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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리뷰 - 영화적 상투어, 서사의 클리셰 

영화 <제보자>에서 찾은 상투적 흥행 코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현실에는 없는 영웅 만들기 

강유정 영화평론가

▎2012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클리셰(cliche)’는 원래 프랑스어로 활자 연판을 가리킨다. 인쇄술이 본격화될 즈음, 빈번하게 반복해서 사용되는 표현이 있자 노력과 시간을 줄이 자는 의미에서 미리 연판을 짜놓은 것이다. 미리 준비해놓을 정도로 뻔한 것, 그것은 독자에게도 뻔한 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글을 쓰는 사람도 기계적으로, 인쇄하는 사람도 반복적으로, 읽는 사람도 관습적으로 넘기는 단어들, 그런 게 바로 클리셰인 셈이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 / 사진제공·NEW
이야기와 플롯이 뼈대를 이루는 산업인 영화나 소설에도 이 클리셰라는 용어는 통한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말하는 장르란 이 클리셰에서 출발한다고도 할 수 있다. 가령, 이런 것이다. 로맨스 영화 하면, 두 남녀가 만나 약간의 장애물을 이겨내고 마침내 사랑의 승리를 얻어내는 장르. 갱스터 장르 하면, 갱스터가 되어 세상의 꼭대기에 서고픈 남자가 등장해 온갖 비리와 협잡이 얽힌 세계를 파헤쳐가는 이야기.

이처럼 장르는 약간은 뻔한 이야기의 공정 위에서 이뤄지는 재조합과 닮아 있다. 하지만 영화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작품들은 이 클리셰를 비꼬고, 전복하면서 탄생한다. 이렇게 새롭게 코드를 바꾸면 역사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채 유행하는 코드를 따라가기만 하면, 그 작품은 클리셰의 일종으로 흡수되고 만다.

서사, 플롯에 있어서의 클리셰는 이런 것들이다. 가령, 영웅의 여자 친구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목숨을 빼앗기기 바로 그 직전 영웅이 나타난다든가, 아침 드라마에서 복수심에 불타던 한 여성이 결과적으로 복수하고자 했던 대상의 혈육임을 알게 되는 장면 말이다.

익숙함의 갈증


▎올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명량]. 최근 흥행작들은 현실에 없는 영웅을 그려내고 있다.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엄밀히 말하자면, 클리셰가 출발부터 진부한 표현은 아니었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여자가 뛰어가고 남자가 뒤따라오지만 붙잡지 못한다거나, 키스를 할 때쯤 스르르 넘어져 화면 밖으로 나가는 장면은 어떤 점에서 영화적 허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말 개연성 있거나 사실적이라서 받아들인다기보다, 으레 장르적으로 반복되는 호흡 정도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클리셰라는 게 꼭 오래된 장르 영화 안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최근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영화들 가운데서도 흥행의 클리셰들이 쉽게 발견된다. 2014년 10월 개봉하게 된 영화 <제보자>를 보며, 지난 몇 년 전부터 최근까지 흥행했던 영화 <도가니> <변호인> <광해> <명량> 등의 흔적이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흥행 영화의 클리셰, 과연 우리 영화의 관객들은 무엇에 처음 흔들렸고 또 무엇을 확인하고자 반복적인 서사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앞서 열거한 영화의 공통점을 살펴보자면 바로 실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다. 실화라는 개념을 좁게 보자면, 신문의 사회면이나 정치면에 실렸던 기사일 테고, 넓게 보자면 역사 소재 이야기가 포함될 것이다. 그러니까, 최근 한국 흥행 영화의 첫째 ‘관습’이 바로 실화를 소재로 한다는 점이다.

둘째 공통점을 들자면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없는 영웅들을 영화 속에서 그려냈다는 점이다. <도가니>에는 장애 아동을 성폭행하는 사학재단과 그 교사들에게 저항하는 작은 영웅이 등장한다. <광해>는 실제 왕보다 더 군주다웠던 광대가 영웅으로 등장하고, <변호인>에는 속물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신하는 영웅이 등장한다. 그리고 <명량>에는 말 그대로 민족의 영웅인 성웅 이순신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오히려 현재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현재 시점의 사회·정치적 불만족을 드러내는 그림자 영웅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영웅론이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감동을 주는 이유도 이와 멀지 않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영웅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또렷해진다.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는 국민의 권리에 대해 헌법을 외친다. 그것은 정의의 주장과 다름없다. 영화 <명량> 속의 이순신이 “무릇 무관의 충(忠)은 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향한다”고 한 말에 담긴 뜻도 그렇다. 그것은 바로 현재의 관객이 믿고 싶은 정의이며, 정의를 믿고 지켜내는 자가 바로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영화 [제보자]에서 윤민철(박해일)이 제보자 심민호를 인터뷰하는 장면. / 사진제공·메가박스㈜플러스엠
실화, 과거 그리고 정의


▎생활 속 소영웅을 그려낸 미국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 /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실화 소재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영웅들은 매우 한국적이다. 이 차이점은 할리우드가 주로 착안하는 실화 소재가 말 그대로 리틀 빅 히어로, 즉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거대 담론 속 인물이라기보다 소소한 개인의 삶에 빛을 비춰준 생활 속 소영웅을 그려내곤 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변호사 보조로 일하면서 거대 기업의 환경 파괴에 맞섰던 <에린 브로코비치>나 한 할렘가 흑인 소년의 삶에 조금 다른 길을 내주었던 백인 중년을 그린 <블라인드 사이드>같은 작품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실화란 아무래도 일간지 사회면이나 정치면 기사에 어울리는 굵직한 사건이라는 이미지가 크다. 한국 스릴러 영화의 큰 발자국을 남긴 <살인의 추억>이나 <추격자>만 해도 그렇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상처가 된 사건들, 그런 사건들이 주로 영화화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임순례 감독의 영화 <제보자> 역시 이런 맥락에 잘 부합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제보자> 역시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실화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리고 한국 사회의 치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처라는 점에서 이전 영화들과 비슷하기도 하다.

<제보자>가 환기하는 실제 사건은 황우석 사건이다. 황우석의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우리 국민 모두의 치부이기도 하다. <제보자>에는 여러 번 등장하는 두 개의 대사가 있다. 하나는 “진실과 국익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라는 화두이고, 다른 하나는 “대체 줄기세포 11개 중 단 하나도 없다는 거야?”라는 아연실색의 질문이다.


▎1981년작 [슈퍼맨2]. 슈퍼히어로물에서는 여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어김없이 영웅이 등장하는 ‘클리셰’가 나온다. / 사진·중앙포토
<제보자>가 관객에게 유도하는 감정은 바로 정의감과 공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적정한 뇌물을 통해 입막음을 하고, 그럴듯한 이미지로 포장해 업적을 과장하는 것, 이런 행동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영화 속 이장환 박사는 누가 봐도 거짓말쟁이이며 사기꾼이다. 관객들은 9년 전의 사실을 복기하면서 한편으로 그 거짓 놀음에 스스로 일조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공분과 자조 사이에서 결국 진실과 정의라는 윤리적 대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황우석 사태는 검증되지 않은 보도에 열을 올렸던 언론과 과학 발전이라는 미명에 빠져 무조건 지원만 해주던 정부와 새로운 것에 매혹된 대중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이 정의라는 경구가 최근 몇 년간 한국의 흥행 영화들에서 상투어가 되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영화 내적으로도 영화 속에서 진실과 정의라는 요소가 언론 영웅담으로 희석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외압에 저항해서 결국 진실을 전파하는 영화 속 피디의 이미지는, 비록 대부분 사실이었다 해도 지나치게 언론인 영웅담의 장르적 서사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진실을 은폐했던 거대한 가림막이 가볍게 걷힌 채, 언론의 자유와 그것을 저해하는 절대적 악과의 싸움으로 평면화되고 만 것이다.

정의와 공분… 상투어 속 진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실화 소재 영화들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없는 과거 속 영웅과 그 현장 속의 정의를 소환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 그것은 영화적 클리셰로서 판타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약간의 차별성이 있다면 전통적 영화에서 판타지가 현재에 없지만 상상으로나마 즐기고 싶은 것의 일종의 상상 효과였다는 것이다. 가령, 신데렐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부유하고, 유능한 남자에게 발견되고 싶은 욕망이라거나 1대 17의 육체적 싸움에서 이겨내는 마초적 판타지처럼 말이다. 현실화되지 않을 확률이 높기에 허구를 통해 즐기는 것, 상투적 클리셰 안에는 그런 판타지의 기능이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영화들과 그 관객들은 판타지를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서 찾고 있다. 이쯤 되면 판타지라는 말보다는 비전이라는 말로 바꾸는 게 옳을 듯하다. 미래에 대한 약간은 순진한 기대감과 낭만적 설렘이 판타지라면 비전은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이자 예측이니 말이다. 말하자면, 2014년 한국의 관객들은 지금 이곳과 미래의 여기에서 어떤 비전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엔 있었지만 현실에 없는 것, 이 노스탤지어는 미래에 대한 간절한 바람의 반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적어도 과거에 있었음을 통해 위로받고 싶고, 가느다란 지푸라기 같은 비전이라도 얻고 싶은 것, 판타지를 소비할 수 없고 현실을 통해 과거를 소환해야 하는 우리는 어쩌면 참으로 팍팍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진도 앞바다에 없는 정의는 <명량>에는 있고, 지금 지켜지지 않는 국민의 헌법적 지위는 영화 <변호인>의 외침 속에 있으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사명감 있는 언론인은 영화 <제보자>에 있다. 하지만, 영화적 허구를 통해 비전을 수혈받는 데에도 한계는 있다. 결국, 역사는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발생하는 현재의 몫이기 때문이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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