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예술가의 초상] 탄생 100주년 장욱진의 삶과 꿈 

맑은 눈으로 원초의 세계를 응시하다 

함혜리 서울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lotuscomcom@naver.com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사람들은 장욱진을 일컬어 이 시대에 도인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 기인(奇人),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야인(野人)이라고 한다. 강한 신념과 아이 같은 맑은 영혼을 동시에 지녔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술을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으며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큰 욕심도 없었지만 가족을 무지 사랑했던 사람. 이 모든 것, 혹은 그 이상이 바로 그 사람 장욱진이다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 장욱진(1917~1990)이 평생을 두고 추구한 화두는 ‘심플(Simple)’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단순함, 소박함, 순수함, 간결함은 정감 어린 그림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맑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지만 강한 자존감과 강한 신념을 지녔던 화가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시간을 초월한 듯 살면서 오직 그림 한 가지에 인생을 걸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가 살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대단히 용기 있는 삶이었다. 어찌나 외곬이었는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지만 스스로는 외롭고 고된 길을 갔다. 그렇게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의 세계를 지켜주었다.

그가 칠십여 년을 살면서 남긴 작품들은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순진무구하고 정감이 넘친다. 자그마한 화면 속에 산, 집, 사람, 호랑이, 까치, 나무 등 꾸밈없고 단순한 이미지들이 사이 좋게 어우러졌다. 향토적이고 소박한 그림들은 보는 이를 꿈의 세계, 평화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강한 신념과 아이 같은 맑은 영혼


▎1980년 작 <풍경>.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에는 평소 가족과 집과 자연을 사랑했던 장욱진의 동심이 잘 나타나 있다. /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봄은 왔건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겨울처럼 스산하다.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장욱진의 맑고 순수한 그림은 더욱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마침 올해는 그의 탄생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독보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장욱진의 삶과 예술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꿈꾸던 이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장욱진이란 화가를 알게 된 것은 그의 5주기에 맞춰 호암미술관에서 가진 회고전(1995년 4월 4일~5월 14일)의 도록을 통해서였다. 향토적이고 원시적이면서 동화 같은 그림을 보면서 이런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지닌 화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진 속의 그는 참 웃는 인상이 좋고, 편안해 보이고 익살스러운 구석도 있을 것 같았다. 깡마른 체격에 쪼그리고 앉아서 작품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품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담백하고 단순했다. 첫눈에 강하게 다가오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 있으니 마음이 참 편안했다. 동산에는 믿음직한 나무가 서 있고, 시골집 마당에는 개와 소, 나무 위엔 새가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순진무구한 사람들과 그들을 닮은 동물과 부드러운 자연이 있는 풍경이다. 정자가 있는 한옥,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두막, 평상에서 정담을 나누는 풍경은 아련한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사람들은 그를 이 시대에 도인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 기인(奇人),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야인(野人)이라고 한다. 강한 신념과 아이 같은 맑은 영혼을 동시에 지녔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술을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으며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큰 욕심도 없었지만 가족을 무지 사랑했던 사람. 이 모든 것, 혹은 그 이상이 바로 그 사람 장욱진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천생의 화가임을 글과 말을 통해 자주 고백하곤 했다. “내게 죄가 있다면 그림 그리는 죄와 술 먹은 죄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림처럼 정확한 나의 분신은 없다. 그림과 술과 나는 삼위일체인 것이다.”(<세대> 1974년 6월호)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내가 오로지 확실하게 알고 믿는 것은 이것뿐이다.”(<샘터> 1974년 9월호)


▎<공기놀이>는 양정 고보 재학 시절에 그린 것으로, 1937년 조선 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 전람회>에 출품해 최고상인 사장상을 받았다. /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장욱진은 1917년 11월 26일 충남 연기군(세종시 연동면 송용리 생가)에서 태어났다. 이날은 음력 생일로, 양력으로 치면 1918년이지만 주민등록상에도 음력 날짜가 생일로 기록돼 있고 장욱진 자신도 음력 날짜를 태어난 날로 삼았다. 그의 부친은 대지주 가문의 둘째 아들로 서화와 골동품에 안목을 지니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아이들에게도 그림을 그리게 했다. 연동에서 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던 그의 가족은 교육 여건이 좋은 서울로 올라오라는 고모의 권유로 고향을 떠나기로 한다. 다섯 살 때였다. 서울로 올라와 종로 당주동에 살다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부친이 타계했고 이후엔 인근 내수동 고모집 옆으로 이사했다.

경성사범보통학교(현 서울사대부국)에 입학한 그는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해 고모와 형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곤 했다. 미술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이 천대를 받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럼에도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에게 1926년은 잊을 수 없는 해가 된다. 보통학교 3학년에 새로 부임한 히로시마 출신의 일본인 미술교사가 그의 그림을 히로시마고등사범 주최의 전일본소학생미전에 출품한 것이 일등상을 받았다. 어린 장욱진에게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바로 전 해에 동화책에 그려진 까치가 마음에 안 들어 온통 새카맣게 그렸다가 최하점인 ‘병(丙)’점을 받는 수모를 겪었는데 일등상을 받고 나자 미술점수가 늘 ‘갑상(甲上)’이었다며 사람들이 외부의 평가에 좌우되는 게 어린 나이에도 참 우스워 보였다고 훗날 회고하곤 했다.

이때 상품으로 유화물감을 받아 유화를 처음 시작했다. 집안의 반대는 계속됐지만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고교)에 진학해서도 미술반 활동에 열중했다. 이때 동경미술학교 출신 미술교사인 사토 구니오의 수업을 받으며 입체파와 피카소의 미술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역사교사에게 대들었다가 3학년에 퇴학처분을 받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서양화가 공진형의 화실에서 그림을 계속하던 중 성홍열까지 앓아 건강이 나빠지자 고모는 그를 만공 선사가 거처하던 충남 예산의 수덕사로 요양을 보냈다. 이때 수덕사를 찾은 화가 나혜석이 장욱진의 그림을 작가의 주관이 살아 있는 좋은 그림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양정고보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학


▎1987년 작 <까치>. 색채보다 선을 중시하고 시어처럼 함축된 절제의 미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3년간 수양의 시간을 보낸 장욱진은 1936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학한다. 장욱진은 운동신경이 좋아 높이뛰기와 스케이트를 잘 탔고 높이뛰기는 한때 비공인 한국신기록까지 세웠다고 제자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그는 4학년 때인 1938년 제2회 전국학생미전에 <공기놀이>(캔버스에 유화, 65×80㎝)를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 그가 살았던 서울 내수동 집에서 가족의 시중을 들던 여자아이들이 한가롭게 모여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그림이다. 특이하게도 얼굴을 자세하게 그리지 않았는데 꽉 찬 화면 속에 인물의 배치와 자세, 움직임이 살아있는 형태의 묘사가 탁월하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당시 심사위원은 고희동, 김은호, 이병규, 도상봉, 김복진 등 쟁쟁한 1세대 서양화가들이었다.

부상으로 상금 100원을 받아 고모에게 비단옷감도 선사했다. 수상을 계기로 가족의 반대도 수그러들었다. 1939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미술학교(지금의 무사시노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화가가 되기 위해 유학을 떠났지만 예과 2년 동안 흑백만을 다루게 하는 엄격한 교육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교수들의 가르침이나 당시 화단의 흐름과 별개로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고향을 소재로 토속적인 주제의 그림을 그리며 독자적인 조형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유학시절인 1941년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의 장녀 이순경(1920년 생)과 결혼했다. 부인을 남기고 일본을 돌아가 제국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얼마 안 되어 해방을 맞았다. 그는 그 후 일본에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1945년 가을, 새로 생긴 국립박물관에 취직했다. 일제가 넘겨준 국립박물관에서 유물을 분류하면서 2년 동안 그는 조선 시대의 회화와 불상 등 최고의 유물을 통해 한국의 전통 미감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중앙박물관을 사직하고 1947년 김환기, 백영수, 유영국, 이중섭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해 현대미술운동을 펼쳤다. 신사실파는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요소의 현대적 해석을 연구한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이었다. 장욱진은 1949년 제 2회 신사실파 동인전에 <독> <마을> <까치> <원두막> 등의 작품을 출품했다. 서양식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동양적인 정서가 강한 작품들이었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 속 평화를 그려


▎장욱진의 가족이 ‘신갈집’이라고 불렀던 용인의 고택 마루에 앉아 스케치에 몰두하고 있는 장욱진. 1986년 당시의 모습이다. / 사진·중앙포토
장욱진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대형에 해당하는 <독>(45.1×37.7㎝, 캔버스에 유채)은 화면 가득히 큰 항아리를 배치하고 그 뒤로 작은 앙상한 나무를 걸쳐 놓고 화면 앞쪽에 까치 한 마리가 있는 작품이다. 비현실적이고 대담한 구도와 사물의 배치, 그리고 토속적이고 자전적인 성격을 지닌 소재와 주제가 두드러진다. 이는 이후 장욱진 작품세계의 독창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된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한 컬렉터가 소장하다 지난 3월 7일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됐다. 경매는 시작 가 6억5000만원에 시작돼 7억원에 낙찰되었는데, 이 금액은 현재까지의 장 화백 작품 중 최고가로 기록되었다.

그의 나이 34세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그의 작품에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촉발시킨 계기가 된다. 그의 가족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핍진한 피란이 속에 그는 붓을 들 수가 없었다. 매일 빈속에 술을 마셨다. 몸이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고향 연기군으로 돌아가서야 심신의 안정을 되찾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951년 고향 충남 연기군 내판에 피란해 있던 시기의 대표작 <자화상>. 장욱진은 “방황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됐다”고 고백했다. /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이 시기의 대표작이 <자화상>이다. 일명 <보리밭>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곡식이 누렇게 익은 황금빛 벌판 사이 길에 프록코트를 입은 채 한 손에는 실크해트를, 다른 손에는 모던 신사들의 필수품인 우산을 들고 그의 독특한 팔자걸음으로 걸어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랑> 1979년 여름 호에 실린 ‘자화상의 변’에서 그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1950년대 피란 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 붓을 못 들은 때가 두 번 있는데 이때가 그중의 한 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 되 들이)을 들고 새벽부터 용두산을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뿐이었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란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고독은 외롭지 않다.”

14.8×10.8㎝의 작은 종이에 유화물감을 기름에 개서 그린 이 작품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더 강한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니 걱정 근심에 마음은 불안하고 쓸쓸했을 것이다. 그는 그림으로나마 꿈을 꿀 수 있었다. 자그마한 종이에 그가 꿈꾸는 삶을 그렸다. 황량한 들판을 예전처럼 풍요로운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어린 시절에 같이 뛰놀던 강아지를 그려 넣었다. 화가 자신은 결혼식에 입었던 프록코트를 다시 걸치고 기분 좋게 아내를 맞이하는 상상을 했던 것은 아닐까. 화면에서 풍기는 평화로움과 한가로움은 전쟁이 가져온 불안과 혼란을 잊으려는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전쟁과 함께 닥쳐온 불안과 공포, 육체적 고달픔 속에서 그는 오히려 평화로운 삶을 그렸다. 이렇게 전쟁은 그로 하여금 이상세계에 대한 염원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다. 이후 그의 작품은 큰 변화를 보인다. 유학시절을 포함한 초기에 보여주던 향토적 정서를 뛰어넘어 그는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염원을 작품에 담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장욱진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절친했던 벗 유영국의 약수동 집에 온 가족이 잠시 얹혀살다가 명륜동의 초가집을 사서 이사했다. 교수시절 그는 제자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가르치지 않았고 자신의 색깔을 내도록 독려했다. “그림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나는 가르칠 체질이 아니다”라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시간이 나면 제자들과 술 마시기를 더 즐겼다.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은 모두 혜화동의 술집에 바쳤다.

장장 12년 동안 지속된 덕소 시절


▎1956년 서울대 미대 교수 시절 그린 <모기장>. 모기장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간결한 구조에 등잔과 물대접, 요강을 배치한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이다. /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서울대 교수 시절 그는 작가로서 자신의 발상과 방법을 독창적 스타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사람, 사물 할 것 없이 모든 이미지를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1956년의 작품 <모기장>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단칸방에 꽉 차게 모기장을 치고 누운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 본 시점에서 그린 것이다. 모기장이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간결한 구조에 등잔과 물대접, 요강을 배치한 파격적인 구도의 작품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컸지만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은 그를 갈등하게 했다. 결국 그는 재직 6년 만인 1960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창작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집안의 생계와 자녀들의 교육은 고스란히 서점을 운영하던 부인의 몫으로 남았지만 그로선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욱진은 47세인 1963년 5월 덕소(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의 강가 언덕에 작은 슬러브 집을 짓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덕소 시절은 장장 12년 동안 지속된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그는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그의 삶을 온전히 예술에 쏟아부었다. 깊은 밤의 산책과 새벽의 신선미를 즐기며 고요와 고독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했다.


▎1970년 작 <진진묘>.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진진묘’는 아내 이순경 여사의 법명.
그는 1962~64년 지금까지의 반 추상 형식과는 다른 추상 작품을 시도하다가 “왠지 자신의 것 같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원래의 화풍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자신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고민하고 갈등했다. 그림보다는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196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그림을 많이 그리지 못했지만 고민과 실험을 거듭하며 새로운 단계로 승화되는 시기였다.

그의 아내는 주중엔 서점을 운영하고, 주말이면 반찬거리를 챙겨 들고 아이들 손을 잡고 덕소 화실을 찾아왔다. 1970년 작품 <진진묘>는 정초에 명륜동 집에서 독실한 불교신자인 아내가 새벽에 정성스레 예불을 드리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 길로 덕소 화실로 돌아가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그린 작품이다. 진진묘는 부인 이순경 여사의 법명으로 그가 그린 아내의 첫 번째 초상화다. 소박한 보살상으로 표현한 작품 속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이 응축돼 있다. 서울옥션 온라인경매에서 5억 6000만원에 낙찰돼 한동안 작가의 최고가 기록을 보유했던 작품이다.

덕소 시기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장욱진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한결 절제된 작품을 많이 그렸다. 덕소 시절 말기인 1974년에 쓴 글에는 예술에 대한 해답과 신념을 얻었음이 느껴진다.

“창조된 생명이 분만될 때까지 꿋꿋하게 기다리는 일만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갈파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꾸준하게 추구하며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날마다 그것을 배우고, 고통스러워하며 또 배우는 그러면서도 그 괴로움에 지침이 없이 그 괴로움에 감사하는 데에 예술가의 생활은 충만하리라 믿어진다.”(‘덕소화실에서 사는 나의 고백’, <세대> 1974년 6월호)

개발 붐으로 강바닥의 자갈 채취가 빈번해지면서 소음이 심해 덕소 화실도 더 이상 그에게 안정감과 집중력을 주지 못했다. 1975년 봄 그는 덕소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왔다. 명륜동 시절엔 한옥 앞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아담한 초가 정자를 지어 ‘관어당’이라 이름지었다. 그는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고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작품 구상을 하곤 했다. 답답할 때면 시골로 스케치여행을 떠나거나 시골의 사찰을 찾아다녔다.

“30호 이내여야 화면을 지배한다”


▎1980년부터 시작된 수안보 시절의 장욱진. 부인이 함께 있었고 주변 경관이 빼어나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시기다.
그 즈음 통도사를 갔다가 암자 앞에서 경봉 스님을 만난 일화는 유명하다. 노 스님은 그에게 대뜸 “뭐 하는 사람이여?”라고 묻자 그는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스님이 “일찍 입산했더라면 일찍 도(道)꾼이 됐을 것인데”라고 하자 그는 답했다. “그림 그리는 것도 같은 길입니다.” 스님은 “쾌(快)하다”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1975년부터 79년까지 명륜동 시절 그의 작품에는 시골 남자와 여자, 가족, 정자와 원두막, 사찰, 산과 동산이 자주 등장한다. 상징 요소들은 더욱 상형적이거나 도상학적인 성격이 강해지고 색채는 동양화의 담채 풍으로 묽어지고 단순해져 관념 산수화 같은 표현이 두드러진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불교와 도교, 민화적 성격들이 다양하게 종합되면서 탈속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나무 아래에 사람이 앉아 쉬고 있고 초당에는 남자 두 명이 편안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아이가 차를 다리고 있는 풍경을 그린 작품 <초당>(1975)은 전통 문인화 속 신선들의 풍류를 맛볼 수 있다.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다 발견한 수안보의 시골집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1980년 시작된 수안보에서의 생활은 부인이 함께 있었고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주변에 좋은 사찰이 많아 그가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그는 1985년 가을 수안보를 떠났다.

명륜동으로 돌아왔지만 시위가 한창인 대학가의 한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루가스는 천식을 앓던 그에게 참을 수 없는 고역이었다. 부산으로 피해 비로소 그림을 좀 그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멀지 않은 교외에 거처를 물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의 고택이었다. 명륜동 집을 정리하고 1986년 봄부터 용인으로 거처를 옮겼다.

한옥의 작은 사랑방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3평이나 되려나?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그에게 충분했다. 그의 작업이 워낙 작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어서 그림에 몰두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장욱진의 작품들은 대부분 작다. 이에 대해 그는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다. “회화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30호 이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한 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세대> 1974년 6월호)

용인 시절은 올림픽이다 뭐다 해서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그림 그리는 기계 같다”고 자조적인 말을 할 정도였다. 그곳에서 지낸 마지막 5년간은 왕성한 창작의 시기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그린 720점의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20여 점을 이 시기에 그렸다. 말년의 작품에서는 단순하고 환상적이고 관념적인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1951년작 자화상


▎1990년 작 <밤과 노인>. 용인시 마북리에 머물 때의 그림으로 맑은 밤을 유영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렸다. /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분명한 신념으로 과장이나 꾸밈없이, 철저하게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는 자신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들을 남기고 1990년 12월 27일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림에 집중해 있었다. 평생 동안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것은 자연과 벗하며 조용히 그림에 집중할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자전적이며 관념적인 것이 장욱진 작품의 특징이다. 그가 남긴 작품은 모두가 그의 자화상이었다. 그림 속의 자신은 그와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었다. 나무도 그와 함께 나이를 먹었다. 말년에는 자연에 둘러싸여 현실을 초탈한 도인처럼 자신을 그렸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 <밤과 노인>(1990)은 마치 그의 죽음을 예감이나 한 듯하다. 마을에 기와집이 있는 마을 길가로 나무 두 그루가 있다. 나무 위에 자신의 분신 같은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았고 아이가 걸어간다.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날아가듯 떠 있다.

한번 잠깐 봤을 뿐인데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풍경, 사람, 그리고 그림. 장욱진의 1951년 작 <자화상>이 그랬다. 콧수염이 덮인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술 한잔을 걸친 듯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검은 새네 마리가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듯 날아들고 있다.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그를 따른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즐거운 풍경이다. 그런데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런 애잔함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작품은 6·25 전쟁의 혼란 중에 고향 충청남도 연기군의 고향 집에 있으면서 그린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황금 들판과 목가적 풍경이라니. 파티에 참석할 때나 입는 연미복은 또 뭔가.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그림은 괴로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우러나는 역설적인 힘을 지닌다. 너무 괴로워 차라리 웃고 마는 해학의 정서처럼 보는 이에게 강한 비애감으로 다가온다. 그의 고향 마을은 세종시로 편입되고 개발 광풍 속에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이리저리 길이 뚫렸다. 그럼에도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 생가와 자화상에 등장하는 들판은 기적처럼 남아 있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쉬움은 컸다. 유명한 그림이 탄생한 장소이건만 아무런 안내 표지판도 없었다. 길 건너에 검은 대리석으로 생가 표시를 해놓았지만 2차선 왕복도로를 달리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위대한 화가 반 고흐가 마지막 삶을 보낸 프랑스 오베르 쉬르와즈의 마을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화가와 그의 예술에 대한 예우와는 사뭇 거리가 있다.

장욱진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이 있지만 예술사적 가치를 생각하면 그가 태어난 내판리 생가는 당연히 보존해 많은 이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가에서 멀지 않은 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에 그의 유골이 안치된 탑비도 세워져 있고, 들녘도 그대로이니 ‘장욱진의 길’을 만들어 그의 삶을 기리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가는 현재 먼 일가의 소유로 그들이 생활하고 있어 개인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문화 시설로 지정하고 보존하는 것이 마땅하나 요원하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유가족의 애만 탈 뿐이다.

함혜리 - <서울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다양한 출입처를 거쳐 파리특파원, 문화체육에디터를 지냈다. 프랑스 체류경험을 바탕으로 쓴 문화비평서 <프랑스는 FRANCE가 아니다>, 우리 시대 대표 미술가들을 인터뷰한 <아틀리에, 풍경>, 건축을 중심으로 유럽의 주요미술관을 소개한 <미술관의 탄생>을 펴냈다.

201704호 (2017.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