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작가의 방 | 현대미술가 곽남신 - 평면과 입체 넘나드는 조형언어의 마술사 

 

글 정영숙 갤러리세인 대표, 경희대 겸임교수, 사진 지미연 기자
미술가의 ‘감수성’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아티스트…왕성한 실험정신으로 캔버스에서 설치미술까지 종횡무진

▎미술가이면서 교육자인 곽남신이 지금도 후학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은 ‘감수성’이다. “감수성의 변화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곽남신(61)은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는 조형언어의 마술사라 할 만하다. 그가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언어는 회화·드로잉·판화·조각·네온·설치 등 다양하고 형식이나 기법, 재료 등 미술재료의 선택도 개성적이며 폭넓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은 미술계의 호평을 받아 대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작가가 재직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로 그를 만나러 갔다.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그의 작업실 작품들이 때마침 OCI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라 제2의 작업실로 사용하는 학교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연구실 겸 작업실에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놓인 모눈종이들과 스케치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책상 위의 몇몇 드로잉에 눈길이 갔다. 수시로 드로잉을 하면서 본 작업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로 정리하는데, 때로는 작품의 아이디어를 정리한 내용이 A4용지 서너 장의 장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때는 문학을 전공할 생각도 했다는 것을 보면 작가에게 글쓰기는 드로잉처럼 자연스러운 작업의 한 과정인 듯했다. 그는 화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사회과학 서적에서 판타지 소설까지 섭렵하는 소문난 독서광이기도 하다.

작업실의 벽면에는 그가 알루미늄 판으로 작업한 <실루엣 퍼즐>, <소녀> 시리즈, 그리고 <달밤>이 세워져 있었다. 그 작품을 보면서 곽 작가를 설명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그림자 회화’가 생각났다. 곽 작가는 원래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가 미술을 공부했던 1970년대는 한국 모더니즘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던 때로 단색 회화 일색인 캔버스가 대세였다.

하지만 캔버스라는 평면에 형태나 정서를 담고 싶었던 그는 1980년대 초에 그림자 회화라는 것으로 돌파구를 찾게 된다. 그는 캔버스에 나무 그림자를 그렸는데, 평면으로 그리는 것이기에 모더니즘의 강령을 지키면서 그가 생각하는 정서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림자’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표현 영역을 아우르는 매개체였던 셈이다.

그가 만들어낸 그림자 회화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삶의 모습이나 대중매체 속 이미지들을 실루엣만 드러나도록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2007년 작품 <거리에서>와 <덫>은 그림자의 윤곽선만으로 사물을 표현한 것이다. 바다의 그림자만으로 바다를 보듯이 걷는 사람의 호흡만으로 그의 심리적 흔들림을, 아우성을 보고 듣는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자 회화는 문학적 표현과도 통한다. 송기원 시인의 ‘그림자에 대해서’라는 시에는 “(…) 바다의 그림자만으로 바다를 봅니다. 구름·비·해·눈·달… 모든 사물들이 그림자만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림자만으로 주제를 표현한 곽 작가의 작품이 이 시와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소녀>, 캔버스 천 위에 스프레이, 색연필, 171×120㎝, 2007
그림자, 의미가 함축된 상상의 이미지

작가의 그림자 언어에 등장하는 인체 동작이나 다양한 표현은 고된 노력 끝에 이뤄낸 것들이다. 그는 “작품의 주제가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 대한 것이다보니 가족이나 지인, 제자 등 주변사람들을 사진으로 찍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사진을 구하기 위해 인터넷이나 SNS를 활용하고 작품의 주제에 적합한 서적이나 잡지를 살펴보면서 구상하기도 한다.

잡지는 패션잡지에서부터 보도사진, 심지어 포르노 잡지까지 참고하는 경우도 있다. 촬영한 사진들은 컴퓨터에서 정리한 후 확정한 사진들끼리 실루엣을 조합하고 다양하게 변형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조작된 기억의 이미지를 표현한 그의 작품 <추억을 팝니다>가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는 지금까지 22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최근에는 사회성 짙고 강한 메시지를 기발한 유머와 도발적인 조크로 표현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전시 작품에는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냉소하거나 연민하는 시선이 드러나 있다.


▎<홍동지 와상>, 연성 우레탄, 모터, 센서, 길이 380㎝ 가변설치, 2014
가장 최근의 개인전 주제는 ‘껍데기’였다. 껍데기는 한마디로 속 빈 강정, 인간사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작가는 껍데기를 주제로 정한 데 대해 “나를 포함해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는 허허로운 삶 자체를 한마디 유머로 표현하고, 삶의 씁쓸한 진실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회에서 작가는 전통 인형극에 등장하는 홍동지(洪同知)를 작품 주인공으로 내놓아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홍동지는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에서 벌거벗고 남근을 드러내는 장사로 남성의 ‘힘’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전시장 1층에 벌러덩 누워 있는 <홍동지 와상(臥像)>은 팔과 다리 등이 부서져 있다.

우레탄으로 만들어진 홍동지는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지만 끙끙거리다가 다시 널브러지기를 반복한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비뚤어진 욕망과 과시, 집착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은 허세에 찌들고 허상을 좇는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이렇듯 작가의 작품들은 페이소스가 강렬하다.


▎<끄~응!>, 종이에 색연필, 56×76㎝, 2013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과 표현의 변주

작가는 이 전시회에서 필요 이상으로 근육질이 강조된 남자, 섹시함만을 강조한 작품 <섹시걸>, 작품 <소녀> 등을 통해 특정 부위만 발달해 균형감을 상실한 인간을 묘사한 작품들도 내놓았다.

작가는 “인간이 갖는 헛된 욕망에 대한 연민이 내 작품의 주제”라고 설명했다. 작가는 이색적인 드로잉 작품도 선보였는데, <포토제닉>은 보디빌더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역기를 드는 과도한 행동을 보여주는 3m 길이의 대형 드로잉 작품이다.

터질 것 같은 자신의 팔뚝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는 <꿈꾸는 마초>나 이두박근을 키우는 케이블을 너무 힘줘서 당기다가 자신의 목이 떨어진 <끄~응!> 등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린 색연필 작품은 근육을 단련하는 데에 ‘용을 쓰는’ 과도한 남성성을 비틀어서 표현한 것이다. 근육에 집착하는 남자들의 과시욕, 권력의지를 조롱하는 일종의 유머로 읽힌다.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의지를 무겁지 않게 유머 넘치게 보여주는 것은 곽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고 보면 2002년에 발표한 작품 <멀리 누기>도 남성들의 권력욕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 가를 풍자한 것이다. 사내아이들이 어릴 때 겨루었던 보잘것없는 장난이지만 결국 멀리 누기가 얼마나 더 남성적인지를 겨루는 권력의 대결임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작가는 예리한 감성으로 이러한 현상을 작품화했고,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다.

곽남신은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으로 다양한 표현의 변주를 보여주는 작가다. 후학들에게 그는 평소 “어항 속의 물고기보다는 바다의 물고기가 물의 세계를 알듯이 예술가는 다양한 매체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술가는 창의적인 매체와 결합할 때, 울림이 생긴다.

감수성의 변화가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라며 “작가가 예술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면 특별한 감수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의 감수성이 유머와 위트로 관객과 소통한다. 그의 이런 실험적 시도는 그림자 연작이나 판화, 드로잉 등 기존의 2차원에서 네온, 입체설치 작업 등 다양한 조형언어로 표현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깜짝이야!>, 종이에 목탄, 106×75㎝, 2013

▎<추락연습>, 합판에 락커칠, 네온, LED, 가변설치, 2014
감수성이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2014년 신작 <추락연습>은 계단을 네온사인으로 표현한 후 높이뛰기 선수가 도약 후 떨어지는 모습이다. 높이뛰기는 추락을 전제로 해야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깜짝이야!>는 화산 폭발을 피해 달아나는 해골의 모습을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작품이다. 같은 역사,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것처럼 ‘깜짝이야’라고 말하는 우리 모습을 풍자한다.

<게임>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통이 없는 발걸음을 보여주는 그림자 작품이고, <비행연습>은 종이에 색연필로 그린 것인데, 하늘로 떠올라가는 풍선 뭉치에 발이 연결된 춤추는 동작은 형상이 없지만 형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개성적 특징인 ‘그림자 예술’을 보여주면서도 실험적이면서도 세련된 표현 양식으로 우리 삶의 본질을 위트 있게 풍자한다.

작가는 “나의 그림자는 의미가 증발된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미가 함축된 상상적 이미지”라고 말한다. 그림자는 실체의 반영이면서도 그 자체는 질량도 부피도 없는 허상이다. 따라서 작가가 ‘삶의 덧없음’을 비유하기에 적절한 매개체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지치지 않는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은 미술공부를 할 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그는 ‘그림자 화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파리국립장식미술학교에 유학해 당시로서는 뉴미디어 역할을 하던 판화를 공부했다. 그가 파리로 간 것은 미술을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본질, 즉 자신의 감수성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했다. 그는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예술 영역을 수용했다.

당시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 파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흡수하며 백남준이 활동한 전위예술 단체인 플럭서스(Fluxus) 멤버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작업태도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테크닉적으로는 국내에 알려지지 않는 판화의 새로운 기법에 흥미를 느끼며 새로운 기법을 습득하는 데 몰두했다. 귀국 후에는 모교인 홍익대에 판화과가 개설되자 실기와 이론을 가르쳤다.

그는 이후 판화에 대한 애정과 후배 양성을 위해 판화기법을 다룬 세 권의 책을 집필했고, 마카오 국제판화 트리엔날 대상, 폴란드 크라코프 판화 트리엔날 명예상을 수상하고,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운영위원 등 판화와 관련된 국제적인 전시와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내 판화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미술가이면서 교육자인 그는 지금도 후학들에게 늘 ‘감수성’을 강조한다. “감수성의 변화가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다”고 그는 주장한다. “미술가에겐 세상을 포착하려는 감수성이 중요하다. 트렌드화되는 감수성을 버리고 미술가 본연의 심성이 살아있는 감수성을 끄집어내어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감수성을 고귀하게 살려야 한다. 그러면 삶의 공간이 변화한다. 르 꼬르뷔지에(스위스의 건축가)의 건축처럼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면 감수성이 바뀐다. 이것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이다.”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과 감수성의 예리한 촉수를 지니고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 그가 만들어낼 다음 작품들이 기대된다.

201407호 (2014.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