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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세계유산 ‘수원화성’ 100배 즐기기 

정조대왕의 꿈 조선 최초의 계획 ‘신(新) 도시’ 

수원=임명수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18세기 조선을 개혁적으로 이끌었던 정조의 대표작 ‘수원화성’… 풍수지리설과 유교질서를 거부한 혁신의 방식으로 건설

▎수원화성의 야경. 수원화성은 수도 한양과 ‘삼남(충청·경상·전라도)’을 잇는 거점이었다. 정조는 이곳을 교통의 중심지이자 경제의 핵심도시로 삼으려 했다.
정조대왕의 개혁을 상징하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올해로 220주년을 맞았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정치사·인간사가 실체화된 도시다. 18세기 조선을 이끌었던 그는 이곳을 조선의 핵심도시로 키우고자 했으며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지낼 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조가 수원화성에 애착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 조선시대의 모든 고을은 풍수지리설과 유교적 질서에 따라 주산 아래 관청을 두고 남향으로 지어졌다. 임금이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하는 형상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또한 산으로 둘러싸여 폐쇄적인 곳에 위치할 경우 물자유통이 어려웠기에 반드시 동서방향으로 도로를 냈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달랐다. 관청을 동향으로 짓고 동서가 아닌 남북방향으로 도로를 냈다. 이는 마치 임금이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형상과도 같았다. 어째서 수원화성은 유교적 질서를 어기는 방식으로 지어졌을까?

18세기 조선을 개혁적으로 이끌었던 정조는 수원화성을 교통의 중심지이자 경제의 핵심도시로 키우고자 했다. 수원화성을 수도 한양과 ‘삼남(충청·경상·전라도)’을 잇는 거점도시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한양과 지방을 잇는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다.

좌로(左路)인 ‘영남대로(嶺南大路)’는 서에서 충주를 지나 대구로 나가는 길로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치러 오갈 때 주로 이용했다. 우로(右路)는 한양에서 수원·공주를 차례로 거쳐 삼남으로 가는 길었는데 좌로에 비해 잘 이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우로의 역할이 새삼 강조됐다. 충청·전라도 지방에서 나는 각종 물자의 유통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정조는 한양과 삼남을 연결하는 우로를 보전하기 위해 수원화성을 동향으로 짓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새로운 도시를 만들다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달빛동행’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민들. 2014년부터 마련한 이 프로그램에는 정조의 ‘수원화성 축성’ 과정을 들려주는 역사 강의도 포함돼 있다
풍수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를 공급하는 용맥(龍脈)이다. 용맥이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져 있어야 좋은 땅이다. 기의 흐름이 빠져나가는 ‘수구(물이 흘러 나가는 곳)’는 잘 닫혀 있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원화성의 주산(主山)인 팔달산은 홀로 덩그러니 위치한 산이어서 용맥이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의 산줄기 체계를 정리한 지리서 <산경표>에는 팔달산이라는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계보(系譜) 없는 산이라는 의미다. 게다가 팔달산에는 채석장이 있었다.

본래 혈이 맺혀 있는 주산에서 돌을 캔다는 것은 ‘용맥을 끊는다’라는 뜻이다. 한 개의 바위라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팔달산의 경우 당시 대놓고 채석을 했기 때문에 풍수지리적 관념이 적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수원화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화성사업소 문화유산관리과 오선화(43·여)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본래의 수원은 현재 융건릉이 위치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일대였다. 그런데 1789년 새로 부임한 수원부사가 수원부 읍내를 현재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겠다고 발표했다. 기존의 수원부 읍내에는 왕실의 무덤이 들어설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수원부 백성들에게는 이주의 대가로 이사비용이 지급됐다. 초가 3칸의 소유주에게는 6냥, 기와집의 소유주에게는 400냥 정도가 집값으로 지급됐다. 당시 쌀 한 섬이 3냥 정도 거래되고 있었다. 큰 값은 아니었지만 이주에 금전적 보상이 따른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수원부 백성들도 큰 동요 없이 수원화성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그렇게 수원부 백성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왕실의 무덤이 들어섰다. 바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었다. 원래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었던 이 무덤은 아들 정조에 의해 풍수지리가 좋은 수원부 읍내로 옮겨졌다. ‘현명한 이를 융성하게 만든다’는 의미의 ‘현륭원(顯隆園)’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수원부 백성들이 새롭게 터전을 잡게 된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자급자족 기반을 구축한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이는 그가 즉위 초반에 구상했던 4대 개혁과제 중 하나였다. 우선 정조는 수원화성의 규모와 위상을 수도에 버금가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우선 최고의 축성 기술을 이용해 공격과 수비에 용이한 성곽을 쌓도록 했다.

‘개혁정치’ 실행자로 발탁된 다산(茶山) 정약용


▎2016년 수원방문의 해를 맞아 수원화성은 5~10월 야간에도 개방된다. ‘달빛동행’ 프로그램을 통해 정조대왕의 전통연회와 성곽 야경을 관람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서울의 육의전(六矣廛)처럼 수원화성에도 시전(상설점포)을 설치해 상업발전을 이끌도록 했다.(육의전은 정부로부터 독점적 상업권을 부여받아 국가 수요품을 조달하는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수원화성의 행궁 앞 네거리에 처마와 처마를 잇댄 시전을 설치해 수시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게 했다.

정조는 농업도 중시했다. 그는 1794년 장안문 밖에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국영농장)을 만들도록 했다. 당시 큰 가뭄으로 백성들이 끼니를 잇기 힘들자 농토 개간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안정적인 물공급을 위해 만석거도 만들었다. ‘쌀 만석을 얻기 위한 만든 저수지’라는 뜻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넓은 땅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고 불렀다. 현재 수원시 연무동에 위치한 장안문부터 경기도 성남시 고등동까지 이어지는 곳이 대유평에 해당된다. 만석거는 현재 시민의 산책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조는 대유평을 수원화성의 백성에게 씨앗, 농기구, 소와 함께 나눠주며 농작을 독려했다.


▎수원화성의 화서문. 조선 최초로 벽돌 재료가 건축양식에 도입되면서 종래의 직각 형태의 문이 아닌 둥근 모서리 형태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성곽은 이원구조로 돼있다. 평소 읍내에 살다가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피란 가는 것이 보편적이다. 전쟁 시 지형조건을 갖춘 산성이 적군을 방어하는 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어체계를 산성에만 의존하다 보니 읍내에는 제대로 된 방어시설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적군의 침입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수원화성에 성곽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수원화성이 건설된 1790년 무렵이다. 당시 수원화성은 수도 한양으로 진격하는 적군을 막아야 하는 부수적인 역할도 해야 했다. 상업발전으로 삼남지방과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우로의 활용이 많아진 결과 남쪽의 방어진지 구축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선 정조는 수원부를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유수란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수도방위역할을 했던 곳이다. 경기도에는 이미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인조가 피신한 적이 있던 강화와 남한산성이 유수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수도 한양과 동일한 구조로 지으라”


▎수원화성의 성곽. 정조는 정약용에게 “조선 최고의 기술로 공격과 수비에 용이한 성곽을 지으라”며 축성을 지시했다.
축성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자 정조는 신진학자들에게 새로운 성제를 연구할 것을 주문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시험 당시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답을 써내 정조로부터 개혁정치 실행의 적임자로 낙점된 인물이다.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길 때 한강에 다리를 설치하고 수원화성의 축성설계를 맡았다. 우선 그는 우리나라 성곽제도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중국의 성제를 비교연구한 후 새로운 성곽안인 ‘성설(城說)’을 만들었다.

성설에 따르면 수원화성의 둘레는 3600보(1보 대략 120㎝, 총 길이 4.2km), 높이는 2장5척(약 7m)에 달한다. 수원화성의 축성은 1794년 정월에 시작해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화홍문. 화홍문은 수원화성에 물이 들어오는 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경치가 좋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수원화성의 성벽 바깥쪽은 8장의 석축으로 두껍게 쌓아 올렸다. 쌓는 방식도 석축의 모서리가 서로 어긋나도록 해 강도를 높였다. 성벽 안쪽은 대량의 흙을 쌓아 올렸다. 현재 이곳은 산책로가 조성돼 관광객과 지역 주민의 여가생활에 이용되고 있다.

수원화성의 성문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이곳의 얼굴과 같다. 이 문을 정조는 수도 한양의 숭례문과 똑같은 중층문루(2층 구조)로 지으려 했다. 그러나 한양에서는 중층문루를 지을 수 있는 건축장인이 없었다. 17세기 창덕궁이 지어진 후 중층문루 기술이 제대로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국 팔도를 수소문한 끝에 강원도의 한 사찰을 찾아냈다. 당시 ‘굉흡’이라는 이름의 승려가 중층문루로 사찰을 지어왔던 것이 확인됐다. 굉흡은 곧바로 수원화성의 장안문 건축에 투입됐다. 이후 그는 장안문 외에도 방화수류정과 북서포루를 지었다.

굉흡을 비롯한 숙련된 목수들이 터를 닦으면 7~10일 후 윤사범·권성문 등 젊은 목수들이 투입돼 굉흡의 방식을 흉내 내며 같은 구조의 문을 지었다. 바로 팔달문이었다. 굉흡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한 덕에 쌍둥이 대문이 나올 수 있었다.

공심돈(空心墩)은 성곽에서 떨어진 요충지에 망루를 설치해 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로 현재 수원화성에만 있다. 그 원형은 중국의 병서 <무비지>에 등장한다. 본래 돈(墩)은 망을 본다는 뜻의 후候)와 함께 써서 돈후(墩候)라고 부른다.

세 개의 공심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서북공심돈’ 한 개뿐이다. 서북공심돈은 수원화성의 성곽 중 하나인 화서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성벽의 일부를 약간 돌출시켜 치성을 만들고 내부공간을 비워 벽돌을 쌓아 3층의 망루를 만들었다. 전체 높이는 약 13m다. 각 층별로 군사들이 들어가 조총을 사용했다.

이 같은 벽돌 건축물은 수원화성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석축의 경우 화포 공격 시 한번에 무너지지만 벽돌로 지었을 경우 맞은 곳만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특히 벽돌 재료가 건축 양식에 도입되면서 직각형태의 시설물이 둥근 모서리 형대로 변화됐다.

봉수당·장락당, 정조의 혜경궁 홍씨를 향한 효심(孝心)


▎방화수류정. 수원화성의 동북쪽 모서리에 우뚝 솟아 있는 방화수류정은 네 곳의 각루 중 하나로 용연(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다.
수원화성에서 가장 경치가 좋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다. 화홍문은 물이 들어오는 문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방화수류정은 화성에 있는 네 곳의 각루 중 하나로 용연(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다. 성의 동북쪽 모서리에 우뚝 솟아 있는 방화수류정은 주변을 감시하는 각루이자 연못을 감상하는 정자 역할도 했다. 정조는 이곳에서 주변 풍광을 감상하고 시를 짓곤 했다.

대포를 쏘는 포루(砲樓)도 수원화성에만 있는 시설이다. 성벽의 일부를 외부에 돌출시켜 만든 3층 높이의 공격시설이다. 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내부공간을 비워 적군의 동향을 감시하고 포를 쏠 수 있도록 했다. 성문 양쪽에는 가까이 온 적군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한 적대(敵臺)도 설치됐다.

행궁은 임금이 궁을 떠나 며칠을 머무는 곳을 말한다. 일시적으로 임금이 머무는 경우를 대비해 만든 행궁도 있지만 수원화성의 행궁은 정기적인 방문을 위해 지어졌다.

수원화성의 행궁은 정조가 정기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는 동안 머물기 위해 지었다. 국내 유명 행궁으로는 유사시 피란처로 만든 남한산성의 광주행궁, 북한산성의 양주행궁과 강화행궁이 있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행궁은 여느 일반 행궁과 다르다.

보통 행궁의 규모는 100여 칸(기둥과 기둥 사이를 한 칸으로 본다)인데 반해 수원화성의 행궁은 무려 600여 칸으로 이뤄져 있다. 이렇게 크게 지은 이유에 대해 한때 역사학자 일부는 아마도 정조가 수도를 수원화성으로 옮기기 위한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화성으로 내려와 살면서 현왕을 보좌하는 상왕의 역할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설이다. 1805년은 순조가 15세가 되는 해다. 이때 정조는 퇴임 후 어머니와 함께 머물 거처를 수원화성에 마련하고자 했다. 이곳 행궁의 전각 명칭이 이런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

노래당(老來堂)·미로한정(未老閒亭) 등이 대표적이다. 노래당은 말 그대로 나이가 들어서 돌아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미로한정 역시 나이 들어서 한가로움을 즐기기 위한 정자를 의미한다. 수원화성의 행궁에서 진행됐던 최대의 행사는 1795년에 열린 정조 모친의 회갑잔치였다. 이때 정조는 회갑연 준비를 위해 본래 300여 칸으로 지었던 이 행궁을 576칸으로 증축했다.

회갑연이 열렸던 봉수당(奉壽堂)의 본래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다. 정조가 현릉원 참배 시 머물던 곳으로 사용됐다. 이후 회갑연의 행사장소로 쓰기 위해 그 명칭을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바꿨다. 이어 봉수당과 연결된 장락당(長樂堂)을 새로 지어 어머니가 언제든지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했다.

봉수당과 장락당의 지붕은 한쪽 모서리가 맞붙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다. 정조는 어머니가 장락당에서 마루를 이용해 봉수당으로 바로 들어올 수 있길 바랐다. 모친이 이동할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정조의 효심이 드러난 건축이다.

이 행궁은 삼조삼문(三朝三門)의 형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삼조란 왕의 명을 받아 신하가 일을 하는 외조,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직접 업무를 보는 치조, 왕의 건강을 위한 휴식공간 내조를 뜻한다. 삼문이란 전각에 다다르기 전에 통과해야 하는 세문을 말한다.

정조 어진을 모신 진전(眞殿), 아름다운 화령전


▎화령전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1801년에 만든 건물이다. 순조는 어진을 잘 봉안하기 위해서 5일에 한 번씩 이곳을 살폈다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에 가기까지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수원화성 행궁 역시 봉수당에 다다르기 전에 정문이자 바깥문인 신풍루(新豊樓)·가운데문 좌익문(左翊門)·안쪽의 문 중양문(中陽門)을 거친다.

이 행궁의 원형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낙남헌(洛南軒)이다. 낙남헌은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위해 행차했던 1795년 당시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행사와 수원부에 사는 연루한 백성을 위로하는 양로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시대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건물을 진전이라고 부른다. 어진은 또 한 분의 임금과 같은 존재였다. 어진을 옮길 때는 가마를 사용하고 살아계신 임금과 다름없이 예우했다.

진전은 한 임금의 어진을 모신 진전과 여러 임금을 모신 진전이 있다. 한 임금의 어진을 모신 진전으로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과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이 유일하다. 여러 임금을 모신 진전으로는 궁궐 안에 있었던 선원전과 별개로 궁밖에 있었던 영희전이 있었다.

경기전은 전북 전주에 있다. 현재까지도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경기전에 모셔져 있다. 반면 화령전에는 정조의 진본 어진이 없는 상태다. 표준영정(어진이 남아 있지 않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가본)이 모셔져 있다.

정조의 어진이 사라진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어진들을 모두 창덕궁 신선원전으로 옮긴 후 보관했는데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소실됐다는 것이다. 그때 정조의 어진이 불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몇 개의 어진은 모두 불에 타 반쪽만 남은 것들이다. 철종 어진이 대표적이다. 화령전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1801년에 만든 건물이다. 순조는 어진을 잘 봉안하기 위해서 5일에 한 번씩 살펴보았다. 정조의 생신은 물론 수원화성에 유수가 새로 부임하거나 후대 왕이 행차했을 때마다 화령전에서 전배를 올렸다.

화령전은 당시 진전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지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단정함을 간직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기에 낡았지만 은은한 나무의 색이 그대로 남아있어 웅장함마저 느껴진다. 화령전 가운데 어진을 모시는 건물은 운한각(雲漢閣)이다. 이 운한각의 중심에는 내합(內閤·초상화를 모신 틀)이 설치돼 있다. 내합은 진전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운한각 뒤쪽에는 아궁이가 하나 있다. 이 아궁이는 실내에 열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안쪽에 온돌이 있다.

이 온돌은 정조의 어진이 위치한 내합에만 설치돼 있다. 생전의 정조를 모시듯 사후에도 안락하게 모시고자 하는 아들 순조의 효심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온도를 높여 습기를 방지해 초상화를 잘 보전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서북공심돈·방화수류정이고 현재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 외 대부분의 목조건축물은 훼손·소실됐다가 1970년 화성성역의궤(화성축조공사기록)를 바탕으로 재건됐다.

하지만 여전히 복원되지 않은 곳도 있다. 팔달문 주변의 성곽이다. 450여m 구간이 단절된 상태다. 팔달문 좌우에 설치된 적대와 3개의 공심돈 중에 남공심돈·남암문이 복원되지 않았다. 이곳에 팔달문시장과 도로 등이 들어서서 복원이 힘든 상태다. 상남지(上南池)·하남지(下南池)·북지(北地)·동지(東池)·상동지(上東池) 등 수원화성에 있던 5개의 연못도 복원되지 못했다.

“18세기 동양을 대표하는 군사 건축물의 걸작”


▎어진. 어진은 또 한 명의 임금과 같은 존재였다. 어진을 옮길 때는 가마를 사용하고 살아있는 임금과 다름없이 예우했다.
수원시 화성사업소는 현재 남지와 북지 복원을 위해 해당부지의 토지보상을 마친 상태다. 팔달산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남지에 모였다가 성 밖으로 흘러나가는데 그 물이 나가는 곳을 은구(隱溝)라 한다. 남(南)은구·북(北)은구 역시 복원될 예정이다. 오는 2030년까지 모두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1995년 석굴암 불국사·종묘·해인사 장경판전 이후 1997년 창덕궁과 수원화성이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수원화성의 경우 등재과정이 쉽지 않았다. 창덕궁은 정부에서 직접 추진했지만 수원화성은 수원시와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등재에 나섰는데 당시 정부의 문화재청은 수원화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권고하지 않았다.

수원화성이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타국의 거대한 성곽과 비교했을 때 훼손의 정도가 심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수원시는 수원화성은 복원의 근거가 됐던 화성성역의궤 기록이 있기에 세계유산 등재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이 당시 자비로 화성성역의궤를 복제해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1997년 4월 유네스코에서 파견된 화성의 조사관은 스리랑카의 건축가이며 문화재 전문가인 니말데 실바(Nimal De·silva) 교수였다. 실바 교수를 비롯한 조사위원들은 “수원 화성의 역사는 불과 200년 밖에 안되지만 성곽의 건축물이 동일한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며 “동서양의 과학적 특징이 통합된 18세기 동양을 대표하는 군사 건축물의 걸작이다”라고 평했다.

세계에서 인정받은 아름다운 수원화성이 특별한 행사를 준비했다. 수원시는 수원화성을 적극적으로 시민에게 알리기 위해 ‘달빛동행’이라는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매년 5월~10월 음력 보름을 전후해 수원화성을 밤에도 개방한다. 화성열차를 타고 달빛 성곽 야경을 즐길 수 있으며 화성행궁에서 전통연회를 즐기는 특별한 여정도 포함될 예정이다.

- 수원=임명수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지난 5월 ‘달빛동행’ 프로그램에 처음 등장한 화성열차. 시민들이 열차를 타고 수원화성 성곽의 야경을 관람하고 있다.
[박스기사] 220년 전 모습 그대로…정조대왕 화성행차


서울·수원시, 10월 초에 창덕궁~화성 46㎞ ‘능’ 행차 재현…인원 2281명, 말 430필 동원해 대규모 한류 퍼레이드 기획

“경기감사가 선두에 서면서 ‘길을 비켜라’를 외친다. 2m 정도 거리를 두고 우의정이 뒤쪽 무리를 이끌며 걷는다. 말 탄 장수들로 구성된 별기대가 호위하며 가마를 탄 혜경궁 홍씨가 뒤따른다. 그 뒤로는 말을 탄 정조대왕과 정조의 여동생 2명이 가마를 타고 따른다.”

1795년 윤 2월 9일(음력) 오전 창덕궁 앞의 광경이다.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가 잠든 수원 화성 융릉까지 참배하기 위해 떠난 능행차(陵行次)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나오는 대목이다. 일반 병사들까지 합치면 대열 길이는 최장 1.5㎞나 됐다. 서울시와 수원시가 최근 수원화성 축조 220주년을 맞아 10월 8∼9일 서울 창덕궁에서 출발해 수원 화성행궁(行宮)까지 가는 46㎞ 구간에서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한다. 창덕궁∼화성 행궁 구간을 한꺼번에 재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7년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각별한 인연이 있는 창덕궁과 수원화성이 이번 능행차를 통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화성행궁 도착 이후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하는 ‘융릉제향’까지 재현할지는 아직 미정인데 화성시와 전주 이씨 종친회의 협조를 구하는 중이다.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수원 이동에 이틀이 걸렸고, 수원에 나흘간 머물고, 다시 이틀이 걸려 창덕궁으로 돌아와 능행차에 모두 8일이 소요됐다. 이번에는 10월 8~9일 이틀간 창덕궁~화성행궁 여정이 서울과 수원 구간으로 나눠 재현된다.

우선 서울시 재현 담당 구간(20.6㎞)은 서울 창덕궁(종로구 와룡동)부터 시흥행궁(금천구 시흥동)까지다. 1231명이 투입되고 160필의 말이 동원된다. 행사날 오전 출발지인 서울 창덕궁에서 출궁(出宮) 의식이 치러진다. 이때 정조의 신하들이 화성행궁으로 떠나는 정조를 알현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숭례문에서도 별도의 출성(出城)의식이 열린다. 이후 한강대교 쪽으로 5㎞를 이동해 한강 노들섬에 연결된 배다리(길이 300m·폭 20m)를 지난다. 나무와 철제 소재의 배다리는 행사 한 달 전인 9월쯤 설치된다. 이어 동작구 본동의 노량행궁을 지나 시흥행궁까지 12.3㎞를 행차한다.

2007년에 정조의 창덕궁~수원 화성 능행차를 재현한 모습. 수원시 재현 담당 구간(25.4㎞)은 둘째날인 10월 9일 오전 9시에 시작된다. 정조를 포함한 30명이 말을 타고 시흥행궁을 출발해 4.9㎞ 떨어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교까지 이동한다. 이어 만안교에서 화성행궁과 연무대까지 20.5㎞ 구간에서 능행차를 재현한다. 이 구간에만 1050명과 270필의 말이 동원된다.

수원 구간에서는 유커(중국인 관광객)를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가 마련된다. 정조가 지날 때 백성이 임금에게 민원사항을 호소하기 위해 꽹과리를 치는 행동(‘격정’)을 연출한다. 또 임금이 각 지역에 진입할 때 지역 유수가 나와 마중하는 ‘정조맞이’도 보여준다. 능행차 곳곳에 백성들이 윷놀이 등을 즐기는 장면도 연출된다.

강희은 서울시 역사문화재과장은 “능행차의 출발지(서울 창덕궁)와 도착지(수원 화성)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며 “이번 재현 행사를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재를 세계에 알릴 수 있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동근 수원시 제1행정부시장은 “능행차를 대한민국 최대 한류 퍼레이드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201607호 (2016.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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