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생사의 경계선에 선 표정 

마지막 찰나의 순간 그 잔인한 생동감이여! 

정여울 문학평론가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 유한함 속에서 무한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 아닐까

▎클레오파트라의 죽어서도 부릅뜬 두 눈은 한때 거대한 제국 로마를 위협했던 이집트 여왕의 당당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클레오파트라> / 그림제공·정여울
#1.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포착하다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그린 그림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판도라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갈등과 슬픔은 물론 ‘희망’이 담긴 상자를 여는 순간, 아버지의 복수를 앞두고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햄릿, 리어왕의 세 딸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는 장면, 데릴라가 삼손을 유혹한 뒤 그를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장면 등등. ‘이 순간’이 지나면 삶이 영원히 달라질 것만 같은 순간을 포착한 그림들은 늘 잔인한 생동감이 넘친다.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바로 그 찰나의 이미지를 붙잡은 그림들은 ‘인간의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클레오파트라>, 1888

클레오파트라가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는 어떤 장면이 스쳐 갔을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당당하고 눈부셨던 클레오파트라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을 것만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에서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로 추락하는 그 순간의 덧없음이 이 그림 속에서는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굳어진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까맣게 변색해가고 있는 파리한 얼굴빛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는 꼿꼿하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듯, 눈도 감지 못한 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를 서성이고 있다. 그녀는 위엄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도 감지 못한 그녀의 부릅뜬 두 눈은 한때 거대한 제국 로마를 위협했던 이집트 여왕의 당당함을, 온갖 지혜와 책략을 동원해 이집트를 살려냈던 명예로운 과거를 상기시키는 듯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묘사한 수많은 그림이 있지만, 나는 클레오파트라의 관능적 아름다움보다는 죽어서도 잃을 수 없었던 그녀의 위엄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이 그림이 가장 좋다. 과연 여왕은 안타깝게 삶을 마감했지만 역사 속에서, 문학 속에서 결코 식지 않은 위엄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들라크루아, <무덤 앞의 햄릿과 호라시오>, 1839


▎햄릿은 자신이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사랑 하는 여인에게 ‘가해자’가 돼버렸다. 다음 순간 맞게 될 고통을 모른 채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빠져 있는 햄릿. 들라크루아, <무덤 앞의 햄릿과 호라시오> / 그림제공·정여울
햄릿이 죽이고 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숙부였지만, 정작 창졸간에 죽음을 맞은 것은 아무 죄 없는 약혼자 오필리아였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숙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는 것을 끊임없이 주저했고, 그 망설임의 시간 속에서 오히려 분노와 상처는 더욱 커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는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숙부로 오인해 죽였고, 자신의 약혼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오필리아는 그만 미쳐버리고 만다. 오필리아는 실족사 했지만 그것은 햄릿의 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직 햄릿은 자신이 저지른 몹쓸 짓을 알지 못한다. 지금 일꾼들이 파고 있는 무덤은 오필리아의 것이지만 햄릿은 그것을 모른다. 그 묏자리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해골이 어린 시절 햄릿 자신과 놀아주던 광대 요릭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햄릿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허무를 깨달으며 슬퍼한다. 다음 순간에 그는 오필리아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햄릿의 가슴속에서는 아버지를 비명에 잃은 아들의 슬픔과 그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달도 안 되어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적대감과 분노, 그리고 자신이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 등 모든 인간적 공포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은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빼앗긴 햄릿은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데 정작 그의 고통의 가장 큰 피해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 오필리아였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였지만 어느 순간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해자’가 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이 극적인 장면, 그러니까 다음 순간 자신이 맞게 될 고통이 무엇인지 모르는 햄릿이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는 순간을 그려냈다.

존 싱어 사르젱,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는 엘렌 테리>, 1889


▎왕을 시해한 뒤에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지만 그전엔 너무도 당당했던 맥베스 부인. 그녀의 그로테스크한 카리스마가 그림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존 싱어 사르젱,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는 엘렌 테리> / 그림제공·정여울
이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 실제로 나오는 장면은 아니지만, 맥베스 부인을 너무도 훌륭하게 연기했던 실제 배우 엘렌 테리를 모델로 하여 맥베스 부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마치 지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군림하듯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맥베스 부인의 모습은 당당하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줄 정도다. 사실 맥베스 부인은 때로는 맥베스 본인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로 왕의 암살을 획책했다. 주저하는 맥베스를 암살자의 길로 밀어 넣는 데 맥베스 부인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이 그림 속 맥베스 부인의 눈빛에는 광기가 번득인다. 왕의 시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두려움이 주로 맥베스 자신에게 돌아갔다면 사건이 일어난 뒤의 두려움은 맥베스 부인에게도 돌아가게 된다.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는 살인을 획책하고 독촉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던 맥베스 부인이 막상 살인이 일어나자 두려움을 숨기지 못한다. 맥베스 부부는 함께 두려움을 일으키는 주체였다가 나중에는 그들이 일으킨 두려움보다 훨씬 커다란 복수의 두려움에 위협당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는 의기양양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던 맥베스가 오히려 왕의 자리에 오른 뒤로는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듯한 극심한 환상에 시달리게 된다. 이 그림은 아직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이전의 맥베스 부인, 그러니까 자신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서의 맥베스 부인의 강한 카리스마를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2. 운명의 나침반이 바뀌는 지점

에드윈 오스틴 애비, <리어왕: 코델리아의 작별>, 미상


▎입에 발린 사랑을 표현한 두 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아버지 리어왕은 추운 겨울날 벌판을 헤매고 다니게 된다. 에드윈 오스틴 애비, <리어왕: 코델리아의 작별>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을 통해 ‘사랑받고 싶은 욕망’의 어리석음을 꿰뚫어보는 것 같다. 리어왕은 노년기에 접어들자 왕국을 통치하는 것도 힘에 부치고, 재산을 관리하는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세 딸 고네릴, 리건, 코델리아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다. 그는 사랑스런 세 딸에게 왕국과 재산을 물려주고 이제 그만 왕좌에서 물러나고 싶어진다. 거기까지는 지극히 인간적인 결정이다. 그런데 리어왕은 ‘세 딸에게 어떻게 재산을 나누어줄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딸의 순서대로 재산을 물려주자’라는 어리석은 셈법을 생각해낸다. 자신을 사랑하는 딸들의 마음을 비교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라’고 주문한 리어왕의 확신은 더더욱 어리석기 그지없다.

아버지이자 제왕의 재산과 권력을 탐낸 고네릴과 리건은 서로 ‘누가 더 감언이설을 아름답게 꾸며내는가’를 경쟁하듯 청산유수로 아버지에 대한 입에 발린 사랑을 표현한다. 어리석은 리어왕은 딸들의 속셈도 모른 채 그저 ‘언어’가 주는 광채에 미혹되어 마치 축제라도 벌이듯 신명이 나서 재산과 통치권을 나눠준다. 막내딸 코델리아만이 오직 침묵한다. 사랑을 말로 표현하라는 아버지의 강요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코델리아는 사랑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믿음에, 사랑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사유에 저항한다. 그러나 리어왕의 가족은 물론 측근들 그 어느 누구도 코델리아의 순수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코델리아는 우직하다 못해 답답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코델리아의 이런 순수한 모습은 리어왕의 마지막 구원의 씨앗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진다. 코델리아의 언니들은 리어왕이 물려준 재산을 차지한 뒤 ‘언제 당신이 내 아버지였느냐’는 식으로 아버지를 홀대하고 만다. 두 딸에게 나라는 물론 재산까지 다 내어준 아버지는 심지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갈 곳이 없어 한기에 떨며 벌판을 헤매기까지 한다.

이 그림은 세 딸의 입장 차이가 격화되는 순간, 리어왕의 재산을 한치 혀의 달콤함으로 빼앗으려는 언니들과 아버지의 재산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순진한 코델리아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바로 이때가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을까. 리어왕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틀린 선택을 고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자신이 쳐놓은 운명의 덫을 향해 자신이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만다. 아버지와 언니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코델리아를 향해 등을 보인 채 돌아서 퇴장하는 토라진 노인의 모습이 바로 리어왕의 어리석음을 웅변한다.

오딜롱 르동, <판도라>, 1914년경


▎판도라야말로 신들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신호탄 아닐까. 불행도 고통도 없는 시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없으니까. 오딜롱 르동, <판도라>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상자를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판도라의 모습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주제였다. 불행이나 고통을 몰랐던 인류에게 판도라는 최초로 쓰라린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최초의 여인’ 판도라를 헤파이스토스의 ‘작품’이자 인류의 역사를 시작한 기원으로서의 여성으로 보지만, 그런 판도라를 왜 이토록 부정적으로 묘사했을까. 어쩌면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 사회의 분쟁과 갈등의 씨앗을 ‘여성의 아름다움’이나 ‘못 말리는 호기심’으로 보았던 것일까. 그리스 신화는 이렇게 ‘최초의 불행’을 엿본 사람의 오명을 여성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역사는 남성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불평등한 믿음을 심어주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판도라는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된다는 그 상자를 열고 싶은 호기심을 참지 못한다. 판도라는 ‘사악한 아름다움’이나 ‘치명적인 호기심’의 상징이 되어버렸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전적으로 여성의 전유물일까. 그리스 신화에서는 판도라의 호기심과 아름다움을 치명적인 위험으로 묘사하지만, 나에겐 판도라야말로 신들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는 신호탄으로 다가온다. 사실 불행도 고통도 없는 시간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니까. 르동의 그림은 판도라가 상자를 열기 전의 세상을 낙원처럼 신비롭게 묘사해놓았다. 하지만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순간, 세상은 저 아름다운 낙원의 빛깔보다도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감정과 사건의 색채로 물들지 않을까. 고통은 때로 인간을 파괴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내면을 더욱 깊고 아름답게 성장시킬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니까. 고통이 없는 곳에서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마저도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릴 테니까.

피터 폴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미상


▎한때 불타는 열정을 공유했던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일렁이는 듯, 데릴라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피터 폴 루벤스, <삼손과 데릴라>
이 그림 속에서 데릴라는 마침내 삼손을 유혹했고, 유혹한 직후에 그를 죽음의 길로 이끌고 있다.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라냄으로써 그의 힘을 제거해버리는 데릴라의 재치와 용기가 반짝이는 장면이다. 방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엄청난 거구의 주인공 삼손을 힘없이 축 늘어진 주검으로 만들어버리기 직전, 데릴라의 생생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이 극적인 장면에서 데릴라는 마침내 미션을 완수하기 직전이지만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데릴라의 얼굴에서는 미묘한 애수의 분위기가 감돈다. 한 손은 마치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듯 물러서는 자세이지만, 한 손은 이제 주검이 될 삼손을 가만히 위로하며 토닥이는 듯하다. 한때 불타는 열정을 공유했던 상대방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일렁이는 듯, 데릴라의 눈빛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3. 이 순간이 지나면, 인생은 어떻게 변해버릴까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미상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태가 된 그리스 신화 ‘티스베와 피라모스의 비극’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의 애절함을 신화의 형태로 보존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 그림제공·정여울
그리스 신화 속에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모태가 된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다. 바로 티스베와 피라모스의 비극이다.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서로 만날 수 없었던 티스베와 피라모스는 오직 ‘담벼락’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 티스베는 담벼락 너머로 혹시나 연인의 목소리나 인기척이 들릴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다. 두 사람은 오직 이 작은 구멍을 통해 서로의 모습을 엿보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지만, 언젠가는 함께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고 성문 바깥에 있는 니노스 왕의 무덤 앞에서 만나기로 부모님 몰래 약속을 했다. 혹시나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몰라 베일로 얼굴을 가린 채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티스베는 사자 한 마리가 주둥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물을 마시러 온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근처의 동굴로 몸을 숨긴다. 바로 그 순간, 바람에 베일이 날려 사자 곁에 떨어지고 만다. 사자는 베일에서 사람 냄새를 맡자 피 묻은 입으로 베일을 갈가리 찢어놓고는 제 갈 길을 간다. 사자가 떠난 뒤 피라모스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 티스베의 피 묻은 베일을 발견한다. 티스베의 것임에 분명한 베일이 사자의 발자국 곁에서 피투성이로 찢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피라모스는 미칠 듯한 슬픔과 자책감에 빠져버린다. 피라모스는 티스베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칼로 자신의 몸을 찌르고 만다. 잠시 후 이제나저제나 연인이 왔는지 학수고대하고 있던 티스베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피라모스를 발견하고 자신 또한 그의 곁을 따라간다. 티스베는 피라모스의 옆구리를 찌른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른다.

두 사람이 연이어 죽음을 맞은 뽕나무 근처에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흘린 피로 흥건해졌는데, 뽕나무 열매가 피처럼 붉은 빛을 띠는 것은 바로 이 젊은 연인의 안타까운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서로 미워하던 양가 부모들은 이토록 어린 연인들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의 유해를 같은 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사랑의 애절함을 신화의 형태로 보존하고 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수태고지>, 미상


▎수많은 수태고지 중에서도 이 그림은 신성성을 최대한 억제하고 인간 마리아의 현실적인 고뇌를 생생히 그려냈다.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수태고지> / 그림제공·정여울
신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수태고지’의 주제 또한 수많은 화가가 앞다투어 그린 장면이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까 말까 고뇌하는 듯한 마리아의 모습은 언제나 매력적인 피사체다. 특히 이 그림은 ‘마리아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마리아는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하다. 겁이 난 듯한 표정, 자신의 운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표정, 조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천사의 메시지를 가만히 듣고 있다. 아직 이렇다 할 평지풍파를 겪지 못했을 마리아에게는 천사의 수태고지가 청천벽력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수태고지를 그린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내가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떤 신성한 상징이나 신비로운 분위기 등을 최대한 억제하고 인간 마리아 그리고 여인 마리아의 현실적인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낸 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의 휘장을 걷어내고, 종교화라는 장르적 문법도 걷어내고, 오직 인간의 현실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자신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평생 살아온 사람이라면 과연 이 엄청난 운명의 메시지를 듣고 과연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천사는 사뭇 경건하고 엄숙한 몸짓으로 눈처럼 새하얀 백합을 선물하며 ‘네가 바로 그 사람’임을 알리고 있는데 소녀 마리아는 커다란 눈망울에 두려움을 가득 담고 벽 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이며, 나아가 고통받는 모든 사람의 상징적 어머니가 될 것이다.

지오토, <나를 만지지 마라>, 1304~1306


▎‘신의 영역’에 올라선 예수님과 인간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거리감일까. 사랑의 본질이란, 너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오토, <나를 만지지 마라> / 그림제공·정여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부활한 첫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쁜 마음에 그를 붙잡으려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요한복음>의 이 장면 또한 화가들에게 수없이 사랑받았던 대목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사람들은 신과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차이를 발견하기도 하고, 이제는 ‘인간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던진 채 마침내 ‘신의 영역’에 올라선 예수님과 인간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철학자 장 뤽 낭시는 <요한복음>의 이 장면에서 철학적 화두를 발견한다. 그토록 다정했던 예수님은 왜 막달라 마리아의 지극히 인간적인 반가움의 표현마저 거부했던 것일까. 낭시는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책에서 바로 그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주장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붙들려 하지 말라는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차라리 놓아주라는 것.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너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바로 그 존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너는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다
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게 사랑하고 아는 것이다.
너에게서 빠져 달아나는 이를 사랑하라.
가버리는 이를 사랑하라.
떠나고자 하는 이를 사랑하라.
-장 뤼크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중에서


카미유 코로,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1861


▎다음 순간에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인간의 모습은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 카미유 코로, <지하세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는 오르페우스> / 그림제공·정여울
오르페우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아내 에우리디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승으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오르페우스는 죽어서라도 아내와 함께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르페우스의 애절한 노래 소리에 감동받은 나머지, 신들은 그에게 기적을 선물해준다. 에우리디케를 살려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하데스가 내건 조건이 있었다. 에우리디케를 이승으로 데려가는 대신, 이승으로 데려가는 그 길에는 절대로 아내를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오르페우스는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아내를 데리고 이승으로 가는 중이다. 그 다음에 어느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 채 다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희망찬 미래를 생각하며 걷고 또 걷고 있다. 다음 순간에 과연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인간의 모습은 서글프면서도 아름답다. 오르페우스는 다음 순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신과의 약속을 어길 것이고, 간신히 하데스에서 찾아온 아내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될 것이며, 그녀를 잃는 것이 곧 세상을 잃는 것과 다름없는 오르페우스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연인을 위해서는 결코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직 오르페우스도 에우리디케도 ‘다음 순간의 파국’을 모른다. 모르기에, 다만 이 순간에 완전히 충실할 뿐이다. 모르기에,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갈 뿐이다. 이것이 인간의 참모습이 아닌지. 1분 앞의 미래조차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미래로, 미래로 걷고 또 걷는 유한한 존재, 하지만 바로 그 유한함 속에서 무한의 사랑을 꿈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삶의 가치일 것이다.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1612호 (2016.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