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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 부패 막는 한국형 향신료 제피·산초·방아 

냉장고 없던 시절에는 더운 날씨에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데 빠져선 안 될 필수 초목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예로부터 모기를 쫓는 데 쓰이던 초피.
초피나무(Zanthoxylumpiperitum)는 제피나무·조피나무·천초(川椒)라 불리는데, 한국·일본·중국 등 동아시아에만 자생하는 귤속, 금귤 속, 탱자나무 속 식물들이 속하는 향초(香草)인 운향과(芸香科) 식물이다. 초피나무와 아주 닮은 같은 속(屬, genus)에 산초나무(Zanthoxylum schinifolium)가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은행나무·뽕나무·삼 따위처럼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있는 암수딴그루(자웅 이주, 雌雄異珠)라는 것이다.


▎초피는 한약재로도 사용된다.
초피나무는 주로 산중턱이나 산골짜기에서 나지만 산기슭은 물론이고 밭 주변에서도 흔하게 자란다. 키는 3~5m로 헌칠하게 자라고, 턱잎이 변한 1㎝ 정도 작은 가시가 잎자루 밑에 1쌍씩 마주 달린다. 또 잎은 어긋나기 하고, 아카시아처럼 잎줄기 좌우에 여러 쌍의 진초록 잔잎이 짝을 이루어 달리고, 끝자락에 잎 하나 붙는 깃털 모양의 잎(홀수깃꼴겹잎)이다. 잔잎(소엽, 小葉)은 달걀 모양으로 길쯤한 잎줄기에 9~11장씩 어긋나게 달린다. 잎의 앞면 가운데에 노랗고 반투명한 기름방울(유적, 油滴)이 나오는 검은 기름 점(유점, 油點)이 있다.

암꽃과 수꽃이 딴 나무에 피는 단성화로, 황록색인 꽃은 5∼6월에 핀다. 암꽃의 암술은 1개로 끝이 3갈래로 길게 갈라지고, 수꽃에는 5개의 수술이 있다. 열매는 암나무에 한가득 송아리로 달리고, 똥그랗고 녹색이었던 열매가 새빨갛게 익으며, 열매껍질이 두 갈래로 갈라져 검게 윤기 나는 둥근 씨앗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제피나무의 어린잎은 데쳐서 묻혀 먹거나 생채로 고추장에 박아 장아찌를 담그며, 열매껍질은 향신료(香辛料)로 사용한다. 열매껍질을 ‘제피’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잘 말려 절구통에 찧어서 병에 담아두고 조금씩 쓰는데 가루 상태로 오래 저장하면 점차 매운맛을 잃게 되므로 열매로 간수했다가 사용 직전에 갈아 쓰는 것이 더 좋다(후추도 매한가지이다).

대충대충 거칠게 간 가루를 추어탕에 넣어 비린내를 잡아 주고, 매운탕·김치·된장찌개에도 넣어 먹는데, 매콤한 맛과 코를 톡 쏘는 매운 향인 산쇼올(sanshool)은 혀끝이 아린 듯 얼얼한 느낌을 준다. 제피에는 기름 성분이 2~6% 들었는 데, 그중 산쇼올이 8% 정도 들었고, 강하고 자극성이 있어 미각과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실은 제피가루를 우리보다 일본 사람들이 더 즐겨 먹으니, 상품화가 되면서 육류와 생선요리에 쓴다고 한다.

침입자를 쫓는 타감 작용

그런데 초피나무에 짙은 향기가 있어서 벌레를 타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호랑나비(Papilioxuthus) 애벌레는 초피나무나 산초나무 말고도 귤·금귤· 탱자나무들의 잎도 갉아먹는다.

다음은 초피나무의 사촌격인 산초나무 이야기다. 산초는 수고(樹高)가 겉잡아 3m 정도에 달하며, 수피(樹皮)는 회갈색으로 줄기에는 어긋나게 돋아난 바늘가시가 촘촘히 나 있다. 잎은 어긋나게 달리고, 제피나무처럼 기수 우상복엽이며, 잔 잎은 많으면 23개이고, 잎자루에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잔 가시가 잔뜩 달린다.

이 또한 암수딴그루로 수꽃엔 5개의 수술이 있고, 암꽃은 암술머리가 세 갈래로 갈라진 1개의 암술이 있다. 열매는 녹갈색으로 여물며, 열매껍질이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까만 종자가 비어져 나온다. 종자(분디)로는 기름을 짜며,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하니 이는 지질학사(地質學史)가 말하듯 옛날 옛날엔 일본도 대륙에 함께 붙어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나무의 생김생김이 산초나무와 초피나무는 언뜻 보아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닮았다. 크게 보아 제피나무는 열매가 익으면 루비(ruby) 빛깔같이 빨갛게 변하고, 산초는 익은 열매껍질이 연한 녹갈색을 띤다. 또 제피는 열매껍질을 주로 먹지만 산초는 반들반들하고 새까만 씨앗을 발라내, 기관지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산초기름을 짠다. 또한 우리 나라 중부 이남에는 초피나무와 산초나무가 함께 자생(自生) 하지만 중부 이북에는 추위에 강한 산초나무만 나고, 씨앗만 놓고는 둘을 눈가늠하기 어렵다.

딴 이야기지만, 역시나 한국·일본·타이완·중국에 자생하는 흔히 ‘방아’라 부르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배향초(排草香, Agastache rugosa)가 있다. 네모진 줄기는 높이가 40~100㎝이고, 잎은 마주나기하고 갸름한 심장형으로 끝 자락이 뾰족하다. 어린잎은 식용하거나 약용하고, 산야의 습한 곳에 야생한다.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하는데, 중국에서는 곽향(藿香)이라 하여 포기 전체를 소화·건위·진통·구토·복통 등의 약재로 쓴다고 한다. 그냥 두면 아무 냄새가 없으나 놈들을 슬쩍 건드리거나 툭 처서 자극을 주면 싸한 냄새가 진동하니 침입자를 쫓기 위한 일종의 타감작용(他感作用, allelopathy)이다. 제라늄이나 다른 허브(herb)식물이 다 그렇다.

제피와 방아를 남쪽에서 즐기는 이유

필자의 고향 경남 산청(山淸)에서는 방아를 터줏대감으로 모셔 집집이 담부랑(담장) 자락에 지천으로 늘비하게 자리 잡았다. 겉절이나 열무김치·된장·장떡에다 순대에까지 잎사귀 한 움큼씩 넣어 먹는 풀이다. 가을이 되면 꿀물이 한 가득 든 보라색 꽃이 여기저기에 봉긋 솟아올라 일렁거리고, 벌새(humming bird) 닮은 ‘황나꼬리박각시나방(bee hawk moth)’ 녀석들이 들끓으니 장관이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인이 박힌 초본인데, 오호 통재라! 경북 청송(靑松)에서 자란 집사람이 방아를 된통 넌덜머리 내니, 시골에서 모종을 파다가 춘천 텃밭에 한가득 심어놨으나 언감생심, 조매(여간해서) 맛도 못 본다. 정녕 어릴 때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은 커서도 숫제 서툴고 꺼린다. 그래서 이유식 시기부터 골고루 먹여 어느 음식이나 다 잘 먹는 식성을 길러 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몫이다. 또한 구라가 아니다. 에누리 없이 말하지만 단연코 남자들은 아내가 먹고 싶어서 요리 한 음식을 단지 얻어먹을 따름이로다. 하나 너무나 당연한지라 핏대 세우고 목청 높여 책망하거나 야마리 없다고 욕할 일도 못 된다.

그러면 제피나 방아 같은 것을 왜 남쪽사람들이 즐겨 먹는가? 제피·마늘·고추·후추 등의 모든 향신료에는 부패를 방지하는 성분이 들었다.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냉장고가 없던 시절)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으로 소금·간장에 되우 짜게 절이거나, 부패를 예방하는 살균제 역할을 하는 향신료를 한 줌씩 듬뿍 넣었다. 하여 우리나라도 남도지방의 음식이 되게 짠 편이고, 동남아 등지의 음식에 우리 입에 맞지 않는 고수풀 같은 것을 넣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한 고장이나 어떤 나라의 음식(식문화)에는 으레 그곳의 기후 환경이 숨어있는 것. 좀 부풀려 하는 말이지만 우리 시골에서는 다들 제피 가루·방아풀 없이는 하루도 못 산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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