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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현장] 쇼트트랙 ‘원조 아이돌’ 채지훈이 보는 평창올림픽 

“안현수급 에이스 부재가 고민, 그러나 새 영웅은 나타날 것”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94년 동계올림픽 금메달, 美대표팀 감독 등 화려한 경력… 국내에 글로벌 스케이팅 트레이닝센터 짓는 것이 꿈

▎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 채지훈이 월간중앙과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꿈나무 육성과 함께 국내에 세계적 수준의 트레이닝센터를 짓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KUSF)가 만든 ‘C제로 룰’이 대학 체육특기자 제도를 뒤흔들고 있다. 학생선수가 직전 2개 학기 학점 평균이 C0를 넘지 않으면 대학 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룰에 걸려 연세대 축구부 14명을 포함해 102명이 고개를 떨구었다. 선수 절반이 대회에 못 나가게 된 연세대 축구부는 아예 대학축구 U-리그 참가를 포기했다.

4월 초, 연세대 스포츠응용산업학과 전용관 교수와 이 제도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낯익은 이가 전 교수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쇼트트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채지훈(43)이었다. 그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500m 금메달, 1000m 은메달을 땄다.

1995년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종합 1위도 했다. 경기고-연세대를 졸업한 채지훈은 뛰어난 실력에다 곱상한 외모로 팬들을 몰고 다니는 쇼트트랙 ‘원조 아이돌’이었다.

99년 은퇴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채지훈은 2006~07 시즌 미국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박사과정도 마쳤다. 2008년 연세대에서 ‘엘리트 쇼트트랙 선수 부모의 자녀지원에 관한 열성 형성과정’ 논문으로 사회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해 귀국한 채지훈은 경기 수원에서 쇼트트랙 꿈나무를 지도하고 있다. 모든 레슨은 영어로 진행한다고 했다. 또 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쇼트트랙 선수들의 국내 전지훈련도 돕고 있다.

수원시 탑동에 있는 아이스하우스에서 채 박사를 다시 만났다. 그는 답변할 내용을 꼼꼼히 메모한 수첩을 들고 있었다. 엘리트 선수의 학업 병행뿐만 아니라 한국 쇼트트랙의 역사와 현실, 희망과 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2006~07 시즌에 미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맡았다고 들었다. 미국의 쇼트트랙 스타 아폴로 안톤 오노가 소개해 줬다던데.

“오노와는 오랜 인연이 있다. 그는 원래 인라인 스케이트 선수였는데 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에서 김기훈 선배와 내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고 쇼트트랙에 매료돼 종목을 바꿨다고 한다. 95년 국가대표 쇼트트랙팀이 레이크플래시드에서 미국 주니어 상비군과 함께 훈련한 적이 있다. 내가 릴레이 훈련 중에 오노의 엉덩이를 힘껏 밀어줬더니 오노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스피드를 느꼈다’며 눈이 휘둥그래지더라. 그때부터 오노는 한국 선수를 닮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고추·마늘·양파 등 한국 음식이 꽉 차 있었다. 쇼트트랙을 잘하기 위해 한국 선수들이 먹는 음식까지 따라 먹었다. 그만큼 열정이 있는 선수였다.”

운동환경은 한국이 미국보다 한 수 위


▎98년 일본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역주(力走)하는 채지훈. / 사진·중앙포토
하지만 오노는 한국인에게 ‘국민 밉상’ 이미지가 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때 김동성의 1500m 금메달을 빼앗아간 ‘할리우드 액션’ 때문인데.

내가 오노에게 ‘콧수염도 자르고 분위기 좀 바꿔보라’고 조언도 했는데 ‘마이(my) 스타일’이라며 고수하더라. 벌써 15년 전 얘기지만 당시 할리우드 액션과 김동성의 실격에 대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가 MBC에서 해설을 했는데 방송에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어떤 내용인가?

“김동성 수준이라면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김동성이 6바퀴째 선두로 나왔는데 좀 이른 느낌이 들었다. 올림픽 결승에서는 완벽한 전략을 짜지 않으면 마지막 바퀴를 남기고 돌발 상황이 생긴다. 점점 스피드가 줄기 때문이다. 두 선수의 충돌 상황에서는 문화적인 관습이 드러난 부분도 있었다.”

무슨 뜻인가?

“내가 미국에서 살면서 가장 그리웠던 게 명동에서 사람들끼리 어깨를 자연스럽게 부딪치며 걷는 거였다. 미국에서는 사람들끼리 지켜야 할 ‘거리’가 있다. 그걸 침범하면 본능적으로 경계의 제스처를 보인다. 자신의 진로를 김동성이 막는다고 느끼는 순간 오노도 본능적으로 그런 반응을 했을 수 있다. 중국은 우리보다 몸을 부딪치는 데 훨씬 무감각하다. 그래서 중국 쇼트트랙 선수들이 국제대회에서 강한 접촉 반칙으로 실격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판정 자체가 홈 어드밴티지라는 말도 있었다.

“김동성의 진로방해 행위는 규정상으로는 실격을 받을 여지가 약간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 같은 큰 대회에서 몸싸움이 없는데 실격을 준 건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올림픽 결승전 주심은 미국·호주·캐나다·영국 등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 출신만 맡는다. 원활한 의사소통 차원이라고 하지만 카르텔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당시 주심은 호주 출신 짐 휴이시가 맡았다.

“그 심판을 잘 안다. e메일로 갖가지 욕설과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중국과 무역을 하는 사업가다. 그 사건 이후 겁이 나서 한국에 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스포츠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따라야 하는 게임이다.”

한국 선수들이 쇼트트랙을 왜 잘하는지 체계적으로 연구했다고 하던데.

“오노 얘기할 때 나온 음식을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분석해봤다.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는 500명 남짓이다. 쇼트트랙 종주국 캐나다에는 3만 명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각자 훈련을 한다. 반면 한국은 집약형이다. 각 지역에서 ‘좀 탄다’하는 선수는 서울로 모인다. 치열한 경쟁을 하고, 탁월한 선수를 따라 하면서 기량이 향상된다. 몸을 슬쩍 부딪치는 걸 꺼려하지 않고, 좁은 공간을 싹싹 잘 빠져 다니는 것도 쇼트트랙에 분명 유리하다.”

훈련 환경도 한국이 좋다고 하던데.

“맞다. 미국은 아이스하키와 피겨 스케이팅이 워낙 인기가 높아 쇼트트랙 훈련을 위해 링크를 빌리기가 어렵다. 미국·일본·싱가포르 등은 링크 대여비가 1시간에 50만원 정도 한다. 한국은 15만원이면 가능하고, 쇼트트랙 선수가 큰 어려움이 없이 훈련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한국 쇼트트랙의 주도권이 쉽게 다른 나라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쇼트트랙은 올림픽이 한국에 준 ‘선물’이다. 동계올림픽 불모지였던 한국은 92년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후 무려 21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겨울 스포츠 강국으로 떠올랐다.

안현수, 가장 아름다운 스케이팅 구사하는 선수


▎러시아로 귀화해 빅토르 안으로 거듭난 안현수. 그는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 3관왕에 오르는 등 한국 선수단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 사진·중앙포토
그렇지만 한국인에게 쇼트트랙은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손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올림픽 때 반짝 환호하지만, 올림픽이 끝나면 금세 잊어버린다. 또 쇼트트랙은 실격·판정시비·짬짜미·폭행 등 온갖 부정적인 뉴스와 자주 엮인다. ‘4년 주기의 쇼트트랙 팬’들도 “쇼트트랙은 툭하면 선수들끼리 걸려 넘어지고, 1등이 꼴찌 되고 꼴찌가 어부지리로 1등 되는 경우도 많다. 이게 무슨 스포츠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채 박사의 생각은 뭘까?

이러다 쇼트트랙이 올림픽에서 퇴출되는 것 아닌가?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김기훈, 오른쪽에서 둘째가 채지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쇼트트랙만큼 빠르고, 정신 없이 상황이 바뀌고, 갖가지 변수가 나오는 종목이 어디 있나. 몸과 몸이 부딪치고, 기록보다는 순위가 중요한 경기다. 경마나 경륜을 보면서 느끼는 희열을 쇼트트랙에서 느낄 수 있다. 같은 빙상인데도 두 명이 기록 경쟁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이 단조로우니까 쇼트트랙의 장점을 접목한 매스 스타트(여러 명 동시 출발) 종목이 나온 것 아닌가.”

쇼트트랙에서 유독 ‘짬짜미’ 얘기가 많다.

“하나 물어보자.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 세 명이 결승에 나가 금·은·동을 땄다면 짬짜미를 해서인가 전략을 잘 짜서 그런가? 반대로 중국 선수 3명 틈바구니에서 혼자 뛰어서 우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가? 쇼트트랙은 종목 특성상 짬짜미와 전략을 명확히 구분짓기 힘들다. 내가 고등학교 때 경쟁팀 선수가 양팔을 벌리고 만세를 부르며 내가 추월 못하게 막은 적도 있었다. 좋은 선수가 되려면 그런 상황도 극복해야 하고, 그게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너무 심하게 하는 건 제재해야겠지만 짬짜미를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다.”

쇼트트랙 장비도 많이 발전했다고 들었다.

“쇼트트랙에서 가장 중요한 게 스케이트 날이다. 스케이트 날을 섬세하게 만지는 기술은 아직도 한국이 최고다. 문제는 좋은 상태의 날을 계속해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20년 전 내가 선수 때 이게 참 안타까웠다. 지금은 컴퓨터로 최상의 상태를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 또 요즘은 안현수(32)가 두 바퀴 정도를 남기고 바깥으로 확 돌아나가서 추월한다. 옛날에 그렇게 했으면 원심력을 못 이겨 바로 나자빠졌을 거다. 그만큼 날이 좋아져서 경기 스타일도 많이 바뀌고 있다.”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해 빅토르 안이 됐고, 2014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를 땄다.

“안현수는 지금까지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아름다운 스케이팅을 구사하는 스타다. 쇼트트랙은 출중한 선수 하나가 있으면 함께 훈련하는 동료의 기량도 급상승하는 특징이 있다. 한국 대표로 올림픽 금메달 3개를 딴 안현수가 러시아로 가는 바람에 러시아 대표팀의 수준이 짧은 시간에 크게 올라갔다. 안현수는 본인의 의지로 귀화했고, 지금까지는 큰 성공을 거뒀지만 은퇴 이후의 인생도 길게 보고 잘 준비했으면 좋겠다.”

안현수가 평창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둘 거라고 보나?

“쇼트트랙에서 30세를 넘어 전성기 체력을 유지한 선수는 거의 없다. 하지만 안현수는 기술적으로 이미 경지에 올라 있다. 그는 흔히 ‘촉’이라고 얘기하는 감이 워낙 뛰어나다. 최단 거리인 500m에서 4등으로 출발해도 여유가 있다. 뒤에서 따라가면서 1, 2등이 어떻게 부딪치고 그럼 어디로 빠져 들어갈지를 다 계산한다. 쇼트트랙은 선수 개개인의 경기 전략이 매우 중요한 스포츠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과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내년 평창올림픽 예상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규정을 바꿀 때 중요시하는 게 한 나라가 특정 종목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거다. 쇼트트랙도 한국 선수들이 워낙 독주하니까 다른 선수들이 추월하기 쉽도록 규정을 바꾸고 있다. 여자는 심석희(20·한국체대)·최민정(19·연세대)이 있어서 큰 걱정은 없는데 남자가 문제다. 안현수·노진규(2016년 암으로 타계)가 없으니까 확실한 에이스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평창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에이스가 출현할 것으로 기대한다.”

화제를 바꿔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한 대학 선수의 학업 병행 문제를 물어봤다. 채지훈 박사는 “운동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이다. 공부를 하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본인은 어떻게 운동과 학업을 병행했나?

“난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로 활동하면서 공부했다. 연세대는 학생선수가 학점을 받기 정말 힘들다. 정기 연·고전 종목(축구·야구·농구·럭비·아이스하키)이 아닌 개인 종목이라 교수님들께 상황을 설명드리기도 어려웠다. 어느 교양과목 여자 교수님은 ‘쇼트트랙 선수’라고 했더니 ‘육상 종목이냐’고 하시더라.(웃음) 그래도 대부분 과목에서 A, B를 받았다. 어쩌다 D를 받은 과목은 재수강을 해서 B 이상으로 맞췄다.”

사회생활도 운동할 때처럼만 해라


학점을 잘 받은 노하우는?

“소통이 중요하다. 학기 초에 교수님과 조교를 만나 미리 의논을 드렸다. 또 노트 정리를 잘하는 친구를 사귀어 시험 때 도움을 받았다. 학기 중에 해외 원정을 가야 할 때는 비행기 안에 비치된 항공엽서에 간단한 내용을 적어 교수님들께 보냈다. 교수님들이 ‘이 친구가 비행기 안에서 나한테 엽서를 보냈다’고 자랑하시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진정성은 통한다는 걸 느꼈다.”

직업 스포츠 선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운동을 하면서 타인과 경쟁하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기도 한다. 이런 게 사회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는 거다. 사회에 나와보니까 방법은 좀 다르지만 운동이나 학업이나 본질은 똑같더라. 운동할 때 정신으로 하면 그렇게 어려운 건 없다. 그러니 운동에만 매몰되지 말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친구도 사귀는 게 좋다.”

스포츠를 취미로 즐기는 분들에겐?

“쇼트트랙 동호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쇼트트랙은 하체를 튼튼하게 하면서 심폐 운동도 된다. 난 20년 가까이 운동을 쉬었는데도 지금도 바지 허벅지는 맞춰 입어야 할 정도다. 한 번 단련된 근육은 잘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게 중요하다.”

내년 평창올림픽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리 국민들은 4년에 한 번씩 겨울 스포츠에 빠져든다. 관심이 있으니까 우리 선수들이 억울하게 판정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열 받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복잡한 쇼트트랙 규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 선수들과 세계 정상급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를 즐기셨으면 좋겠다.”

채지훈 박사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불고 있는 스케이팅 배우기 열풍을 주목한다. 싱가포르·인도네시아·태국 등에서 붐이 조금씩 일고 있지만 훈련 시설·장비·지도자가 태부족이다. 따라서 한국으로 전지훈련을 많이 오는 실정이다. 그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이를 더 발전시켜 쇼트트랙 최강국인 한국에 글로벌 스케이팅 트레이닝센터를 짓는 꿈을 꾸고 있다.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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