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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인터뷰] 꿈 대신 삶 택한 프로골퍼 장하나 

“도쿄올림픽 금메달 따고 결혼 프러포즈 받을래요”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지난해만 LPGA 3승으로 각광, 올해 5월 전격 유턴 선언… 상금 벌어 좋을 일에 쓸 터, 은퇴 후 재단설립도 계획 중

▎“꿈 대신 삶을 택했다”는 장하나는 2019년까지 보장된 LPGA 투어 카드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장하나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는 전 세계 여성 골퍼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무대다. 부와 인기를 누릴 수 있고, 뛰어난 성적을 올리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돼 평생 대접을 받는다.

장하나(25·BC카드)는 2013년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3관왕(대상·다승왕·상금왕)에 오른 뒤 LPGA를 겨냥했다. 2015년 LPGA에 데뷔해 준우승을 네 차례나 했다. 그리고 2016년에 3승을 올렸다.

올 시즌에도 한국 선수 중 가장 먼저 우승컵(2월, 한다 호주오픈)을 따내며 2019년까지 풀 시드를 확보했다. 시즌 상금순위 9위, 세계랭킹 10위를 달리던 장하나가 지난 5월 돌연 국내 복귀를 선언했다. 2019년까지 보장된 LPGA 투어 카드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장하나는 복귀 기자회견에서 “내 꿈을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골퍼로 살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6월 12일, 김포공항 국내선 도착 게이트에 장하나가 빨간색 골프백을 카트에 싣고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뒤에 아버지 장창호(65) 씨와 어머니 김연숙(66) 씨가 짐을 끌고 나타났다. 2주 연속 제주도에서 열린 KLPGA 대회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었다.

장하나는 국내 복귀 무대였던 롯데 칸타타 여자오픈에서 공동 9위에 올랐다. 6월 11일 끝난 에쓰오일 챔피언십에서는 공동 29위에 그쳤다. 장염과 고열에 시달리며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 장하나는 “제주에서 먹은 육회가 잘못되는 바람에 대회 내내 고생을 했어요. 그래도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좋은 추억을 쌓고 왔죠”라며 밝게 웃었다. 유리 박물관인 ‘유리의성’에서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줬다. 김포공항 청사 내 햄버거 가게에서 마주앉은 장하나는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에너자이저’로 돌아와 있었다.

국내로 복귀해 대회를 치른 느낌은?

“마음이 편안하고 좋았어요. 다른 선수의 팬까지 저를 응원해 주시는 걸 보고 참 기뻤어요. 대회 관계자 한 분은 엄마와 함께 지내기 위해 돌아왔다는 제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언제 한국에 복귀하려는 마음을 굳혔나요?

“지난해 9월 에비앙 마스터스를 마지막으로 LPGA 투어를 끝낸 뒤 아시안 투어를 하면서 ‘이젠 들어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LPGA 투어에서 3승을 했으니 4승 정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다 호주 오픈에서 우승했고요. 아빠에게 어떻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피닉스에서 열린 대회(파운더스컵) 끝나고 어느 날 아빠가 ‘이제 그만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먼저 말씀하셨어요. 완벽주의자인 아빠가 그 말씀을 하시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망설이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했어요. 두말 않고 ‘네’ 하고 대답한 뒤에 바로 다음날 비행기표를 예약했죠.”

“내가 쳇바퀴 도는 햄스터인가 싶었다”


▎장하나가 지난해 3월 6일 싱가포르 센토사 골프장에서 열린 LPGA투어 HSBC 위민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아버지 성격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아빠가 어릴 적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였고, 골프도 언더파까지 치셨어요. 당구는 700점을 치고, 볼링·탁구도 선수 수준까지 하셨어요. 혈액형이 B형인데다 운동도 한 종목을 완벽하게 해야 다음 종목으로 넘어가는 성격입니다. 식당 테이블에 냅킨이 조금만 비뚤어져 있어도 바로잡아야 하고, 호텔 방에 그림이 살짝 비뚤게 걸려 있어도 잠을 못 주무실 정도였죠.”

그런 분과 함께 다니면서 고생이 많았겠네요. 싸우지는 않았나요?

“싸우기도 좀 했죠. 주로 코스 매니지먼트 관련해서죠. 아빠는 무조건 모험적으로 치라고 하시거든요. 제가 ‘이번 홀에서는 파만 해도 잘하는 거’라고 하면 목소리가 높아지죠. 의견이 맞지 않으면 제가 ‘알았어’ 해놓고 원하는 대로 칩니다.”(웃음)

어머님이 우울증을 앓으셨다면서요?

“엄마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여장부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식당을 그만두고 저까지 미국으로 떠나버리니까 혼자 많이 외로우셨던 것 같아요. 저한테 말씀은 안 하셨지만 외삼촌께 통화해서 물어보면 ‘엄마가 우울증 약을 많이 타왔다’고 하셨어요.”

장하나의 어머니 김연숙 씨는 농구선수 출신이다.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 주인공인 박찬숙이 숭의여고에서 센터로 날릴 때 보성여고에서 가드로 뛰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 반포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세 명의 동생을 시집·장가 보낸 ‘또순이’였다. 41세 때 식당 단골손님의 소개로 한 살 연하인 장창호 씨와 만나 결혼을 했고 다음해 장하나를 낳았다. 김씨는 “제가 운전을 전혀 못해요. 미국에 가서도 하나와 아빠가 골프장에 가면 나 혼자 남아서 어디 사 먹으러 갈 수도 없고, 많이 힘들었죠. 그래서 혼자 한국에 돌아왔는데 너무 오래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까 힘들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장하나에게 ‘국내 복귀하게 된 요인을 숫자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었다. 그는 “엄마 20, 아빠 20, 나 60 정도 될 것 같아요. 엄마 아빠 문제가 결국 내 문제니까 숫자는 큰 의미가 없죠”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나요?

“사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건 없었어요. 제가 육식을 워낙 즐기는데 미국에선 질 좋은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좋았죠. 그런데 우승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기는 견딜 수 없었어요. 한국에서 우승하면 온 가족과 친구들,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까지 모여서 떠들썩한 파티를 하며 즐겼죠. 그런데 미국에서 우승하면 저녁에 아빠랑 식당 나가서 ‘수고했어’ ‘고마워요’ 하고 건배한 뒤에 숙소 돌아와서는 다음 대회 나가려고 짐을 챙겨야 했어요. 이게 뭔가, 내가 뭣 때문에 골프를 하나 회의가 몰려왔죠. 나 자신이 꼭두각시 또는 하염없이 쳇바퀴를 도는 햄스터 같았죠.”

결국 가족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웠던 거네요.

“그렇죠. 내가 이번 시즌에 잘해서 타이틀을 땄다고 쳐요. 그걸 지키기 위해 내년에는 더 아등바등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서른 살이 넘겠죠? 그럼 우리 엄마·아빠는 점점 더 늙고 힘이 빠지겠구나 싶었죠. 그리고 엄마·아빠 입장에선 제가 제대로 된 남자 만날 기회도 없는데 어디서 이상한 놈 덜컥 만나 ‘결혼하겠다’고 데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었다고 해요.”(웃음)

강행군에 지친 아버지 보며 ‘울컥’


▎서울 반원초교 6년 장하나가 2004년 제18회 한국여자오픈골프 선수권대회에서 드라이버샷을 하고 있다.
아버지 장창호 씨에겐 지난해 3월 있었던 ‘짐가방 사건’의 생채기가 강하게 남아 있다. LPGA 투어 HSBC 챔피언스가 열리는 싱가포르의 공항에 도착한 장씨가 에스컬레이터에서 짐가방을 놓쳤다. 그 가방이 굴러 내려가 앞에 있던 전인지를 쳤고, 허리를 다친 전인지는 대회 출전을 포기했다. 이후 ‘사과를 제대로 했느냐 안 했느냐’ 같은 감정적인 요인들이 섞이면서 장하나와 전인지 측은 모두 큰 상처를 입었다.

장하나가 이 대회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댄스 세리머니’를 한 게 더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전인지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춤이 나오느냐’는 비판이 장하나를 찔렀다. 장하나는 “대회 직전에 미국 방송과 인터뷰에서 ‘우승하면 무슨 세리머니를 하겠느냐’고 묻길래 ‘춤을 추겠다’고 했어요. 전인지 선수에겐 미안했지만 저도 제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장하나의 에이전트사인 스포티즌의 김평기 부사장도 “하나는 원체 에너지가 넘치고 자기표현에 거침이 없어요. LPGA 측에서도 한국 선수 중에 독특한 캐릭터니까 이런 점을 부추긴 것도 있죠. 아무튼 그 사건 이후 하나 부녀가 겪은 마음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요”라고 설명했다.

장하나는 평소 댓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무반응보다는 관심이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악성댓글뿐만 아니라 휴대전화로 문자폭탄이 쏟아졌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비난을 속수무책으로 받으면서 장하나는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

대회 중간에 기권하고 미국의 병원 1인실에서 보름간 꼼짝 않고 칩거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장하나는 “그땐 정말 골프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아빠가 안 계셨다면 은퇴 선언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겁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도 ‘나 때문에 딸이 욕먹고 괴로워한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게다가 미국 본토와 멕시코 등을 오가는 장거리 투어 일정에 맞추느라 무거운 짐을 싣고 내리고, 10시간 넘게 운전을 하는 강행군에 심신이 지쳤다고 한다.

‘골프 대디’는 한국의 독특한 엘리트 골프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다. 한국 여자 골프가 세계 정상에 오른 데에는 골프 대디들의 희생과 헌신이 큰 몫을 했다. 박세리·박인비·신지애 등 세계 정상을 경험한 선수들 뒤에는 골프 대디들이 있었다. ‘고보경’을 데리고 뉴질랜드로 이민 가 체계적인 훈련과 관리를 통해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를 만든 이도 아버지였다.

자식의 성공이 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핏줄 의식, 부지런함과 집요함이 코리언 골프 대디의 특징이다. 반면 글로벌 에티켓과 매너가 부족해 이런저런 해프닝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다.

골프 대디에 대한 생각을 묻자 장하나는 “다른 종목에도 스포츠 대디가 있겠지만 골프는 선수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면이 많기 때문에 더 부각돼 보이는 것 같아요. 지금 LPGA 상위권 선수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 투어를 다닙니다. 리디아 고, 렉시 톰슨, 아리야 쭈타누깐, 박인비 언니 등이요. 그게 선수를 보호하고 더 좋은 성적을 내는 힘이 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하나는 LPGA 선수들의 현실을 들려줬다. “힘들게 경기를 끝내고 숙소에 들어오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요. 그때 옆방 동료가 ‘나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하면 뿌리치기가 힘들어요. 못이기는 척 나가면 커피만 먹게 되나요? 맥주도 하게 되고, 그럼 컨디션을 망치게 되는 거죠.”

LPGA 선수 중에 레즈비언이 일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자 장하나는 “힘들고 외로우니까 그럴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가족과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뚜렷한 목표를 향해 집중하게 됩니다”고 설명했다. 아버지라는 든든한 방패막이 덕에 장하나는 2년 반 동안 4승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세계랭킹 1위보다 행복이 더 소중해”


▎2012년 ‘위너스클럽’(생애 첫 우승)에 가입한 이예정, 김지현, 장하나, 정혜진, 정희원(왼쪽부터)이 연말 시상식 특별공연에서 카라의 ‘판도라’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 사진:KPGA
3년 만에 돌아온 국내 투어는 어땠나요?

“선수층이 더 두꺼워진 느낌입니다. 전에는 20여 명이 선두권을 형성하고 이들끼리 우승을 다퉜는데 지금은 저 밑에서 생각지도 않은 선수가 툭 튀어나와 우승을 하거든요. 2011∼2013년 선두그룹이던 전인지·김세영·김효주·박성현 등이 미국으로 빠져나가고 현재는 노장과 신예 등 여러 그룹이 혼전을 벌이는 양상 같아요. 2∼3년 뒤에나 확실한 선두그룹이 나타나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골프를 보여주고 싶으세요?

“지금까지는 성적에 집착한 골프를 했다면 이제부터는 ‘생계형’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요.(웃음) 미국에 진출하면서 ‘세계랭킹 1위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죠. 그 목표가 더 이상 제 삶을 끌고 가지 못해요. 대신 주위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엮어가는 행복을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부모님과 함께 대회에 나갈 겁니다. 상금을 벌어 좋은 일에 더 많이 쓰고, 은퇴 후 목표인 재단 설립도 준비하고 싶어요.”

30세 이전에 결혼하고 싶다고 했는데.

“시나리오는 다 짜놨어요. 2020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귀국하는 공항에 남친이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나타나면 꽃다발을 안기면서 ‘그동안 나라와 골프를 위해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날 위해 살아줘’라고 프러포즈를 하는 겁니다. 아이는 신혼을 즐기고 난 뒤에 갖고 싶은데, 이런 말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애를 만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장하나는 부모로부터 뛰어난 체력과 운동신경을 물려받았다. 또 어릴 적부터 검도·수영·스키·스케이트 등을 하며 상·하체를 고루 발달시켰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 2004년, 제주도에서 타이거 우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드라이버샷을 무려 260야드나 날려 ‘장타소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하나의 또 다른 별명은 ‘네잎클로버 소녀’다. 초등학교 때 최연소 출전 선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골프장에서 네잎클로버를 찾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힌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위해 김포공항에서 만나 명함을 주고받을 때 장하나가 건넨 명함 사이에도 네잎클로버가 끼어 있었다.

장하나는 남다른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데도 남다른 면이 있다. 짐가방과 우승 세리머니 사건으로 한창 힘들 때 그는 팬클럽인 ‘하나짱’ 홈페이지에 ‘난 끼가 많다.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시키면 한다. 춤? 시키면 한다. 난 그런 사람이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정적인 운동인 골프를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색다른 시도도 하게 됐다”고 했다.

이런 장하나의 솔직함과 에너지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국내 투어로 유턴한 장하나가 안고 가야 할 숙제다.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김춘식 기자 kim.choonsik@joongang.co.kr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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