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책갈피] 역사에서 사라진 한 민족지도자를 복원하다 

일제강점기 신안 도서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 4·19혁명의 시원이 된 ‘광주 3·15의거’ 이끈 사실 밝혀내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민족운동가 장병준(1893~1972)은 낯선 이름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독립투사처럼, 선생은 항일운동의 선두에 섰던 주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기록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직보호를 위해 활동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움직인 탓이다. 해방 이후에도 스스로 전력을 과시해 이득을 취하거나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런 강직함 때문에 선생의 일생은 주목받지 못했다.

<장병준 평전>은 이렇게 수십 년 잊혀져 있던 고인의 일생을 복원한 첫 작업이다. 지은이는 10여 년 넘는 긴 세월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사료를 한 땀 한 땀 조각보 이어 붙이듯 되살렸다. 가족과 친지, 지인과 학자들 인터뷰를 진행하며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한 지도자의 길을 좇아갔다. 추적과 분석과 재구성의 과정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항일 민족운동사의 귀중한 유산을 파내는 발굴과 같았다.

장병준은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도에서 개척의지가 강하고 교육열이 높았던 인동 장씨 가문 태생이다. 1919년 만세 시위를 주도하며 지역의 운동가로 떠오른 뒤 서울을 거쳐 중국 상하이,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삶을 보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의정원 의원을 거쳐 목포 신간회의 간사로 민족통일전선의 주역으로 활동하는가 하면, 해방 뒤에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4월혁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평생을 제국주의 또는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운 영원한 투사였다.

워낙 자료가 없던 선생인지라 평전 전체 내용이 다 귀중하지만 그중에서도 4·19혁명의 시원이 된 ‘광주 3·15의거’를 밝힌 점은 뜻 깊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상상을 초월한 선거부정을 알게 된 당시 67세 장병준 선생은 그날 낮, 이에 항의해 전국에서 최초로 규탄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은 ‘곡(哭) 민주주의 장송(葬送)’이라 쓴 현수막을 직접 펼쳐 든 채 시위대 선두에 섰는데 이 모습이 외신을 타고 보도되기도 했다.

일찍이 선생의 비범함에 눈떠 2013년 논문 ‘장병준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발표한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일제는 이 가공인물이 누군지 추적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서술했다. 장병준이란 인물이 그만큼 탁월한 의지와 헌신의 민족운동가였다는 방증이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처참한 옥살이, 끈질긴 감시와 탄압에도 선생은 끝까지 저항하는 기개를 보였다. 통합과 연대정신, 도전과 개척정신, 동아시아의 바다와 대륙을 넘나드는 적극적이고 창조적 실천력이 그를 다른 운동가들과 구별하게 만든다. 이 교수는 “그의 삶은 오늘날 우리가 항일 민족운동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필자는 “일제강점기에 온 삶을 바쳐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 수천, 수만의 선열이 아직도 익명으로 잠들어 있다”며 이 책이 익명의 선열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했다.

일제강점기 신안 도서 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였던 장병준의 일생은 19세기 말 장산도라는 작은 섬에서 출발해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전역을 누비며 한겨레의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장병준의 호는 포양(包洋)이다. ‘바다를 품는다’는 선생의 호 그대로 바다보다 크고 넓은 고인의 정신을 오늘 되새긴다.

-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201605호 (2016.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