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대중문화 인물연구] 언어에서 노래를 길어 올린 21세기의 음유시인 

밥 딜런, 노벨문학상보다 위대하다 

강헌 음악평론가
“나는 시인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네 타는 곡예사다.” _밥 딜런(1965)

밥 딜런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결정적인 공헌은 다름아닌 ‘언어’다. 그는 언어의 힘으로 그 이전까지 거의 만나지 못했던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음악을 대중에게 선물했다. 그의 노랫말 안에서 대중은 각성과 함께 진정한 예술의 힘을 경험했다.


▎2012년 1월. 밥 딜런이 미국 LA의 한 공연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2016년 가을, 세계 대중음악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소멸해가고 있던 한 장르를 다시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내야 하는 두 개의 사건을 만난다. 가을이 짙어가던 시월, 일흔다섯의 늙은 로커 밥 딜런이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11월 11일에는 밥 딜런과 거의 동시대를 공유한 캐나다의 뮤지션 레너드 코언이 8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한 사람은 세계적인 영예를 획득하고 또 한 사람은 쓸쓸히, 누구나 갔고 또 누구나 가야 할 길을 조용히 갔다.


▎1963년 발매 된 밥 딜런의 2집 앨범 의 표지. / 사진·중앙포토
이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음유시인’이다. 명백히 ‘천박한 이윤동기 아래 움직이는’ 대중음악의 시장에서 인생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두 아티스트에게 ‘시인’이라는 다소 고귀한 칭호를 선사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음악 전통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낸’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한림원의 영구 비서관인 사라 다니우스는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영어권 전통에서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전통을 구현하고 있었으며 54년간 전통이 되어왔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재창조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왔다”고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대중음악인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다니, 밥 딜런의 노래처럼 ‘시대는 변했고(The Times They are A-Changin’), 상황 역시 변했다(Things Have Changed)’.


▎밥 딜런은 한때 정치적으로 진보를 표방했지만 그 같은 이념적 프레임 역시 자신의 삶과 예술을 하나의 틀 안에 가두는 족쇄로 인식했다.
약관의 나이에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등장한 1962년부터 밥 딜런은 줄곧 시인의 대접을 받았고,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그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불편해 했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가 10년을 넘어서는 1970년대부터 미국 대학의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래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그의 가사는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공인되기 시작했으며, 80~90년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그의 시들이 셰익스피어나 T.S. 엘리엇에 견줄 만하다는 의견과 이런 딜런에게 노벨상을 수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영문학자 고 장영희는 그가 다른 유명한 시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시들은 책 속에 있지 않고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밥 딜런이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있자마자 문학계는 물론 대중음악권에서도 여기저기 불편한 의견들이 속출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이없는 것은 아마도 노벨상이 대중성에 영합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미묘한 경계를 딛고 선 대중음악가


▎엘비스 프레슬리는 젊은 시절 밥 딜런의 우상이었으나 두 사람의 신화적 자취는 매우 동떨어진 곳에 형성돼 있다.
노벨상 그 자체의 권위에 대한 왈가왈부는 일단 제쳐두자. 서구 사회에서 제기된 이와 같은 비난은 여전히 대중음악은 예술적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상 역사적 시효가 말소당한 엘리트주의의 공허한 망령이 여전히 21세기에도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영국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인 비틀스는 예술적 창의성과 친근한 대중성으로 세계음악 시장을 석권했다. 당시 명성 높은 작곡가이자 신대륙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비틀스의 놀라운 예술적 권능을 인정하며 “50년 뒤의 인류 음악사는 1960년대가 비틀스의 시대였다고 기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상 고급문화의 항복을 선언했다.

노래말은 시가 아닌가. 밥 딜런은 시인인가. 그는 시집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의 장구한 모든 앨범에 실린 노랫말은 어떤 시보다 시적이다. 그는 시인이라는 틀을 즉각적으로 거부했지만 어떤 시인보다도 시대의 정신과 독립적인 내면의 소리를 언어를 통해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밥 딜런은 미묘한 경계를 딛고 선 대중음악가다. 무명 시절부터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로큰롤의 스타를 꿈꾸었으며 스물두 살이 되던 1963년에는 스타덤에 오르며 자신의 야망을 실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 50여 년 동안 4000만 장에 가까운 음반 판매고를 올리며 글자 그대로 살아 있는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역사성은 그의 동시대 경쟁자로서 무려 13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비틀스나 팝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후배 마이클 잭슨의 역사성과는 다르고, 또한 당연하게도 그가 우상으로 여긴 선배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것과도 대단히 동떨어진 지점에 존재한다. 아마도 이들의 신화적인 발자취와는 멀어도 한참 먼, 그 ‘동떨어진 지점’이야말로 밥 딜런의 역사적 가치를 증빙하는 내용이 될 것이다.


▎1965년 여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의 밥 딜런(오른쪽에서 둘째)이 연주하고 있다. 맨 왼쪽 기타리스트는 마이크 블룸필드, 맨 오른쪽 건반악기 주자는 알 쿠퍼다. 이들은 미국 블루스 록의 거대한 뿌리로 평가받는다. / 사진·중앙포토
빌보드차트 No.1 히트곡을 무려 20곡이나 보유한 (앨범 차트에서도 무려 19개의 앨범이 정상에 오른) 비틀스나 1983년[Thriller] 앨범으로 미국에서만 2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세계를 강타한 마이클 잭슨의 화려무비한 디스코그래피에 비한다면 55년 음악인생에 빌보드 1위곡 한 곡이 없고 (1965년 ‘Like a Rolling Stone’과 1966년 ‘Rainy Day Women #12&35’가 2위까지 오른 게 최고 성적표다) 그나마 앨범 차트에서 고작 세 개의 1위 앨범만을 가지고 있는 밥 딜런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일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 세상에 내보낸 노래들의 진정한 가치는 도매상의 매출전표에 놓여 있지 않다. 그 노래들은 음반가게의 진열대가 아니라 시대와 의식의 진열대에 배포되었다. 그는 대중음악이 자본의 논리 안에서 ‘Baby, I love you’ 같은 동어 반복적인 클리셰(상투어)를 재생산하는 기계임을 거부했고, 모든 억압과 마법의 주술을 거부한 자유로운 주체 간의 진정한 소통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가 등장하면서, 그리고 그의 노래가 모든 불의의 장막을 걷어내고 정의의 영광을 희구했던 1960년대 서구의 유토피아적인 전복의 시대정신과 조우하면서, 대중음악은 탐욕스러운 자본의 논리가 입혀준 위선의 무대복을 벗고 마침내 시대와 현실의 정신이 되었다. 다시 말해 마침 1960년대에 착륙한 그에 이르러 인류의 대중음악은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존엄함을 상실해가는 인간에게 건네는 달콤한 체념과 위안의 오락 상품에서 벗어나, 각성과 연대를 촉구하는 사상의 표현으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노랫말을 문학사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잘못


▎밥 딜런을 발굴한 존 해먼드가 스타로 만든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할리데이. / 사진·중앙포토
따라서 밥 딜런이 대중음악사에 남긴 결정적인 공헌은 다름아닌 ‘언어’다. 그는 무엇보다도 노랫말의 혁명가인 것이다. 그는 그만의 방식의 노랫말을 통해 그 이전까지 거의 만나지 못했던 창조적이고 충격적인 음악을 대중에게 경험하게 만들었다.

노랫말?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대중음악에서 노랫말이란 그저 멜로디나 리듬, 화성 같은 모든 음악적 요소에 비해 부차적인 요소가 아닌가? 비틀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는 이런 말도 서슴지 않았다. 가사는 거추장스럽다고. 자신은 공연에서 어떻게 하면 청중들이 내 노랫말을 못 알게 듣게 발음하느라 애쓴다고.

하지만 미학적으로 보더라도 대중음악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기존의 모든 음악 체계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은 노랫말이라는 문학적 요소와 제반 음악적 요소 간의 하이브리드적인 결합이 가져온 예술적 효용성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번 가정해 보라. 당신이 수십 년간 애청해 온 노래에 그 노랫말이 없다면? 그리고 그 노랫말을 운반해주는 보컬 없이 그 나머지 연주만을 감상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 앙상한 음악적 울림에 하품하며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일찍이 국문학자 조동일이 ‘유행가 시인과 비애라는 상품’이라는 글에서 지적했듯이 유행가의 시인들은(다시 말해 작사가들) 기존의 시인들과는 다른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대중의 문학적 상상력을 일구어온 존재다. 그러므로 이들 노랫말을 문학사에서 배제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음악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음 혹은 음향 자체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언어엔 의미가 동반한다. 이 언어와 제반 음악적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하면서 추상적인 음의 질서는 강력한 의미를 탑재하며 대중들의 동감을 적극적으로 견인한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의 대중음악에서 노랫말이란 그저 새롭게 독립적인 스타로 부상한 보컬리스트에게 존립근거를 제공하는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2년 뉴욕 맨해튼 남쪽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그리니치 빌리지에 등장한 한 명의 왜소한 청년이 음악사의 ‘새로운 아침(New Morning)’을 열게 된다.

그 청년은 미네소타 주 출신으로 유대계 러시안 이민자의 후손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을 중퇴하고 그의 우상인 포크 뮤지션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왔고, 본명은 로버트 앨런 지머맨이라고 했다. 십대 때부터 시에 심취한 그가 예명도 아니고 아예 본명을 밥 딜런으로 개명해버린 연유는, 그가 대부분의 의문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 적이 생애 내내 한 번도 없었음을 상기한다면 역시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십대 때부터 시에 심취했다고 하여 그의 딱 한 세대 앞 웨일즈의 시인 딜런 토마스의 이름에서 영감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뿐이다.

이 무명의 청년은 1950년대 반문화의 첨병인 비트족들의 근거지인 그리니치 빌리지의 작은 카페들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다 거물 프로모터 존 해먼드에게 픽업된다. 존 해먼드는 비트 제너레이션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앨런 긴즈버그와 20세기 초중반을 아로새겼다. 그는 블루스 뮤지션 로버트 존슨과 더불어 오늘날의 밥 딜런이 있게 한 앞 세대의 공로자 세 사람 중의 한 명이다.

존 해먼드가 발탁한 1960년대의 적자


▎1963년 8월 워싱턴DC 민권운동 당시 가수이자 연인이었던 존 바에즈(오른쪽)와 함께한 밥 딜런. / 사진·중앙포토
존 해먼드는 한마디로 20세기 미국 대중문화사에서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그는 뉴욕의 명문가 출신으로 하버드를 졸업했으며, 좌파였고, 상류계층의 사교계의 마당발이었다. 그는 미국 마이너리티 문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1930년대 후반부터 흑인 재즈의 파이오니어들, 가령 듀크 앨링턴이나 카운트 베이시 같은 인물의 메인스트림 진입을 지휘했으며 어쩌면 유흥가의 뒷골목에서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빌리 할리데이, 사라 본, 엘라 피츠제럴드 같은 흑인 여성을 디바의 왕좌에 앉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음악계 내부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그가 그전까지는 보지 못한 차가운 이성과 비판정신, 너무나 섬세해서 곧 부서져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닌 백인 청년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카리스마를 보았던 셈이다.

그의 호기로운 주선으로 메이저 레이블 인 CBS에서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되지만 그것은 실패로 끝났고 딜런은 ‘해먼드의 바보’라는 호사가들의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존 해먼드는 까다로운 민중주의자였고 그의 예술가들에게 완벽을 요구했다. 그와의 인연은 어린 밥 딜런이 앨버트 그로스먼이라는 젊은 매니저를 고용하면서 끝난다.

존 해먼드와 밥 딜런 사이의 파트너십은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해먼드는 인종과 세대와 장르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안목을 가진 걸출한 시대의 연출자였다. 그가 발탁한 인물이 다름아닌 밥 딜런이었다는 점은 1960년대라는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달려갈 것인지를 예시하는 것이었다.(다음 70년대에 존 해먼드가 발탁한 인물은 이후 미국 로큰롤의 총아로 ‘보스’의 애칭을 얻게 되는 바로 그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

밥 딜런의 텍스트는 데뷔 앨범에 실린 ‘Song to Woody’에서 암시하듯 미국 포크 음악의 아버지 우디 거스리였다. 딜런은 뉴욕의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내는 우디 거스리와 함께 그의 뒤를 이어 미국 포크 음악계의 맏형을 역할을 자임하고 있던 피트 시거를 또한 만났다. 그들과 함께 자신의 음악이 앞으로 어떤 운명의 문을 두드릴지에 관한 영감을 차근차근 숙성해나갔다. 그리고 그는 미국 60년대의 노래가 될, 아니 그 이후로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모든 진보적인 깃발을 상징하게 될 노래인 ‘Blowin’ in the Wind’를 담은 역사적인 두 번째 앨범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두 번째 앨범이야말로 밥 딜런의 출사표였으며 그의 예술적 의제인 ‘민중의 시’로서의 포크음악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한 앨범이었다.

[The Freewheelin’ Bob Dylan]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1963년 앨범은 왜 인간의 세계는 전쟁의 논리 위에서 폭력적으로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담았다. 앞서의 타이틀곡 말고도 군수산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Masters of War’, 미시시피 대학의 제임스 메레디스 사건을 통해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Oxford Town’, 핵에 의한 거대한 재앙의 묵시록적 표현인 ‘A Hard Rain’s A-Gonna Fall’같은 시사적인 주제의 노래가 담겼다. 거기에 통상적인 러브송으로부터의 이탈인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에 이르기까지 저항적인 포크음악의 진수를 단숨에 선보인 명작 중의 명작이다.

이 음반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이유는 이 음반이 1970년대 한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펼쳐진 청년문화의 봉기에 거의 교과서적인 전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유석은 ‘Blowin’ in the Wind’를 ‘파란 많은 세상’으로, 이연실은 ‘A Hard Rain’s A-Gonna Fall’을 ‘소낙비’로, 양병집은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역(逆)’으로 번안하여 불렀다.(나중에 김광석은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며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제목을 바꾸었다.) ‘소낙비’의 번안까지 맡은 밥 딜런의 진지한 추종자 양병집은 밥 딜런으로 인해 대중음악을 통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깨달았다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고백했다.

블루스맨의 시선으로 최강대국 미국을 바라보다


▎‘노래하는 시인’ 밥 딜런. 반전과 평화의 상징인 그는 노랫말을 시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 사진·중앙포토
하나의 음반이 이토록 강렬하게 사회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을까? ‘Blowin’ in the Wind’는 밥 딜런이 아닌 대중성이 뛰어난 포크 트리오 피터 폴 앤 메리가 불러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지만 정작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다. 밥 딜런의 음악이 의미심장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음악 상품으로 그치지 않고 고요하지만 거대한 파장처럼 미국 사회에, 나아가 세계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Blowin’ in the Wind’는 3년 뒤 흑인 R&B계의 신흥주자로 부상하던 스티비 원더가 리메이크하여 차트에 올렸고, 여성 흑인 블루스 싱어 오데타 고든은 아예 밥 딜런의 노래만으로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노래에 대한 동감과 지지는 지역과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머물지 않았고,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와 열광에도 도취되지 않았던 밥 딜런. 그런 태도는 그를 노벨문학상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평가받게 하는 미덕이다.
우리는 밥 딜런을 포크 뮤지션이라고 부르지만 그의 1960년대 노래엔 유독 [○○○ Blues]라는 제목의 노래가 많다. 제목엔 이 단어가 보이지 않더라도 블루스 형식의 노래가 많다. 그는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왕 로버트 존슨의 녹음을 반복해서 들으며 그 가난하고 뿌리 뽑힌 자의 미국적 미학을 온 몸으로 체득했다. 그는 시골길을 따라 이 도시, 저 도시를 하염없이 방랑하는 흑인 블루스맨의 시선으로 최강대국이라는 자기 조국의 모순과 그 모순 아래에서 교수되고 있는 정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미국 서민의 고통과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유머를 소박하게 구현한 백인 우디 거스리와 농장 노예노동의 고통과 도시 빈민 노동자로 밀려난 흑인들의 정서를 형상화한 흑인 블루스맨 로버트 존슨이 밥 딜런의 영감의 원천이었던 셈이다. 문맥에서 벗어난 얘기지만 이 로버트 존슨의 블루스는 영국의 기타리스트이자 로커인 에릭 클랩튼에게도 깊은 영감을 선사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밥 딜런의 음악은 미국 문화 특유의 흑과 백 양쪽에 풍부하게 걸쳐 있고, 또한 그의 음악은 동시대 흑과 백 진영의 뮤지션 모두에게 전복의 영감을 제공했다. 밥 딜런이 등장하기 전 리듬앤블루스 흑인 음악진영은 50년대 매카시즘의 우울한 영향 아래 사회적 발언이 거의 봉쇄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 개인적 욕망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정신이 미국을 흔들자 흑인 음악인 속에 꿈틀거리고 있던 울분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열망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60년대 중반 이후 소울(Soul)이라는 흑인 정신의 권능을 마음껏 표방하는 음악 장르가 흑인사회의 자긍심을 높이 고취시키게 된다. 밥 딜런의 평전을 쓴 마이크 마퀴스는 이 소울 음악의 출현에 밥 딜런의 음악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밥 딜런과 비틀스는 가장 극적인 이종교배


▎1960년대 중반 전성기의 비틀스 멤버. 밥 딜런의 노래 정신이 영향을 미친 대상은 비틀스와 이후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록밴드다. / 사진·중앙포토
밥 딜런의 노래 정신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대상은 다름 아닌 비틀스, 그리고 그 이후로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게 되는 록밴드다. 이들은 밥 딜런의 세례를 받았다. 10대 여고생들을 들뜨게 했던 러브레터 류의 노랫말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현실을 향해 나아가거나 내면의 혼란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다. 비틀스가 미국에 상륙했을 때 밥 딜런 또한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았다. <런던타임스>는 밥 딜런이 영국에서 처음 소개한 ‘It Ain’t Me Babe’의 후렴구 ‘No, No, No’는 비틀스의 후렴구 ‘Yeah, Yeah, Yeah’에 대한 응답이라는 날카로운 포착을 담았다. 이미 세상을 제패한 비틀스 또한 1964년 말을 기점으로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들은 더 이상 10대 여고생들의 주머니나 터는 ‘Oh-Ye’ 밴드가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인식은 순식간에 깊어졌고 레논과 매카트니가 주로 담당하는 노랫말은 더 이상 아이돌 밴드의 노래가 아닌 성숙한 문제의식과 뛰어난 문학적 표현기법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밥 딜런과 비틀스 간의 상호영향은 대중음악사 전편을 걸쳐서 볼 때 가장 극적인 이종교배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밥 딜런이 비틀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밥 딜런 또한 비틀스의 록 사운드에서 심대한 영향을 입었다. 밥 딜런은 포크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쿠스틱 사운드를 버리고 록 음악의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하기로 결심한다. 고작 24세 청년의 사운드 전향은 충성심 강한 포크의 팬들에겐 대재앙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참으로 이르게도 밥 딜런은 자신의 노래를 통한 정치적 복무와도 결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이 진보 진영에 끼친 충격은 컸고, 특히 자신의 연인이자 동반자이기도 했던 조앤 바에즈나 필 옥스, 배리 맥과이어 같은 좌파 포크 뮤지션들의 실망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그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진 것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배신이었다.

저항의 아이콘으로서의 자기부정. 그러나 밥 딜런의 이와 같은 선택은 결코 기회주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당시 진보 진영의 퇴조는 적어도 5년 뒤에나 시작된다), 예술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불안정한 감정 상태에 의한 변덕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이미 존 해먼드와의 짧은 인연에서도 그랬듯이, 자신이 어떤 도그마에 갇혀 고정되고 규정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더듬이를 가졌다. 그것이 그가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작업을 마치고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정처 없는 도보여행을 하며 얻게 된 포크음악의 진정한 방랑정신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는 정지척 선동가도 아니며, NGO의 사회활동가도 아닌, 한 명의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충실했을 뿐이다.

뉴포트의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전기기타를 매고 등장했을 때 포크의 팬들을 경악에 찬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무표정하게 묵묵히 자신의 신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 노래, ‘Like A rolling Stone’은 팝음악 사상 가장 문제적인 노래로 추앙받게 된다. 비트의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이 노래를 두고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그러나 그 어떤 설명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완벽한 해설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위대한 예술이 주크박스에서도 가능한가를 시험해보는 도전이었다.”

밥 딜런이 이 명작을 담은 문제작 ‘Highway 61 Revisit ed’을 발표하면서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포크록이라는 신종 장르의 문을 연 개척자가 되었다. 그는 그 스스로가 개척한 새로운 음악의 영토에서 [Blonde on Blonde](1966) 같은 두 장짜리 걸작 더블앨범을 발표하며 자신의 음악적 관심을 자아에 대한 초월적인 성찰의 지평으로 넓힌다. 이 앨범은 ‘아침이슬’의 작곡자이자 한국 싱어송라이터의 시대를 연 김민기의 십대 시절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앨범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밥 딜런은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자유훈장’을 받았다. / 사진·중앙포토
포크 뮤지션이자 FM 라디오의 DJ이기도 한 한동준은 또 다른 관점에서 밥 딜런의 음악적 의미를 ‘현재성’에 둔다. 즉 그에겐 기존의 가치, 그것도 자신이 생성시킨 가치조차도 바로 지금 이 순간, 현재의 관점에서 무너뜨리고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는 늙어갔지만, 그리고 다시는 60년대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나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적 관점에서 새로운 의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예술가적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빌보드의 스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보수적인 그래미 어워드도 20세기가 저무는 1998년이 되어서야 [Time Out of Mind] 앨범에 올해의 앨범상을 포함한 세 개의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으며 자신의 입장을 좀처럼 발표하는 적도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 있는 한 현역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65세를 맞은 2006년, 21세기에도 여전히 문제적인 아티스트라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하는 앨범 [Modern Times]를 발표하며 그는 현존하는 최고령 아티스트로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유서 깊은 음악잡지 <롤링 스톤>은 이 앨범을 올해의 앨범으로 꼽으며 여전히 ‘현재’를 완전연소하고 있는 노 음악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2008년 노벨상을 수상하기 전에 ‘팝음악과 미국문화에 끼친 깊은 영향’으로 퓰리처상이 그에게 주어졌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1960년대 시대정신의 아들이다. 그는 가장 적절한 시대에 가장 적확한 문제의식을 안고 때맞춰 지상에 도착했다. 만약 그가 10년만 빨리 왔더라면 그는 그저 매카시즘의 빨갱이 사냥의 수많은 사냥감 중 하나로 희생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대에서 멈추어 서지 않았고, 자신에게 쏟아진 열광과 찬사에 머물지 않았다. 서른 다섯장에 이르는 기나긴 디스코그래피는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예술적 방랑의 기록이다. 쉽게 자신의 명성에 안주하고 조로하는 대한민국의 예술가들이 다시 한번 그의 삶과 예술에서 자신의 정신을 재충전해야 할 것이다. 1960년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남긴 과제는 여전히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노래가 아닌 그의 육성을 남긴다.

“재즈와 희망과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 신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던가, 신이 우리를 돌보신다던가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추라 하지 말라. 요점만 말하자. 도덕적 질서란 없다. 사람들은 그 따위 것들은 다 잊어버린다. 유리한가 아닌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제 정신이 아닌 세상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아야 한다.”

강헌 -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교의 음악대학원 음악학과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했다.1991년 <김현식론> 이후 한국 대중음악에 관한 비평을 25년간 썼다. 들국화 헌정 앨범 및 노무현 추모 앨범 등의 프로듀서를 맡았고 <검열 철폐 기념 콘서트 자유>를 만들었다. 저서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 <명리-운명을 읽다>가 있다.

201612호 (2016.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