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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산책]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오해와 이해 

인간이든 바퀴벌레든 “껍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니?”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외피가 뭐든 복제에 유리하면 그만! 조건·환경 바뀌면 언제든 새 ‘생존기계’로 갈아타는 것이 유전자의 속성 국내서도 책 판매량·인지도 압도적 1위…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해는 수년째 제자리걸음

지난 1월 말, 한국을 처음으로 다녀간 세계적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76) 영국 옥스퍼드대 뉴칼리지 명예교수. 1976년 발표한 대표저술 <이기적 유전자>는 당시 35세였던 도킨스를 세계적 스타 과학자의 반열에 올렸다. 문학에서나 어울릴 법한 ‘이기적’이라는 은유는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책을 스테디셀러로 만들었다. 동시에 그로 인해 많은 오해도 받았다. 한국에서도 강연과 대담으로 ‘진화생물학 바람’을 일으킨 그 이기적인 용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봤다.


▎1월 21일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서울 한남동 북파크에서 ‘진화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학생이나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아는 과학자를 떠올려보라고 하면 흥미로운 현상을 접할 수 있다. 청중이 누구든 늘 나오는 독보적 이름은 아인슈타인이며(한 번도 안 나온 적이 없다), 그 다음으로 에디슨·뉴턴·퀴리부인·노벨 등의 이름이 드문드문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인물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유독 몇몇 이름만 회자하는 이유는 이들에게는 이들만의 고유 수식어가 있다는 것이다. ‘세기의 (괴짜) 천재 아인슈타인’ ‘발명왕 에디슨’ 혹은 ‘뉴턴의 사과’ ‘노벨상을 두 번 탄 퀴리 부인’ ‘노벨상을 만든 노벨’처럼 말이다.

아무리 업적이 뛰어나더라도 이런 수식어가 없는 밋밋한(?) 과학자는 널리 이름을 각인시키기 어렵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데 성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는 과학자의 반열에 이름을 올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는 단순히 수식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 영국의 <프로스펙트>와 미국의 <포린폴리시>가 공동으로 선정한, 현존하는 사람들 중 가장 대중적 영향력이 큰 사람들을 의미하는 ‘세계 100대 지식인(Top 100 Public Intellectuals)’에서 도킨스는 노엄 촘스키와 움베르트 에코의 뒤를 이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몇 년 후 실시된 같은 조사에서는 순위가 조금 하락했어도 여전히 도킨스라는 이름의 무게감은 상당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17년 2월 기준, 도킨스의 대표작인 <이기적 유전자>는 몇 년째 자연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분야를 망라한 스테디셀러 목록에서도 당당히 24위에 올라 있다. 우리의 과학서적 시장이 매우 협소하다는 것과 가뜩이나 적은 독서인구 중에서도 과학책을 읽는 사람은 유독 소수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럼에도 <이기적 유전자>가 이토록 인기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판매량이나 대중적 인지도와 별개로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를 둘러싼 이해 정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듯싶다. 여전히 사람들은 유전자의 이기성이 제 잇속만 채우려 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정당성을 자연에서 찾는 뿌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유전자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붙인 ‘이기적’이라는 적당히 속물적이고 대단히 인간적인 은유법을 곡해한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도킨스는 왜 한낱 분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유전자에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붙여 의인화했고, 그 의인화된 분자들은 왜 그토록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을까?

병아리는 왜 쪼기 행위 같은 본능을 갖고 태어날까


▎<이기적 유전자> 번역서.
본격적으로 이에 대한 오해를 풀기 전에 먼저 도킨스라는 인물에 대해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킨스의 정식 이름은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로, 1941년 3월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도킨스 스스로 “나는 자연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일찍이 열대 아프리카라는 완벽한 환경에서 자랐을뿐더러, 자연학자가 되기엔 완벽한 유전자까지 물려받았다. 수 세대 동안 우리 집안 사람들은 카키색 반바지를 입고 햇볕에 그을린 다리로 제국의 여러 밀림을 누비고 다녔다. 나는 피스헬멧(pith helmet: 아주 더운 나라들에서 머리 보호용으로 쓰는 가볍고 단단한 소재로 된 흰색 모자)을 쓰고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둘러싼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소들은 그가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과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고 성장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와 삼촌들은 아프리카·인도·네팔의 무성한 밀림을 헤치고 다녔다. 도킨스 집안에서는 나뭇가지 위에 앉은 푸른 깃털의 새가 무슨 새인지 모르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받았다고 하니, 성장한 도킨스가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기 시작한 건 어쩌면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기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도킨스는 그의 가문 남자들이 그랬듯이 헬멧과 반바지차림으로 정글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적 소년이라기보다 두꺼운 책을 들고 몰래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책벌레에 가까웠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훗날 이런 특성은 그가 현장에서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일종의 이론생물학자로서 생물학은 물론이거니와 과학 전 분야에 걸쳐 파문을 일으키는 이론을 들고 나오는 것으로 이어진다.

옥스퍼드의 베얼리얼 칼리지에 진학해 동물행동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니코 틴베르헌(Niko Tinbergen, 1907~88)의 제자가 된 도킨스는 한동안 평범한 동물학 전공 대학원생의 삶을 살았다. 틴베르헌은 큰가시고시 수컷이 지닌 영역 방어와 공격성에 대한 연구로 1973년 콘라드 로렌츠·카를 폰 프리슈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됐다. 그의 영향을 받은 도킨스의 학위논문 주제는 병아리의 쪼기 행동에 대한 연구로 정해진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상황에서 병아리의 쪼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병아리들은 알을 깨고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주변에 보이는 좁쌀만큼 작은 물체들을 닥치는 대로 쪼아댄다. 그런데 병아리들은 자신이 쪼아대는 작은 물체들이 먹잇감인지, 의미 없는 얼룩인지 어떻게 구별해내는 것일까? 먹잇감이라면 쪼는 행동이 매우 유익할 테지만, 그저 얼룩이라면 얻는 것도 없이 부리만 다칠 공산이 크므로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 하지만 갓 알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이 어떻게 이를 구별하는 것일까?

도킨스는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병아리들이 입체감을 지닌 것, 즉 위가 밝고 아래쪽이 어두운 색으로 보이는 물체-지구상에서는 태양이 늘 머리 위에 있으므로 자연에 존재하는 물체들은 위쪽이 밝고 아래쪽이 그늘질 수밖에 없다-들을 집중적으로 쪼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이는 부화 이후 인위적으로 빛이 아래쪽에서만 비추는 실험실에서 큰 병아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낸다. 병아리들에게 위쪽이 밝고 아래쪽이 어두워 입체감을 나타내는 것들이 먹이일 공산이 높다는 것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본능이었고, 이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각인된 행동이었다.

이 연구는 얼핏 병아리의 쪼기 행위가 본능이냐 학습이냐를 판정하는 연구 결과처럼 보이지만, 도킨스가 더 주목했던 것은 병아리에게 아로새겨진 이 본능적 행동의 기원이었다. 도대체 병아리들은 왜 이런 행동을 본능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일까?

병아리뿐 아니라 자연의 많은 생물체는 일련의 본능적 행동을 타고 난다. 사실 이런 본능이 존재하는 이유는 쉽게 짐작된다. 일찍이 다윈이 말했듯, 그것이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므로 자연의 손이 이를 선택(natural selection)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본능이 개체에 유리하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동물의 본능은 매우 이타적으로, 다시 말해 개체에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고의 원시바다에 출연한 DNA란 강력한 ‘복제자’


▎영국 채널4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찰스 다윈의 천재성> 촬영 중 고릴라를 바라보는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예를 들어 남아프리카에 사는 미어캣은 대부분 30마리 정도가 집단을 이루어 서식하는데, 이들 무리에서는 늘 천적이 나타나지 않는지 망을 보는 파수꾼이 있게 마련이다. 파수꾼들은 한시도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사방을 둘러보다 독수리나 자칼 같은 천적이 나타나면 날카로운 소리로 경보를 알려 동료들을 피난시키는 역할을 한다.

파수를 보는 일은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파수를 보는 동안에는 한눈을 팔 수 없으므로 먹이를 먹을 수도 없고,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내지르는 날카로운 경고음은 오히려 천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켜 잡아먹힐 위험도 크다. 따라서 파수꾼이 된다는 건 목숨을 건 희생이 요구되는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이다. 그럼에도 미어캣들은 돌아가면서 번갈아 맡는 파수꾼의 직책을 회피하거나 거부하는 법이 없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토록 이타적인 본능을 지니도록 진화한 것인가?

도킨스는 이 현상에 주목했다. 도대체 이 개체들은 왜 이타적인가? 이전까지의 설명은 집단 전체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개체들의 이타적 행동이 전체 집단의 생존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라는 집단선택설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생물체의 본능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킨스의 접근방식은 당시까지의 주된 접근방식을 뒤집는 것이었다. 도킨스는 가장 작은 것에 주목했다. 집단도 종도 개체도 아닌 보잘것없는 유전자, DNA 분자들이 길게 이어져 늘어선 단순한 화학물질에 주목했다.

태고의 지구에서 바다는 온갖 화학물질이 떠다니는 일종의 걸쭉한 수프였다. 수억 년 동안 이 수프에서는 여러 가지 물질이 만들어지고 없어지고 결합되었다 쪼개지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과는 달라지는 순간이 나타났다. 우연히 만들어진 하나의 물질이 있었다. 이 물질이 여타의 다른 것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은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복제자(replicator)라는 것이었다.

복제자는 원시바다의 수프 속에 떠다니는 탄소·질소·수소·산소·인 등을 붙잡아 자신과 똑같은 복제본을 추가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복제본은 다시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오래지 않아 바다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곳이 되었다. 이전에는 물질들이 무작위로 만들어졌다 흩어지는 곳이었다면, 이제는 복제자의 존재가 확실히 두드러지는 곳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복제자가 왜 탄소를 기반으로 하는 DNA의 형태를 띠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탄소의 뛰어난 결합력과 육각형의 안정적 구조가 다른 물질들에 비해 더 안정적이면서도 복제 가능한 형태를 띠는 데 유리했을 것이기에 흩어지지 않고 살아남았으리라. 원시바다에는 DNA가 아닌 다른 구조의 복제자 분자들이 있었을 수 있다. 처음부터 DNA만 유일한 복제자로 생겨났다기보다 여러 가지 복제자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공격적인 복제가 가능했던 DNA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하다.

복제자 분자가 여타의 물질과 다른 유일한 차이는 스스로 복제가 가능했다는 것뿐이었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가르는 전부였다. 도킨스는 DNA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복제자를 유전자라고 칭했다. 유전자들은 오로지 스스로 복제하는 것만이 가능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어떤 의도도 욕망도 계획도 목적도 없다. 그저 주변에 있는 원소들을 모아 자신을 복제하는 분자적 특성만 반복될 뿐이다.

유전자는 복제하는 존재-아무런 의도도 없다


▎‘진화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를 주제로 서울 한남동 북파크에서 강연하는 리처드 도킨스.
도킨스는 이를 ‘이기적’이라는 적당히 세속적이고도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단어를 이용해 은유적으로 설명했다. 원시바다에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한 분자들이 뒤섞여 있더라도, 여기에 단 하나의 복제자가 존재한다면 충분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복제자의 복제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욕심쟁이 먹보가 이전까지는 골고루 나눠 먹던 원시바다의 수프를 몽땅 제 수프 그릇에 쏟아 부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이기적 분자’인 유전자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를 우연히 뒤집어쓴 유전자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것들이 보호막 역할을 하여 수를 늘리는 데 유리했다. 이것이 생명체의 탄생이다.

여기서 도킨스는 ‘사실은 유전자가 전부’라는 사실보다 더욱 인류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명체도,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인간도 일종의 생존기계, 즉 유전자라고 알려진 복제자들을 보존하고 복제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생존기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존재조차 인식하기 어려웠던 유전자라는 분자가 실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존재하게 한 ‘배후조종자’이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생명체가 사실은 유전자라는 단순하고 목적 없는 분자들이 그저 자신을 복제하고자 하는 이기적 열망으로 프로그래밍한 운반체 혹은 로봇에 가까운 보잘것없는 존재였다는 도킨스의 엄청난 ‘팩트 폭력’적인 주장은 곧 엄청난 논란과 충격을 선사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이것이 1976년, 35세의 청년 도킨스가 해석해낸 생물의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비밀이었다.

도킨스가 유전자를 이기적 존재라고 말한 배경이 오히려 생물체가 가진 이타적 습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이 자못 아이러니하다. 다시 말해, 개체가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독립적이든 상호협조적이든, 그게 본질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개체가 보이는 이기적이거나 이타적 행동 자체가 유전자의 복제에 기여하는 바가 얼마나 크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혼자 먹어치워야 할까, 동료와 나눠먹어야 할까. 인간의 가치로는 전자를 이기적이라 비난하고 후자를 이타적이라 칭송하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무조건 이기적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조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서는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지체하지 않고 혼자 먹어치우는 이기적 행동이 복제자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먹잇감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다른 개체들과 나눠먹는 이타적 행동이 훗날 내가 굶주릴 때 동료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복제 가능성을 높이는 ‘유리한’ 행동이 되기도 한다.

결과값이 무엇이든 유전자의 복제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식이 다른 조건들과 맞물려 때로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며 비정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말할 수 없이 이타적이고 상냥하게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유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복제하는 데 유리한 껍데기가 인간이든 바퀴벌레든 공룡이든 대장균이든 상관없다. 외피가 무엇이든 유전자 복제에 유리하면 그만이므로, 조건과 환경이 바뀌면 얼마든지 새로운 기계로 갈아탈 수 있다.

가장 논란이 된 시각을 제시한 과학 커뮤니케이터


▎왼쪽부터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번역서, <눈먼 시계공>(1986), <만들어진 신>(2006), <이기적 유전자> (1976).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극단적 환경 속에서도 그곳에 적응한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과, 커다랗고 육중했던 공룡들이 자그맣고 팔랑거리는 새가 되어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극적 변화가 모두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된다. 유전자들이 그 환경과 조건에 맞는 새로운 생존기계로 갈아탔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사실 말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유전자와 생명체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접근방식 자체가 매우 낯설었고, 그로 인해 도출된 결론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심리적 반발심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유전자를 핵심에 놓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생물학의 난제-왜 생물체는 경쟁하는 동시에 공생하는가, 왜 개체는 자신과 피를 나눈 가족이나 친족들에게 더 너그러운가, 왜 어떤 개체군은 이타적 본능을 타고 나는가, 왜 지구상의 생물종들은 끊임없이 탄생과 멸종을 반복하는가 등을 단 하나의 만능열쇠, 즉 ‘유전자는 복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한 문장으로 모두 이해 가능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물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이후 스스로를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어린아이’로 칭했듯,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생존기계’라는 개념도 완벽히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해밀턴의 친족이론 등 이와 비슷한 개념을 보고했던 많은 다른 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중세 시절 ‘지구중심적 천체 체계(천동설)’가 내포한 수많은 모순을 발견한 사람은 많았지만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는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인해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한 결정적 인물이 코페르니쿠스였던 것처럼, 생물의 모든 행동과 진화적 경향을 집단이나 종이라는 거시적 관점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법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도킨스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제안이 그랬듯, 이러한 접근법이 오랫동안 생명체의 행동과 진화 과정에서 관찰된 많은 모순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결정적 시각을 제시한 것은 물론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결정적 한 방을 터뜨린 도킨스는 이후 <확장된 표현형> <눈먼 시계공> <만들어진 신> <지상 최대의 쇼> <악마의 사도> 등 10여 권의 과학서를 집필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혹은 악명을- 널리 알린 가장 유명하고 가장 논란이 된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책이 한 권 더 나올 때마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윈의 후예, 밈(meme)의 창시자, 전투적 무신론자, 악마의 사도 등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이기적 유전자’의 위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모든 영웅과 위인들 역시 사람이기에 지녔던 모순과 약점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일구어낸 뚜렷한 업적은 분명 의미 있는 것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이후에 드러난 도킨스의 사회·종교·정치적 견해에 대한 평가는 분명 제각각이지만-그것도 매우 극단적으로!- 적어도 생물의 존재와 진화에 대해 유전자적 입장이라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한 인물이라는 특성만큼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은희 - 연세대학교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서 과학언론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2년부터 ‘하리하라’라는 필명으로 과학 관련 칼럼을 연재하며 대중과학 작가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리하라의 생물학 카페> <하리하라의 눈 이야기> 등이 있다.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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