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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산책 | 시인 김담의 강원도 고성 - 동해북부선 기찻길에 고동이 메아리치는 날을 기다린다 

 

사진 주기중 기자
아스라하게 펼쳐진 금강산 연봉이 바라다보이는 실향민들 아픔 배인 땅… 전쟁이 만들어낸 수복지구, 화진포의 이승만별장·김일성별장은 관광명소

▎고성의 화진포는 어디를 둘러봐도 솔숲이었다. 미끗하고 길차게 자란 금강소나무의 거북 등딱지 같은 솔보굿은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선로(線路)가 사라진 기찻길은 더 이상 기찻길이 아니었다. 남북으로 굉음을 울리며 마을과 내를 가로질러 내달렸을 기찻길은 이제 자전거길이 되기도 하고, 남새를 기르는 텃밭이 되기도 했으며 웃음과 눈물이 스며들었을 역사(驛舍)는 터무니로만 남았다.

강원도 고성(高城)은 수복지구(收復地區)다. 해방 당시, 고성군은 38선 이북이었다. 중국의 논픽션 작가 왕수쩡(王樹增)이 지은 <한국전쟁>은 “1945년 8월 9일 저녁, 미국의 젊은 장교 딘 러스크에 의해 30분 만에 붉은색 연필로 그어진 선이 바로 북위 38도선이었다. 스탈린은 이 선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으며, 일본군을 공격하던 소련 적군은 38선에서 공격을 멈췄다”고 적고 있다.

그 38선 때문에 고성군은 해방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어른들은 이 시절을 ‘인공치하(人共治下)’라고 불렀다. 뒤이어 6·25 전쟁이 벌어졌고,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을 맺을 당시 군(軍)의 현실적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휴전선(休戰線)이다.

155마일(약 250㎞) 휴전선은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금화를 거쳐 동쪽 끝인 고성군 명호리에 이른다. 전쟁 이전 38선과는 다른 모습인데 서해안의 웅진군이 북한으로, 그리고 중동부 지역의 철원·금화·화천·인제·고성군의 일부가 남한으로 넘어오면서 고성군은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됐다. 사람들은 북고성·남고성이라고 예사로이 말하지만, 북고성은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땅이다. 코앞이지만, 멀리 돌아서라도 갈 수 없다.

인공 때 ‘인민학교’에서 배운 ‘장군의 노래’는 노인들 주름 깊은 기억 속에 아직껏 살아 있었지만, 대한민국에서 1945~1953년까지 고성군의 역사는 부재했다. 한국전쟁 뒤 고성군청 소재지였던 고성읍이 여전히 북한 땅에 속하게 되면서 결국 간성읍에 새로운 군청이 들어섰다.

현재의 고성군은 북쪽으로는 북한 고성군, 남쪽으로는 속초시, 서쪽으로는 인제군에 접하고, 동쪽에는 동해시가 있다. 전쟁은 국가 사이에서 벌어졌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가 또 전쟁터였다. 마치 공중전 뒤에도 고지(高地)에 깃발을 꽂는 보병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듯이 남겨진 이념의 흔적은 검질겼다. 그것은 과잉과 결핍을 동시에 불러들였다.

‘국민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매년 6월 25일이면 머리에 붉은 글씨를 쓴 하얀 띠를 두르고 거진 읍내 당포함 전몰장병 충혼탑까지 5리 길을 행진했다. 머리띠에는 ‘반공·방첩’일 때도 있었고, ‘멸공·방첩’일 때도 있었다. 우리들은 목청껏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을 부르짖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내가 갓난아이였던 1967년 1월 19일, “동해어로저지선 근방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 중이던 해군 PCE 56함(당포함/함장 김승배 중령)이 북한 해안포의 집중포격을 받고 격침되었고, 승조원 79명 중에 3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부상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거진읍내에 충혼탑이 세워졌고, 어린 우리들은 ‘6·25사변일’이면 전교생이 단체로 이곳을 찾았다. 어쩌면 충혼탑에서 묵념하는 일보다 그 근처에 있던 급식 빵공장에 더 마음을 빼앗겼는지도 모른다. 하루 한 개씩 학교에서 나눠주었던 노랗고 불그스름했던 둥근 옥수수 빵은 입에 달았다.


▎끊어진 동해북부선의 다릿기둥은 물살에 닳고, 비바람에 쓸린 채 듬성드뭇했다.
끊어진 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

꿈속에서 듣는 고동은 힘차면서도 아스라했다. 향로봉산맥 어디쯤에서 시작해 동해로 흐르는 북천(北川)에는 동해북부선(東海北部線) 기찻길 다릿기둥이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레일이 사라진 다릿기둥은 물살에 닳고, 비바람에 쓸린 채 듬성드뭇했다. 망가지고 헤진 다릿기둥에는 이따금 갈매기들이 날아내리곤 했다.

가을이면 여전히 먼바다로 떠났던 연어들이 돌아와 새끼를 깠지만, 선로(線路)가 사라진 기찻길은 더 이상 기찻길이 아니었다. 남북으로 굉음을 울리며 마을과 내를 가로질러 내달렸을 기찻길은 이제 자전거길이 되기도 하고, 남새를 기르는 텃밭이 되기도 했으며 웃음과 눈물이 스며들었을 역사(驛舍)는 터무니로만 남았다. 풍경에 묻힌 기찻길은 수리수리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동해북부선 기차는 양양역을 출발해 낙산사역, 공현진역, 거진역과 고성역 등을 거쳐 삼일포역과 외금강역을 지나 함경도 안변역에 도착했다. 사람과 수탈한 물자들이 부지런히 그 길을 오갔다. 양양과 고성에는 철과 금은 광산이 있었으며 명파리 금은광산은 지금도 광산골, 광산천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일제는 부산과 포항을 잇던 동해남부선과 연결하여 해산물과 자원을 수송하려 했지만 조선의 광복(光復)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느 한 시절, 이곳 고성 사람들은 서울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서울로 가려면 안변역에서 원산과 용산을 오가는 경원선 기차로 바꿔 탔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날 때까지 기차는 오갔다고 어른들은 증언했다.

뙤약볕에 풀들이 아등그러지던 오래전 어느 해 여름, 나는 흔적으로만 남은 동해북부선 철길을 따라 걸었다. 산에서 흘러온 물길은 들을 지나 바다로 나갔으며 바다 가까운 곳에는 어김없이 철교 다릿기둥들이 풀숲에 묻혀 있었다. 죽왕면 공현진에서 만난 안씨 노인께 기차에 대해 여쭙자, 노인은 서슴서슴 중모리로 이야기를 불러내더니 금강산여행을 떠났던 대목에 이르러서는 어느덧 신명이 나서 자진모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 당시 여든에 가까웠던 안씨 노인은 이야기 속 소년이 되어 금강산으로 소풍을 갔다. 그럴 때는 짓물렀던 눈동자가 한순간 섬광처럼 빛났다 스러졌다. 기차는 하루 네 번 양양군 양양역에서 출발했다. 누구는 조국 독립을 바라며 또 누구는 오로지 살기 위해 원산에서 함경선으로 갈아타고 만주 벌판으로 떠났을 것이다. 식민지에 태어나 인공치하를 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된 안씨 노인은 그 순간만큼은 어떤 경계도, 의심도 없는 천진스런 소년이었다. 어른들 손에 이끌려 열두 살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노인은 한 번도 기차를 본 적이 없었다. 기차는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무엇이 되었다.

지금은 죽왕면 공현진 굴을 철망으로 막아 놓았지만, 안씨 노인을 만났던 그 당시에는 걸어서 굴속을 오갈 수 있었다. 말발굽처럼 생긴 터널 어귀에는 총탄에 패인 듯한 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짧은 거리였는데도 알지 못할 공포로 등골이 서늘했다. 한여름이었는데도 추근추근한 기운 때문에라도 발걸음이 빨라졌다.

현내면 배봉리에 있는 기차 굴에서는 소들을 만났다. 어둑어둑해서 미처 발밑을 살피지 못하고 빈 깡통을 걷어찼다. 난데없는 소리에 놀란 소들이 영각을 켜듯 한꺼번에 울어댔다. 그때 울음소리는 두억시니처럼 나를 덮쳤다. 느긋하게 누워 한가롭게 되새김질을 하던 소떼들의 휴식을 내가 방해했기때문이었다. 배봉리 철교 다릿기둥들 근처에는 ‘지뢰’라고 쓰인 팻말들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2007년 5월 17일, 북한 금강산역을 출발한 열차가 비무장지대를 통과하여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인 제진(저진)역에 들어섰다. 57년 만에 재개된 동해선 철도 시범운행이었으나 아쉽게도 그것을 끝으로 열차는 다시 오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북한을 거쳐 시베리아철도를 타고 유럽을 오가는 일은 여전히 꿈으로 남았다.

남한 제진역∼북한 금강산역 구간 25.5㎞의 철로는 2005년 12월 완공되었다. 현재는 자동차는 다닐 수 없고 사람만 겨우 다닐 수 있는 북천을 가로지르는 ‘북천교’는 남과 북에 의해 만들어진 다리였으며 ‘고성 합축교’라는 이름으로 2004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합축교 다릿기둥과 상판 밑바닥을 다리 밑에서 올려다보면 남과 북이 서로 다르게 만든 다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향로봉산맥을 이루는 건봉산 자락에 자리한 건봉사는 크고 작은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지금은 터무니만 남았다.




▎폭격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불이문은 기둥이 네 개이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썼다.
건봉사(乾鳳寺) 부도밭

시인 고은이 <한용운 평전>에서 ‘금강 밖의 금강’으로 표현한 건봉사는 1989년 1월 안보관광지로 지정돼 민통선에서 해제되었다. 그전에는 ‘부처님 오신 날’만 하루 겨우 건봉사에 갈 수 있었다.

폭격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불이문(不二門)은 기둥이 네 개이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으며 1920년에 지었다. 민통선에서 해제되기 전 건봉사 터에는 ‘군법당’이라고 현판을 단 법당이 능파교, 무지개다리 건너 지금 대웅전 오른쪽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다.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사찰로 부처 치아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고. 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 낙산사 등 9개에 이르는 절을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주춧돌만 남은 폐허가 됐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건봉사가 민통선에서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름방학을 맞아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아니 달려갔다는 말은 온전하지 못하다. 간성 읍내에서 건봉사까지 삼십 리 비포장 길을 걸었다. 이마가 벗겨질 것 같은 볕이 몹시 뜨겁게 내리쬐는 날, 마침내 건봉사 경내 군법당 앞에 이르렀다.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군법당 앞 수돗가로 궁싯거리며 다가갔다. 신작로에서 스친 일행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강소나무들은 관세음보살께서 현신하신 듯 다소곳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물을 한 모금 마셨는지 그러고는 그렇게 서 있었는데, 어느 사이 스님께서 차란차란 내용물이 넘칠 듯한 사발을 내밀었다. 찬 커피였다. 서슴없이 사발을 건네받았다. 둘레에 서 있던 이들이 부처님 앞에 인사도 하지 않고 어쩌고 웅성대는 가운데 스님께서는 이들의 엉얼거림을 단박에 무질러버렸다. “삼십 리 길을 걸어서 온 그것만으로 이미 부처님 앞에 인사드린 것과 같다고, 그것이면 됐다”고.

불이문 옆 아무래도 정령들이 깃들어 살 것 같은 팽나무도 팽나무였지만, 건봉사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것은 금강소나무들이었다. 해질녘에 만나는 미추룸하고 훤칠한 금강소나무들은 관세음보살께서 현신하신 듯 다소곳하면서도 관능적이었다.

거칠 것 없이 사뭇 미끗하고 길차게 자란 나무정수리 끝에는 늘 바람이 놀았다. 오색딱따구리가 날아들기도 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아마득한 우듬지를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이면 가만바람이 불었으며 그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세월의 더께가 가마득하게 실려 오곤 했다.

시인 고은이 쓴 <한용운 평전>의 만해 스님도 계셨지만, 누구보다 덕숭산 수덕사에서 뵈었던 박설산 스님은 여태껏 기억 속에 뚜렷하다. “강원도 거진에서 왔노라”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그 바람 생각 나?” 물으셨다. 일제강점기 열다섯 살에 건봉사에서 출가했고, 학도병으로 끌러가지 않으려고 철길에 다리를 집어넣으셨다는, 발가락을 잃고 다리를 절었던 그 스님.

부도밭 들머리에 수문장처럼 서 있던 금강소나무 한 그루가 그새 말라죽었다. 생명의 물기가 시나브로 졸아들었을 것이다. 보기 좋았던 소나무 두 그루는 이제 한 그루뿐이다. 볕 좋은 봄날이면 부도밭 벚나무 그늘 아래서 놀았다. 줄기가 움파이고, 벌레가 들끓기도 하는 늙은 벚나무는 그리하여도 해마다 꽃을 피웠다. 부도들 언저리로는 꿩의바람꽃과 노랑매미꽃, 벌깨덩굴과 제비꽃, 그리고 요강나물이 어느 해는 차례대로, 또 어느 해는 한꺼번에 왁자글왁자글 꽃을 피우곤 했다.


▎코앞에 고향을 두고서도 돌아가지 못했던 북측 지역 실향민들이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고 살게 되면서 거진항이 북적거렸다.
한쪽에서는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뜯고, 또 한쪽에서는 관광객들이 노루귀꽃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도밭에서 이런 꽃들을 흔하게 볼 수 없게 되었다. 부도밭을 알쭌히 가꾸는 손길이 수풀을 밀어냈기 때문이었다. 밖으로 쫓기듯 내몰린 오래전 그 꽃들이 자꾸 아쉬웠지만, 이제 부도밭에는 새로운 꽃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반공 글짓기와 민간인통제구역

복원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건봉사는 주춧돌이며 부도들이 여기저기 수풀 속에 묻혀 있었다. 아무것도 눈에 걸리는 게 없어서 외려 절집처럼 여겨졌다. 이따금 근처 막사에서 병사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를 빼면 퍽 고즈넉했다. 학교에서는 ‘인민 괴뢰군’에 의해 건봉사가 쑥대밭이 되었다고, 어린 우리들에게 가르쳤다. 어린 우리들은 한 번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구도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이 한때 인민공화국에 속했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처럼, 건봉사가 괴뢰 도당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가르침은 그래서 자연스러웠다. ‘북괴’는 ‘반공(反共) 글짓기’를 하고 ‘반공(反共) 포스터’를 그릴 때면 늘 뿔 달린 도깨비로 등장했다. 봄, 가을이면 수업 시간 중에도 ‘삐라’를 주우러 나가야 했다. 때때로 숙제가 되기도 했다. 북한 괴뢰 도당들이 보낸 것을 찾아야 했지만, 더러 남한에서 보낸 것을 줍기도 했다. 역풍을 맞고 목적지를 잃은 풍선들이 학교 운동장에 날아 내리기도 했다.

향로봉산맥을 이루는 건봉산 자락에 자리한 건봉사는 크고 작은 여러 암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 또한 다 없어지고 지금은 터무니만 남았다. 우리 마을 어른들이 ‘여승터’라고 부르는 보리암 터에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기왓장들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건봉사 인근 산속에는 ‘묘적’, ‘머내안’, ‘한기안’, ‘바람골’ 등으로 불리는 골짜기들이 있고, 대부분 암자였으나 다 수풀에 묻혔다.

건봉산은 민간인통제구역이지만 근처 주민들에게는 군부대에서 ‘영농출입증’을 발급하고 한시적으로 출입을 허가하는데 건봉산 ‘타깃’에 포사격 훈련이 없는 날이어야 하며 입산이 허가되면 나물이나 약초, 버섯 따위를 뜯거나 캘 수 있었다. 옛날 노인들은 건봉산, 그 너머에는 또 다른 크고 작은 산마루와 계곡들이 있으며 어느 곳에는 마을 숲정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산양과 수달들이 살고 있다고 귀띔했다. 마을이었던 흔적들은 발길에 차인다고, 은근슬쩍 일러주었다.

폭설로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고, 오직 눈뿐인 한겨울이 오면 어른들은 헛간 시렁에 매달아 놓았던 설피를 꺼내 신고, 숫돌에 윤 나게 간 창을 둘러메고 멧돼지 사냥을 떠났다. 토끼며 꿩 사냥은 흔했지만, 멧돼지 사냥은 삼삼오오 패를 지어야 했고, 그렇게 큰 산으로 들어간 어른들은 어떤 날은 허탕치고, 또 어떤 날은 백여 근이 넘는 멧돼지를 앞뒤로 걸머메고 산을 나왔다.

내 어릴 때 이야기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패를 지어 멧돼지 사냥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 사냥은 불법이었다. 지금도 폭설로 산과 들이 눈으로 뒤덮이면 노루와 고라니들이 떼를 지어 산기슭 골짜기로 모여들었고, 멧돼지는 솔수펑이 우듬지 아래에서 소나기눈을 피했다.

낡은 목선이 화진포 바닷가, 모래밭에 기우뚱 엎어져 있었다. 글자체로 짐작컨대 북한에서 떠내려온 듯했다. 잠시잠깐 살피다 자리를 떴다. 어느 날은 남측에서 보낸 선전물이 미처 북쪽에 당도하지 못하고 해류를 따라 화진포 바닷가까지 밀려온 날도 있었다. 화진포 호수 둘레, 이를테면 거진읍 화포리, 현내면 죽정리와 초도리 일부는 1972년 군(軍)에 의해 징발된 뒤 20여 년 가까이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는, 군사 작전지역이었다.

화진포 바닷가와 화진포콘도 사이에는 오래도록 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1990년대 초까지 화진포콘도 일대, 즉 김일성별장(화진포의 성),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은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었다. 어느 해, 해변 모래밭을 지나 화진포콘도와 이승만별장을 둘러보고 현내면 죽정리 쪽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나를 막지 않았다. 이승만별장을 지나 고인돌이 있는 솔숲 사이 포장된 길을 걷다 보니 눈앞에 초소(哨所)가 보였고, 동시에 총을 든 초병이 성큼 초소 앞으로 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초소가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1 화진포 호수에 담긴 이승만별장. 이중환은 <택리지>에 화진포를 일러 “달이 맑은 샘에 빠진 것 같다”고 썼다. 2 이기붕별장. 1990년대 초까지 민간인의 출입이통제됐다.



화진포(花津浦)의 김일성별장

고성문화원이 펴낸 <고성지방의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어릴 때 김일성별장이라고 불렀던 ‘화진포의 성’은 일제강점기에 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의 예배당(교회)을 독일 망명 건축가 베버에 의해 화진포에 짓게 된 것이 성의 유래다. 원산 인근에 살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거당하면서 화진포 부근에 별장들을 짓게 되었는데, 이 화진포의 성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인공치하에서는 ‘사회보험 화진포정양소’로 개명하여 휴양소로 쓰였고, 1948년 어느 날에는 김일성의 처 김정숙이 김정일, 김경희 남매를 데리고 외금강 휴양소에 들러 금강산 관광을 마치고 기차 편으로 ‘현내’역을 통해 이곳에 다녀간 사실이 현지 주민들과 당시 정양소에 일했던 사람들에 의해 전해졌다.

맑은 날 이른 아침, 김일성별장에 서서 북녘을 바라다보면 아스라하게 펼쳐진 금강산 연봉들과 함께 금강산 1만 2천 봉의 마지막 봉우리라고 하는 낙타봉과 함께 말무리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선봉 앞에 선녀와 나무꾼 전설로 이름 높은 감호도 보인다. 장쾌하다. 고성군에는 ‘감리교회’만 스무개가 넘는다. 사찰과 교회, 천주교 공소, 서낭당과 같은 유형의 신전만을 따져도 고성은 신들의 땅이다. 무속신앙 또한 뿌리가 깊다.

화진포호수는 석호(潟湖)인데, 동해안 석호는 약 4천~4천500년 전 후빙하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졌다. 죽왕면에 있는 송지호와 더불어 장자못 전설이 전해온다. 장자못 전설에는 마름쇠도 삼킬 만큼 사박한 인심을 가진 시아버지와 갸륵한 뜻을 지닌 며느리가 등장한다. 시주를 청하러 온 스님을 시아버지가 푸대접하여 내쫓고, 이를 말리는 며느리를 가엽게 여긴 스님께서 며느리를 구해주려고 하지만, 그것 또한 여의치 않다.

우레와 벼락 속에 자신이 살던 집이 물바다가 되는 것을 본 며느리는 돌이 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스님이 하신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미 집안이 들머리판이났으니 살아도 산목숨은 아니다. 화진포나 송지호에는 고방에 쌓아두었던 쌀이 변하여서 된 재첩과 맑은 날이면 물속에 잠긴 금붙이들 그림자가 여태도 물빛에 어린다고 전한다.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테지만, 흘려듣기 어렵다.

겨울이면 나는 일부러 호수를 찾곤 했다. 러시아의 북부 툰드라와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떠나온 고니 떼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룩소만 한 고니들이 하얀 섬처럼 둥둥 떼를 지어 호수 위를 떠다니는 모습은 퍽 보기 좋았다. 호수에는 청둥오리는 물론, 흰뺨검둥오리도 있었다. 물론 때를 맞추지 못하면 만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강추위로 호수가 꽁꽁 얼어붙어도 고니 떼는 없었다. 어릴 때는 화진포 호수에 ‘오리 숨구멍’이 있다고 믿었다. 얼음판 아래 살고 있는 오리들이 숨을 쉴 때면 그곳으로 목을 길게 내민다고 여겼다. 암·수컷이 서로 갈마들며 숨을 쉰다고. 그렇게 주먹만 하게 뚫린 구멍 덕분에 오리들은 호수를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얼음 언 호수에서 빙어를 낚던 일도, 한여름 밤 재첩을 잡던 일도 이젠 다 옛이야기가 된 것처럼, 어느 때부턴가 더는 오리 숨구멍을 떠올리지 않았다. 기후 탓인지 아니면 화진포길을 내달리는 자동차 소리 때문인지 점점 고니 떼를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꽝꽝 얼음이 언 화진포 호수는 최민식이 주연한 영화 <파이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화진포를 일러 “간성(杆城)의 화담(花潭)은 달이 맑은 샘에 빠진 것 같다”고 이중환은 <택리지>에 썼다. 갈대가 수선거리고 뱁새(붉은머리오목눈이)가 야단법석을 떠는, 해당화가 아찔한 향기를 내뿜는 화진포, 화담은 늦가을 밤, 달구경을 하기도 그만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솔숲이었다. 거진읍 화포리 쪽 호수 기슭을 배경으로 둘러선 금강소나무들은 남달랐다. 거북 등딱지 같은 솔보굿은 신령스러웠다.

고묵은 나무들 가운데 말라죽은 나무도 생겼고, 지금은 또 가지치기를 해서 예스러운 맛을 잃었지만 그렇더라도 금강소나무는 금강소나무였다. 바닷가 모래밭 가장자리에 서리가 내린 뒤에도 해당화는 피고 졌는데, 지금은 화진포 둘레길에서나 볼 수 있었다. 어른들 사이에서 ‘소갈병’, 즉 당뇨에 좋다는 소문이 떠 돌면서 한동안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꽃들은 이르게 또는 지르되게 피었고 열매를 맺었다.


▎실향민들의 아픔과 함께 한 화진포 바닷가. 화진포 둘레길에는 해당화가 피고 진다.
명태, 그리고 막국수

지금은 고인이 된 바리톤 오현명이 부른 가곡 <명태>를 듣다 보면 낡고 근천맞은 시인의 거처와 함께 처마밑에 줄느런히 매달려 있던 명태가 삼삼하게 떠오른다. 명태가 흔했던 시절에는 개들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때는 농촌인 우리 마을에도 명태 덕장이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 더 이상 덕을 맬 곳이 없게 되자 너른 터와 물을 찾다 보니 그리 되었다.

농사를 짓는 마을 아낙들은 겨울이면 덕장에 나가 명태 배를 땄다. 품삯은 자신이 배를 딴 명태의 창난이었다. 화폐가 아니었다. 명태 열 짝을 따면 열 짝을, 백 짝을 따면 그 백 짝에서 나온 창난을 가져다 손질하여 읍내 장에 내다 팔았다. 명란은 주인이 따로 챙겨 가져올 수 없었지만, 그렇게 농촌 아낙들도 한겨울, 농한기에 가욋벌이를 했다.

부둣가에 명태가 나기 시작하면 촌사람들은 싸리나무를 벴다. 관태(貫太)에 쓰일 싸릿가지였다. ‘관태’는 말린 명태, 즉 황태를 싸릿가지에 스무 마리씩 꿴 것을 말하며 ‘쾌’는 또 명태 스무 마리를 한 묶음으로 하여 세는 단위를 이르고, 명태 스무 마리는 또 한 ‘두름’이라고도 했다. 오징어는 스무 마리를 한 ‘축’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이런 단위들을 거의 쓰지 않고 생선 마리 수로 판매하거나 ‘만 원’을 단위로 생선을 팔았다.

명태가 거의 잡히지 않는 요즘은 ‘지방태’와 ‘원양태’ 구분이 의미가 없어졌지만, 명태가 ‘개락’이던 시절에는 원양태는 아주 하찮게 여겼다. 명태라고 하면 당연히 ‘지방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한겨울 갓 잡은 명태는 맑은 국을 끓였다. 움 속에 묻어 뒀던 무를 꺼내 삐져 넣고, 마늘에 소금으로 간을 했다. 담백하면서도 달았다. 흔하면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명태는 달랐다. 심심하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은 명태 눈알을 젓가락으로

어른들은 막국수를 토면이라고 불렀다. 냉장시설이 발달한 요즘이야 한여름 음식으로 소개되는 막국수이지만, 어릴 때는 주로 한겨울에 막국수를 먹었다. 마을에는 두세 집 건너 ‘분틀’이라고 불리는 국수틀을 가지고 있었다. 미친바람이 문풍지를 흔들어대고, 장독대에서는 아이스케키를 만들려고 올려놓은 주발이 얼어붙기 시작할 즈음, 장판이 눌어붙을 만큼 장작을 땐 아랫목에 이불을 뒤쓰고 앉아 살얼음이 낀 동치미 국물에 만 국수를 후루룩후루룩 물 들이켜듯 먹었다. 다시없는 별미였다.

옥수수 알갱이를 능궈 강낭콩 등과 섞어 만든 ‘옥수수범벅’ 또한 일품이었지만, 옥수수를 능글 만한 절구가 없으므로 지금은 만들지 않았다. 한겨울에 찬 음식을 먹었듯, 한여름에는 또 뜨거운 음식을 먹었다. 집에서 심고 가꾼 밀은 ‘뜨더국’이 되고, 국수가 되었다. 제철음식 없어진 이제야 그야말로 우스갯말이 될 것이겠지만, 제철음식을 먹는 일은 긴말이 필요 없었다.

한국전쟁 뒤 코앞에 고향을 두고서도 돌아가지 못했던 북측 지역 실향민들이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고 살게 되면서 음식과 말, 생활양식은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가자미식해를 만드는 집이 있는가 하면 도치라고 불리는 심퉁이를 제사상이 올리는 집도 있었다. ‘치’자로 끝나는 생선은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도치를 제사상에 올릴 때는 심어 또는 싱어라고 달리 불렀다.

새치를 임연수어라고 부르듯이. 음식도 뒤섞이고, 말도 얽혔으며 자연 또한 얽히고 설켰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돌아갈 수 없어 실향민(失鄕民)이 된 사람들과 스스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삼이웃이 되었다. 어쩌면 고향이란 진정으로 고향을 타향이라고 여길 때만이 비로소 고향일 것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동해북부선 기찻길에 고동이 메아리치는 날을 기다린다.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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