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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 정희대비가 조장한 조두대의 ‘내알(內謁)’ - 조선사 최고권력 여종의 국정농단 파노라마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엄내치’… 권력자가 엄내치(嚴內治)에게 소홀하면 비극적 말로를 맞는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신년호부터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가 ‘조선왕조 스캔들’을 연재한다. 절대권력자 국왕의 주변에서 일어난 각종 스캔들을 통해 역사를 읽는 재미와 교훈을 추구하자는 기획이다. 환관·술사·무당·군인·궁녀가 등장하는 흥미로운 무대이며 술과 취미, 약과 음식, 유흥과 잡기가 춤추는 난장이기도 하다. 스캔들은 강아지의 장난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거대한 고래 몸뚱이가 되어 국정을 농락한다. 권력은 스캔들을 조심해야 무병장수한다.<편집자>

▎2007년 개봉된 영화 <궁녀>의 한 장면. 보통 궁녀는 “아는 것을 말하지 말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약자였지만 여종에서 궁녀가 된 성종조 조두대는 당대의 권력실세로 군림했다.
조선 제8대왕 예종 승하 후,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13세의 성종은 후계교육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예종의 큰아들이 아니라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신숙주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 정희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요청했다. 대비는 처음에는 “나는 문자를 몰라 국정을 결단하기 어렵지만, 주상의 생모인 수빈(粹嬪)은 문자도 알고 사리도 알아 감당할 만하다”며 사양했지만 강청 끝에 수락했다.

이렇게 시작된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왔다. 국정은 근본적으로 행정문서를 통해 운영되기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게다가 조선시대 행정문서는 한문으로 작성 되었고 그 한문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남성이었기에 문제는 더 심각했다.

기왕의 행정 관행으로 한다면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이렇게 시행되어야 했다. 우선 승정원에 모이는 문서를 승지들이 한글로 번역한다. 그 다음 번역 문서를 승전색 환관에게 줘서 정희대비에게 전달한다. 정희대비가 결재하거나 명령하는 한글 문서는 승전색을 통해 다시 승지들에게 전달한다. 승지들은 이 문서를 한문으로 번역해 해당 관청에 발송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정희대비는 수시로 승전색 환관과 승지들을 만나야 했다. 여성인 정희대비는 이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대안으로 한문에 능숙한 측근 여성을 내세웠다. 당시 정희대비의 측근 여성 중 한문에 능숙한 여성이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성종의 생모이자 정희대비의 큰며느리인 수빈 한씨였고, 다른 한 명은 조두대(曹豆大)라는 여종이었다. 큰며느리 수빈은 한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수렴청정 적격자로 추천되기까지 됐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희대비가 믿고 쓸 수 있는 측근은 조두대라는 여종일 수밖에 없었다.

조두대는 승전색 환관과 승지를 대신해 정희대비의 결제문과 명령문을 작성했다. 그 과정에서 정희대비에게 가는 행정문서는 조두대를 거쳤고, 결제문이나 명령문 역시 조두대를 거쳤다.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역할에 따라 승정원을 비롯한 궁중기구는 물론 의정부와 6조 등 중앙정부조직이 유명무실화 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여종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그런 조두대가 정희대비와 함께 권력구조의 정점에 자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이었다. 나아가 조두대가 정희대비의 측근이 된 사연 역시 역사적이었다.

영순군의 몸종이었던 조두대의 입신


▎경기도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광릉. 궁녀 조두대는 정희왕후 윤씨를 내알해 거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원래 조두대는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 8대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아들 중에서 광평대군은 다섯째였다. 세종 7년(1425)에 태어난 광평대군은 12세 되던 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해 출궁했다. 그 직후 세종은 광평대군을 무안군 이방번의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부왕 태종에게 살해당한 무안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의 미망인 왕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신씨와 함께 양모 왕씨를 모시고 살던 광평대군은 20세 되던 해 7월에 첫째 아들을 보았지만 그해 12월 창진(瘡疹)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승으로 간 광평대군도 불쌍한 인생이지만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아버지를 잃은 아이 역시 불쌍한 팔자라 하겠다. 그러나 제3자의 이 같은 동정이 어찌 부인 신씨의 슬픔과 같으랴? 충격을 받은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핏덩이를 남기고 저승으로 떠난 아들, 그리고 핏덩이를 남기고 출가해버린 며느리를 보면서 세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 마음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세종은 손자를 살려야 했다. 기록에 의하면, 핏덩이 손자를 불쌍히 여긴 세종은 유모에게 명하여 안고 앞으로 나오게 한 후 친히 수복(壽福)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 손자가 훗날의 영순군(永順君)이었다. 핏덩이 때부터 영순군을 돌보며 키운 사람은 사실상 유모와 몸종이었다. 영순군의 유모는 홍씨라는 여성이었고 조두대는 바로 몸종이었다. 조두대는 세종 때 영순군을 시중들기 위해 처음 입궁했다. 이후 영순군은 출궁했지만 조두대는 궁중에 남아 궁녀가 되었다. 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했기 때문이었다. 문종, 단종, 세조, 예종 대에 걸쳐 궁녀 조두대는 영순군과 궁중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세조는 그 어느 국왕보다도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다. 부왕 세종의 유언 때문이었다. 세조는 조카 영순군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핏덩이 영순군을 길러준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정희대비는 세조 사후에 조두대를 더더욱 신임하고 중용해 국가 권력구조의 정점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한문을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중용했다는 면에서 보면 실용적인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지만, 기왕의 인연을 중시했다는 면에서 보면 자비로운 마음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기간 중 조두대의 공식 직함은 ‘전언(典言)’이었다. ‘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라는 뜻으로서 환관으로 치면 승전색(承傳色)에 해당했다. 전언 조대두는 한문뿐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실록에 의하면 조두대는 재상 이철견의 수양녀였다. 이철견은 정희대비의 조카 즉 정희대비의 여동생 아들이었다. 이런 이철견의 수양녀인 조두대는 정희대비에게 손녀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조두대는 정희대비는 물론 인수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예컨대 인수대비의 대표작인 <내훈(內訓)>의 발문을 조두대가 썼다. “(…) 신(臣)이 가만히 살펴보니 역대의 어진 왕비는 시부모를 부지런히 섬겨 인효(仁孝)의 덕을 다했고, 자식을 엄히 키워 국가의 경사를 이룬 자가 많았지만, 직접 교훈서를 지어 훈계한 자는 거의 없었습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조두대는 분명 역사와 고사에 두루 능통했다. 당시 궁중에서 여성의 몸으로 이 정도의 식견과 한문 실력을 가진 인물은 인수대비와 조두대 두 명뿐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희대비의 손녀 같은 딸이자 대비의 말씀까지 관장하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국왕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와도 밀접한 전언 조두대의 영향력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했다. 당연히 조두대의 영향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다. 이처럼 비공식적인 줄을 이용해 절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내알(內謁)이었다. 말 그대로 안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알현과 청탁이 내알이다.

면포사업 독점으로 ‘재벌’이 되다

조두대는 자신의 내알, 나아가 그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이용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물론 자신은 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조카 조복중(曹福重)을 내세웠다. 천민 신분의 조복중은 고모 조두대를 배경으로 국내외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실록에는 조복중에 대하여 “본래 부상대고(富商大賈)로서 면포(綿布) 바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음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 입니다”라는 언급이 있다. 부상대고는 요샛말로 재벌이다. 면포를 바치는 사업을 독점적으로 하여 재벌이 되었던 것이다.

조두대는 큰돈을 시주해 영감암(靈鑑庵)을 중창하기도 했다. 영감암은 오대산 상원사 주변에 있는 암자로 고려 말에 나옹대사가 수도하기도 했지만 조선 건국 후 퇴락했다. 세조 12년(1466) 국왕의 상원사 행차에 동행했던 조두대는 영감암의 사연을 듣고 중창하기로 결심했다. 본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또 부모의 극락왕생과 세조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중창공사는 세조 13년 봄부터 예종 1년 가을까지 2년 반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성종 5년(1474)에는 암자에서 수도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위해 논 10섬지기를 시주했는데, 대략 1만6천 평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조두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격증하면서 온갖 구설도 격증했다. 궁중비화에는 거의 빠짐없이 조두대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 6년(1475) 11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중신들이 작당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승정원 문에 붙었던 것이다. 익명서는 묻지 않고 바로 소각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름이 거론된 조정중신들은 사퇴의사를 밝혔다. 성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큰 상을 내걸어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다. 만약 주모자가 자수하면 면죄해주고, 모의에 참여한 자가 고발하면 천인은 면천하며 양인은 3품 관직을 내리고, 주모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도 같은 상을 내린다는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12월 10일, 승정원에 친군위 권즙의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최개지라는 사람이 누군가와 노비 소송을 벌였는데, 그 누군가가 정희대비의 친정식구와 조두대에게 뇌물을 써서 이겼고 분개한 최개지가 괴문서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권즙은 이런 내용을 친척인 박윤형으로부터 들었는데 박윤형은 최개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 고발장은 익명서 사건을 궁중 문제로 비화시켰다. 성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조정중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모자를 색출하려 한 것인데 고발장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정희대비를 겨냥하였다.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가 뇌물을 받고 노비 소송을 왜곡 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내알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익명서 사건은 주모자 색출에서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수렴청정 끝낸 후에도 조두대 비호

의금부에서는 처음에 박윤형과 최개지를 체포하여 사실여부를 조사하였다. 하지만 박윤형은 그런 말을 권즙에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최개지 역시 그런 말을 박윤형에게 한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최개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박윤형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개지와 박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는 권즙이었고, 그 말을 들은 박윤형이 최개지에게 전달 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권즙은 자신의 죄를 박윤형과 최개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먼저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의금부는 다시 권즙을 체포해 조사했지만 그는 물론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한 자가 누군지는 오리무중에 빠져들었고, 도리어 그 발언의 진위여부가 논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논란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논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논란이 거세질수록 곤란해진 사람은 오히려 정희대비였다. 궁지에 몰린 정희대비는 12월 13일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내렸다.

“처음에 주상이 어리고 대신들이 나의 수렴청정을 요청하기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매사에 조심하고 노력했는데, 지금 최개지의 말에 ‘전언 조두대가 정희대비에게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소송판결을 내렸다’는 내용까지 있다. 이것은 내가 수렴청정을 하기에 나타난 결과다. 정치는 부인의 일이 아니고 또 이제 주상이 총명하니 만기가 비록 번거롭다고 해도 어찌 결단하기 어렵겠는가?”(<성종실록> 권62, 6년 12월 13일)

정희대비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을 그만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성종과 조정중신들은 만류했지만 정희대비의 강경한 고집으로 결국 철렴이 결정되었다. 성종 7년(1476) 1월 13일이었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정희대비의 불명예 퇴진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익명서의 발단은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의 국정농단으로 최개지가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하는 소송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최개지의 패소가 국정농단 때문인지 아니면 최개지 본인의 잘못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희대비가 철렴하면서 최개지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정희대비의 친정과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최개지 사건에서 국정농단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최개지 사건에 등장하는 최개지 본인을 위시하여 권즙, 박윤형 모두가 국정농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그런 말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국정농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들의 인식은 바로 당시 백성의 여론이었다.

물론 이런 여론은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를 대신하는 조두대를 곡해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조두대의 국정농단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조두대를 측근으로 두는 한 이런 여론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두대를 물리치든가 아니면 수렴청정을 그만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정희대비는 조두대를 내치는 대신 자신의 수렴청정을 포기했다.

권력의 속성상 그 맛을 본 사람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동서고금의 역사는 웅변한다. 그런데 정희대비는 자발적으로 불명예 퇴진을 택했다. 성종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조두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두대와 영순군에 대한 정희대비의 자비심은 가히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종 14년(1483)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두대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록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조두대에 대한 신임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두대는 인수대비의 강력한 신임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변처녕(邊處寧) 사건이었다.

성종 22년(1491) 겨울, 명나라 황태자가 조만간 책봉되리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進賀使)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성종 23년 봄에 진하 정사에 정괄, 부사에 변처녕이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의 부상대고는 북경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남겼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갈 때는 인삼을 가져다 팔아 이익을 남겼고, 올 때는 또 비단이나 고급 약재를 가져와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북경 무역을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만 가능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행이 결정되면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는 고귀지(高貴枝)와 조복중이었다. 고귀지는 정희대비의 친정인 파평 윤씨에 줄을 댄 부상대고였고, 조복중은 조두대의 조카였다.

진하 부사에 임명된 변처녕은 처음에 고귀지의 아버지 고윤량(高允良)을 수행군관 명목으로 사신 행렬에 합류시켰다. 본래 수행군관은 사신을 호위하기 위한 무관이기에 장사꾼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지의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갑자기 조복중으로 교체되었다. 당연히 고귀지는 의심했다. 조복중이 자신보다 더 많은 뇌물을 썼거나 아니면 조두대를 이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분개한 고귀지는 조복중을 찾아가 크게 따졌다. 싸움이 커져 결국 사헌부에 적발되었고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에서는 변처녕은 물론 고귀지와 조복중도 엄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서는 고귀지와 조복중을 체포해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조복중은 분명 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엉뚱한 나무들만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배후인 조두대를 처벌하지 않는 한 조복중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삼사에서는 조두대도 엄히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론의 예상대로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 후, 진하부사 변처녕은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했다. 하지만 조복중은 멀쩡했다. 진하부사는 재상급인데 그런 변처녕도 패가망신하는 마당에 천민인 조복중이 멀쩡했다는 것은 결국 조두대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에 사관은 이런 논평을 남겼다.

위 사건이 일어난 성종 23년은 이미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조두대의 내알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두대의 내알을 받아준 사람은 인수대비였다.

정희대비와 비교할 때 인수대비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정희대비는 문자를 몰랐지만 인수대비는 문자를 알았다. 또 정희대비는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수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비 사이에는 같은 점도 많았다.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같은 점은 내알을 조장했다는 사실이었다.

백씨의 내알에 빠진 인수대비


▎드라마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채시라. 성종의 생모였던 인수대비 역시 조두대의 내알을 막지 못했다.
정희대비의 경우 내알은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문자를 모르기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아는 조두대를 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문자를 잘 알았고 수렴청정을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조두대를 측근으로 둘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인수대비는 왜 조두대를 측근에 두어 내알을 조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대비가 중용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쓰던 사람을 며느리 입장에서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와 마찬가지로 조두대에게 매우 자비로웠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이나 월산대군 그리고 손자인 연산군에게는 매정한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측근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특히 조두대와 백어리니(白於里尼)라는 두 여성에게 그러했다. 원래 백어리니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세자빈 권씨의 여종이었다. 그녀는 강선(姜善)의 부인이었으며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총명했다. 세자빈 권씨는 훗날의 경혜공주를 출산한 후 총명한 백씨를 유모로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이 역모로 몰려 죽은 후 백씨는 수양대군에게로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총명한 백씨를 큰아들에게 주었고, 그 인연으로 백씨는 훗날 성종이 되는 자산군의 유모가 되었다. 자산군은 백씨를 마치 생모처럼 존중했으며, 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 역시 백씨를 극진히 신임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백씨는 성종이 즉위한 후 봉보부인(奉保夫人)의 자격으로 입궁했다. 이처럼 인수대비와 백씨의 인연은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인연 못지 않게 구구절절하다. 뿐만 아니라 정희대비가 조두대를 측근으로 중용했듯이 인수대비 역시 백씨를 측근으로 중용했다. 나아가 정희대비 사후에는 조두대 역시 측근으로 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희대비 사후에는 궁중 내알이 기왕의 조두대 한 명에서 백씨까지 더하여 두 명으로 늘었다. 당연히 궁중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은 조두대와 백씨 두 명에게 줄을 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 나왔던 변처녕과 더불어 이공(李拱)이라는 인물이었다. 이공은 세종대의 유명한 역법학자 이순지의 아들인데, 실록에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사론이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예컨대 이런 사론이 대표적이다.

“처음에 이공이 봉보부인 백씨의 조카딸을 첩으로 삼고 백씨 부부를 부모처럼 섬겼다. 순천부사가 되어서는 몰래 뇌물을 들여 백씨와 깊이 사귀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곧 승지가 되었다가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또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백씨가 아들을 장가들이던 날 이공이 백씨의 집안일을 마치 늙은 종처럼 맡아 보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다 비루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공은 권세와 이익을 달게 여겨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주목사가 되어서는 더욱 부지런히 섬겨 뇌물을 땅으로 나르고 바다로 날라 바쳤다.” [<성종실록> 207, 18년(1487) 9월 28일]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희대비나 인수대비는 조두대와 백씨에게 바다처럼 자비로웠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자비심이 공식적인 행정조직을 무력화하고 내알을 조장했으며, 성종의 치세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유교지식인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처방이 <대학연의>의 ‘엄내치(嚴內治)’였다.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것, 즉 내알을 방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엄내치’였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니, 엄내치에 소홀하여 비극에 빠진 권력자들이 헤아릴 수 없다. 일면 역사가 허망하기도 하고 일면 두렵기도 하다.

필자 인터뷰ㅣ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 “스캔들의 역사는 수신제가의 귀중한 반면교사”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 왕실을 “유교국가 조선의 꽃이기도 하지만 스캔들의 보물창고”라고 규정한다. 국왕, 왕비, 세자, 세자빈, 대비, 후궁, 환관, 궁녀, 무당, 스님, 양반, 군인 등 온갖 군상이 얽히고 설켜져 벌이는 스캔들의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신 교수에게 스캔들의 역사를 통해 후대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물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스캔들에 주목한 이유는?

“최고 권력 주변의 인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일으키는 스캔들은 당시의 역사는 물론 인간의 심층과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적 동질감과 동정심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주변을 경계하고 자중하는 데 큰 교훈을 준다.”

스캔들을 주변부적으로 보는 역사 판단의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다. <대학연의>는 유교의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을 자세히 설명한 책인데 양반들의 필수교양 서적이었다. <대학연의>에서 제일 재미있는 대목이 스캔들이라 생각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반면교사로 스캔들만한 것은 없다.”

조선시대 스캔들을 ‘연의’의 방식으로 서술하고 싶다고 했는데.

“과거 동양에는 연의(演義) 전통이 있었다. 말 그대로 뜻을 넓혀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연의다. 예컨대 <삼국지>를 자세히 설명한 <삼국지연의>가 대표적이다. 궁중의 온갖 인간군상이 얽혀져 벌이는 스캔들은 하나하나가 가히 <조선왕실연의(朝鮮王室衍義)>의 일부라 할만하다. 이런 왕실스캔들을 연의의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냄으로써 역사적 흥미와 더불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풍요롭게 하고 싶다. 소설과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콘텐트의 좋은 소재로도 활용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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