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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와 차 한잔] 국립발레단장 강수진의 인생 2막 

“넘어져도 좋아. 너의 100%를 보여줘”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국립발레단 진화 이끄는 프리마돈나… 레퍼토리 다양화에서 안무가 육성까지 “인생과 발레는 닮은꼴… 어제의 내가 나의 유일한 경쟁자였죠”

▎지난해 7월 현역에서 은퇴한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인생 2막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르다. 그에게 현역 시절의 스포트라이트가 그립지 않느냐는 질문은 우문(愚問)이다. “저는 매일 파라다이스로 출근하는 걸요!”라고 대답하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 사진:전민규 기자
국립발레단은 진화 중이다. 강수진이 2014년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은 뒤 국립발레단은 다양한 레퍼토리에 도전했고, 단원들은 안무가라는 새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 진화하는 건 발레단뿐 아니다. 예술감독 겸 단장인 강수진 자신도 그렇다.

그를 만난 건 지난 8월 31일 정오. 지난해 7월 22일 그가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현역에서 은퇴한 뒤 약 1년 후다. 국립발레단장으로서의 인생 2막에 그는 완벽히 적응한 듯했다. 바쁜 일정 탓에 점심시간을 쪼개 인터뷰를 진행한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편안해 보였다. 무대가 그립지 않으냐는 말에 그는 큰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어머, 왜요? 저 발레 진짜 열심히 했어요. 후회는 전혀 없어요. 지금도 너무 감사한 걸요. 매일 아침 (국립발레단에 출근하는 게) 파라다이스로 가는 것 같아요.”

애당초 강수진의 사전에 ‘후회’란 단어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게 ‘강수진 스타일’이다. 그가 2013년 펴낸 책 제목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인플루엔셜)였다. 오늘 최선을 다한다는 뜻에서다. 그에 이어 강 단장이 최근 펴낸 신작 <한 걸음을 걸어도 나답게>(인플루엔셜)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내게 쉬운 성공 비결을 듣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내일을 믿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오늘의 땀을 흘리는 것뿐.”


▎사진:국립발레단
국립발레단의 여름은 숨 가쁘게 흘러갔다. 국립발레단의 창작 발레 <허난설헌-수월경화(水月鏡花)>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6월 30일~7월 1일, 캐나다 토론토·오타와에서 8월 8일과 10일 무대에 올랐다. 단원인 강효형 솔리스트가 허난설헌의 비극을 발레로 표현한 작품으로, 황병기의 가야금 선율과 한복을 모티브로 한 의상이 어우러진다. 16세기 조선의 여류 시인이며, 가야금 선율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이 대다수라 반응은 미지수였다. 55분간의 공연이 끝난 뒤 모두가 숨을 죽인 이유다. 곧 울려 퍼진 현장의 뜨거운 기립박수. 한국 발레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국내 활동도 바지런히 이어갔다. 단원들의 안무작을 중심으로 한 무대를 연이어 올리면서다. 피아노 등 라이브 연주가 함께한 ‘댄스 인 투 더 뮤직(Dance Into the Music)’(8월 4~6일)과 ‘KNB(국립발레단의 영어 약칭) 무브먼트 시리즈’(8월 12~13일) 공연이었다. ‘KNB 무브먼트 시리즈’는 강 단장이 취임 이듬해인 2015년부터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로 직접 구상해 진행 중이다. 그의 친정 격인 슈투트가르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을이라고 쉴 수는 없다. 예술의전당 내 국립발레단의 연습실에선 지금 대작을 위한 연습이 한창이다. 평창 겨울올림픽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강 단장은 11월엔 <안나 카레니나>를 무대에 올린다. 평창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올림픽 개막 D-100일인 11월 1일에 막을 올린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관객도 즐겁지 않다”


▎국립발레단은 최근 몇 년간 실험적 무대를 선보였다. 단원들을 무용수로만 한정하지 않고 안무가로서도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탄생한 강효형 솔리스트의 안무작 <요동치다>는 무용계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안무가 부문 후보로도 선정됐다. 사진은 <요동치다>를 전막 발레로 안무한 <허난설헌-수월경화>. / 사진:국립발레단
<허난설헌-수월경화>는 강 단장에게 여러 의미에서 도전이었다. <백조의 호수>나 <라 바야데르>처럼 발레단의 세를 과시할 수 있고, 검증된 클래식 작품으로 안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강수진은 도전을 택했다. 전문 안무가도 아닌 단원에게 전막 발레를 맡겼으며, 발레와 앙상블을 이루기 어렵다는 편견이 있는 한국의 음악과 의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KNB 무브먼트 시리즈’에 한국적 발레 ‘요동치다’를 출품했던 단원 강효형에게 전막 발레 안무를 제안했다. 그 프로젝트로 안무가의 재능을 발견한 강 솔리스트는 같은 작품으로 세계적 권위의 브‘ 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상(賞) 안무 부문 후보로도 올랐다.

강 단장은 작품을 전적으로 맡기며 세 개의 조건만 걸었다. “한국적일 것, 스토리가 있을 것, 지나치게 모던하지 않을 것.” 그렇게 태어난 게 <허난설헌-수월경화>다. 안무가로서의 강효형뿐 아니라 이 새로운 레퍼토리를 소화해낼 수 있을 거라는 단원들 전체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실험을 강행했고, 또 성공했다.

<허난설헌-수월경화> 초연 전 일각에선 ‘리스크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리스크 맞죠. 근데 말예요. 도전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요? 도전이 없으면 발전도 없잖아요. 물론 고민은 했죠. 하지만 효형 씨는 육성 사업(‘KNB 무브먼트 시리즈’)을 하면서 준비가 됐다는 감이 왔어요. 기회를 주고 싶었고요. 효형 씨뿐 아니라 모두에게요. 도전이라는 게 없으면 그냥 밋밋하게 사는 거죠.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그래도 해보고 후회하는 게 좋지 않나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발레단원이 같은 마음으로 매 순간 임했어요.”

지난 4월 이재우(발레단 수석무용수) 씨를 만났더니 ‘<수월경화> 연습이 너무 즐겁다. 발레단이 하나로 뭉쳐서 연습 중’이라더군요.

“제가 리스펙트(respect·존경)하는 게 그 점이에요. 하나의 공연이 성공하기 위해선 단원 한 명, 주역 한 명만 잘해서는 안 돼요. 인생과 닮지 않았어요? 이번 공연은 초연인데다 단원이 안무를 했기 때문에 조금 흐트러짐이 있을 수도 있었죠. 그런데 처음부터 팀워크가 좋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모두가 ‘잘 해보자’는 마음으로 서포트를 하는 게 느껴졌죠.”

강효형 솔리스트는 작품의 주역을 맡은 신승원·박슬기 수석무용수보다 후배였는데, 연습 현장에선 ‘안무 선생님’이라 불렸다고요.

“서로가 서로를 리스펙트한 거죠. 선배와 후배를 떠나 모두가 한 팀으로, 작품을 위해 마음을 모은 거니까요. 그런 게 관객들께도 전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콜롬비아 공연 현지 무대 안팎 분위기는 어땠나요?

“발레라는 장르를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도 소통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게 항상 저의 목표였어요. 콜롬비아는 관객들 반응이 물음표이긴 했어요. 외국인에겐 좀 힘들게 들릴 수도 있는 가야금 음악이고 해서요. 갈라 형식으로 무대를 진행했는데, 관객의 감동이 전해져 오더라고요. 보람 있었어요.”

단원들을 대상으로 굳이 왜 안무가 육성 사업을 시작했나요?

“제가 안무가 육성 사업을 시작하면서 의도했던 건 이거였어요. 단원들도 매일 연습으로 바쁘지만, 각자가 자신의 시간을 쪼개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요. 저는 단원들을 겉뿐 아니라 속으로도 다 파악하고 있어요. 단원들이 지금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서 공연을 해줬으면 해요. 자기 자신이 즐거워야 관객도 즐거워요. 단원들 모두가 다 오래 무용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느 순간엔 다른 일을 하는 때가 오겠죠. 약점 없는 사람이 없듯 강점 없는 사람도 없고요. 그들의 숨은 재능을 이끌어내는 것도 제 의무라고 생각해요. 발레 후에도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죠.”

“아무도 내 편이 아닌 곳”에서 매일을 불태우다


▎강수진 단장은 지금도 단원들과 가능하면 매일 아침 ‘클래스(발레의 기본이 되는 몸 풀기)’를 함께 한다. 클래스를 통해 단원들의 장단점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연습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 사진:이의정
강수진의 리더십이 빛나는 건 그 스스로 하루를 불태우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100%의 하루”를 살아낸 결과다. 현역 은퇴 후에도 발레단장으로서의 일정이 없으면 단원들과 함께 클래스(바ㆍ센터 기본 동작 등을 통해 몸을 푸는 기초 수업)를 한다고. 이젠 좀 쉬고 싶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는 이런 질문이 오히려 이해가 어렵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서 말했다.

“클래스를 하면 단원들이 더 잘 보여요. 아 저 친구는 이 동작에서 계속 실수를 하는구나, 이 친구는 이렇게 잡아주면 더 좋아지겠다, 이런 것들이요. 제 머릿속엔 단원들 전체가 다 들어 있어요. 그리고 하루하루의 노력이 밑거름이 돼야 성장을 할 수 있지요. 단장으로서 저는 무용수마다 다른 특성을 파악해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마중물을 부어주어야 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클래스를 하는 건 필수다. 현역 은퇴 후에도 뼛속까지 발레리나인 강수진 자신을 위해서도 클래스는 필수다.

예술행정가로서의 길이 쉽지만은 않다. 특히 단원들과의 소통은 까다롭다. 처음 그가 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모든 단원을 단장실로 불러 면담을 했다고 한다. 몇몇 단원은 울면서 단장실을 나왔다고 한다.


▎강수진 단장은 단원들을 지켜보기만 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뛴다. 단원들의 몸을 직접 만져보고 개선점을 함께 찾아나간다. 이렇게 몸소 단원들의 발전을 이끌어내는 게 그의 리더십이다. / 사진:하지영
“제 성격이 직설적이고 솔직해요. 그땐 한국말도 좀 서툴렀던 거 같고요. 저도 많이 배웠어요. 소통이라는 게 참 중요하더라고요. 발레단 분위기가 나빠지는 건 대개 사소한 정보를 제때 전달받지 못해서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해 어물쩍 넘어가면 늘 문제가 돼요. 연습 스케줄 변동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정보가 발레단 전체에 투명하고 빠르게 공유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요.”

강수진도 사람이다. 인생의 위기도 겪었다. 이런 부침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돕는 자양분으로 삼았다. 한국무용을 했던 강수진이 발레를 시작한 건 전공자로서는 한참 늦은 중학교 2학년 때다. 그를 발탁한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교장 덕에 서울 휘경동의 집을 떠나 모나코로 유학을 갔다. 그곳은 그의 표현을 빌리면 처음엔 “아무도 내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곳이었다. 괴롭고 외로울수록 그에게 힘이 된 건 발레였다.

“발레에 빠져들면 일상의 잡념이 사라졌어요. 수련하는 마음으로 발레를 했지요. 제 체형도 처음엔 발레를 하기에 완벽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몸도 노력하면 바뀌더라고요. 저는 이걸 ‘근육을 조각한다’고 불러요.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루도 쌓이고 쌓여 대단한 하루하루가 되던걸요. 아주 조금이지만 어제보다 실력이 느는 맛이 있어요. 남과 경쟁할 필요 없이 어제의 나와 경쟁을 하는 거죠.”

그렇게 스스로를 ‘수련’한 결과, 세계 발레 꿈나무들이 선망하는 로잔 발레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했다. 하지만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만 18세로 그 당시로는 최연소 입단을 했지만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주역은커녕 군무 기회조차 오지 않자 그는 낙담했다.

“2년쯤 지나니까 무대에서도 생활에서도 난 그냥 들러리인 것 같더라고요. 우울해서 살이 10㎏이나 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기회가 갑자기 온 거예요. 선배가 부상을 입어 군무 자리가 하나 비어서 무대에 섰는데, 울고 싶더라고요. 연습이 부족해 군무에서 저만 자꾸 동작이 틀렸거든요. 꿈에 그리던 기회를 이렇게 어이없게 날려버리다니 참담했어요. 처절하게 깨달았죠. 무대에 설 가능성이 없더라도 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요. 그날부터 발레단 물품 담당자가 ‘토슈즈 좀 아껴 신어요’라고 잔소리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했어요.”

인생의 정점이라 믿었던 순간 찾아온 최악의 위기


▎(왼쪽)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시절의 강수진. 타고난 재능도 있었지만 오늘날의 강수진을 만든 건 매일 우직하게 반복한 연습이다. / (오른쪽)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만난 남편 툰츠 셔크멘(오른쪽)은 강 단장의 든든한 반려자이자 요리사이며 선생님이다. 그 유명한 강 단장의 발 사진을 처음 찍은 것도 남편이었다. / 사진:강수진
노력은 대개 배신하지 않는다. 강수진은 점차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수석 무용수가 된 것은 물론, 32세였던 1999년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 무용수 상을 받았다. 스타 발레리나가 된 그의 공연 스케줄은 꽉 찼다. 하지만 그때 가장 큰 위기가 그를 덮쳤다. 정강이뼈 스트레스성 골절 진단을 받은 것. “지금 계속 연습을 하면 평생 발레를 못 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연습을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이 있는 발레계에서 그는 “최소 1년은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는 것처럼 억울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정말 약이더라고요. 우선 스스로의 부상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몸을 그간 혹사시켰으니 좀 쉬게 해주자고 마음먹었죠.”

그렇게 약 9개월이 지난 뒤 금이 가고 곪아 있었던 정강이뼈 조직이 붙기 시작했다. 기적이었다. 바로 다시 재활 훈련을 시작했다. “쉬는 동안 발레 근육은 싹 사라졌어요. 당시 제 몸보다 아이들의 몸에 근육이 더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죠. 왼쪽 다리는 45도 이상 올라가지도 않았고요. 속에선 ‘그 힘든 걸 다시 하려고?’라는 목소리도 들렸어요. 그런데 그때 이런 말이 떠오르더군요.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진다’고요. 그래서 일단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서 재활에 집중했죠.”

“나이 드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몰랐어요”


▎강수진 단장의 사무실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있다. 그의 소중한 반려견 써니도 발레단에 거의 매일 ‘출근’한다. / 사진:하지영
이때 그에게 힘이 되어준 존재가 남편 툰츠다. 슈투트가르트의 선배 무용수였던 그 역시 부상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 발레 마스터(코치)로 활동하는 툰츠는 강수진만을 위한 스트레칭 동작을 만들어줬다. “저도 사람이니까 괴롭죠. 온몸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어요. 남편이 고생 많이 했죠. 정신적으로나 발레 선생님으로서나 힘이 많이 되어줬어요. 뼈에 좋은 음식도 찾아서 해주고요.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누구나 제 남편 같은 사람이 있다면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부상으로 발레슈즈를 벗은 지 1년 3개월 뒤 그는 완벽한 모습으로 재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인 줄리엣 역할이었다. 부상 전보다 더 깊이가 생겼다는 호평을 받았다.

발레를 쉬기 전, 그는 뼈의 심각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픔을 참으면서 공연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점프를 하거나 턴을 돌고 나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고. 그러나 재활을 마치고 나온 몸은 예전과 달랐다. “몸 상태가 좋아지니까 점프도 잘 되고, 몸도 더 단단해지고 가벼워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제가 발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됐죠. 성숙해졌어요.”

지금 힘이 든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강수진은 건네고 싶은 말이 많았다. “지금 슬럼프인 거 같다고요? 아니에요. 슬럼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그건 슬럼프가 아니에요. 힘들 땐 그 순간이 버거워서 힘들다는 감정도 못 느껴요. 지나고 나면, 버티고 나면 ‘아, 슬럼프였구나’라고 생각하는 거죠. 쉬운 일로 가겠다고 작정하면 오히려 쉬운 일이 절대로 나오지 않더라고요. 일단 뭐든 시작을 하고, 슬럼프가 찾아오면 천천히 하지만 계속 걸어가세요.”

많은 발레리나가 체력의 한계를 느껴 은퇴하는 30대에 그는 성공적으로 복귀했고, 40대를 지나 50세가 되는 해인 2016년에 은퇴했다. 그는 마흔 이후 무대에 서는 게 더 즐거워졌다고 했다. 그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10대 때는 그저 발레가 좋았다. 20대 때는 무조건 열심히 했다. 30대 때는 내가 뭘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춤을 췄다. 그리고 40대가 되고서야 비로소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인터뷰에선 이렇게 말했다. “나이 드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건지 몰랐어요.”

그저 행복하게 독일에서 은퇴 후 생활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는 2007년엔 독일 정부가 최고의 장인 예술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부여하는 칭호인 ‘캄머탠저린(궁정 무용가)’을 받았다. 이 칭호를 받은 예술가는 소속 기관에서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 연금도 평생 보장된다. 그런데, 그는 종신단원 직을 내려놓았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다. 한국 국립발레단장이라는 도전이다. 남편도 탄탄한 경력을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함께 올랐다. 남편은 무보수 객원 코치로 활약 중이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의 공연 스케줄이 2014년 1월 30일 끝났는데, 강수진의 첫 출근은 2월 3일이었다.

10대부터 유학을 했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한 강수진에게 모국의 국립발레단장으로서 복귀는 각별하다. 어떤 발레단을 만들어가고 싶은지 묻자 그의 말이 빨라졌다. “21세기의 발레단은 한 장르만 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각자 좋아하고 특별히 잘하는 분야가 있죠. 제게는 스토리 발레가 그래요. 그렇다고 그 분야만 파고들면 살아남을 수 없어요. 선택의 폭을 넓혀 관객층을 더 확장해야 하죠.”

그가 취임한 뒤 국립발레단은 코믹 발레인 <말괄량이 길들이기>부터 모던 발레인 <봄의 제전>까지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려왔다. 매년 어떤 작품을 올릴지 결정할 때,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2~3개 꼭 포함시키는 게 강수진 단장의 스타일이다. 단원들이 직접 안무한 작품을 포함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 인정받지 못하거나 환영받지 못한다고 해도 새로운 시도를 멈춰서는 안 되는 거 같아요. 단원들도 처음엔 힘들어했죠. 하지만 이젠 ‘다음 무대의 주인공은 나일 수 있다’거나, 새로운 상황에서 자신이 이전엔 발견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찾으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 발레 수준도 높게 평가했다. “요즘 보면 한국인들이 활약하고 있지 않은 해외 발레단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예요. 수만 많은 게 아니라 실제로 굉장히 잘하고 있고요. 해외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이 있지만 저는 우리 (발레단) 안에서 단원들을 마음껏 키워주고 싶어요. 시간이 조금 걸릴지 몰라도 계속 밀어주면서요. 기초를 튼튼하게 키우는 게 중요해요. 후배들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걸어가는 그 과정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단원들도 열정으로 화답하고 있다. 공연이 끝나면 막이 내려간 무대 위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파이팅’을 외치기도 한다. 관객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그 공연 뒤 무대엔 강 단장이 있다. 단원 한 명 한 명을 안아주기도 하고, 사진도 함께 찍으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그가 최고로 치는 무대는 뭘까 궁금했다. 실수하지 않은 완벽한 무대가 아닐까 했지만 답은 아니었다. 그가 망설임 없이 내놓은 답은 이랬다. “무대에서 넘어져도 좋아요. 자기의 100%를 쏟아낸 공연이 좋은 공연입니다. 넘어지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는 공연이 있는 반면, 넘어지진 않았는데 후회가 남는 공연이 있어요. 차이는 내가 매 순간 최선을 다했느냐에서 나오죠. 최선을 다했지만 넘어졌다? 어쩔 수 없어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관객이 다 지켜보고 있고, 그 순간엔 너무 괴롭죠. 하지만 그게 인생이에요. 반면 자기의 70%만 쏟은 공연에선 넘어지지 않았더라도 부끄러운 거예요.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의지가 중요해요. 전 단원들에게 얘기합니다. ‘넘어져도 괜찮으니 100%를 보여주세요.’”

강수진 자신이 후회하는 건 없을까. 그는 손사래를 치며 “없어요, 없어요”라고 반복했다. 유쾌하게 깔깔 웃으며. 모든 일을 잘했다고 느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살다 보면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그 순간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거잖아요. 내가 생각했을 땐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근데 그게 잘 안 되면? 어쩔 수 없어요. 과거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요. 그 실수와 실패에서 배우고, 오늘 열심히 해서 내일은 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거죠. 그렇게 매일을 불태우며 산다면 내일 모든 게 끝난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201710호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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