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코스모폴리탄이 사랑한 도시⑨] 중국 상하이|건축물에 담긴 메갈로폴리스의 민낯 

전 세계 모험주의자의 ‘글로벌 아지트’ 

글·사진 한지은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서양에서 도입된 자본주의적 문화양식의 화려한 경연장 … 식민지 경험이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도시로의 성장 이끌어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는 화려하고도 어둡고, 부끄러우면서도 자랑스럽다. 상하이의 신중산층은 아직도 과거 ‘조계지역’이 불러일으키는 이국적 분위기에 열광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미스터리의 상하이. 그곳에는 도도함과 탁함이 공존한다. 그래서 상하이의 진면목 찾기는 쉽지 않다. 범부의 삶과 영웅의 일대기가 현란하게 뒤섞인 야누스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Paris of the East)’이자 ‘서편의 뉴욕(New York of the West)’으로 불리며 코스모폴리탄의 중심지로 여겨졌다. 미래의 중국을 상징하는 상하이 푸둥(浦東) 지구의 초현실적 빌딩숲.
“당신이 이 사회의 겉모습을 볼 때, 번화한 거리에 화려한 서양식 건축, 빛나는 자동차, 댄스홀과 술집, 수많은 오락 장소는 사람을 매혹하는 분위기를 퍼트린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이 도시의 핵심에, 화려한 서양식 건축 뒤에, 20세기 출현한 문명도시 가운데에는 지옥이 있다.”

언뜻 현대의 국제적 대도시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위의 글은 1937년 <상하이생활(上海生活)>이라는 잡지의 창간호에 실린 글이다. 천국과 지옥처럼 극단적인 두 가지 모습으로 상하이가 그려진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해안가의 작은 어촌 마을이 1843년 개항(開港) 이후 전통적인 중국의 도시와는 다른 국제적인 대도시로 변모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부터 상하이에는 수많은 이항대립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때로는 ‘동양의 파리(Paris of the East)’이자 ‘서편의 뉴욕(New York of the West)’으로 불리며 코스모폴리탄의 중심지로 여겨졌지만, 동시에 가난한 중국인에게는 지옥과 같은 도시이자 주변 지역을 착취하는 제국주의의 ‘기생충’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이처럼 상하이를 이항대립적 관점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에도 상하이를 찾는 이들은 황푸강(黃浦江)을 사이에 두고 푸둥(浦東) 지구의 초현실적 빌딩숲에서 미래의 중국을 그려보는 한편, 푸시(浦西)에 늘어선 근대 건축들을 보며 상하이의 화려한 과거를 그리워한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모더니티와 식민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부와 가난’ 등 오늘날 상하이를 둘러싼 이항대립의 어느 편에 이 거대한 도시의 진짜 모습이 자리하고 있을까? 인구 2400만 명의 중국 최대 도시 상하이의 진짜 얼굴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상하이는 과연 중국인가?


▎1. 프랑스 조계에 남아 있는 서양식 저택들은 주로 고급 레스토랑, 카페 등으로 사용되며 젊은이들의 웨딩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 2. 이농주택을 철거하고 난 자리에 지어진 상하이 최고급 아파트. 쾌적한 거주환경을 위해 인공호수와 공원까지 조성되었다.
이것은 상하이를 둘러싼 오래된 질문이다. 중국 경제 발전의 상징이자 중국의 최대 도시 상하이를 두고 이 무슨 황당한 물음이냐고 묻겠지만 사실이다.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상하이가 개항 이후 전통적인 중국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근대적이고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하면서부터 이러한 의문은 계속됐다. 1843년 개항의 결과로 들이닥친 서양의 영향(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지) 속에 상하이는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크게 다른 국가 속의 국가가 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상하이에서 만난 여러 친구는 나에게 “상하이를 중국이라고 보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으며, 내 강의를 수강하던 지방 출신의 중국인 유학생 또한 자신이 상하이를 방문한 경험을 “서울보다 훨씬 더 외국 같았다”는 느낌을 말해주었다.

개항된 항구 주변의 일정한 땅에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자유롭게 하고 그 지역의 행정권을 외국에게 위임하는 개항장(開港場)은 19세기 불평등 조약으로 외국과의 통상을 시작하게 된 한·중·일 세 나라에만 있는 장소였다. 중국에서는 이 땅을 ‘조계(租界)’라 부르는데 난징조약을 통해 상하이에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양 각국의 조계지가 건설되었다. 조계지의 형성과 그곳에 미친 서양의 영향은 이후 상하이와 관련한 대립적 이미지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즉 상하이는 제국주의적 불평등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왜곡된 도시라는 오명을 얻게된 동시에, 서양에서 도입된 자본주의적 문화양식과 근대적 신공간의 주요한 무대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조계 시기의 상하이, 그중에서도 1930년대는 이 도시에서 매우 특별한 시기로 기억된다. 혼란스럽던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으로 상하이는 아시아 최대의 백화점, 최고층 빌딩, 최대의 경마장, 제일 화려한 도박장과 나이트클럽과 영화관이 자리한 중국, 나아가 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밤이 없는 도시라는 뜻으로 ‘불야성(不夜城)’이라 불린 상하이의 난징로(南京路)는 중국인에게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네온사인으로 눈부신 이른바 난징로의 4대 백화점의 쇼윈도는 세계 각국에서 온 희귀한 수입품으로 가득했다. 상점뿐 아니라 엘리베이터와 옥상정원, 댄스홀 등을 갖춘 백화점은 그때부터 이미 상하이 여행의 필수코스였다.

한편 1930년대 상하이의 조계에는 브로드웨이 맨션(Broadway Mansion) 같은 서양식 고층 아파트뿐 아니라 ‘화원양방(花園洋房)’이라 불리는 정원이 딸린 서양식 저택이 즐비했다. 대부분 서양인이거나, 금융이나 무역업자, 고위 관료인 집주인들은 실내 장식이나 가구에서부터 음식, 음악 등 소비 취향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스타일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작은 유럽이 상하이에 공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하이의 도시 곳곳에 유럽의 문화가 스며들면서 大光明(Grand Theater)이나 國泰(Cathay) 등 서구식 영화관을 찾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 것은 상하이의 중산층에게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어갔다.

부자들의 천국, 가난한 자들의 지옥


▎19세기 후반 상하이 조계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들어선 이농주택. 건물 사이사이 좁은 골목인 농탕(弄堂)은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자 쉼터 역할을 한다.
오늘날 국제적 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하게 그려지는 상하이의 1930년대는 사실 실업과 고물가, 만연한 범죄와 빈곤 등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상하이에는 ‘부자들의 천국, 가난한 자들의 지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백화점과 댄스홀, 카페 등 근대적이고 소비적인 문화가 넘쳐나던 상하이 도심의 뒷골목에서는 인력거꾼과 날품팔이 노동자, 고아와 매춘여성, 마약과 도박에 찌든 중국인들이 신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 상하이는 사회주의적 관점에 따라 제국주의 불평등의 상징이자, 서구 자본주의에 영혼을 팔아버린 타락한 도시로 폄하되곤 했다. 난징로의 화려한 네온사인도, 프랑스 조계의 이국적인 풍경도 모두 외국물이 단단히 든 상하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그 중심에 상하이가 자리하면서 상하이의 화려하지만 동시에 부끄러운 과거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다. 오늘날 글로벌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상하이의 신중산층들은 과거 조계 지역이 불러일으키는 이국적 분위기에 열광한다. 스스로를 ‘쁘띠 부르주아’로 여기는 이들은 1930년대 풍으로 장식된 카페에서 커피와 애프터눈 티를 즐기며,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옛 조계 거리의 상점과 갤러리를 산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취향을 드러낸다. 이들 덕분에 오늘날 과거 조계의 서양식 주택의 상당수는 리모델링을 거쳐 고급 호텔이나 레스토랑, 카페, 술집 등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돈 있는 중국인 누구라도 이들 장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하이는 비로소 중국이 된 것일까?

상하이 시내에만 수십 개에 달하는 고가 수입품으로 가득한 백화점이나 옛 조계에 자리한 이국적이고 고풍스러운 카페의 종업원들은 어디에서 살까? 좀 더 구체적으로 평균 연봉 900만원 정도인 상하이의 보통사람들의 집은 어떤 곳일까 상상해보자. 먼저 중국 친구들의 표현으로 ‘엄청나게 운이 좋아’ 상하이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면 과거 조계지였던 시내에 남아 있는 오래된 이농주택(里弄住宅)에 살 수도 있겠다. 도심의 한가운데 중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결합된 고풍스러운 외양에 이 친구가 부러운 마음이 든다면 잠시만 접어두어도 좋겠다.

대부분 1930년대 이전에 지어진 이농주택의 실내는 비좁고 어두워 보통 ‘토끼굴’로 불린다. 심지어 새벽마다 건물 밖의 공동화장실에서 줄서기를 다퉈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 상태가 좋은 건물일지라도 많은 사람이 함께 살기 때문에, 내 중국인 친구의 고모는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50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바닥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기뻐했다고 한다. 특히 지금이나 그때나 섭씨 40도를 오가는 상하이의 여름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계절이어서, 에어컨도 없던 예전에는 여름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골목에 나와 잠을 청하곤 했다.

컴컴한 실내, 건물 밖에 자리한 수도시설, 전깃줄과 빨랫줄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집에서 덥고 습한 상하이의 여름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스럽겠지만, 이 도시를 터전을 살아가는 상하이 사람들은 비좁은 집도 넓게 사는 삶의 지혜 또한 체득하고 있다. 언제 쏟아질지 모르는 폭우와 습기를 피해 장대를 이용하여 가능한 한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빨래를 말리고, 집 바깥의 좁은 골목에 모여 한담을 나누며 여름밤의 더위를 잊는다. 늦은 오후면 과일이나 저녁거리 노점이 펼쳐지는 이농주택 입구, 의자 하나만 달랑 있는 주택 안 이발소, 가족처럼 안부를 챙기는 골목안 사람들 덕분에 비좁은 집이 아니라 우리 동네 전체가 곧 하나의 집이 되는 것이다.

“한 몸 쉴 수 있는 곳이 그립다”


▎2010년 상하이박람회의 중국관. 그 규모에서부터 주위를 압도하며 세계 속에 달라진 중국의 위상을 대변했다.
1990년대 상하이 도시재개발의 열풍 속에 낡은 이농주택은 대부분 철거되어 고층의 아파트로 새로 지어졌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평균 임금이 가장 높은 도시인 데다 시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고층 아파트를 보며 상상 속 주인공의 두 번째 보금자리로 이 아파트를 떠올렸다면 큰 오산이다. 오늘날 상하이 시내에는 공용수영장까지 딸린 서구식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지만, 월세만 200만원이 훌쩍 넘는 시내의 고급아파트는 상하이 보통사람들에게는 감히 꿈꾸기조차 어려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 지역에 그것도 가능한 한 여러 명이 함께 모여 살 방 한 칸이라도 구했다면, 그나마 ‘상하이 드림’의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채운 사람이 불릴 것이다.

사실 상하이의 주택난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19세기 말 주변 지역의 혼란을 피해 조계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하이는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이자 거주 밀도가 가장 높은 도시가 됐다. 살인적인 월세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이 빌린 방을 쪼개 다시 빌려주는 일이 많아지면서 수십 명이 한 집에 사는 일 또한 다반사였다. 중공(中共) 성립 이후에도 상하이는 늘 만원이었다. 사회주의 신중국의 주인공인 노동자를 위한 이른바 ‘공인신촌(工人新村)’이 건설되긴 했지만 턱없이 부족했고, 계획경제에서 주택에 대한 투자는 극도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90년대 ‘푸둥지구개발’로 전 세계의 자본이 상하이로 몰려들기 시작할 때까지도 상하이 시내에는 조계 시절 건설된 어둡고 비좁은 주택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의 외관은 10여 년 만에 옛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달라졌다. 1990년대 상하이의 도심 풍경은 대규모 철거 지역과 건설 크레인으로 특징 지워졌으며, 2000년대 말 상하이는 뉴욕보다 마천루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상하이를 찾은 관광객은 상하이 도심을 순환하는 고가도로를 달리며 도시를 가득 채운 빌딩숲이 만들어 내는 시각적 이미지에 압도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마천루로 가득한 이 거대한 도시에서 자신의 한 몸을 쉴 수 있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는 일이 ‘미션 임파서블’처럼 느껴지는(사실 푸동의 고층빌딩은 <미션 임파서블3>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상하이 보통사람들에게도 비슷할 것 같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으로 중국 전체가 떠들썩했을 때 상하이 사람들은 도통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2년 뒤로 다가온 2010년 상하이세계박람회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1851년 런던에서 처음 시작된 이후 세계박람회는 유럽 각국의 국력 및 기술력을 과시하는 행사였다. 전면이 유리로 지어진 런던세계박람회의 수정궁(Crystal Palace)이나,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철골 구조의 에펠탑은 모두 자신의 기술과 문명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하는 야심찬 기념비였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용이라 불리는 중국, 그 중에서도 여의주에 해당하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최초의 세계박람회는 따라서 세계로 향하는 도시의 모든 열망과 꿈이 집약된 행사가 됐다.

글로벌 시티 상하이의 꿈


▎스쿠먼 주택을 테마로 개발된 신톈디(新天地)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자 국제적 소비공간이 되었다.
150년이 넘는 세계박람회 역사 속에 2010년 상하이박람회는 최대 규모로 기록되어 있다. 5.28㎢에 달하는 박람회장의 규모, 192개의 참가국, 총 관람객이 7300만 명에 달했다. 더욱이 대전이나 여수박람회처럼 소규모로 진행되는 인정엑스포가 아니라, 상하이박람회는 모든 참가국이 자비로 전시관을 지어야 하는 5년에 한번 열리는 등록엑스포였다. 그렇다면 말 그대로 메가 이벤트인 세계박람회에서 상하이는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을까? 세계박람회는 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하는 범지구적인 공동의 이슈를 제시하는데, 2010년 상하이의 주제는 ‘더 좋은 도시, 행복한 삶(Better City, Better Life)’이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서구의 영향의 결과로 세계적 도시가 되었던 상하이, 그 곳에서 열리는 중국 최초 세계박람회의 주제가 ‘도시에서의 행복한 삶’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상하이박람회장이 건설된 곳은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중심지였던 강남조선창(江南造船廠) 등 중국의 근대산업유산이 집중된 지역이다. 19세기 말 열강의 침탈 속에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부강을 꾀했던 양무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개혁으로 여겨지지만, 박람회를 통해 상하이는 다시 세계의 주요 도시로서 과거의 명성을 상당부분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하이는 서울보다 더 조밀한 전철노선을 갖추는 등 엄청난 도시 인프라를 갖추게 되었다. 노후한 공장과 허름한 주택이 밀집했던 지역은 최단기간에 철거되어 박람회장이 되었다. 물론 박람회가 끝난 후 도심에 자리한 이 넓은 땅에는 국제적 수준의 업무 및 상업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다시금 세계적 명성을 가진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세계적 인재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과거 ‘모험자의 낙원’으로 불리던 상하이에는 돈과 명성, 정치적 자유를 찾아온 전 세계의 사람이 모였다. 그중에는 새로운 땅에서 기회를 찾으려는 서양인, 명성을 쫓는 배우와 작가, 일확천금을 꿈꾸는 도박꾼과 암흑가의 보스, 러시아혁명을 피해 온 러시아인과 조선의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아직도 상하이 도심의 골목골목에는 이들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다. 과거 상하이를 그토록 다양하고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었던 이들의 후예는 오늘날 누구일까?

상하이는 현재 중국에서 다양한 출신지와 국적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도시 중 하나다. 상하이의 오피스와 금융가에서, 백화점과 쇼핑몰에서, 고급아파트단지와 옛 조계의 고풍스러운 주택에서는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상하이를 선택한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상하이에 글로벌한 분위기를 부여하는 대표적 장소 중 하나는 옛 산업시설을 문화공간으로 전환한 이른바 ‘창의산업구(創意産業區)’이다. 2000년대 이후 상하이 도심에는 100개의 창의산업구가 만들어졌는데, 주로 더 이상 운영되지 않는 공장이나 창고 등을 갤러리, 공방, 상점,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개조하여 뉴욕의 ‘소호’ 지역을 연상시킨다.

공장이나 창고처럼 과거 산업시설의 분위기가 가득한 장소에서 다양한 현대 미술과 세련된 디자인 상품, 이국적이고 독창적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하이의 국제적이고 다양한 매력을 대표하는 곳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중국어가 아닌 영어만이 통용되는 카페, 미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북한 미술품, 일본 기모노를 맞추는 의상실을 만날 수 있다. 국적과 이데올로기의 경계가 무의미한 이곳은 과거 상하이에서 활약하던 전 세계 모험자의 후예, 그들의 아지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식민 지배의 과거가 부끄럽지 않은 이유


▎황푸강변의 와이탄(外灘) 지역은 조계의 행정기관과 각국의 금융기관이 밀집한 상하이 식민 지배를 상징했다. 와이탄의 이국적 건물들은 오늘날 상하이의 대표적 관광지로 변모했다.
야누스 같은 상하이의 진짜 얼굴, 진짜 상하이다운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중국 명대의 원림(園林)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위위안(豫園)을 구경하고, 주변에 길게 줄을 선 샤오롱바오 가게에서 만두를 먹은 후에, 명·청대 스타일로 지어진 상점가에서 실크로 만든 실크 슬리퍼를 몇 개 사고선 상하이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기뻐할 수도 있다. 사실 위위안과 도교 사원인 청황먀오(城隍廟), 인근의 상하이 옛거리(上海老街)는 오늘날 상하이 시내에서 전통 중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다. 옛 상하이 현성(縣城)이 자리하던 곳으로 바둑판 모양의 대로로 연결된 조계와 달리 수로(水路)와 미로 같은 골목길이 어우러진 전통적인 중국 강남(江南) 지방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상하이 사람들에게 여기가 가장 상하이 다운 곳이냐 물으면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 가꾸어진 전통 분위기가 나는 관광지, 혹은 중국 특색의 음식을 즐기거나 중국풍의 기념품을 살 수 있는 시장에 가깝다는 대답이 돌아오고, 그건 진짜 상하이다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상하이 사람들은 자기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가 본래 중국의 것인지, 아니면 외국에서 전해온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무관심해 보인다. 중국과 서양에서 각각 발원한 문화였을지라도 상하이에 들어오면 그것은 상하이다운 것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상하이 사람들은 식민지를 겪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자신의 과거에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다. 심지어 1990년대부터 상하이에서는 식민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는 문화상품이 인기를 끌고, 당시를 본뜬 각종 공간이 조성되는 등 옛 상하이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유행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기에 식민 지배라는 부끄러운 자신들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심지어 상품으로 판매하는 상하이의 모습은 처음에는 매우 의아스러운 일이었다. 일례로 황푸강변의 와이탄(外灘) 지역은 조계의 행정기관과 각국의 금융기관이 밀집한 상하이 식민 지배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와이탄의 이국적 건물들은 사회주의 성립 이후 오랫동안 부끄러운 과거의 흔적으로 치부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상하이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심지어 1930∼40년대 서양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만국건축박람회’라 불리는 건물들은 본국에는 사라져버린,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문화유산으로 각광을 받는다. 웅장하고 이국적인 양식의 건물들에는 각국의 은행, 보험사 등 금융기관뿐 아니라 고가의 수입명품 숍, 고급 레스토랑 등이 들어섰다. 밤이 되면 건물마다 특색 있는 야간조명이 켜지는데 황푸강 건너편 첨단의 마천루를 뽐내는 푸둥 지구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도시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부끄러울 수 있는 과거에 대해 무심함을 넘어 대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늘날 상하이인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상하이 문화를 대표한다는 스쿠먼(石庫門) 주택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이농주택의 한 양식인 스쿠먼 주택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폭증하는 조계지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상하이만의 독특한 주거양식이다. ‘스쿠먼’이라는 말은 돌로 만든 문틀에서 유래했는데 보통 화강암으로 된 문틀에 두꺼운 흑색의 나무문이 달려있고 문틀 위에는 유럽 스타일의 각종 장식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유럽식의 테라스와 창문틀을 갖추고 연립주택 형식으로 지어져 마치 서양 건축처럼 보이는 스쿠먼 주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돌과 목재가 결합된 중국 강남지역의 전통주택의 특징 또한 담겨 있다. 개항 도시 상하이의 굴욕적인 역사가 역설적이게도 동서양의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결합된 스쿠먼 주택을 탄생시킨 것이다.

“들어온 모든 것은 상하이의 일부다”

스쿠먼이 도시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상징하는 상하이의 얼굴이 된 것처럼, 오늘날 상하이에서 개항 도시와 식민의 경험은 잊고 싶은 과거가 아니라, 이 도시가 다양한 문화에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가능성을 갖게 한 근거로 이해된다. 결국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모더니티와 식민주의 등 상하이를 둘러싼 대립적 이미지는 모두 상하이의 다양한 얼굴 중 하나였다. 본래의 기원과는 상관없이 상하이에 들어온 순간 이 모든 특성은 상하이다움의 일부가 되었다. 어디에서 발원한 강물이든 상관없이 모두 포용하는 바다를 의미하는 ‘해납백천(海納百川)’이라는 말이 오늘날 상하이의 도시정신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하이의 개방적 특성 때문이다.

다만 모든 것을 포용하는 다양성과 세계주의의 상하이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은 아니라는 사실이 못내 씁쓸하다. 시내의 고층 아파트와 고급 백화점은 물론이고, 프랑스 조계의 서양식 저택을 개조한 부티크 호텔이나, 미슐렝 별점에 빛나는 와이탄의 레스토랑, 스쿠먼을 개조한 독일 정통 맥주집 어디에서도 출신지를 따지지는 않지만,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초국적 계급이나 극소수의 부유한 중국인들이다. 상하이라는 큰 바다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상관없이 모든 강물을 받아들인다. 다만 자본이라는 거대하고 빠른 파도가 바다를 아름답게 만든 다양한 물길을 집어삼켜버리진 않을까 걱정스럽다. 다국적 자본에 의해 획일화된 세계의 다른 대도시와는 다른 상하이의 진짜 얼굴을 우린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지은 -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며 동아시아의 문화지리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상하이의 도시 변화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도시와 장소 기억>를 펴냈다. 그 외 저서로는 <서울스토리>(공저), 번역서로는 <지리학의 창으로 보는 중국의 근대> 등이 있다.

201509호 (2015.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