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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창조의 본고장’ 바우하우스를 가다④] 네 번째 이야기 |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세상의 모든 건축은 예술이다” 

글 김정운 문화실리학자 / 사진 윤광준
산업디자인 선구자 페터 베렌스 영향받아 예술의 대중화 선언… 바우하우스 교장 취임해 건축을 중심으로 한 예술운동 추진
#1. “바이마르 공예학교 교장직을 맡으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시작은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의 편지였다. 1915년 4월 11일, 당시 바이마르 작센 대공 예술공예학교 교장이었던 반 데 벨데는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와줄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 벨기에의 대표적 건축가 겸 공예가였던 반 데 벨데는 1901년 작센 공국의 초청으로 바이마르에 왔다. 원래 화가가 되고자 했던 그는 파리에 유학하여 인상파의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회화의 미래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가지게 된 후, 건축과 공예에 집중하여 아르누보, 유겐트슈틸, 데 스틸과 같은 당시 새로운 예술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벨기에 사람이지만 1907년 결성된 ‘독일공작연맹(Das Deutsche Werkbund)’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예술적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진다고 느낀 당시 작센 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Wilhelm Ernst) 대공은 바이마르의 문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 당시 대표적 문화인이었던 반 데 벨데를 초청했다. 그는 그러한 대공의 기대에 부응하여 공예연구소를 만들고, 1906년에는 바우하우스의 모태가 되는 작센 대공 공예학교도 설립한다. 그리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한다. 자신의 공예학교 바로 맞은편의 작센 대공 미술학교 교사를 새로 건축하고, 바이마르의 니체 기록보관소 실내 인테리어를 디자인하는 등 예술 도시로서의 바이마르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의 조국 벨기에는 독일의 적국이 된다. 반 데 벨데는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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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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