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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일 셰프의 낭만적 음식기행 - 잔치국수, 전통 음식일까 

원조 밀가루가 음식문화 혁명 이끌고 국수 시장의 성장에 기여… 근대식 국수 제조공장도 일제시대에야 도입됐다 

박찬일 이태원 ‘인스턴트 펑크’의 주방장

▎밀을 재배하지 않았던 터라 한반도에서 국수는 한동안 부자들의 간식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수는 서민들의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 사진·중앙포토
몇 해 전 KBS의 이욱정 프로듀서(PD)가 제작한 <누들로드>라는 다큐멘터리가 화제를 불러온 적이 있다. 음식을 다룬 프로그램으로는 이색적일 만큼 스케일이 컸고, 주제도 특이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란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관심사가 될 수 있지만, ‘일개’ 국수를 다루면서 그것도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가는 블록버스터급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관심을 끌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여세를 몰아 올해 <요리인류>라는 <누들로드>의 확장판이랄까, 완성판이랄까 하여튼 더 거대한 인류의 요리 역사를 파헤치는 다큐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 <누들로드>를 보면서 인간사의 여러 역사를 국수를 매개로 해서 풀어보면 어떨까 하는 흥미로운 관심을 갖게 됐다. 필자는 ‘국수로 말미암은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수를 좋아하고, 국수에 대해 고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국수 편력은 제법 화려해서 이탈리아 국수를 다룬 책을 쓰기도 했고(<보통날의 파스타>), 국수를 주제로 10차례가 넘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국수 요리 강의는 제외하고 말이다). 어쩌면 필자에게 국수를 다루게 하는 팔자가 있다고 느낄 정도다. 여담인데, 원래 잡지사 기자를 하던 1998년에 타로점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온 미래 점괘 카드가 놀랍게도 요리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에이, 내가 설마” 하고 지나쳤다.

선주후면… 국수는 조선시대 양반의 해장음식


▎1 제분 전의 통밀. 밀은 국내 음식문화의 혁명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제분 전의 통메밀. 윤기가 흐를수록 질이 좋다. / 사진·중앙포토
필자는 1965년생으로, 한반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이 ‘국수로 말미암은 자’가 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이 한반도 5천 년 역사에서 가장 국수가 싸고 흔한 연대이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국수가 정말 귀한 존재였다. 가까운 조선의 역사를 보면, 국수는 결코 아무나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임금이나 양반, 권력자와 부자의 점심상에 주로 국수가 올랐다. 일반인들은 대개 하루 두 끼만 먹었기 때문에 국수 먹을 기회 자체가 드물었다.

중화(中火), 우리말로 ‘낮것’이라고 부르는 점심은 있는 자들의 몫이었다. 조선 후기 민화의 국수 먹는 장면에 기생집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양반들이 술 마시고 별식으로 국수가 해장용으로 선택됐고(先酒後麵·선주후면의 역사는 아마도 여기서 시작 된 것 같다), 또 기생집에 갈 수 있는 계급이란 당연히 능력 있는 양반이었다. 일반인은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을 많이 먹고 점심은 대개 거르거나 간단히 간식으로 때우고 저녁을 먹었다. 쌀이 부족한 데다 밀가루도 드물어서 점심에 면을 먹는 풍습은 오직 양반의 몫이었다.

한반도는 중국 대륙에 비해 밀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가능하면 쌀을 생산해야 했으므로 우선순위에서도 밀렸다. 밀 재배시기와 쌀이 대체로 겹치기 때문에 땅에는 물을 대서 논을 만드는 것이 유리했다. 쌀은 밀보다 영양가치가 더 높고 맛있기 때문이다. 쌀은 곧 생명이었다. 서양에서는 빵이 그것에 해당한다. 밀가루를 거론하면서 생명이나 삶, 인간을 연결해본다. 이를 테면, 예수가 빵을 자신의 육체에 비유한 것이 그 예다.

짠 반찬에 다량의 잡곡식을 했던 우리 선조들에게는 쌀이 제일 귀했다. 열매를 맺을 때는 둘 다 알갱이지만, 먹을 때는 다르다. 밀은 도정해 빻는 분곡(粉穀)이고 쌀은 겨만 벗기면 먹을 수 있는 입곡(粒穀)이어서 요리법도 달랐다. 아궁이를 사용하는 한국식 조리환경은 분곡 요리가 어려웠다. 분곡은 빵이 대세인데, 아궁이는 빵을 굽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빵은 모양을 내어 부풀린 후 오븐에서 간접 복사열로 익히는 게 어울린다. 이런 오븐이 한국식 취사, 난방에는 없었다.(중국식 호떡은 벽돌 오븐을 써서 굽는데, 조선인들이 이것을 보고 아주 흥미로워했다.)

우리는 쌀에 집착했다. 밀가루는 부자들이 간혹 먹는 간식이었다. 조선 후기에 화북지방에서 수입하는 밀가루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역시 ‘수입품’은 고급 음식에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가루 곡식으로 메밀이 있었다. 메밀은 여름에 심어서 가을에 먹을 수 있어, 쌀과 재배시기가 겹치기 않아 농민들이 선호했다. 벼농사를 망칠 경우 긴급히 대체작물로 뿌려도 됐고, 그냥 밭에 뿌려서 길러먹기도 좋았다. 메밀은 건조하고 서늘한 기후를 좋아한다. 평안도와 강원도, 남한에서도 산간지방과 제주도(제주도는 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쌀이 재배되지 않는 환경이기 때문에 메밀이 선택됐다. 현무암 토양은 물 빠짐이 좋아 벼를 길러낼 재간이 없었다)에서 많이 길렀던 것이 그 증거다. 평안도 냉면과 강원도 막국수는 이런 자연 환경과 경제적 이유가 결합돼 등장한 민족적이고 지리적인 국수 문화다. 메밀은 분곡인데 간혹 쌀처럼 빻지 않고 메밀쌀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빻아서 국수나 수제비를 내렸다.

메밀은 밀가루에 비해 글루텐 함량이 적고 쫄깃한 맛이 적어서 그다지 고급 면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 시대에는 밀가루가 흔해서 오히려 메밀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냉면집에서 예외적으로 메밀로만 만든 순면(純麵)을 시켜 먹는 건 고급 미식가의 상징이 됐다] 실제 분곡의 가치로는 밀가루에 대적하지 못한다. 밀가루는 곱기도 하거니와 치대면 쫄깃한 식감이 일품이고 풍미도 메밀보다 나았다. 뚝뚝 끊어지는 메밀은 결코 지금처럼 높은 메밀 함량을 의미하는 고급 식도락이 절대 아니었다. 시대에 따라 기호와 인기가 달라지는 것이 인간 문화인데, 밀가루와 메밀의 역사도 그리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단백질 함량이 높고 열량이 많은 것은 당연히 고급품이었는데, 당대에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혈압을 낮춰주고 열량이 낮다는 이유로 메밀이 선택되기도 한다. ‘고열량=고급품’이었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인식이 지배하는 것이다.

메밀보다 고급 식도락이었던 밀가루


▎떡볶이는 참기름·쇠고기와 함께 볶아먹는 고급 간식거리였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필자의 나이는 밀가루 시대에 절묘하게 걸쳐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밀가루를 싸게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65년도는 이미 정부에서 혼분식 운동을 시작해서 쌀 절약에 전국민적으로 나서던 시절이었다. 1963년 7월 10일자 <경향신문>에는 ‘쌀밥 점심 판금 첫날 울상의 음식점’이라는 제목으로 사회면 톱기사를 쓰고 있다. “밀가루 특배(特配)라도 되지 않으면 식당이 다 망할 판”이라는 업주의 하소연이 나온다. 그때 이미 밀가루는 미국 원맥(原麥)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특배라는 형태를 거론하는 것을 보면 정부가 배급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사를 더 보면, 1965년에 미 공법 480호 가 거론된다. 이는 미국 잉여농산물의 국제 원조 등에 관한 것인데, 한국도 이 법률에 의해 다량의 식량과 면화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식탁은 쌀에서 밀가루로, 옷은 삼베에서 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밀가루 원조는 국내 음식문화를 혁명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일례로 떡볶이는 그 원조를 찾기 어렵다. 본디 떡볶이는 넉넉한 집안에서 설에 먹다 남은 굳은 떡을 간장이나 참기름, 쇠고기와 함께 볶아먹는 고급 간식이었다(넉넉하지 않고서야 가래떡이 굳도록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원래 궁중음식이었던 것이 반가에 퍼졌다는 말도 있다. 기름에 볶았기 때문에 ‘볶이’였다. 그런데 밀가루가 싸게 공급되던 1960년대에 쌀 대신 밀가루로 가래떡 모양을 만들고, 이 조차도 빨리 익히기 위해 떡보다 가늘게 뽑아서 당시 막 시장에 생기던 고추장 양념에 ‘조려서’ 팔기 시작한 게 바로 지금 매운 떡볶이의 원조쯤 된다. 기름은 비싸서―1970년대 미국산 콩으로 만든 식용유(해표식용유)가 대량 공급되기 전까지는 기름이 아주 귀한 것이었다―볶을 수 없었다. 기름 한 방울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본디 가래떡볶이의 이름을 차용해 그렇게 부르면서 유통되고 판매됐다. 정확하게는 ‘매운 밀가루 떡조림’이라고 불러야 했다.

이렇게 밀가루 공급은 필자가 태어나던 무렵 국수 시장이 크게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안 그래도 국수를 좋아하는 민족인데, 쉽게 먹을 수 없는 밀가루가 시장에 싸게 풀리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국수 천국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즈음, 획기적인 국수 혁명이 발생한다. 바로 인스턴트 라면의 등장이다. 중국계 일본인 모모 후쿠 씨에 의해 니신식품에서 개발해 1950년대 곤궁한 전후 일본의 재건에 크게 기여 한 인스턴트 라면은 1960년에는 한국에 들어와 더 중요한 역사를 쓰게 된다. 우리나라는 지금 일본을 제치고 세계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최초의 삼양라면. / 사진·중 앙포 토
어려서 10원짜리 노란 봉지에 든 삼양라면 닭고기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롯데라면도 나오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농심이란 브랜드가 후라이보이 곽규석과 인기절정의 코미디언 구봉서를 내세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를 시작했다. 삼양라면의 아성에 이때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은 이 광고를 따라 하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를 외쳤고, 도시락 김치병(대개 멕스웰하우스 커피병이었다)을 싸던 라면봉지가 주황색의 삼양라면 일변도에서 형제의 노적가리 우정을 다룬 그림이 들어 있는 농심라면 봉지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라면은 우리 세대의 남자아이가 처음 요리를 배우는 ‘일품’ 음식이기도 했다. 아이들이라면을 혼자 끓여먹을 수 있게 되면서, 여성 주부의 노동력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보험회사에 여성 모집인이 크게 늘어난 것도 라면 덕이 아니었을까.

다 먹고 난 라면봉지로는 도시락 김치병을 싸는 건 물론 재주 있게 엮어서 살림도 만들었다. 냄비받침도 되고, 방석도 됐다. 라면은 당시 시대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구로공단의 신화가 나온 것은 인스턴트 라면의 등장이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남녀 노동자들이 혼자 살면서 식사를 때우다시피 하면서 일을 나갈 수 있었으니까. 이런 라면은 그 뒤로 떡라면, 계란라면에다 인스턴트 냉동만두의 등장으로 만두라면 등으로까지 분화했다. 다양성은 곧 그 문화가 사회구성체에 잘 스며들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다.

국수 문화를 바꾼 ‘인스턴트 라면’


▎잔치국수 / 사진 : 중앙포토
국수와 수제비 같은 요리도 크게 번성했다. 국수는 옛 조리서를 보면, 양반가의 음식답게 아주 복잡한 레시피가 나온다. 녹두와 계란 같은 고급 재료를 듬뿍 써서 만드는 화려한 국수가 많다. 그런데 일제시대의 유산은 미국의 잉여농산물 공여와 맞물리면서 우리 식생활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미국 잉여농산물도 사실, 일제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는 자동으로 미국의 점령지역이 됐다. 이런 역사적 연결고리는 결국 우리가 미국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고, 밀가루 원조를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밀가루의 원활한 공급은 전통적인 한국식 요리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식생활이 이미 일본의 영향을 다수 받게 됐고, 요리법도 자연스레 그 대기권 아래에 놓이게 된다. 그로 인해 전통 국수 요리법이라고 할 안동 건진국수는 지금 극히 ‘마이너’한 국수로 존재할 뿐이다.

일제는 유럽에서 받아들인 근대식 국수 제조공장을 조선반도에 도입한다. 나폴리 등에서 파스타를 만들 때 쓰이던 장비와 제조시설을 도입, 옥외 건조하는 국수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압출한 후 잘라 건조하는 유럽식 국수는 우리가 기억하는 유년의 국수공장의 모델이 됐다. 나무로 만든 옥외건조대에 국수를 얹어서 말린 후 절단해 파는 국수 말이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이런 가내수공업적 국수공장이 대개 문을 닫고 대형식품회사가 공급을 거의 도맡아 하고 있다. 포항 구룡포에는 아직도 전통방식―즉 일제시대 이후에 개발된 유럽형 모델―으로 국수를 만드는 집이 있다. 제일국수공장이 그것인데, 모터를 써서 국수를 밀고 건조는 완전 수제작으로 옥외에서 말리는 방식이다. 기회가 되면 이 집 국수를 한번 받아다가 요리해보시기 바란다. 국숫발이 아주 탱탱하고 맛있다. 이 집은 원래 일곱 개가 있던(국수를 워낙 많이 먹었던 시절에) 구룡포 국수공장 가운데 막내 격이다. 1971년에 창업했다. 그런데 시절이 바뀌면서 모두 폐업되고 오직 한 곳만 남았는데, 그것이 오늘날 명물이 됐다.


▎경북 포항 구룡포 제일국수공장은 아직까지 전통 방식으로 국수를 만든다. 이 공장의 뒷마당에 있는 옥외건조대에서 국수가 말려지고 있다. / 사진 : 중앙포토
이 집은 옛날식대로 넓적한 우동국수와 가는 국수를 함께 만든다. 우동국수는 대개 신김치나 매운 양념에 호박이나 감자 등을 넣고 막 끓여먹는 ‘제물국수용’ 음식이었다. 한겨울에 필자의 어머니도 자주 끓였다. 김치로 요리하기 좋은 국수였던 것이다. 근런데 필자는 이 국수를 아주 싫어했다. 국수를 처음부터 넣고 끓이는 제물국수라 국물이 탁하고 면발이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는 국수는 호로록 빠는 재미가 있고, 입에서 생동하듯 춤추는 반면 우동국수는 묵직하고 풀 냄새가 났다. 가는 국수(소면)는 삶아서 찬물에 헹궜다. 그래서 밀가루 냄새가 적고 탱탱한 맛이 살아 있다. 이렇게 헹군 국수는 멸치육수에 말았다. 이것 역시 우리 전통은 아니다. 문헌에 우리 국수는 고기 국물이나 간장에 말았던 것으로 많이 나온다. 멸치가 대세가 된 것은 선진 어업기술로 무장한 일본 배가 조선에 진출하면서부터다. 그래서 지금도 유통시장이나 산지에서는 멸치 다루는 용어로 일본어를 많이 쓴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인천과 서울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청요리집은 우리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다. 그런데 이것이 흔한 ‘중국집’이라는 이름을 얻고 대중적으로 득세하게 된 것도 정치적이고 국제적인 영향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좋아서 중국요릿집, 즉 중국집이 많이 번성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밀가루의 공급과 그것을 장려하는 정책 이 결합된 결과물로 본다.

혼분식 장려책이 중국집 대중화 이끌어


▎최초로 짜장면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음식점 ‘공화춘’은 접대부가 있는 호화 요릿집이었다. 공화춘의 옛 전경과 짜장면.
본디 청요리집은 요정처럼 기능했다. 최고급 요리를 팔면서 정치인과 권력자의 ‘비밀회합’ 장소 역할을 했다. 인천에 있는 ‘공화춘’은 현재 짜장면박물관이 되 었는데, 건물 밖에 당시의 간판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글귀 중에는 ‘색판회석(色瓣會席)’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인다. 접대부가 서비스하는 식당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공화춘의 역사를 기록하는 문서에는 당시 짜장면을 파는 식당이 아니라, 코스 요리를 먹으면 짜장면‘도’ 먹을 수 있는 집이라고 써놓았다.

대구의 ‘군방각’이나 서울 남산의 ‘아서원’도 다르지 않았다. 자유당과 이후 정권을 잡은 공화당의 정치가 이곳 중국집 밀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중국집이 대중화로 가게 된 역사를 만든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게 된다. 바로 혼분식 장려책이다. 일반 식당에서 쌀밥 판매를 금지하는 조처도 있었다. 점심에 밥 사먹기 힘들게 된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파는 중국집으로 몰려갔다. 밀가루가 싸지자 짜장면 같은 간이 음식을 주로 파는 소규모의 중국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배달하는 동네 중국집도 크게 늘었다. 비싼 중국요리라는 인식이 엷어지고 짜장면 같은 면요리와 간단한 요리를 먹을 수 있는 간 이식당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이런 문화는 ‘빨리 빨리’라는 한국식 식당문화와 맞물려 빠르게 서비스하면서도 고열량을 제공하는 중국식 국수문화를 크게 퍼뜨렸다. 중년 나이라면 어렸을 적, 짜장면에 얽힌 추억 한두 가지 없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짜장면과 함께 울고 웃으며 자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970~80년대의 이런 짜장면 호경기는 중국요리계에는 오히려 독이 됐다. 싸구려 음식이 전통적이고 개성 있는 중국요리를 모두 밀어낸 것이다. “국수만 만들 줄 알면 주방장으로 스카우트된다”는 말이 생긴 것도 그 시절이다. 요즘 제대로 하는 중국요릿집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 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국수는 짧은 우리 역사 동안 먹거리의 최전선에 등장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잔치국수의 역사도 그리 길지 않아서 전통 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민망하다. 국수는 밀가루 문명에서 크게 번성했지만, 밀 재배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한반도에서 대표적인 음식문화가 되는 특이한 역사의 아이러니도 낳았다. 이런들 저런들 국수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다양하게 요리되는 수많은 국수는 이제 우리 음식문화의 대세인 것이다.

201411호 (201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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