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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추적] 이우환·천경자 화백 사건으로 본 ‘위작의 세계’ 

“고유의 석채(石彩) 비밀 푸는 게 위작 가리는 핵심”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기술을 가진 것만으로 진품 행세를 할 수는 없다. 화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재료를 혼합해 쓰는 석채를 똑같이 구현하기가 가장 어렵다. 작품이 탄생하고 나서는 캔버스와 나무틀도 진품의 그것처럼 만들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각종 유명 전시와 경매, 해외반출 등의 유통 과정을 정교하게 거치면서 가짜는 진짜로 둔갑한다. 최고 작가들의 그림을 둘러싼 진품 시비로 한국 미술계의 권위를 추락시킨 위작의 세계를 정밀 취재했다.

▎경찰이 압수환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 No.780217>.(1978년 2월 17일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뜻) 경찰은 국과수 감정 등을 통해 위작으로 결론냈지만 이 화백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 맞다고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는 미스터리한 두 사건이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25년 전에 불거져 현재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의혹사건이다. 천 화백은 수 차례에 걸쳐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 등은 감정결과를 근거로 “천 화백이 그린 진품이 맞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1999년 검찰 조사를 받던 화가 권춘식(69) 씨가 “위작 논란이 있는 미인도는 내가 그린 것”이라고 고백했지만 그동안 몇 차례 입장을 오락가락 번복하면서 아직까지도 위작여부는 명확히 가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천 화백의 <미인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또 다른 숨겨진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프랑스 감정팀이 조사를 벌여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팀은 천 화백 유족 측과 검찰에 전달한 보고서에서 특수 카메라로 ‘미인도’와 비슷한 시기 천 화백의 진품 9점을 비교 분석한 결과 “진품 확률은 0.0002%”라는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미인도 화면 층위를 1600여 개 단층으로 쪼개어 각각 촬영하고 다른 진품들과 비교해 데이터 수치를 매겨보니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프랑스 감정팀의 감정결과는 침소봉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박 입장을 냈다. 감정팀이 감정에 필수적인 천 화백 작품의 배경지식, 미술사 자료, 소장경위 분석 등을 배제하고,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위작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번에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미인도>와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사건은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 화백은 한국의 대표적 현대미술 작가로,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도 유명해 각종 미술품 경매에서 고가에 거래돼왔다. 특히 그의 작품은 수 년 전부터 국내외 미술품 시장에서 나타난 ‘단색화’ 인기 현상과도 맞물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천 화백의 입장과 반대로 이 화백은 위작이라는 수사기관의 조사결과에 반발해 “모두 내가 그린 작품”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위작 관련자들이 대부분 체포돼 자백도 했고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가짜임이 판명났는데도 이 같은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위작’ 수사 발표에도 ‘진품’ 주장 이유는?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 No.780217> 작품은 지난해 12월 K옥션에서 4억9000만원에 낙찰됐다. 하지만 당시 첨부된 감정서가 위조 문서임이 밝혀져 위작 논란을 촉발시켰다.
흔히 사람들은 작가라면 자신이 그린 진품인지 여부를 모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여러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진위를 가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위조범들의 정교한 수법과 더불어 우리나라 미술 유통시장의 불투명성, 화랑과 작가와의 특수관계, 감정기관의 비전문성 등 여러 복합적 이유가 얽히고 설켜 진품이 가짜가 되고 가짜가 진품이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원한 한 미술평론가는 “25년 전에는 천경자의 말을 믿을 것인가, 화랑협회의 말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이우환의 말을 믿을지, 아니면 경찰의 말을 믿을지가 문제”라며 “제2의 천경자, 이우환 화백과 같은 사건은 언제든 또 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위작은 누가 왜 만들어 유통시키는 걸까. 또 화랑과 감정기관, 작가와는 어떤 관계로 서로 얽혀 있길래 같은 입장을 보이다가도 때로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는 걸까? 위조범이 자백을 했는데도 왜 감정기관 혹은 작가는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되는 걸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월간중앙>은 가장 최근 벌어진 이우환 화백의 작품 사건을 중심으로 위작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과 수법, 감정 기관의 문제, 유통 과정에서 벌어지는 복마전 같은 실태를 들여다보았다.

지난해 6월 경찰은 “이 화백의 작품 가운데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시리즈에 위작들이 존재하고, 이 위작들이 2012~2013년에 서울 인사동 일부 화랑을 통해 유통됐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들어갔다. 이 작품들은 1970년대 후반에 그려진 이 화백의 대표작들로 억대의 가격에 거래되고 있었다. 1년여에 걸친 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위작으로 판단해 확보한 13점의 그림을 국과수에 감정 의뢰했다. 그 결과 13점은 모두 진품이 아니라는 결과가 나왔다. 경찰은 위작에 관여한 연루자들을 추적해 체포했다. 문제는 위작으로 판명된 그림들이 조금씩 다른 기법과 재료들을 써 만들어진 것으로 드러나 하나의 조직이 아닌 두 개 이상의 위작 조직이 관여한 것으로 경찰은 판단하고 있다. 경찰 수사로 드러난 위작범들의 수법은 <인사동스캔들>과 같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치밀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수법을 좇아가보자.

2011년 당시 오랫동안 무명의 서양화가로 지내온 이경모(39·가명)의 생활은 몹시 궁핍했다. 그림 그리는 일만으로는 도저히 신혼살림을 꾸려가기가 벅찼던 이씨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유혹이 다가왔다.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서 화랑을 운영하던 화상(畵商) 현석민(63·가명)이 그를 찾아왔다. 유명 작가의 그림을 똑같이 모사해 그리는 작업을 함께하자는 제안이었다. 주로 일본에서 일하면서 부산을 자주 왕래하는 골동품상 이민식(가명)이라는 사람과 얘기가 다 돼 있어 일단 그림이 비싼 값에 팔리게 되면 적지 않은 수입이 보장될 것이라는 달콤한 제안에 이씨는 귀가 솔깃했다. 계획대로라면 목돈을 쥘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이씨는 현씨의 제안에 응했다.

무명화가 이씨에게 그런 제안을 하기 4~5년 전인 2000년대 중반에도 현씨는 중국에서 민화 밑그림을 들여와 또 다른 한국의 무명화가를 시켜 채색을 입힌 뒤 파는 일을 해온 터였다. 위작 프로젝트를 함께하기로 한 두 사람은 얼마 후 이민식을 만나 구체적인 논의를 했다. 현씨와 무명화가 이씨는 이 화백의 작품을 모사한 위작을 만들어 넘기면, 골동품 수집가이자 유통업자인 이민식이 이를 유통시켜 수익금의 50%를 나눠 갖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번들거리는 진품 질감 내려 유리가루 섞기도


▎이우환 화백 위작을 주도한 현석민(63·가명) 씨가 유통 총책인 또 다른 연루자에게 보낸 내용증명. 위작 수십 점을 보냈는데도 판매 대금을 주지 않는다는 항의성 내용이다. 이 내용증명이 경찰 수사의 실마리가 됐다.
2012년 2월, 현씨는 경기도 고양시에 작은 오피스텔을 하나 마련했다. 위작 프로젝트를 진행할 작업실이었다. 현석민과 이경모는 겉으로 봐서는 위작 동업자 관계였지만 엄연한 상하관계였다는 게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 수사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연루자들 사이에 약간의 진술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골동품상 이민식이 처음에 이 화백 위작 프로젝트를 설계한 뒤 이 계획을 현씨와 상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국내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은 현씨가 주도했다. 오피스텔을 빌리는 자금도 현씨가 마련한 것이다. 현씨와 위작범 이씨 두 사람은 연배 차이가 제법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씨는 이씨에 대해 감독자, 감시자 역할을 하며 위작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끔 무명화가인 이씨가 힘들어하거나 느슨해져 의도대로 작업이 안될 때는 질책도 하고 조언도 한 것으로 안다. 각종 재료 비용은 모두 현씨가 조달했다. 이우환 화백의 그림을 흉내 내 그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각종 재료의 비밀을 푸는 작업에 상당한 공과 시간을 들였다.”

이 화백의 작품과 같은 질감과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이들은 경매에 출품된 이 화백의 작품을 면밀히 관찰하며 연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일반 물감이 아닌 생소하고 특수한 안료가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작품을 옆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니 두툼하게 도드라져 있고, 또 가루 같은 게 섞여있는 것도 보였기 때문에 경험칙상 이 화백 본인만이 쓰는 특수한 석채(石彩)가 주 안료로 쓰였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현씨의 진술 내용이다. 석채는 돌가루·광물 등으로 만든 물감을 뜻한다.

이들은 서울 홍대앞 K화방, 인사동 M미술백화점 등을 다니며 석채를 구입해 비슷한 질감을 내기 위해 실험을 수차례 진행했다. 하지만 접착성이 없는 석채만 가지고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아교와 석채를 섞는 과정을 반복했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할 때 알맞은 농도의 점도가 나와야 했지만 여전히 아교만 섞었을 때는 떡지고 뭉개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결국 아교와 비슷한 접착력이 있는 겔(gel)을 일정량 투입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실패를 거듭하며 알아냈다. 이런 식의 실험을 반복하면서 그림을 그릴 재료 연구에만 수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우환 화백이 사용한 석채와 최대한 비슷한 느낌을 내기 위해 이들은 일본의 길상이라는 회사가 만든 석채를 선택했고 아교와 겔을 일정 비율로 혼합했다. 화가들은 이런 원료들을 섞을 때 자신들만의 특별한 배합 비율을 철저히 지키는데 위작범들이 이를 100% 완벽하게 구현해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정밀하게 분석하거나 제대로 된 안목감정을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진품과 가짜를 쉽게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완성도가 필요했다.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마련하기 전 처음 한달 정도는 일산의 모 여관방 특실을 잡아서 3~4일 작업하고, 또 다른 장소로 옮겨 며칠씩 작업을 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런데 그림을 그릴 재료 외에 캔버스와 나무틀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역시 이 화백이 사용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것을 사용하기 위해 또다시 연구를 거듭했다.”(서울청 지능범죄 수사대 관계자)

연구와 실험을 반복했지만 현씨 등 위작범들은 여전히 그림 전반에 나타나는 독특한 질감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 화백의 진품은 전반적으로 번들거림(반짝임)이 느껴졌지만 이들이 만든 가짜에서는 그런 질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리석 가루를 섞어보는 등 시행착오를 격은 후 유리 음료수 병을 가루로 빻아 재료에 섞어 그렸을 때 가장 비슷한 반짝거리는 효과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유리가루까지 넣는 등 시도를 한 것이 오히려 가짜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단서가 됐다.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이들이 만들어 유통한 것으로 판단한 그림을 분석해보니 유리가루 성분이 검출됐다. 이우환 화백은 유리가루를 재료로 써본 적이 없다고 수사팀에 밝혔다. 하지만 이 화백은 경찰의 위작 결론과 달리 의혹을 받고 있는 작품들이 모두 자신의 작품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문제의 ‘유리가루’에 대해서도 처음과 달리 다소 유보적이고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경찰 수사팀 관계자)

경찰이 11월 15일 구속한 또 다른 이우환 화백 작품의 위조 조직 역시 현씨 일당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나타났다. 화가 박모(56) 씨와 유통책 김모(58)·구모(44·여) 씨 부부가 위조한 그림 역시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라는 같은 작품이지만 사용한 기법이나 재료가 현씨 조직의 것과 달라 경찰은 당초부터 별개의 조직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해왔다. 이들 박씨 일당은 이 화백의 작품을 40점 넘게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화가 박씨 역시 진품에 쓰인 석채와 비슷한 질감을 내기 위해 저렴한 흰색 돌가루와 청색계열 염료를 혼합, 진품과 유사한 청색 물감을 제조했다. 또 안료를 캔버스에 고착하기 위해 본드를 섞는 수법도 사용했다. 이렇게 위조한 작품은 서울 인사동 한 화랑 대표 김모(58·여) 씨에게 29억원을 받고 넘겼다.

미술계 전문가들은 석채의 비밀을 푸는 것이 위조범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고 가장 핵심적인 작업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안목감정이건 정밀한 과학감정이건 진짜와 가짜의 미세한 차이는 바로 석채를 어떻게 혼합해서 만들어 썼느냐에서 갈리고, 이를 파악하는 게 진위를 가리는 관건이라는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고백한 권씨 역시 미인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비밀은 석채에 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그 역시 천 화백이 쓴 석채를 완벽하게 구현해내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권씨는 “천 여사는 작품에 악센트를 넣듯이 부분적으로 석채를 쓰는데 일본에서 질 좋은 것으로 사다 쓴 것 같다”며 “일반 시중에서는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천 화백이 쓴 석채는 거칠거칠한 돌가루 느낌이 나는 반면 자신이 위조한 그림은 분채(汾彩) 물감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은 단순히 가루를 아교에 풀어 썼기 때문에 겉으로 만져서는 부드러울 뿐 거칠한 느낌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씨는 “석채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거칠고 부드러움의 차이가 있어서 진품과 위품을 구별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수약품 처리 통해 수십 년 된 나무틀로 가장


▎경찰은 이우환 화백의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를 다량으로 위조한 현씨 일당으로부터 위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 미술 도구 여러 점을 압수했다. 가장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을 반듯하게 그리기 위해 사용된 레이저 수평기다.
정교한 위작을 만들기 위해서는 석채뿐만 아니라 캔버스와 나무틀도 중요한 요소다. 이우환 화백 작품을 위조한 현씨는 화상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화백의 것과 비슷한 캔버스와 나무틀을 구해와 이씨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이들이 구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도 역시 진품과는 어딘가 차이가 났다. 고급스러운 질감이 없는 볼품없는 위조품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이 화백이 즐겨 쓰는 캔버스의 뒷부분이 다소 올이 굵은 일본산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캔버스를 나무틀에 접착하기 위한 방식도 진품과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수 차례 시도를 거듭했다. 이들은 일본 후나오카사에서 만든 캔버스와 스키나무로 된 나무틀을 골동품상 이씨에게 요청해 구했다. 캔버스를 나무틀에 고정하기 위해 못과 접착제(본드)를 이용했는데 못을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하기 위해 소금물에 담근 후 이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못을 스키나무 틀에 박게 되면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못이 나무틀에 들어갔다. 또 캔버스는 측면까지만 덮고 뒷면은 덮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재단했다.

재료가 다 준비되자 본격적으로 이 화백의 작품을 흉내 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이 화백이 70년대 후반에 주로 그렸던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건축공사 현장에서 이용되는 ‘레이저수평기’라는 기구도 사용했다. 레이저 광선을 일직선으로 쏴주는 레이저 수평기를 켜놓고 이 선을 따라 점들을 일렬로 그려내는 수법이었다. 작가의 서명도 똑같이 위조했다. 우선 도록에 담긴 진짜 서명을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에 저장한 뒤 그 이미지를 영사기(빔프로젝터)를 이용해 캔버스에 쏜 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들은 진품에 있는 일련번호도 놓치지 않았다.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진품에 적힌 숫자를 일일이 떼어내 같은 모양으로 번호를 만들어냈다.

이처럼 수개월 동안 연구와 실험을 반복해가며 안료 하나에서부터 캔버스 틀, 서명, 일련번호를 진품과 거의 유사하게 구현해냈다. 마지막 과정은 ‘세월의 흔적’ 만들기였다. 이들이 만든 위작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그려진 진품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캔버스 뒤쪽에 갈변 현상이 보이도록 커피색 물감을 칠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이 2012년 2~10월까지 만들어 낸 위작품은 80점 정도였고 이중 완성도가 높은 위작품이 40여 점이나 됐다. 현씨는 8개월간 매달 6~7점의 완성도 높은 위작품을 골동품상 이씨 등에게 건네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컬렉터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현씨 등은 감정서도 위조했다.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위작이 전문가의 눈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다고 한다. 미술품 복원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가이자 감정 전문가인 최명윤 국제미술과학연구소 소장은 “몇 시간만 조사하면 재료를 만든 사람, 또 재료가 생산된 공장까지도 특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 소장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우선 캔버스를 보면 육안으로 쉽게 확인된다. 오래돼 보이려고 일부러 헌 나무틀을 사용했다. 천을 들어내고 확인한 결과 나무틀에 누런 색 스프레이로 노후화한 흔적이 확연히 드러났다. 나무틀이 있는 상태에서 칠을 대충해서 캔버스에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 소장이 이 화백의 작품 중 위작이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된 시점은 바로 현씨 등이 위작을 만들어 유통하던 2012년부터였다.

“우연히 화랑에 갔다가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새 그림이 있지? 1978년 작품인데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분명 조금씩 훼손될 텐데 이상했다. 특히 그림을 보면 두꺼운 부분은 아교가 많고, 얇은 부분은 아교가 적기 때문에 수축하면서 편차가 생기고 손상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당시 본 작품은 손상이나 노화의 흔적이 없었다.”

전시회 출품, 해외 반출 등으로 그림의 이력도 ‘세탁’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위조한 권춘식 씨의 진술서. 권씨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보관 중인 미인도를 자신이 위조한 게 맞다고 주장했지만 여러 차례 진술을 바꿔 진위 논란만 키웠다.
최 소장에 따르면 캔버스를 고정하는 나무틀을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수법은 다양하다고 했다. 분무기를 이용해 물을 뿌리는 방법이 있다. 물을 뿌리고 말리고 하는 작업을 반복적으로 1주일가량 하게 되면 마치 30~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중크롬산이라는 약품을 이용하는 수법도 있다. 이 약품으로 나무의 섬유질을 태우고 빗물에 노출시키면 오래된 틀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현 씨 등 위작범의 수법처럼 스프레이나 물감으로 나무에 색을 씌우는 방법도 종종 사용된다고 한다.

캔버스로 쓰인 천을 면밀히 분석하면 진품여부를 가릴 수 있다. 천 만드는 공장이 현재 우리나라에는 5개 정도가 있는데 공장마다 천 만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게 최 소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천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위작범들이 어떤 공장에서 만든 천을 갖다 썼는지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이우환 화백의 위작품에 쓰인 천들을 조사해보면 진품이 나온 78, 79년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으로 분석됐다.

정교한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으로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데는 유통 과정이 중요하다고 경찰과 업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다시 말해 해당 작품을 누가 소장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또 국내외 각종 전시회나 경매에 출품하는 과정을 추가로 거침으로써 순식간에 가짜가 진짜로 탈바꿈한다. 소위 ‘나카마’를 통해 복잡한 유통 과정을 거치면서 유명 미술관이 소장하거나 권위 있는 전시회에 버젓이 출품돼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진품으로서 인정받았다고 주장한다. ‘미인도 위작 논란’이 불거진 건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움직이는 미술관’ 때문이다. 당시 문화부가 중심이 돼 추진한 이 사업 때문에 10년간 수장고에 있던 ‘미인도’가 나와 대중에 전시됐고, 포스터로도 제작되어 5만원 정도에 판매, 일반에 공급됐다.

이후 ‘미인도 위작 논란’이 시작되자 업계 한 관계자는 “진짜라는 이유를 대지 않으면 곤란해질 사람이 많았다”면서 “미술관은 답을 갖고 시작했다. (전시된 작품이) 진품이어야만 하는…. (미인도를) 진짜로 만들지 못하면 7명의 목이 날아간다는 얘기가 파다했다”고 한 바 있다. 국내 전시 외에 해외로 일단 빼돌렸다 다시 국내로 들여오는 과정까지 더해지면 소위 업계 전문가라 할지라도 가짜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어려워진다.

“소장 경위를 속이기 위해 이우환 화백의 위작품의 경우에도 일본에 있는 컬렉터가 소장하고 있던 그림으로 세탁 과정을 거쳤다. 국내에서는 잘 확인이 안 되니 가장 유용한 세탁 방식이다. 특히 이 화백은 일본에서 주로 거주하며 활동한 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다.”(경찰 수사 관계자)

최명윤 소장 역시 불투명한 유통 과정을 지적했다. 최 소장은 특히 국내뿐 아니라 해외 경매시장을 통해 유통되는 이 화백의 작품 중 일부가 일련번호가 겹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을 찾아내기도 했다. 2012년 이후 최 소장은 국내외에서 유통된 이 화백의 작품 중 79점의 관련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이 중 같은 일련번호가 매겨진 그림을 6쌍이나 찾아냈다. 국내 화랑이 아트바젤 홍콩 등 유명 미술시장에 출품한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

대형화랑과 작가의 특수관계에 감정평가도 ‘흔들’


▎왼쪽부터 천경자 <미인도>(나비와 여인) 위조범으로 알려진 권춘식 씨가 1970년대 말 <미인도>를 그리며 모본(母本)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는 천경자 작 <장미와 여인>(1981). 오른쪽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1980년 4월 이관된 <미인도>. 천 화백 유족 측은 “(미술관에 있는) <미인도>의 코와 입술 등이 천 화백의 화법과 다르다”고 말했다. / 지난해 8월 작고한 천경자 화백. 천 화백은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창적 화풍을 개척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꽃과 여인을 주된 소재로 하여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렸다.
지난 3월 홍콩 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에 외국의 한 갤러리가 출품한 이 화백의 1979년 작품 <선으로부터>(80.3×100㎝)와 지난해 11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 출품된 <선으로부터>(100.2×72.5㎝), 2014년 5월 크리스티 홍콩경매에 출품된 <점으로부터>(145×111.5㎝)의 작품 뒷면에 적힌 일련번호가 ‘79***2’로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련번호는 비슷한 계열의 그림 시리즈를 완성할 때마다 작품을 구분하기 위해 제목 대신에 붙여 식별하는 장치다. 업계 관계자는 “하루에 여러 장을 그렸을 경우라도 완성된 순서에 따라 번호를 붙이기 때문에 동일한 번호가 2개, 3개 존재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경찰 수사 결과에서 현씨 등은 위작 제작 과정에서 일련번호를 진품에서 도용해 붙였다고 자백한 바 있다. 최명윤 소장 측 조사에 따르면 해외의 유명 경매나 미술시장에 돌고 있는 이 화백의 위작은 현재까지 파악된 것만 20~30점이라고 한다. 일련번호 의혹 등과 관련해 이우환 화백 측은 “1978~79년에 한창 많이 그릴 때는 한 달에 30∼40점씩 그렸다. 전시를 했어도 도록에 실리지 않은 작품이 허다하다”며 “화랑에 팔았는데 돈 못 받고 어디론가 없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고 서명이나 일련번호 역시 내가 직접 안 넣고 화랑에 맡긴 일이 잦았다”고 해명했다.

이 화백 측의 이러한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경찰과 미술계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이들은 이미 객관적으로 위작 판정이 내려진 작품들에 대해 이 화백이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로 작가와 화랑 사이에 오래전부터 형성된 특수 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경찰 수사 결과 위작으로 판명된 작품 중에는 이 화백이 화랑 측의 의뢰를 받고 직접 진품으로 판정해 감정서가 나간 사례도 확인됐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이 화백이 경찰의 입장과 달리 “내가 그린 작품이 맞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유통과정에서 첨부되는 감정서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미술업계에서 90% 이상 감정의뢰를 하는 가장 공신력 있는 기관이 한국미술감정 평가원이다.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감평원에 감정의뢰가 들어온 시기는 현씨 일당이 위작을 생산해내기 시작한 2012년이었다. 경찰과 감평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그해에만 이 화백 작품 27점을 감정해달라며 의뢰가 쏟아져 들어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감정 의뢰에 응했던 감평원에서도 너무 많은 작품이 들어오자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부 위원 사이에서는 “그림이 너무 새것이다”라거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딘가 인위적”이라며 위작 의견이 제시됐다. 하지만 이 화백이 주로 거래하는 유력 화랑 측에서 “작가에게 의뢰해보니 자신의 작품이 맞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그 의견을 좇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감평원 측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지자 2013년 이후부터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은 의뢰가 들어와도 아예 감정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다 보니 이 화백의 작품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일부 화랑이 작가에게 직접 의견을 물어보거나 자체적으로 판단해 감정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 화백은 “1970년대 후반부터 B화랑이 내 작품을 열심히 취급했다. ‘내 화랑’이라 생각해 안심하고 뭐든지, 감정까지 맡겼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최명윤 소장은 “이 화백 측이 진품이 맞다고 얘기하니 감정위원들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된다”며 “최소한 판정불능 정도라도 입장을 명확히 해줘야지, 화랑이나 작가 측 의견을 의심 없이 쫓는 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미술품 감정 과정에서 이러한 일이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이는 현대미술뿐 아니라 고미술 쪽에서도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왔던 문제라는 것이다. 익명을 원한 한 미술평론가는 “가령 ‘전(傳) 겸재’라 해서 출품되거나 전시될 때가 있다”며 “이는 겸재 선생의 작품으로 전해진다는 뜻인데 언제부터 전해지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적어도 감정위원들은 ‘전’이라는 단어를 붙여 감정서를 내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현대미술이건 고미술이건 감정서를 전수조사하면 ‘전’이라고 쓴 게 꽤 많다는 것이다.

“한국화랑협회가 주도하는 감정평가제도 개혁돼야”


▎11월 15일 경찰은 이우환 화백의 작품을 위조한 또 다른 그룹인 박모 씨 일당을 추가로 체포해 구속했다. 이날 경찰은 위작으로 판단해 압수한 <선으로부터> 등 6점을 언론에 공개했다.
미술계 안팎에서는 객관적인 감정을 위해 감정기구의 이원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2003년 한국미술품감정협회 부설기관인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이 생기기 전까지 국내 미술품 감정은 한국화랑협회가 도맡아왔다. 감정협회는 미술품 감정 전문화를 위해 화랑협회 위원들이 발족시킨 단체다. 현재 감정평가원은 감정협회와 화랑협회 소속 인원들로 구성돼 있다. 또 감정평가원의 등기이사는 대부분 화랑 주인들이다. 위작인지 여부를 알았건 몰랐건 간에 위작의 유통이 일부 화랑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현재의 평가원 인적 구성으로는 투명성과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최명윤 소장은 감정이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 프랑스처럼 법원에 자문하고 감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사법감정사 제도를 만들 것을 주문한다. 그는 “현재 법적으로는 안목감정, 과학감정 둘 다 한계가 있어 이제는 법과학적 감정론이 필요하다”며 “법의학·법화학처럼, 법미술학적으로 감정을 할 수 있는 감정인을 키워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경찰 수사팀 관계자는 “같은 작품이라도 돈 없는 사람이 갖고 있으면 100만원짜리가 돈 있는 사람이나 유력 화랑이 소장하고 있으면 1000만원, 억대의 작품으로 둔갑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감정과 유통이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해법을 찾지 않으면 미술품 위작 사건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201612호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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