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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인물탐구| 정치인의 기질과 운명론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권력은 위험한 것, 가까이 가면 타 죽을 수도 있다” 

수화쌍포(水火雙砲), 용칠호삼(龍七虎三)의 팔자… 물처럼 고요하나 대포에 불붙는 날 올 수도 

사진 전민규 월간중앙 기자
조용헌의 정치인 탐험은 정치인의 역동적 운명과 기질의 상호작용을 심층 인터뷰를 통해 밝히는 작업이다. 이 기획은 ‘강호동양학’이라는 소통형 인문학을 개척한 ‘고수(高手)’ 조용헌 씨가 맡는다. 새로운 차원의 ‘통찰적 인물연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년간 연재될 12명의 정치인은 장차 국가의 운명을 짊어질지도 모르는 지도자급 인물, 다시 말해 차기 또는 차차기 대권주자 후보들이다.<편집자>

로마문명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이다. 원형경기장은 칼과 방패를 잡은 검투사가 피를 흘리며 싸움하는 장면을 관람하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건축물이다. 검투사가 주인공이다. 러셀 크로가 주연한 <글래디 에이터>나, 아래턱에 보조개가 들어간 커크 다글라스가 주연한 <스파르타쿠스>가 검투사 영화의 고전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피를 흘리며 싸우는 싸움구경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잔인한 장면이 많을수록 매료시킨다. 인간사 구경중에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 아닌가!

이 검투사가 현대에 와서는 두 가지 직업으로 분화되었다. 하나는 연예인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인이다. 검투사가 주는오락적 측면은 연예인이 계승하였고, 피를 튀기는 승부사적 측면은 국회의원이 계승하였다고 본다. 둘 다 널뛰기 팔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금배지를 단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검투사의 팔자로 접어든 것이 된다. 여의도 국회는 또 다른 콜로세움이다. 국회의원이 되면 칼과 방패를 들고 원형경기장에 입장하는 셈이다. 좌우 관중석에는 수많은 관중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본다. 매스컴을 통해 전투 장면이 실황 중계된다. 일거수일투족으로 휘두르는 초식(招式)에 대중들은 박수를 치고 휘파람을 보내는가 하면 야유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춧가루를 뿌리고, 돌을 던지기도 한다.

여차하면 날아오는 수십 개의 짱돌을 맞아 치명상을 입고 눈에 멍이 들고 갈비뼈가 나가거나, 반신불수가 되기도 한다. 이게 다 파란만장이다. 매일매일이 무협지요 대하소설이고 피디수첩이다. 단 로마의 검투사와 한국의 국회의원이 다른점은 있다. 검투사는 노예 신분이었지만, 국회의원은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세상에 권력처럼 좋은 것이 또 있단 말인가? 권력을 잡으면 모든 욕망이 충족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선거 때가 되면 검투사가 되려고 박이 터진다. 지원자가 줄을 선다. 아! 검투사의 길이여. 무슨 팔자로 검투사가 된단 말인가?

집권당 대표이고 5선 의원인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의원을 만나보았다. 5선 의원이면 프로페셔널 검투사가 아닌가. 수많은 대결을 거치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동안 나는 주로 강호(江湖)와 재야(在野) 전문이었다. 방외지사(方外之士)들과 대화는 많이 나눠보았지만, 콜로세움의 검투사들과 공식적인 인터뷰를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잡지 편집자의 꼬임에 빠져서 검투사를 해부하는 매우 난이도가 높은 인터뷰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니 나는 글을 써온 먹물업자이고 검투사는 피를 뿌리는 핏물업자 아닌가! 먹물과 핏물은 상극이면서도 동시에 상생인 측면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당쟁사를 살펴보면 핏물을 기록한 것이 먹물이기 때문이다. 인생사 자의반 타의반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번 가보는 거지뭐. 먹물과 핏물의 상충작용을 피하기 위해서 눈앞에 벌어진 디테일한 상황에 대한 질문보다는 원론적인 큰 질문만 우선 던져보았다. 고수(?)는 너무 디테일한 질의응답은 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에 가까이 가면 타 죽는다.”

김무성의 대답은 주로 단답형이었다. 관계대명사와 접속사를 안 쓰는 화법이었다. ‘스키다시’를 싫어하는 성격들이 이런 화법을 사용한다. 이미 충분히 정리가 되어 있을 때 단답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단문이라 해서 영양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단백 농축일 수도 있다. 농축 단답은 인수분해를 해서 풀어보고 유추해석해 볼 수 있다. ‘타 죽는다’가 김무성이 규정한 권력에 대한 정의였다. 타 죽는다는 것은 불에 타 죽는다는 것이고, 권력은 불과 같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불은 겨울의 추위를 막아주는 따뜻하고 밝고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타 죽는다는 것은 불이 지닌 순기능만 보고 너무 가깝게 달려들다 보면 불에 타 죽는다는 것이다. 불에 탄다는 것은 생선구이 할 때 석쇠에 생선이 타는 장면이 연상된다. 불에 탈 때는 냄새가 방안을 진동한다. 쇠고기를 불판에 구울 때도 그렇다.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식이 바로 낙지구이다. 불판 위에 올려졌을 때 꿈틀거리는 낙지다리가 불에 구워지면 서서히 오그라든다. 낙지가 불판에서오그라지면서 타 들어가는 장면은 사실 잔인한 장면이다. 권력을 누리고 호가호위하던 사람들이 어느 때인가 불에 타들어갈 때는 낙지 다리가 오그라들어가는 장면이 연출된다. 왜 불인가? 여론이 불과 같은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번 산불이 나면 모두 태워버린다. 김무성이 ‘불에 타 죽는다’고 규정한 배경에는 본인의 정치 체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정치를 YS(김영삼 전 대통령) 문하에서 배웠다. 김현철이 YS의 혈자(血子)라면 김무성은 법자(法子)에 해당한다. 법자는 제자를 가리킨다. 사상이 전해진 자식이 제자다. YS 문하에서 정치수업을 받으면서 온갖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YS 문하라면 부수적으로 DJ와 JP의 행동양태도 간접적으로 섭렵했을 것이다.

김현철이 YS의 혈자(血子)라면 김무성은 법자(法子)


▎대학 2학년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던 김무성이 초가가 빼곡한 시골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삼김(三金) 정치에서 벌어진 온갖 장면을 지켜보았을 것 아닌가. 온갖 장면의 하이라이트는 아마도 ‘불에 타 죽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정권시절에 소통령이라 불리웠던 김현철도 어떻게 보면 불에 타서 화상을 입은 셈이다.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DJ의 ‘홍’자 들어가는 세 아들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권 때에도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SD 이상득’과 ‘왕차관 박영준’은 감방에 가야만 했다. 권력에 가까이 간사람들은 자식과 친인척, 그리고 2인자들이다. 자식과 2인자 치고 불에 타지 않은 사람은 아주 소수다.


▎1970년 2월 중동고등학교 졸업식 날의 김무성. 고등학교 시절부터 ‘리더’ 자질이 엿보였다는 것이 동창생들의 증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신이므로 자식이 없다. 불에 탈 자식은 없다. 그렇지만 이 공식에 대입해보면 2인자 그룹이 불에 탄다는 유추 해석이 가능하다. 이쯤에서 조로아스터교(敎)가 생각난다. 이슬람교 이전에 고대 중동에서 숭배했던 종교가 배화교(拜火敎·조로아스터)다. 아주 오래된 종교다. 대략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은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본 사람은 안다. 활활 타는 장작을 보면 번뇌가 사라진다. 불을 자주 때면 건강해진다. 우울증이 줄어든다. 불은 사람을 끌어당긴다. 매료시키는 힘이 있다.

일주일씩 도자기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도공들은 불이 끌어당기는 매력을 체험한다. 그러다가 불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은 이런 불이라는 말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순간은 영광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여차하면 불에 타 죽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적어도 권력 중심에서 있는 사람은 “내가 이러다가 여차하면 불에 타 죽는다”는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은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 신자인지도 모른다. 권력을 추구하니까.

정치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시기가 언제인가? 두 세 가지 사례를 이야기해달라.

“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 시기다. 민주화 투쟁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불투명했다. 이 군사독재정권이 얼마나 오래갈지. 이거 대항하다가 죽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가 있던 시절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전국에 ‘민추협’이 주최하는 ‘대통령직선제 개헌’ 현판식을 하러 다녔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에서 친위쿠데타를 할 수도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기 때문에 분위기가 흉흉했다. 이때는 우리들이 사무실을 구하려고 해도 당시 독재정권은 통일민주당 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50평 이상이 되면 당국에 신고하라고 했다. 경찰이 늘 우리 뒤를 따라다녔다. 사무실을 물색하러 다니다가 서울역 뒤의 중림동에 지상4층, 지하1층의 건물이 나타났다. 200평 사무실을 임대하기보다는 아예 통째로 이 건물을 사버리는 것이 편했다. 빚이 있는 이 건물의 매입자금을 YS에게서 받았다. 부족한 부분은 내가 돈을 보태겠다고 보고하고 건물 매입을 추진했다. 중도금을 낼 때마다 걱정이 됐다. 만약 또 쿠데타가 나면 내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이 건물 낸 돈도 전부 날아가는데 나는 과연 지금 중도금을 내야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당시에 선후배들이 무교동 술집에 가서 모이면 계엄령과 쿠데타 걱정을 많이 했다. ‘만약 쿠데타 나면 다 도망가야 한다. 그래야 목숨을 부지한다. 고문당하다가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랬더니 어떤 선배가 ‘도망가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고초를 겪는다. 그냥 남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문은 ‘철창우리 속에 사자와 같이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긴장감이 밀려왔다.

고생 끝에 통일민주당 당사를 마련했다. 당사를 마련했다고 하니까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YS의 보안력은 노벨상감이다. 철통 같은 감시 상황에서 어떻게 당사를 마련할 수 있었느냐? 대단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사에 입주할 때 동교동에서 축하한다는 의미로 집기라고 하나 보내줘야 하는데, 거울 하나 보내오지 않았다. 이때 직감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DJ쪽에서 딴 살림 차릴 것 같습니다’ 하고 YS에게 보고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정말 양김(兩金)이 분열했고, 대선구도는 ‘1노(盧)3김(金)’으로 갔다. 이렇게 되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결국 지고 말았다.

김무성 인생 물보라는 18, 19대 공천탈락

이명박 정권 시절인 18대 때 ‘친박’이라고 해서 공천을 못 받았다. 탈당해야 하느냐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탈당하고 무소속 ‘친박연대’를 만들었고, 당선된 뒤 당에 복귀했지만, 당시 상황에서 정말 어떻게 판단하고 방향을 잡아야 할지 어려웠다. 19대 때 공천에서 탈락했을 때도 고민이 많았다.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하고서도 공천을 못 받으니까 허탈감이 왔다. 그때 탈당해서 당을 하나 꾸리자는 의견도 있었다. 탈당해서 나가면 현역 국회의원 35~40명 정도의 작은 정당 당수가 될 수 있었다. 작은 정당의 당수를 할 것이냐, 아니면 그래도 새누리당에 남을 것이냐? 참으로 심경이 복잡했다. 결국 고민 끝에 불출마로 가닥을 잡았다. 탈당했으면 대선 몇 달 앞두고 우파 분열상황이 될 뻔했다.”

<맹자>에 보면 물을 보라는 대목이 있다. ‘觀水有術 必觀其瀾(관수유술 필관기란)’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란(瀾)’은 흘러가는 강물이나 냇물이 바위에 부딪치고 90도로 꺾이면서 물살과 물보라를 튀긴다는 의미다. 평탄하게 흘러가는 물은 밋밋해서 볼 게 없다. 급하게 꺾이면서 물살이 튀겨야 이치를 강구하게 된다. 옛 사람들은 인생을 여기에 비유했다. 물살 바뀌고 꺾이는 대목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이냐를 이 대목에 투사한 것이다. “물을 관조할 때 반드시 그 급하게 꺾이는 대목을 보라”는 맹자의 이야기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인생 살면서 물살 안 꺾여본 사람이 있는가? 풍파 안 거치고 인생 사는 사람 있는가? 누구나 풍파를 겪는다. 정치인의 풍파는 검투사의 풍파이기 때문에 콜로세움의 관객에게 스펙터클한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보통사람의 풍파와는 약간 다르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김무성 인생의 물보라는 18대 공천과 19대 공천 탈락이 되겠다. 이때 내리는 판단이 그동안 쌓아온 내공의 결정체다. 탈당할 것이냐, 말 것이냐. 고냐 스톱이냐? 탈당을 안 하고 스톱을 했다. 탈당할 법도 한데 왜 안 나갔을까? 상황이라는 게 정답이 없다. 나간다고 장땡도아니고 그렇다고 안 나간다고 장땡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직면하는 상황도 대개 그렇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만 있는 것이다. 그때 처한 상황, 본인 자신의 타고난 기질, 주변의 어드바이스, 돌발적인 변수 등이 어우러져 결정을 내리게 한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 이후 투표를 불과 하루 앞두고 정몽준의 결별선언이 있었다. 이건 결과적으로 패착이었다. 그 이전의 대선에는 YS로부터 DJ가 따로 독립했다. 양김 분열이다. 이때 DJ가 내렸던 판단도 복잡했을 것이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각각 대권을 잡았다. 박근혜도 이회창 총재 시절에 탈당을 한 번 했던 적이 있다.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정도의 지역적 기반과 비중을 갖지 않은 인물이 함부로 탈당했다가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양당 구조에서 제3당을 해서 재미 본 사례가 없었다는 사실도 김무성의 잔류에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판단을 할 때는 앞서 진행되었던 선례와 판례를 참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역사책을 읽어야 한다. 역사는 판례집이니까 말이다. 51대 49의 애매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장자방(張子房)의 존재도 중요하다. 내공이 쌓인 장자방이 주변에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장자방이라고 해도 시원찮은 장자방인가, 아니면 당대 일류급의 장자방인가. 그리고 이 장자방 말을 판단 주체가 수용할 것인가, 말것인가도 있다. 장자방 한 명의 역할이 10만 명의 추종자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능한 책사나 장자방이 옆에 있다는 것도 그 사람의 복이다.

결단을 내릴 때 작용하는 또 하나의 변수가 본인의 타고난 성격과 기질, 그리고 팔자(八字)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탯줄을 자를 때 과연 어떤 별의 기운을 많이 받았는가? 결국 운명적 요소도 작용한다는 말이다.

김무성의 팔자를 물어보니 ‘辛卯년 丁酉월 癸亥일 甲子시’라고 한다. 태어난 날짜가 중요하다. 癸亥일에 태어났다. 癸亥는 간지(干支)가 모두 물이다. 특히 계수(癸水)는 물 중에서도 조용한 물이다. 한강이나 낙동강 같은 커다란 강물이 아니고 산속에서 조용히 흐르는 계곡물과 같다. 계수 일주(日主)에 태어난 사람들은 대체로 말이 적고 조용한 편이다. ‘용각산(龍角散) 성격’이 많다.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이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하다.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일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어느새 일을 마쳐놓은 경우도 많다.

보스의 화법, 상대를 위압하는 스타일


▎1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공사를 준비 중인 국가 시설을 둘러보고 있는 당시 김무성 내무부 차관.(왼쪽에서 셋째) 2 1987년 6·10항쟁 당시 YS와 함께 서울시내 중심가에서 호헌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무성의 모습이 보인다.(왼쪽에서 다섯째)
실제로 김무성과 대화하면서 느낀 점은 표정이나 말투가 아주 차분하다는 점이다. 말소리도 크지 않다. 영화 <대부>를 보면 마피아 두목으로 나오는 말론 브란도가 이야기할 때 매우 낮은 목소리로 짧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피아 두목의 어법은 저런 것이구나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다. 낮은 목소리 톤이면서도 짧은 대화. 자신감의 표출로 본다. 이게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스의 화법이자 상대를 위압하는 스타일이다. 목소리가 높고 말이 많으면 하수(下手)로 여긴다. 김무성의 화법도 비슷하다. 그러나 마피아 두목과 다른점은 눈동자가 맑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을 만나 승부를 의식해야 하는 검투사 치고는 맑은 편이다. 김무성에게는 고요함이 있다는 게 상당한 장점으로 느껴졌다.

본인 입으로도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는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직업이 검투사이면서도 서재에서 먹을 갈고 붓글씨를 쓰다가 나온 사람의 표정이 있다. 피 냄새보다는 먹물 냄새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이 점이 좀 예상을 벗어난 대목이었고 김무성의 독특한 개성으로 여겨졌다. 18대 때는 공천 탈락 후 탈당을 했지만 당선되어 당에 복귀했다. 그러나 19대 때는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탈당을 안 하고 백의종군의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계수’가 지닌 팔자적 요소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미국에 가서 상·하원 의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 태권도계의 대부 이준구 선생을 필자가 6~7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양반이 1960년 후반에 쿵푸 스타 이소룡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소룡의 무술 철학이 ‘물’이었다는 내용이다. 이소룡이 이야기하기를 물은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고귀한 존재다. 높은 데서 왔으면서도 끊임없이 낮은 데로 흘러간다. 겸손이다. 흘러가면서 만물을 양육시킨다. 덕을 쌓는다. 그리고는 다시 수증기로 증발하여 하늘로 올라간다. 승천(昇天)이다. 다시 고귀한 신분으로 돌아간다. 이게 물의속성이라는 이야기를 ‘준 리’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이소룡도 인생에 대해서 상당히 연구를 했던 것 같다.

‘식신생재’ 팔자는 조상의 음덕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정치의 요체를 묻는 조용헌 씨의 질문에 “유연성과 함께 만난을 무릅쓸 각오가 돼 있어야 정치를 한다”고 대답했다.
물의 반대가 불이다. 성격의 양대 꼭지점은 물과 불로 압축된다. 근래 정치인 가운데 불은 누구였을까? 생각해보니 노무현이다. 불은 직감이 빠르고 솔직하면서 뒤끝이 없다. 그 자리에서 퍼붓고 끝나기 때문에 뒤에 가서 할 말이 없다. 말을 잘한다. 순간 상황 파악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것이다. 불은 남방의 주작(朱雀)이고 물은 북방의 현무(玄武) 기운이라고 한다. 주작은 화려한 꼬리 깃털을 한 번씩 활짝 편다. 현무는 거북이와 뱀이 엉켜 있는 모습이다. 노무현이 재임 시절 국회로부터 탄핵을 받고 이를 정면돌파했던 것도 불 체질이 아니면 못하는 행동이다. 마지막에 부엉이 바위에 올라간 것도 가슴속에 불이 치솟으니까 그 불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이 많은 팔자는 불을 만나야 묘용(妙用)이 생긴다. 물만 많으면 팔자가 너무 추운 팔자가 된다. 물론 불이 많은 팔자도 물을 만나야 좋다. 뜨거운 것을 식혀준다. 김무성은 丁酉월에 태어났는데, 丁酉의 丁이 불이다. 이 불을 辛卯년의 卯.甲子시의 甲이 장작 역할을 해주고 있는 형국이다. 장작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丁火를 밝혀준다. 김무성 팔자는 ‘식신생재(食神生財)’ 격이다. 식신(食神)은 베풀기를 좋아하는 넉넉한 기질을 가리킨다. 식신생재격(食神生財格) 사주는 크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베풀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베푼 것이 나중에 ‘쓰리쿠션’이 되어서 재물이 되는 형국이다. 그래서 부자가 많다. 재물도 근검절약해서 생기는 차원이 있고, 베푼 것이 몇 바퀴 돌아서 재물로 오는 차원도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재물의 사이즈가 크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불가의 고승들은 “부자 되려면 먼저 베풀어라”고 설파한다. 떡밥을 미리 뿌려놓아야 붕어가 모여 들것 아닌가! 투자도 하지 않고 재물이 오겠는가. 식신생재팔자를 타고 나는 것은 그 윗대의 조상들이 많이 베풀었다는 증거다. 그 증거가 사주팔자로 나타난다. 고조부나 증조부 대에 떡밥을 뿌려놓으면 그 손자대에 받아 먹는다. 그 인과관계의 대차대차표를 대조 확인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너무 근검절약해서 모은 재물은 독이 되는 경우가 있다. 아까워서 쓰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근검절약하고 돈 아끼고는 것도 도가 지나치면 안 좋은 업보로 작용한다. 김무성 팔자의 정화(丁火)는 재물로도 작용하지만, 물을 보강해주는 용신(用神) 작용을 하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불대포로 가동된다. 이 팔자는 물이지만 불대포를 가지고 있다. ‘무대포(無大砲)’가 아닌 것이다. 평상시에는 물처럼 조용하게 있다가 유사시 상황이 발생할 때는 화염 가득한 불대포도 가동된다. 물과 불을 모두 쓰는 ‘수화쌍포(水火雙砲)’ 팔자인 것이다. 이 분포를 무협지의 권법 용어로 표현 한다면 용칠호삼(龍七虎三)이다. 용이 7할이고 호랑이가 3할이라는 말이다. 용은 물에서 노는 동물이고, 호는 불 같은 성정을 상징한다. 용은 물과 같으므로 여간해서는 대결을 피한다. 수비 위주다. 호랑이는 공격이다. 주먹을 휘둘러 상대를 격살시키는 권법가들은 호법(虎法)을 쓴다. 권법 가운데 팔괘장(八卦掌)이 용법(龍法)이라고 한다면 오리지널 소림권(少林拳)은 호법(虎法)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김무성의 정치행태는 수비7할, 공격 3할이다. 불 체질의 노무현을 여기에 대입해본다면 공격 8할 수비 2할이라고나 할까. 김무성 팔자에 흥미로운 대목도 보인다. 바로 도화살(桃花殺)이다. 복숭아 꽃은 아름답다. 도화가 피면 벌과 나비가 많이 날아든다. 지금이야 서양에서 들어온 예쁜 꽃이 많아졌지만 옛날에는 복숭아 꽃이 제일 아름다운 꽃으로 여겨졌다. 도화살이 있으면 이성이 많이 들어붙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여자에게 이 도화살이 있으면 남자가 많이 달라붙는다고 해서 안좋게 보았다.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붙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 도화살이 좋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화살이 많으면 인기가 있는 것이다. A급 연예인들 치고 도화살 없는 사람이 없다. 연예인만 그러는 게 아니다. 어느 산부인과 남자 의사를 보니까 도화살이 있었는데, 병원에는 늘 여자 환자가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다 돈이다. 정치인도 도화살이 있어야 선거에 당선된다. 여자표가 많이 나온다. 지금은 매스컴의 시대다. 조선조 때에는 대중들이 정승, 판서 얼굴도 몰랐다. 지금은 화면으로 연예인과 정치인의 얼굴을 매일 대한다. 매력 없으면 바로 퇴출이다. 대중들의 투표라는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하는 투표민주주의 시대에는 도화살이야말로 정치인이 장착하고 있어야 할 필요충분 조건이 아닌가 싶다. 표를 찍어주려면 무엇인가 매력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김무성은 키가 181㎝다. 당당한 풍채다. 얼굴도 귀골이다. 여자 유권자들이 호감을 가질 풍채다. 외국 나가서 유럽의 검투사들과 같이 서 있어도 풍채에서 밀리지 않는다.

전남방직, 1960년대 직원 3천 명 전성기 누려

경상도 사람이 어떻게 전남 광주에 있는 전남방직을 운영하게 되었는가? 선친은 어떤 이력을 가졌나?

“부친이 김용주(金龍周.1905∼1985)다. 경남 함양 출생이다. 부산상고 나와서 일제시대 식산은행(殖産銀行)에 다녔다. 첫 발령지가 포항이었다. 포항에서 부친이 밤에는 야학(夜學)을 운영했다. 돈 없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셨다. 야학을 운영하다가 이게 문제가 되어 일본사람들에게 식산은행에서 쫓겨났다. 은행 나와서 가게를 시작했다. 하필 이름도 ‘三一商會’로 지었다. 3·1운동을 염두에 둔 작명이었다. 일본 형사들이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생기자 포항에 ‘영흥(永興)국민학교’를 선친이 세웠다. 쌍용의 김성곤 회장의 부인 김미희 씨가 영흥국민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이 인연으로 두 사람이 결혼을 포항에서 할 때 그 주례를 아버지가 서줬다. 이명박 대통령도 영흥초등학교를 나왔다(박근혜와 경선할 때 이명박은 김무성이 자기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가게에서 다룬 품목은 잡화무역이었다. 당시 동해안 오징어와 정어리가 유명했다. 이걸 중국에다 팔았다. 나중에 비누공장도 하고 철도운송 사업에까지 사업이 확대되었다. 선친이 당시 교류하던 인물들이 인촌 김성수, 천우사(天佑社)를 세운 전택보, 대한제당을 운영한 설경동 등이다. 해방 후 한국경제의 주역들이었다. 1948년에는 반관반민의 대한해운공사도 창립했고, 이게 나중에 한진해운이 되었다. 1950년대 전반에는 대한통운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야당인 민주당에 선친이 정치자금을 댔다. 1952년의 부산 정치파동 때는 거의 모든 자금을 선친이 제공했다.

전남방직은 1953년에 정부로부터 불하받았다. 전남 광주에는 일제 때 일본사람이 세운 ‘가네보’라는 방직공장이 있었다. 물이 많고 여공인력이 풍부한 광주의 입지조건을 보고 일본인이 방직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정부로부터 불하받을 때 동업자가 있었다. 김형남 회장이다. 숭실대학교를 세운 분이다. 선친과 김 회장 둘이서 같이 ‘가네보’를 불하받아 이름을 전남방직으로 정했다. 처음에는 얼마 동안 전남방직으로 합동운영하다가 나중에는 선친과 김 회장이 5대5로 공장을 반쪽씩 나눠 운영하게 되었다. 우리는 전남방직 이름을 그대로 썼고, 김 회장은 ‘일신방직’으로 새 이름을 정했다. 전남방직 전성기는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까지라고 볼 수 있다. 직원이 3천 명이나 됐다. 광주·전남 일대에서 가장 잘나갔던 기업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방학만 되면 선친의 엄명에 따라 광주 전남방직에 내려가 15일에서 20일 정도는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그래서 광주는 나에게 친숙한 도시다. 우리집 주력 기업이 광주에 있었으니 광주는 경상도 사람인 나에게도 친숙한 도시였다.”

“정치의 핵심은 유연성이다”

선친이 친일파였다는 소문도 있다.

“선친 이름이 김용주인데, 친일인명사전에 실려 있는 김용주는 동명 이인이다. 다른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는 가게 이름도 ‘삼일상회’로 지은 사람이다.”

함양에서 살기 이전에는 어디서 살았는가? 선산은 어디에 있나?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다. 조선조 무오사화의 주인공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중시조다. 연산군 때 화를 입고 그 가족이 야반도주했다. 전북 임실에서 숨어 살았다. 복권이 되어서 다시 서울에 올라가보니까 집도 없어졌고 비빌 언덕이 없었다. 다시 전라도 장수에 내려와 살았다. 장수에서 살다가 고을원님 집안 사람들과 묫자리 싸움을 하게 됐다. 당시에 명당 묫자리를 둘러싼 쟁송이 많았다. 묫자리 싸움을 하다가 우리 집안의 힘이 센 장사가 부안 김씨였던 원님 집안사람을 한 명 죽이고 말았다. 그래서 집안이 함양으로 피신했다. 이때가 조선 말기다. 그래서 함양에서 몇 대를 살게 되었지만 집안의 윗대 선산의 일부는 전북 장수에도 있다. 조상 묘가 몇 개 있다. 고을원님 집안사람을 죽여 피신할 때 우리는 함양으로 갔지만, 집안의 다른 일파는 대구 근처의 현풍으로 도망을 갔다. 현풍으로 피신한 후손이 쌍용의 김성곤씨 집안이다. 김성곤과 우리는 윗대로 올라가면 장수에서 같이 살았던 한 집안이다.”

정치는 무엇이 핵심인가?

“유연성이다. 만난(萬難)을 무릅쓸 각오가 있어야 정치를 한다. 보통사람은 그걸 견디기 어렵다. 정치인이 되려면 그걸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지간한 건 웃고 넘겨야 한다. 정치인은 먼저 화내면 지는 것이다. 화를 참아야 한다. 그러려면 건강도 받쳐줘야 한다. 건강이 안 좋으면 표정이 어둡고 신경질적이 된다.”

김무성은 목소리 톤이 높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로 함축적인 단문을 구사하는 정치인이었다. 물의 차분함과 유연성을 느끼게 하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협지 식으로 규정을 한다면 ‘용칠호삼(龍七虎三)의 초식’이라고나 할까. 외부를 향한 분출보다는 내부를 향해 수렴하는 기질이 발달한 정치인이었다.

필자 인터뷰ㅣ조용헌 씨 - “정치인의 마음행로 밝히고 싶어”


조용헌 씨는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 중 하나인 사주명리학을 ‘미신’의 수준에서 ‘학문’의 영역으로 복권시킨 주인공이다. 사주명리학에 내재된 삶의 지혜를 대중과 공유하는데에 기여했다. 그는 정치를 ‘삶의 종합예술’로 규정한다. 정치인이 기질과 팔자를 조화시켜야 당사자도 국가도 편안하다고 본다. 그에게 새 연재물의 방향과 취지를 물었다.

왜 정치가 종합예술인가?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가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며, 각 분야 발전의 뇌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안이 흘러들어오고, 흘러나간다. 조화를 이루면 흥하고, 그렇지 못하면 망한다.”

운명과 기질은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가?

“문학 이론에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반대로 운명이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운명과 기질이 교호하여 좋은, 또는 불행한 미래를 만든다.”

정치인 연구가 겉으로 드러난 발언과 행동에만 주목한다는 비판이 있다.

“그래서 이 기획에 매력을 느꼈다. 1시간 정도 인터뷰해서는 그 사람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기(氣)의 교감, 속 깊은 대화가 이뤄져야 과거 행동의 진짜 맥락을 밝힐 수 있다.”

이 인터뷰를 통해 가장 밝히고 싶은 것은?

“마음의 행로다. 그 행로는 아주 먼 과거에서 시작돼 미래로까지 연결 돼 있다. 정치인의 마음행로를 독자에게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이걸 모르면 사기당한다.”

<한기홍 선임기자>

조용헌- 원광대 불교학 박사. 지난 20여 년간 한·중·일 3국의 1천여 사찰과 고택, 영지(靈地)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기인, 달사를 만나 교유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문·지리·인사 등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을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트로 자리매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용헌의 사찰 기행> <5백 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 <방외지사> 등이 있다.

201501호 (2014.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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