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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취재] ‘롯데’ 수사 132일, 결국 실타래는 못 풀었다! 

미궁에 빠진 총수 일가의 비자금과 로비 행방 

문병주 중앙일보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지난 8월, 이인원 롯데 부회장이 남긴 “2015년 초까지 롯데그룹의 모든 결정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했다”는 유서 때문에 난관에 부딪힌 검찰 수사의 속사정

▎지난 6월 검찰은 롯데그룹을 상대로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하며 수사의 포문을 열었다. 3개월 내 수사를 마무리짓겠다고 초강수를 뒀다. 그러나 이인원 롯데 부회장의 자살로 수사는 흐지부지돼버렸다.
지난 8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의 북한강 옆 산책로. 오전 7시쯤 아침 운동을 나온 동네 주민의 눈에 산책로 옆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는 남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목에는 끊어진 넥타이 일부가 매여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스카프와 연결된 채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오전 8시가 지나자 인터넷과 방송에 속보가 뜨기 시작했다. ‘롯데 2인자 이인원 부회장 자살!’

롯데그룹의 경영 전반에 대한 의혹을 수사 중이던 검찰에 비상이 걸렸다. 이날 이 부회장은 서울중앙지검에 오전 9시 30분까지 나와달라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검찰 수사에 대한 압박감에서 자살했다’라는 해석이 가장 먼저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검찰 쪽으로 화살이 향하지 않았다. 검찰 조사과정에서 혹은 소환조사 후에 일이 벌어졌다면 강압수사 논란이 거세졌을 터였다.

검찰 수사를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기업인은 한둘이 아니었다. 1987년 투신자살한 범양상선 고(故) 박건석 회장은 회사 경영악화와 경영진 내분 등에 시달리던 중 검찰에서 조세포탈과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은 2003년 8월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서울 계동 사옥에서 뛰어내렸다. 대북 송금 및 현대그룹 비자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 씨에게 사장 연임 청탁과 함께 3000만원을 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2004년 3월 한남대교에서 뛰어내렸다. 노 전 대통령이 “형의 청탁을 받은 뒤 남씨가 연임되지 않도록 했다”고 밝힌 기자회견 직후 “내가 모두 짊어지고 가겠다”는 말을 남겼다.

수사의 변곡점이 된 이인원 부회장의 자살과 유서


▎지난 8월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이 자살했다. 국과수에서 이 부회장의 부검을 하기 위해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응급차로 이송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에는 자원개발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성완종 전 경남그룹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로비 대상 이름과 액수가 적힌 ‘성완종 리스트’와 함께 “내가 왜 자원 외교 비리의혹 수사의 표적이 됐는지 모르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부회장의 자살은 이들의 선택과는 다르게 포장됐다. 그는 “억울하다”거나 “내가 다 짊어지겠다”는 말이나 글을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전날 오후 10시쯤 직접 자신의 제네시스 G900세단을 몰고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평소 답답할 때면 찾던 북한강 산책로였다.

이 부회장은 회사를 그만두면 이곳에 정착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튿날 차 안에서는 가족들과 롯데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형식의 편지가 A4용지 4매 분량 발견됐다. 유족들의 반대로 전체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경찰과 검찰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가족들에게 그동안 집안 일로 힘들었다는 내용을 남겼다.

“그동안 병간호 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말들이 알려진 요지다. 이 부회장을 10년 넘게 옆에서 보필하던 직원 등에 따르면 병간호는 부인에 대한 가족들의 병간호를 의미했다. 이 부회장의 부인은 2000년대 초 집 근처(서울 동부이촌동) 한강공원에서 이 부회장과 산책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후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등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뇌를 다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은 오후 6시 퇴근하면 매일 집에 가서 부인에게 밥을 떠먹여주고 오후 7~8시쯤 부인을 데리고 산책을 가거나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가는 일을 묵묵히 반복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엔 부인이 대장암 수술까지 받아 걱정이 더 컸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이런 심정을 친분이 있는 몇몇에게 알리고 삶의 고단함도 토로했다. 그가 회사 임직원에게 남긴 유언도 있었다. 롯데 측에 따르면 유서에는 ‘2015년 초까지 모든 결정은 신격호(94) 총괄회장이 했다’는 말과 ‘신동빈(61)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글이 담겨 있었다.

검찰에 따르면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검찰 관계자는 “신 회장을 중심으로 뭉쳐야 롯데가 잘 될 수 있다는 취지의 글”이라고 전했다. 이 내용은 롯데 관계자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됐다. 자신에게 소환 통보했던 검찰을 향해서는 ‘롯데 비자금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부회장과 롯데를 변호했던 변호인이나 지인에 따르면 그가 남기고 싶은 말은 후반부에 녹아 있다. 이 부회장의 지인은 “개인적 삶의 고단함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표시한 것이고, 자살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결국 검찰 수사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와 관련, 롯데 내부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 “이 부회장이 수사를 자기 선에서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 소환 전인 8월 15일 소진세(66) 정책본부 대외협력단장(사장)을, 25일에는 황각규(61) 정책본부 운영실장(사장)을 소환 조사했다.

이들은 이 부회장과 더불어 ‘정책본부 3인방’으로 불렸다. 이어 26일 이 부회장에 대한 소환조사를 마치고 나서 신동빈 회장을 부를 계획이었다. 세 사람의 소환통보 전 롯데그룹 정책본부 주변에서는 “이 부회장이 결국 책임을 져야 하는 구도”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 부회장은 그룹 정책본부장이자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한 뒤 주요 보직을 두루 맡으며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을 보필했고, 신동빈 회장으로 그룹의 실질적 운영이 넘어오고 나서도 그룹의 주요 사안을 모두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한 내부의 보이지 않는 압박은 대단했다는 후문이다.

역대 최대 규모의 수사인력 투입했다지만 단숨에 ‘급제동’


▎8월 27일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 빈소에 신동빈 회장과 임직원들이 조의를 표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1973년 롯데호텔에 입사한 뒤 창업주 신격호 총괄회장을 보필했다. 최근 신동빈 회장으로 그룹의 실질적 경영권이 넘어오고 나서도 그룹의 주요 사안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가 남긴 “롯데 비자금은 없다”, “2015년 초까지 모든 결정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했다”는 말은 그가 받은 압박감을 역설적으로 풀어낸 것으로 지인들은 보고 있다.

“비자금을 만들어 총수 일가가 활용하거나 로비에 썼는지 보는 게 검찰 수사의 핵심이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했고, 신동빈 회장에게 주요 책임을 물으려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치매증상을 보이는 아버지가 주요 혐의를 떠안아야 한다는 진술을 한 셈”이라고 검찰 관계자는 해석했다.

이 부회장의 자살로 검찰 수사는 급제동이 걸렸다. 수사를 지휘하던 이동열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이 부회장 소환 예정 이틀 전인 24일 “수사가 7부 능선을 넘었다고 보면 된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룹 정책본부 3인방 소환 조사가 끝나면 바로 총수 일가를 소환 조사해 수사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자살로 검찰은 수사 일정을 수정해야 했다. 6월 10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하며 포문을 열었던 검찰은 애초 추석 연후 전인 9월 둘째 주까지는 수사를 마무리짓겠다는 목표였다. 지난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진행한 자원개발비리 수사와 포스코 수사가 각각 6개월, 8개월간 진행되면서 부작용이 심했고 뚜렷한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던 터라 이번만은 최대한 수사 기간을 줄여보겠다는 계획이었다.

검찰이 수사에 서울중앙지검의 3개 부서 검사 20여 명을 투입했다. 6월 10일 첫 압수 수색 때는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의 3분의 2가량인 240여 명이 현장에 나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검찰의 수사 일정은 한 달 정도 늘어졌다. 8월 말 소환계획이었던 신동빈 회장은 9월 20일에야 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결론은 그로부터 또 한 달이 걸렸다. 10월 19일 검찰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앞서 검찰은 9월 26일 175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신 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범죄혐의에 대한 법리상 다툼의 여지 등을 고려할 때 구속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29일에 기각했다.

신 회장 측은 “신격호 총괄회장이 그룹 경영의 실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신 회장에게 비리의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주장했고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검찰은 법원의 결정에 “사상 최대의 기업비리임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신 회장의 변명을 토대로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또 “그간 대기업 수사 관련 영장 발부 기준과 상당히 다르다. 훨씬 경미한 수십억 원 횡령에 불과한 사건에 대해서도 영장을 발부하고 실형을 선고해온 법원”이라며 “요새 법원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고 따졌다. 신 회장의 영장에 기재된 범죄 규모는 1750억원이나 됐다.

형인 신동주(62)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의 셋째 부인인 서미경(57) 씨 측에게 총 500억원대의 부당 급여를 지급한 것으로 파악됐다. 영화관 매점을 총수 일가 구성원에 불법 임대하며 일감을 몰아주는 등 1200억원대 배임 혐의도 포함됐다. 하지만 영장을 재청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진 않았다.

검찰은 결국 “영장 재청구 여부를 신중히 검토하겠다”며 2주를 끌다가 영장 재청구를 포기했다. 이렇게 롯데에 대한 검찰 수사는 132일 만에 막을 내렸다. 최종 수사결과 발표에서 검찰은 신격호 총괄회장, 신동빈 회장, 신동주 전 부회장을 일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총수 일가 중 구속된 사람은 롯데면세점 입점 대가로 수십억을 받고, 회삿돈을 자녀에게 지급하는 등 8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은 신영자(74)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이 유일하다. 계열사 대표 등 총 24명이 횡령·배임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신 회장 영장 재청구를 둘러싼 검찰과 법원의 신경전


검찰은 롯데 수사를 통해 범죄금액 3755억원에 총수 일가의 횡령성 이득액만 1462억원에 달하는 것을 밝혀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총수 일가가 서미경 씨 등이 지배하는 해외 특수목적법인(SPC)에 보유 중인 일본 롯데홀딩스 주식을 액면가에 넘겨 증여세 858억원 납부를 회피한 것도 드러났다.

이동열 서울중앙지검 3차장은 “수사 성패가 영장으로 평가받는 건 적절치 않다고 본다. 대기업 총수 일가 비리를 밝혀내고 단죄하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검찰의 신 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 포기는 검찰 내부에서 조차 이례적인 판단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자살해서 수사가 더 진척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검찰 스스로 ‘사상 최대의 기업 비리’라고 밝힌 만큼 한 번 정도는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수사팀 내부에서도 영장을 재청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평검사들과 수사관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수뇌부에서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겠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검찰의 이 결정에 대해 해석이 분분했다. 정치적 해석에서부터 검찰 내부 사정이 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이용주 국민의당 의원은 10월 초 서울고·지검 국감을 앞두고 “사드(한반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 배치와 관련해 성주 골프장을 내놓는 대신 롯데그룹 오너 일가 혐의를 봐주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롯데에 대한 검찰의 고강도 수사는 정부가 사드 배치 부지 선정을 고심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방부의 사드배치 부지 확정 발표가 신 회장에 대한 법원 구속영장 기각일인 9월 29일 다음날 이뤄진 걸 근거로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검찰은 당연히 신 회장에 대한 영장 재청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검찰 내부의 복잡했던 상황도 신 회장을 불구속기소키로 결정하는 데 한몫했을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법원과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에서 진행해온 법조비리 사건과 관련이 있다. 특수1부는 9월 2일 인천지법 김수천(57) 부장판사를 구속했다. 김 부장판사는 정운호(51·구속기소)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에게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중고차를 공짜로 받는 등 1억7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김 부장판사 사건수사를 4개월에 걸쳐 진행했다.

판사출신인 최유정(46·구속기소) 변호사가 수임료 반환을 놓고 정운호 전 대표와 다툼하면서 정 전 대표를 둘러싼 각종 로비 의혹이 불거졌는데 이 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김 부장판사 비리가 드러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 전 대표 측 브로커 이민희(56·구속기소) 씨가 얽히면서 다른 현직 판사 3명의 실명도 거론됐다. 당사자들은 정 전 대표나 이씨와의 친분은 시인하면서도 “사건이나 재판 관련 청탁은 없었다”고 펄쩍 뛰었다.

법원은 풍비박산이 났다. 대법원은 9월6일 전국법원장회의를 소집했고, 그 자리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대법원장이 법관 비리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발표한 것은 세 번째로 10년 만의 일이었다. 2006년 8월 조관행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법조 브로커 김홍수 씨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이용훈 당시 대법원장이 대국민 사과를 한 바 있다.

법원 내부가 부글거렸다. 익명을 원한 한 중견 판사는 “검찰이 법원을 욕보이려고 작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김 부장판사에 대한 비리가 수사팀에 입수된 후 4개월 동안 사건을 만지작거리며 보이지 않는 압박을 법원에 가했다”고 덧붙였다.

그가 말한 압박은 검찰의 다른 수사와 관련한 압수수색영장, 구속영장 등의 발부와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서울중앙지검이 명운을 걸다시피 한 롯데 비리 수사와 관련해 판사들이 심적 압박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와중에 ‘잘나가던’ 검찰의 롯데 수사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수사의 최종 목표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 로비’였지만…


▎6월 10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검찰 수사관들이 신동빈 회장 집무실 등에 대한 압수품을 차량에 옮기고 있다. 이날 서울중앙지검 수사관의 3분의 2가량인 240여 명이 투입돼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8월 16일 검찰은 허위 회계자료를 만들어 정부를 상대로 세금 환급 소송을 제기해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법인세 220억여 원을 포함해 모두 270억원대 세금을 돌려받은 ‘소송 사기’를 벌인 혐의로 허수영(65) 롯데케미컬 사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허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수사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고 당시 수사팀 분위기를 전했다.


▎9월 20일에는 2000억원대 배임·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신동빈 회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했다. 검찰은 신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구속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검찰 수뇌부의 고심도 깊어졌다. 김수천 부장 판사에 대한 수사가 막바지로 향하면서 법원이 검찰의 각종 수사에 대한 ‘견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 당시 법원의 중견 판사들 사이에는 “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최근 검찰이 청구하는 롯데 관련 영장 기각은 당연하다. 나라도 그렇게 판단하겠다. 검찰이 애초 약속했던 압수수색과 계좌추적 범위를 넘어서 수사를 무작위로 확대한 측면이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동렬 3차장은 수사결과 발표 시에 “수사 성패를 법원의 영장 발부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수사팀 내부에서도 수사 시작 전 탄탄하지 못했던 내사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회의장에서는 내사를 전담했던 특수4부 검사들과 수사에 나중에 투입된 첨단범죄수사부 검사들 사이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갈등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검찰 내부에서 “진경준 전 검사장과 정운호 사건에 휘말린 홍만표(57) 전 검사장을 구하기 위해 설익은 곳에 칼을 들이댔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사상 최대의 기업비리를 밝혀냈다”고 자평한 검찰이 롯데 수사의 궁극적 목표로 삼았던 건 무엇이었을까. 수사가 진행되는 내내 이동열 3차장 등 검찰 간부들은 “제2 롯데월드 인허가 로비에 대한 단서가 없다. 경영 비리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제2롯데월드 인허가 로비’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기사들이 종종 나왔다. 검찰이 섣불리 인허가 로비 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지 못하고 몸을 사리고 있다는 해석도 나왔다.

왜 검찰이 인허가 로비 의혹을 수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을까? 사정당국 관계자들에 따르면 실제 검찰은 제2롯데월드에 대한 수사를 최종 목표로 삼았다. 그 징후는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에서 포착됐다. 이 부서에서는 지난해부터 제2롯데월드의 시행사인 롯데물산이 2011년께 공군 중장 출신 천모(69) 씨에게 컨설팅비 명목으로 13억원을 건넸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를 벌여왔다.

제2롯데월드는 2010년 11월 123층 높이로 최종 건축허가가 났다. 이때 허가를 결정적으로 가능케 했던 게 성남 서울 공항의 활주로 각도를 3도 변경하는 결정이었다. 당시 공사비 1000억원을 롯데 측이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롯데물산은 전투기 부품정비업체 B사의 회장으로 근무하던 천씨에게 활주로 공사와 관련한 컨설팅을 맡기고 돈을 건넨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은 천씨에게 전투기 정비와는 무관한 활주로 공사 컨설팅을 맡긴 것에 주목했다. 그 돈이 활주로 공사비 절감을 위한 로비 명목 등으로 공군 관계자들에게 건네졌다는 의심이 갔기 때문이다. 롯데는 1987년 서울시로부터 송파구 잠실에 있는 부지를 매입해 2002년 지상 112층짜리 초고층 빌딩을 짓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부지 5.5㎞ 인근에 전시 전략적 요충지로 꼽히는 서울공항이 있어 비행 안전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공군이 강하게 반대했다. 이후 15년간 반대를 하던 공군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2007년 12월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후 상황이 급변했다. 취임 2개월 만인 2008년 4월 이 전 대통령이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서 “날짜를 정해놓고 제2롯데월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검토하라”는 발언을 했고 국방부는 건립 허가를 상정한 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공항 활주로를 3도 틀고 비행 안전시설 지원 비용을 롯데가 전액 부담하는 조건으로 공군은 제2롯데월드 건설에 찬성했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한 김은기(64) 공군참모총장이 경질되기도 했다. 이듬해 3월 행정협의 조정위원회가 건축 허가 방침을 발표했고 롯데는 2010년 타워 건설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용적률과 건폐율도 상향 조정돼 당초 지상 112층짜리가 지상 123층·지하 6층짜리로 변경됐다. 또 다른 특혜 논란이 일었다.

검찰의 내사 사실은 지난 6월 10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실시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보도되기 시작했다. 7월에 들어서는 장경작(73) 전 롯데호텔 사장과 기준(70) 전 롯데물산 사장이 출국금지되면서 인허가 로비 수사가 본격화되는 분위기였다.

장 전 사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인 신분 때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1층을 집무실처럼 이용할 당시 롯데호텔 사장이었다. 이 전 대통령과는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기 전 사장은 2008년부터 2년간 롯데물산 사장직에 있었다. 롯데물산은 제2롯데월드 사업을 주도했던 시행사다.

로비의 실체는 누구일까?


▎잠실에 위치한 제2롯데월드의 전경. 이번 검찰 수사를 둘러싸고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제2롯데월드 인허가를 부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로비스트로 의심되는 천씨는 기 전 사장과 고교 동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공군에 대한 로비가 ‘기 전 사장-천 전 중장-당시 공군 고위층’으로 연결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장 전 사장을 통해서는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이 전 대통령에게 제2롯데월드 인허가를 부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검찰은 장 전 사장에 대해서는 피의자 신분 조사조차 하지 못했다. 기 전 사장은 7월 23일 새벽 구속됐지만 KP케미칼(현 롯데케미칼) 사장으로 있던 2006년 조작한 회계 자료를 이용해 세금 환급 소송을 내도록 지시한 혐의 등 소송사기 혐의가 적용됐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제2롯데월드 시행사 롯데물산에 대한 압수수색은 끝내 진행되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단서가 있어야 수사를 하는 것이니 막연한 추정이나 의혹만 가지고 수사에 돌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수사팀에서는 제2롯데월드 인허가 로비로 갈 단서를 계속 찾아왔다. 수사팀 관계자는 “계좌추적 등을 통한 결정적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진술도 없었다”고 말했다. “초반에 의지는 충만했지만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한 수사로 이어지는 만큼 확실한 물증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사정당국·롯데 관계자들은 제2롯데월드 로비는 애초 검찰 수사에서 밝혀지기 힘들 것이라고 수사 초기부터 예상했다.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제2롯데월드 로비 실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당시 사장급 이상이다. 특히 이 전 대통령에게 로비를 했다면 그건 신격호 총괄회장이 직접 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잘 알고 있는 신 총괄회장이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신 총괄회장 말고 로비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이인원 부회장이었다. 수십 년을 신 총괄회장의 수발을 들면서 롯데의 ‘집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부회장의 자살이 제2롯데월드 로비 의혹과 관련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 이 회장 주변에서는 “이 회장이 검찰 수사에서 제2롯데월드 관련도 물어볼까 상당히 고심했다”는 말도 들렸다.

검찰이 캐려 했던 롯데 총수 일가의 드러나지 않은 비자금 의혹과 제2롯데월드 인허가 로비를 포함한 각종 의혹의 진실은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에 안장된 이 부회장이 자신의 생명과 함께 안고 떠난 건 아닐까.

- 문병주 중앙일보 기자 moon.byungjoo@joongang.co.kr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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