자결(自決)이고, 다음은 망명(亡命), 그리고 은거(隱居)다. 그러나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로움을 들어 적을 물리친다)하는 의병(義兵)이 있다”고 했다.

자결한 선비의 대표적인 사례는 구한말의 민영환(閔泳煥, 1861~1905)과 황현(黃玹, 1855~1910)을 들 수 있다. 영의정까지 지낸 민영환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와 이완용 등을사오적 처형을 주장하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45세에 자결을 선택했다.

황현은 개혁을 부르짖던 선비였지만, 현실에 절망해 낙향한 뒤 일제의 강제 병탄이 이뤄지자, “나는 일찍이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작은 공로도 세우지 못했다.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고자 하지만, 충(忠)은 아니구나”라는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이들의 자결은 절망감과 죄책감이 만든 선택이다.

망명의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국내에서 자결 대신 적극적으로 의병이나 기타 활동을 하다 한계에 봉착하자 해외 투쟁을 위해 망명했다. 정 교수가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했던 의병(義兵)은 구한말은 물론이고,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그들 중에서도 무인 출신이 아닌 문인 의병은 그 의미가 더 크다. 책만 붙들고 있던 문인들이 칼을 잡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과 그 휘하 장수 17명의 위패가 봉안된 충익사(경남 의령군 의령읍)에 있는 곽재우 장군 기마도.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

그럼에도 문인 출신 의병장은 많다. 임진왜란 때에는 전라도의 고경명(高敬命, 1533~1592), 황해도의 이정암(李廷馣, 1541~1600), 충청도의 조헌(趙憲, 1544~1592),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 1565~1624)가 대표적 인물이다. 고경명은 1552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동래부사를 역임했던 전형적인 문인이었지만, 의병을 봉기했고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정암은 1561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고, 각종 관직을 역임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황해도초토사(招討使)를 지내다 의병을 모아 연안성(延安城)을 방어했다.

조헌은 1567년 식년 문과에 급제해 성절사(聖節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도 다녀왔고, 공조좌랑·전라도 도사·보은현감 등을 지냈다. 자신이 예견했던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수복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 정문부는 15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했고, 사헌부 지평·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를 역임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반란을 꾀한 국경인(鞠景仁) 등을 토벌했다.

높고 낮은 관직을 지냈거나, 산림 혹은 은일의 길을 걷다가 의병을 일으킨 문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사람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의 문인 출신 의병장들은 그들의 선의(善意)와 의기(義氣)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실제로 병법을 잘 알았거나, 이를 활용해 승리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곽재우는 문인 출신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성과도 뚜렷했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침략군 1진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무관(無冠)의 선비 곽재우는 불과 10일 채 되지 않은 4월 22일,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죽거나 도망간 관리들을 대신해 경상우도 방어에 나섰다. 당시 41세의 곽재우는 의령(宜寧)에서 은일의 삶을 살던 선비였다.

그러나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나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은 집안의 후손이다. 마땅히 죽음으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 왜적을 토벌해 복수하는 것은 책임이다(自謂家世世受國恩宜以死報 以討賊復讐爲己任)”라며 거의소청(擧義掃淸)의 깃발을 들었다. 자신의 가솔과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적병이 이미 다가오고 있어 우리 부모와 처자는 장차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동네에도 젊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마음을 함께해 정암진(鼎岩津)을 근거지로 지킨다면 우리 고장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가만히 앉아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라고 호소했다. 가솔 약 10명으로 시작한 의병은 보잘것없는 수일지 모르지만,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다. 본래 곽재우는 경상도 명문가 출신이다.

증조부는 곽위(郭瑋)는 예안현감, 조부 곽번(郭藩)은 성균관사성, 아버지 곽월(郭越)은 의주목사·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자신도 경상좌도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이기도 했다. 그의 손위 동서는 이조판서·대사성을 지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이다.

비난받을 정도의 부를 축적한 곽재우

27세에는 사신이 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초시(初試)에도 여러 번 합격했다. 34세인 선조 18년(1585년), 마침내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한 시험인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로 합격했다. 그러나 며칠 후 물거품이 됐다. 답안이 선조의 마음을 거슬러 시험 자체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시험 문제는 ‘당태종이 여러 위(衛)의 장졸들에게 전정(殿庭)에서 활쏘기를 가르쳤다’는 ‘당태종 교사 전정론(唐太宗敎射殿庭論)’이었는데, 그의 답안이 그 시대에 맞지 아니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하는 ‘시휘(時諱)’에 걸린 것이다. 게다가 다음해인 1586년 아버지 곽월까지 운명했다.

사대부의 길을 걷고자 최소 30년을 문과 급제를 목표로 공부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시휘’의 낙인이 찍혔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던 부친이 세상을 등지자 절망해 과거를 포기했다. 그는 의령 동쪽 기강(岐江) 근처에 돈지강사(遯池江舍)를 짓고 낚시를 하며 평생을 살 결심을 했다.

그러나 41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은일 대신 바로 의병을 봉기했다. 그는 은일했던 시기에 낚시만 하며 지낸 것이 아닌 듯하다. 그가 일찍부터 조식의 문하에서 병법을 배웠다는 기록, 훗날 그가 쓴 상소문에 <춘추좌전>, <손자병법(孫子兵法)>, <위료자(尉繚子)> 등의 병법서를 인용한 것에 비춰볼 때, 그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법과 전쟁사를 치밀하게 공부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광해군일기>의 ‘곽재우의 졸기(卒記)’를 보면, “학문을 버리고 힘써 농사지으면서 재물을 늘려 재산이 수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은둔한 것처럼 살았다는 것은 관직을 멀리한 것이지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 지낸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전란 기간 중의 일화에는 장사꾼 곽재우의 모습도 있다. 1597년 정유재란 중에 계모 허씨(許氏)가 사망하자 울진(蔚珍)에 가서 상을 치르면서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었다’거나, ‘물건을 만들어 팔아서 생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바로 직전 세대 인물인 토정 이지함(李之菡)이 장인의 역모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장사를 하고 어부의 삶을 살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청빈하고 재물을 나눠준 이지함과 달리, 곽재우가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당시 선비들의 삶과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온갖 욕을 먹어가며 모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 자금으로 썼다. 당시 전쟁을 예견한 사람은 많았다. 조헌이 그랬고, 이순신도 그랬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전쟁을 대비했다. 의병봉기 때의 모습을 보면, 곽재우가 농업과 상업을 했던 이유는 은일하던 선비가 할 수 있는 전쟁준비의 한 수단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곽재우는 평범한 선비와는 큰 차이가 있다. 부를 축적하는 선비, 병법을 탐구하는 선비, 실전에서 승리한 선비, 관직 버리기를 우습게 아는 선비였다. 또 과거시험에서의 ‘시휘’ 사건, 임란 직후에 경상감사 김수가 전쟁준비를 잘못했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목을 베어야 한다는 격문(檄文)을 쓴 것 등을 보면 그는 붓과 칼을 동시에 휘두른 선비였고, 붓도 칼처럼 쓴 과격한 사람이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아 시대와 불화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주변 환경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조식 문하에서 공부한 그는 스승의 눈에 들어 16세 때 외손녀 사위가 됐다. 조식은 당시 퇴계 이황과 함께 경상좌·우도를 대표하는 학자였고, 특히 그는 성리학만을 강조하는 퇴계와 달리 문무(文武) 겸비를 강조했다. 조식은 칼을 차고 다녀 ‘칼을 찬 선비’라고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조식이 곽재우의 손위 동서였던 동강 김우옹과 달리 곽재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곽재우를 무인 재목으로 평가한 것이다. 또한 조식의 사위이며, 곽재우의 장인이었던 김행(金行)도 종4품 무관직인 만호(萬戶)이기도 했다.


1 곽재우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웠던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 2 곽재우 장군이 <선배시첩(先輩詩帖)>에 남긴 칠언율시. 국토를 되찾으려는 다짐과 당시의 험난한 시대상이 담겨 있다.



진주성의 전투지원 명령을 거부

또 곽재우 그 자신이 무예와 병법에 관심이 많았던 듯하다. 기록을 보면 19세 때, 셈법과 병법을 공부하는 틈틈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국경지방 체험도 그의 시야를 넓히는 데 일조했다. 23세에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3년을 보냈다. 의주는 군사 요충지이기에 자신이 학습한 병법을 실제 군사운용 현장에 투영해보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렇듯 환경과 관심, 경험이 맞물려 전쟁 발발 직후에 집안의 재산을 털어 장사들을 모았고, 깃발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내건 의병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자 자기 옷을 벗어 싸움할 군사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군사의 처자에게 입혔다. 이는 병법가 오자(吳子)가 군사의 몸에 난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의 군대(父子之兵)’를 만든 것과 같은 리더십을 실천한 사례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지원하라는 명령에 대해 “백전백승의 군졸들을 어찌 차마 죽을 곳으로 데려가겠소. 고립된 성은 지킬 수 없소”라며 출전을 거부했다. 군사에게 피해를 주는, 지는 싸움은 할 수 없다는 병법의 원칙을 지킨 고육책이다. 중국 고대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의병(議兵)>에서 ‘삼지(三止)’, 즉 ‘장수가 지켜야 할 세 가지 지극한 것’을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위반해 장수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라도 “장졸들을 위태로운 곳으로 몰아넣지 말라(不可使處不完), 이길 수 없는 적을 공격하지 말라(不可使擊不勝), 백성을 속이지 말라(不可使欺百姓)”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이순신이 1597년 초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곽재우가 예측한 대로 진주성은 결국 함락됐고, 이순신과 달리 조정의 불합리한 명령을 실행한 원균의 조선 수군도 전멸당했다.

곽재우가 병법에 능통했다는 사실은 1599년 11월에 쓴 ‘도산성을 수선할 것을 주청하는 장계(請繕島山城啓草)’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병법에 이르기를, ‘먼저 적이 우리를 이길 수 없게 하고, 적을 이길 수 있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고 했는데, 이는 <손자병법>의 ‘군형(軍形)’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지키는 곳이 없는 데 있다(亡在於無所守 城之不可不守)”는 <위료자>의 구절도 언급했다. 그의 말처럼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인 <위료자>의 ‘12릉(十二陵)’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가 얼마나 병법을 열심히 연구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자신이 학습한 병법 이론과 의주에서의 경험을 실전에 적극 활용한 그가 의령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를 방어하는 바람에 일본군의 호남 진출은 봉쇄됐다.

전쟁 기간 동안 그를 상징할 눈부신 대첩(大捷)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 대해 조정은 물론이고 백성 중에도 아는 이가 많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6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김세겸(金世濂)은 “<일본국사(日本國史)>에 임진년에 그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해 온 사실을 상세히 기재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여러 장수 중 오직 선생의 성명만이 기재돼 있다”고 했다.

사대부 곽재우는 41세 때 의병 활동의 공로로 유곡 찰방에 임명된 이래 1616년까지 24년간 29회의 다양한 관직에 제수됐다. 그중 15회는 출사했고, 14회는 관직 자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출사했던 15회도 실제로는 임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직하거나, 부임했다가 바로 사직하곤 했다. 그 원인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8세에 경상좌도 병사에 부임해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도산성(島山城)을 수리할 것을 간청하고 성을 수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하지만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직서를 내고 낙향했다. 그로 인해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탄핵을 당해 곧바로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1년 후 귀양에서 풀려난 뒤부터는 현풍(玄風)의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신선(神仙)처럼 살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신선이 될 수 없었다. 세상의 불의를 걱정하고 개혁하려는 마음과 현실을 떠나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의 경계선에서 방황했다. ‘임금이 부르는 명령이 있었음(有召命, 유소명)’란 시(詩)에는 경계인(境界人) 곽재우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몸을 편안히 하려니 군신(君臣)의 의(義)를 저버릴까 두렵고, 세상을 구하려니 날개가 난 신선이 되기 어렵네(安身恐負君臣義 濟世難爲羽化仙).” 자기 한몸을 편히 하는 것과 의리를 지키는 것, 신선처럼 탈속해 사는 것과 세상을 구제하는 일 사이에서 고심하는 인간이 그였다.

부귀영화 대신 세상의 불의(不義)를 극복하려는 열정이 강한 그가 출사를 하거나 거부할 때 쓴 상소문은 일반적인 선비 혹은 사대부라면 입밖에 낼 수 없었던 과격한 이야기가 많다. 비수와 같은 그의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이 시대의 리더들에게도 경종을 울린다.

중국 남송 때의 인물인 ‘장준에 대한 논평(張浚論)’에서는 “천하의 충신(忠臣)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충신이라고 할 수 없으며, 천하의 현신(賢臣)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현신이라고 일컬을 수가 없다(不知天下之忠臣者 不可謂之忠 不知天下之賢臣者 不可謂之賢)”며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왕과 사대부를 비판했다.


▎곽재우 장군의 뜻을 기려 후손들이 경북 달성군 비슬산에 세운 예연서원.



사대부가 입밖에 내지 못하던 과격한 언어들

1598년 9월 선조가 관직을 내렸을 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그의 침략성 때문이 아니라 왕인 선조가 그럴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라며,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지난날의 허물을 아주 고쳐서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라”고 꼬집었다. 12월에 올린 상소도 마찬가지다. “전하께서는 진실로 조종(祖宗)의 2백 년 사직(社稷)을 생각하시고, 조종의 2백 년간 다스린 백성들을 걱정해 지난날의 잘못을 통렬히 뉘우치시고 이전의 마음을 크게 고쳐야 한다”고 선조의 반성을 촉구했다.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임금 선조의 무능이라고 보고 질타했다. 또한 당쟁을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당쟁은 “장차 전하의 나라가 반드시 위급해져 멸망할 지경에 이를 때 그칠 것"이라고 했다. 선조에게 악담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라를 중흥시키는 세 가지 계책 상소(中興三策疏)’에서는 광해군을 겨냥했다. “전하께서 하신 일 중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天運)이었고, 할 수 없었던 것은 인사(人事)였다"며 능력이 아니라 운이 좋아 왕이 된 만큼 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 왕의 능력을 보여주라고 일갈했다.

1609년에는 광해군이 궁궐 신축공사를 하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역대 제왕의 흥망성쇠가 백성의 마음과 하늘의 명운(命運)에 달려 있음을 전제, “오늘날 백성의 마음이 떠난 것인가, 떠나지 않은 것인가? 하늘의 명운이 가버린 것인가, 가버리지 않은 것인가?(今日之人心離耶 不離耶 天命去耶 不去耶)”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빨리 마음을 뉘우쳐 지난날의 허물을 힘껏 고치고, 백성의 힘을 중하게 여겨 토목의 역사는 다시 일으키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전쟁의 후유증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궁궐공사냐고 따진 것이다.

광해군이 큰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전하께서 편안하게 놀기를 좋아하시는 조짐이 반드시 이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면서 “왕이 나라를 중흥시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하가 다스리는 나라를 하늘이 대신 다스려주는 것인가? 땅이 대신 다스려 주는 것인가? 귀신이 대신 다스려주는 것인가?(殿下之國事 天爲之耶 地爲之耶 鬼神爲之耶)”라고 거침없이 질타했다.

그의 격정적인 간언은 멈추지 않았다. “궁중의 시녀와 무당과 눈먼 점쟁이, 척리(戚里, 임금의 내척과 외척)와 소인(小人)의 말만 듣고, 충신과 현명한 신하를 믿지 않았던 옛날의 왕들 중에서 나라를 망치고 자신을 망치지 않은 왕은 없었다”며 광해군을 다그쳤다.

선조와 광해군에게 날린 직격탄

선비 곽재우는 백성의 안녕을 선비와 임금의 임무로 보았다. “백성이 편하게 된 뒤에 나라가 부유하게 되고, 나라가 부유하게 된 뒤에야 군사가 강하게 되고, 군사가 강하게 된 뒤에야 적을 막을 수 있고, 적을 막은 뒤에야 나라가 중흥하게 될 것이다(民安而後國富國富而後兵强 兵强而後禦敵 禦敵而後中興).”

관직을 주면서도 귀 기울이지 않는 왕에게 “전하는 신의 말을 쓰지 않으면서 신의 몸만 이용하려 한다(殿下不用臣言 而欲用臣身者). 이는 신을 관직으로 묶어 다른 여러 신하처럼 부리기만 하려는 것이다. 전하는 여러 신하를 개와 말처럼 여긴다(殿下視群臣如犬馬). 그런데도 신까지 그 가운데로 몰아 넣으려고 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자신은 개와 말이 될 수 없다고 관직을 거부하면서,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시옵소서(伏願殿下勿復召臣焉)”라고 선언했다.

곽재우의 삶에 대해 많은 논자는 경계인의 삶과 말년의 솔잎을 먹고 살았던 행보를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지혜라고 평가했다. 전쟁터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들이 권력자의 의심을 사 천수를 누리지 못한 전철을 피하려는 처세술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는 그의 다양한 상소문에서 나타나듯 ‘세상을 구하려는 열정’과 그의 진정성을 왜곡한 부분적 인식이다.

그는 매순간 현실의 불의와 부조리, 관행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싸움을 보다 능동적으로 이끌고자 거꾸로 신선의 삶을 가장했다. 30대 중반의 곽재우는 권력의 눈밖에 나 과거를 포기했지만, 은일의 시기를 다가올 국가 전란을 대비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40대의 곽재우는 전란이 일어나자 탁월한 병법가로 가장 먼저 ‘충의(忠義)’의 깃발을 들고 붓 대신 칼을 빼어 들고 백성을 지켰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는 모든 것을 초탈한 듯한 도인(道人)의 모습으로 있으면서도 시시비비를 논하며, 임금에게 고함쳤다. 그가 세속의 권세를 추구하는 사대부나 글자만 아는 선비였다면 가능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쏟아냈다.

솔잎을 먹으며 신선의 삶을 동경하는 듯한 모습이나, 창녕군 도천면에 ‘근심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정(忘憂停)’을 지은 참 이유는 세상의 고통을 너무 잘 알고 있던 그가 세상에 소리치려는 역설적 수단이었다. 경계선 위의 삶은 위험하지만 곽재우처럼 세속적 욕망을 버린다면 할 일이 많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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