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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20)] ‘역사의 트레거’ 이성계(2) 

원명 교체기 전쟁 영웅 시대적 과제 해결사로 변신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2만 명이 넘는 대규모 왜군의 침략을 격퇴한 황산전투를 통해 민중의 영웅이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부상한 이성계. 동북지방 출신이라는 신분적 약점을 혼인으로 극복하며 중앙정계에 진출한 그는 시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변혁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서울 인왕산 국사당에 있는 무신도 중 하나인 이성계의 초상. 19세기 학자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고려 공민왕 상을 걸어 놓았다”고 돼 있어 초상의 주인공이 공민왕일 가능성도 있다. / 사진제공·김영수
누가 역사의 승리자가 되는가?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자가 승리자다. 짧은 국면만 보면 권력투쟁이 난무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렇다. 역사는 단기적으로는 비합리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합리적이다. 고려 말은 국방과 전제, 종교에 큰 문제가 생겼던 때다. 일차적으로는 백성의 생명과 생계에, 이차적으로는 세계관에 빨간 등이 켜졌다. 물론 이성계가 의도적으로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과제를 해결하는 역사의 트레거(träger)가 되었다. 그는 집권 뒤 우선 사대정책을 통해 원명 교체에 따른 대외 관계의 혼선을 종식했다. 다음으로 군대를 재건해 왜구 문제를 해결했다. 외교 안보 문제를 정리한 것이다. 또 전제개혁을 통해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마지막으로 신진 유신들과 연합해 유·불을 교체했다. 역사책에는 한 줄로 정리돼 있지만 실제 역사는 인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것이다.


▎화약과 화포를 제조해 왜구 격퇴에 결정적 공을 세운 최무선의 영정. 최무선은 영주(永州, 지금의 영천) 사람으로 광흥창사 최순동의 아들이다.
1356년(공민왕 5) 개성에 온 청년 이성계는 공민왕대의 여러 전쟁을 통해 무장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혔다. 1371년(공민왕 20) 7월, 신돈 제거 후 인사에서 37세의 이성계를 지문하부사에 임명한 공민왕은 “문신 이색과 무신 이성계가 같은 날 문하성에 들어왔는데 조정의 의논이 어떠한가”라고 말했다 한다. 이는 요동공벌에 대한 논공행상의 일환으로 보이는데, 공민왕은 이성계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이색과 비견하는 명예를 베푼 것이다. 우왕대에 이성계는 점차 정치적인 의미까지 획득했다. 황산대첩을 비롯한 왜구 토벌전을 통해 그는 군사적 영웅으로 부상했고, 정도전과의 만남을 통해 역사적 변혁의 비전을 획득했다. 이 역량을 기초로 1388년 무진정변과 위화도회군을 단행했고, 이를 통해 비로소 역사적 변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392년 조선 건국은 여말선초 40여 년에 걸친 역사적 도정의 종착역이었다. 물론 전제와 세계관의 도전은 그 시간의 길이가 한 세기에 걸친 것이다.

고려 말의 왜구문제는 해적과의 전쟁이었으나, 단순한 군사적 문제가 아니었다. 왜구와의 전쟁은 매우 근본적인 정치적 결과를 초래했다. 이성계의 정치적 부상이 그것이다. 우왕대에 이성계는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왜구 문제의 궁극적인 정치적 의미는 고려가 최소한의 국가적 요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왜구 문제는 국가의 존립 의미를 의심케하는 일이었으나, 고려 정부의 힘겨운 노력은 근본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한편 백성들은 왜구의 잔학한 살육은 물론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묵종하고 있었다.


▎진포대첩 상상도. 1380년(우왕 6)에 병선 500척, 병력 2만 명에 이르는 왜구가 영산강 어구인 진포에 침입했다. 고려군은 화기를 동원해 병선을 모두 불태웠다. 이는 왜구와의 전쟁에서 고려군이 대대적 역습을 가한 첫 승리이자, 대왜구 전을 승리로 이끄는 전환점이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우왕 원년 중앙정계에서 축출된 정도전 역시 왜구를 피해 사방을 유랑했다. 민생의 고통을 몸소 체험한 그는 마침내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한편 이성계는 왜구 토벌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민심의 이반과 양심적 지식인의 동요 그리고 신흥 무장세력의 부상이 결합해 역성혁명이 가능했다. 그들은 집권 초기에 처음으로 대마도를 공격하고 왜구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켜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최영도 감동한 격전의 황산전투


▎이성계의 애마 여덟 마리를 그린 팔준도(八駿圖) 중 하나인 사자황(獅子黃). 사자황은 사자처럼 용맹한 황색 말이란 뜻으로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가 탔던 말이다. 주나라 목왕의 팔준도를 모방해 1447년 세종이 안견에게 그리도록 했다. 원래 그림은 없어졌고 1703년 숙종대에 다시 제작했다. /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황산전투의 중요성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성계는 민중의 영웅이 됐다. 이 전투는 500여 척의 병선에 2만여 명의 왜구가 침입한 사상 유례없는 규모였다. 최무선이 화약과 화포를 가지고 처음으로 참전해 지금의 금강 어구인 진포 앞바다에서 왜구의 병선을 모조리 불살랐다. 퇴로를 차단당한 왜구는 탈출하기 위해 내륙을 약탈하며 남해 쪽으로 내려갔다. 고려 정부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해 왜구 토벌을 명했다. 당시 고려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장군들의 사병으로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이성계를 연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왜구는 남원 운봉까지 남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겁먹은 다른 장군들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관망했다. 이성계의 용맹한 친병들조차 1차 접전에서 패했다. 이성계 역시 부장 이지란이 아니었다면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리에 화살을 맞았으며 두 차례나 말이 쓰러지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이성계는 남원에서 해발 470m의 여원치를 넘어 운봉의 인월역에 머물던 왜구와 접전했다. 전설에 따르면 왜구에게 욕을 보고 자결한 주모의 넋이 여원치에 나타나 이성계에게 필승의 전략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여원치의 마애석불은 이성계가 주모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군이 산을 등지고 스스로 방어하므로, 태조는 사졸들을 지휘하여 싸움을 걸게 했다. 태조는 쳐다보고 적군을 공격하고 적군은 죽을 힘을 내어 높은 곳에서 충돌하니 우리 군사가 패해 내려왔다. 조금 후 태조가 다시 군사로 하여금 소라를 불어 군대를 정돈케 하고 개미처럼 붙어서 올라가 적진과 부딪쳤다. 적장이 창을 가지고 바로 태조의 후면으로 달려와서 심히 위급하니, 편장 이두란이 말을 뛰게 하여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영공, 뒤를 보십시오. 영공, 뒤를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니 두란이 적장을 쏘아 죽였다. 태조의 말이 화살에 맞아 넘어지자 바꾸어 탔는데 또 화살에 맞아 넘어져 다시 바꾸어 탔다. 날아오는 화살이 태조의 왼쪽 다리를 맞혔다. 태조는 화살을 뽑아 버리고 기세가 더욱 용감하여 싸우기를 더욱 급하게 하니, 군사들은 태조의 상처 입은 것을 알 수 없었다. 적군이 태조를 두서너 겹으로 포위하니 태조는 기병 두어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갔다. 적군이 또 태조의 앞에 부딪치므로 태조가 즉시 8명을 죽이니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는 하늘의 해를 가리키면서 맹세하고 좌우에 지휘하기를,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과 싸워 죽겠다’ 하니 장수와 군사가 감동, 격려되어 용기백배로 사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태조가 앞장서서 힘을 내어 치니 적의 무리가 쓰러져 흔들리며 날랜 군사는 거의 다 죽었다. 적군이 통곡하니 그 소리가 만 마리의 소울음과 같았다. 적군이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관군이 이긴 기세를 타서 달려 산으로 올라가 기뻐서 고함을 지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켜 사면에서 이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크게 쳐부수었다. 처음에 적군이 우리 군사보다 10배나 많았는데 다만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태조실록> ‘총서’)


▎운봉과 인월 사이의 우측에 있는 남천의 피바위(血巖). 아기 발도가 화살을 맞고 흘린 피로 붉게 됐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바위 위에서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기를 받는다고 믿는다. 이 지역에는 이성계에 대한 전승설화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 사진제공·김영수
황산전투의 승리는 누구보다도 최영을 감명시켰다. 이성계가 개선하자 최영은 친히 백관을 거느리고 개경 동쪽 교외까지 나와 영접했고, 눈물을 흘리며 “삼한이 일어난 것은 이 한 번 싸움에 있는데, 공이 아니면 나라가 장차 누구를 믿겠습니까”라고 치하했다. 최영은 이후 이성계를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성계를 ‘나라의 주석’이라고 칭송했다. 권근은 황산대첩을 송축하는 시를 지었다.

“나라 위한 충성은 밝기가 태양과 같고 적을 꺾은 용맹은 늠름히 바람이 나도다. 동궁(彤弓)은 빛나서 은혜와 영광이 무겁고 백우전(白羽箭)은 높다랗게 기세가 웅장하다. 한번 개선하여 종사가 안정되니 말 위에서 기이한 공적((奇功) 있을 것을 이미 알겠네.”(<태조실록> ‘총서’)

적장도 보듬은 이성계의 인덕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 일제는 반 시국적인 고적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 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 사진·권태균
이성계는 군사전략에도 조예가 깊었다. 1362년(공민왕 11) 7월, 원이 북쪽 초원으로 달아난 뒤 요동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북원의 장군 나하추(納哈出)와의 전투를 보자. 이성계는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대등하게 맞섰다. 그 전략의 핵심은 기동성에 있었으며, 기만과 기습·매복 그리고 선제공격 같은 전술에 능숙했다. 그는 신속하게 이동해 적에게 유리한 시간과 장소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써 병력의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항상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군의 사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며 결국 지휘관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에 좌우됨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면서도 병사들의 인격을 존중했으며, 전투에 앞서 언제나 뛰어난 활 솜씨를 과시해 병사들의 사기를 고양하고 적의 전투 의지를 꺾었다. 또 전투가 시작되면 스스로 선봉에 서서 위험을 감수하고, 먼저 적장을 제압했다. 이 때문에 그의 친병은 1500명에 불과했지만 어떠한 적에게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황산대첩비 탁본.
이성계의 또 다른 장점은 인재를 각별히 애호했다는 점이다. 그와 싸운 많은 적장이 이성계의 휘하가 됐다. 조무(趙武)는 원래 원나라 장군으로 경원의 공주(孔州)에 침입했다. 이성계는 그의 군사적 능력을 아껴 화살로 수십 번 그를 맞혔지만 죽이지 않았다. 조무는 이성계의 부하가 됐다. 처명(處明)은 여진족 장군으로 공민왕 19년 요동 공벌 때 이성계의 휘하가 됐다.

“올라(兀羅)의 전쟁에 태조가 처명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으므로 처명이 은혜에 감동해 매양 몸에 맞은 화살 흔적을 보면 반드시 목이 메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종신토록 태조의 곁을 따라다니며 모셨다. 황산대첩에서 처명이 태조의 말 앞에 있으면서 힘을 다하여 싸워 공을 세웠다.”(<태조실록>‘총서’)

배주(拜住)는 원나라 장원급제자다. 그 또한 요동 공벌 때 이성계 휘하가 됐다. 이성계는 장원(壯元)이란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에게 입히고, 말을 줘 마침내 그와 함께 왔다. 왕은 배주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을 내렸다. 황산대첩 때 15~16세의 소년 무장으로 왜구의 총지휘관이었던 아기발도(阿其拔都)조차 살리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그와 함께 숱한 전공을 세웠던 여진 천호 퉁두란(이지란)은 전란을 피해 1371년(공민왕 20) 고려에 귀화했는데, 이성계는 그를 만나 한마디를 나눠보고는 의기가 투합하여 언제나 한곳에 거처했다(往見一言契合 常宿一處)고 한다.(<國朝人物志> 太祖祖 李之蘭)


▎1996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의 한 장면.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조준 등 당대 가장 뛰어난 신진 성리학자가 이성계와 깊은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도 그의 이러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특히 두 살 아래인 정몽주의 도량을 중히 여겨 지방에 대장으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를 천거해 함께했고, 누차 그를 선발 천거하여 같이 정승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정몽주는 공민왕 13년 삼선·삼개의 침입 때와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의 조전원수로 동행했다. 공민왕 13년에 이성계가 31세, 정몽주가 29세였으므로 젊을 때부터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성계는 일반 병사들에게도 친절했다.

“대장 중에 최영·변안열·지용수·우인열 등은 막료와 사졸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욕설로 꾸짖어 못하는 말이 없었고, 혹은 매질을 가하여 죽는 사람까지 있게 되니 휘하의 군사가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태조는 성품이 엄중하고 말이 적었으며, 평상시에는 항상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바라보기에는 위엄이 있으나 사람을 접견할 적에는 혼연히 한 덩어리의 화기(和氣)뿐인 까닭으로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하였다. 그가 여러 장수 중에서도 홀로 휘하의 사람들은 예절로써 대접했으며 평생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여러 장수와 휘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기를 원했다.(<태조실록> ‘총서’)

동북 출신의 핸디캡 혼인으로 극복


▎고려 말 왜구 침입으로 인한 백성들의 비극을 잘 보여주는 최씨 분매(崔氏奮罵). 1379년(우왕 5) 왜구가 진주에 침입했을 때, 산중에 피신한 진주 호장 정만의 부인 최씨와 4명의 자녀가 왜구에 붙들려 최후를 맞았다. / 사진제공·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러나 이성계의 이러한 군사적·정치적 성장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우왕에게 이 점을 경고했다. 권력은 윤리학보다 물리학에 가깝다. 선악이 없으며 크기와 힘에 따라 물리적으로 운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영은 이성계를 옹호했다. 그런데 이 경고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지윤과 사돈 간이었다. 장남 이방우가 지윤의 큰딸과 결혼한 것이다. 지윤의 어머니는 무당으로 출신이 천했다. 처음 일개 병졸로 군문에 들어간 지윤은 누차 무공을 세워 무장으로 입신했다. 우왕대는 이인임과 연합정권의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우왕 3년 이인임의 헤게모니에 도전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인임의 입장에서 보면 지윤과 이성계가 연합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윤 사건 때 이성계와 아들 이방우가 죽음을 면한 것은 행운으로 보인다. 이방우는 그 뒤 술에 빠져 세상을 멀리했다.

이성계 자신도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그의 활 솜씨는 유명해 공민왕도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 한 사람뿐”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활쏘기 시합에서도 상대방을 신중하게 배려했다.


▎이성계의 3남 이방의, 익안대군의 영정. 이성계의 건국을 돕고 개국 일등공신에 책정됐지만 이후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 사진제공·김영수
“태조는 항상 겸손으로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한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태조실록> ‘총서’) 또한 우왕 3년 8월 신주·안악 등 황해도 북서부지역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이성계와 더불어 조전원수로 파견된 임견미는 전투에서 패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이성계였으나 임견미는 패전을 숨기고 이성계의 전공을 가로챘다. 이성계는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계의 잠재적 위험성은 부단히 제기됐을 것이므로, 그의 입지는 매우 좁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우려는 사실이 되었고, 최영이 그 첫 번째 희생자였다.

이성계 가문은 개성에 진출한 이래 중앙에 정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군공이 든든한 토대였다. 그러나 이자춘을 동북방으로 파견하려고 했을 때 어사대가 반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미한 가문과 동북방 출신이라는 핸디캡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성계는 이 약점을 혼인을 통해 극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자 서울 부인(京妻)인 신덕왕후(神德王后)는 곡산(谷山) 강씨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강윤성의 바로 아래 동생이 강윤충(康允忠)이다.

강윤충은 충혜왕대와 충목왕대의 권력자로 악명이 높다. 곡산 강씨는 태조 왕건의 외가이며, 고종대의 문하시중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 강지연(康之淵)이 선조라고 한다. 그런데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강윤충은 본래 천한 노예(賤隸)로 ‘감전의 노비(監傳奴)’였다. 토지와 노비문서를 보관하던 방고감전별감(房庫監傳別監)에 속한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그가 공민왕의 부왕인 충숙왕의 측근이 되어 정4품직 호군(護軍)이 됐다.

천한 노비 출신이 어떻게 충숙왕을 섬길 수 있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하지만 몽고 지배기에는 이런 사례가 매우 많다. 충숙왕은 원래 충선왕의 차남으로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였다. 어머니도 제2비 의비(懿妃)로서 몽고 여자 예쉬진(也速眞)인데, 가계도 모를 만큼 한미했다. 충숙왕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부왕 충선왕의 그늘 밑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니 어린 시절 충숙왕을 섬긴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윤충은 우연히 충숙왕의 시종이 됐다가 그 공으로 발탁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충혜왕·충목왕·충정왕대까지 부귀와 권세를 누렸다. 특히 1339년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과 심양왕 고가 고려 왕위를 놓고 다툴 때 심양왕 지지자들이 일으킨 조적의 난에서 수세에 몰린 충혜왕을 지지해 일등공신에 책봉됐다. 하지만 충혜왕이 원에 잡혀가 죽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그는 충혜왕의 몽골 왕비 덕녕공주와 간통해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충목왕 즉위 후 황제의 명에 의해 대대적 개혁이 시도됐다. 이를 좌절시킨 핵심 인물이 바로 그였다. 당대의 유명한 개혁정치가들인 김륜, 이제현, 박충좌는 그를 정치적 부정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임금과 백성을 기만하고 천하의 공론도 꺼리지 않으며 천하의 법도도 두렵게 여기지 않는 자”라고 비판했다.(<康允忠傳>)

이성계의 장인이자 강윤충의 맏형인 강윤성은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찬성사에 올랐다. 동생 덕분이었을 것이다. 강윤성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단 4건뿐이다. 그의 장남 강득룡(康得龍)은 1351년(충정왕 3) 8월 정2품인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임명됐고, 10월에 공민왕이 즉위하자 11월에 삼사우사가 됐다. 1354년(공민왕 3) 7월에 평리, 12월에 다시 삼사우사에 임명됐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의 난 이후 개경에 환도하던 공민왕은 흥왕사에서 김용의 난을 만났는데 난이 평정된 뒤 이판동(泥板洞) 강득룡의 집에 유숙했다고 한다. 강순룡(康舜龍)은 강윤성의 차남이자 신덕왕후의 오빠다. 그는 1354년(공민왕 3) 2월 종2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됐고, 6월에 장사성 토벌을 위해 고려군을 파견하라는 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사신으로 파견됐다. 그때 관직이 원의 숭문감 소감(崇文監少監)이며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였다.(<고려사> ‘世家’) 그는 7월에는 정2품 찬성사에 임명됐다. 숭문감은 도서의 번역과 교정을 담당하는 원의 관청이다. 그는 이미 원에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고, 사신으로 그가 온다는 기별을 듣고 고려 정부에서 관직을 준 것이다.

신덕왕후의 가문은 이처럼 한미하고 명예롭지 못한 세평을 받고 있었으나 이성계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강씨 가문이 비록 부정한 경로를 통해 진출하기는 했지만 강윤충 등 일족은 최고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공민왕의 제거 대상 1호인 그는 원의 지배하에서는 안전했다. 공민왕대 초 강윤충은 찬성사와 판삼사사에 발탁됐다. 그러나 1356년(공민왕 5)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자 왕은 강윤충을 석기의 모반사건에 연루시켜 유배했다가 3년 뒤 처형했다. 또한 1357년 판삼사사 강윤성과 숙부인 판사 강윤휘(康允暉)는 채하중 역모사건에 연루돼 국문을 받았다. 사건을 담당했던 이인복에 따르면 이 사건은 친원파 채하중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었다.

신흥명문으로 떠오른 신덕왕후 가문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사당인 이산묘. 태조 이성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후 역사 기록에서 강씨 일족의 행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볼 때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듯하다. 이 일족은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웠다. 1363년(공민왕 12) 강윤휘의 장남 호군 강영(康永)이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및 기해격주홍적공신(己亥擊走紅賊功臣)으로 책봉됐다. 강윤성의 형강윤귀(康允貴)의 장남 강원보(康元甫)는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으로 책봉됐다. 기해격주홍적공신은 홍건적 1차 침입 때, 수복경성공신은 2차 침입 때의 공을 표창한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이 강득룡의 집에 유숙한 것으로 보아 신임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이 암살되기 수일 전 북원에서 온 이역의 승려가 강순룡에게 “원나라가 심왕(瀋王)의 손자를 고려왕으로 세운다”는 소식을 전한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곧 석방됐다.(<고려사> ‘세가’) 이후 우왕 원년 명의 사신 채빈을 죽이고 북원으로 달아난 김의 사건에서 이인임은 김의와 밀통한 죄를 강순룡 등에게 전가했다. 이때 강순룡이 찬성사라는 고위직에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우왕대에 복권한 듯하다.(<고려사절요>) 이런 여러 사건을 보면 강순룡은 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기록을 보면 강씨의 가문은 명문세가는 아니었지만 원 지배하에서 전환기의 기회를 잘 포착해 성공한 신흥가문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비슷한 가문끼리 결혼을 통해 입지를 공고히 했다. 신덕왕후의 자매 중 하나는 신귀(辛貴)의 부인인데, 무장 양백연과 간통했다고 한다.(<楊伯淵傳>) 신귀는 이성계와 동서 간으로, 충혜왕과 충목왕대의 권신 신예(辛裔)의 동생이다. 신예는 충목왕대의 인사를 좌우해 ‘신왕(辛王)’이라고 불렸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그의 매제(妹弟)였다.(<辛裔傳>)

신씨 가문도 원과의 커넥션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1351년(공민왕 1) 고용보가 조일신 난에 연루돼 도주한 뒤 1355년(공민왕 4)에 신예가 죽고, 1357년 신귀가 채하중 사건에 연루돼 유배됨으로써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들은 신돈 집권기에 복권됐다. 신예는 신돈과 같은 영산(靈山, 경남 창녕) 출신이었다. 신귀와 강윤성, 강윤휘가 채하중 사건에 함께 연루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력이 거의 유사한 두 가문은 아마 정치적 성향도 일치했을 것이다.

이성계와 이방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처음 이성계 가문이 혼인할 수 있는 범위는 매우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가문들은 잠시나마 모두 최고 권력을 행사해본 경험이 있었다. 차남 이방과는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다. 삼남 이방의는 최영의 일족인 철원 최씨 최인두(崔仁)의 딸과 혼인했다. 넷째 아들 이방간은 민지(閔漬)의 손자이자 민상정(閔祥正)의 아들인 판도판서(版圖判書) 민선(閔璿)의 딸과 결혼했다. 민지는 원종대의 장원급제자이며 첨의정승으로 치사했고,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저술한 대학자였다. 민상정은 대사헌에 올랐고 청백리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방간에 이르러 이성계 가문은 개성의 유서 있는 가문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다섯째인 이방원은 예문관대학사 민제(閔霽)의 딸과 결혼했다.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왕실과 혼인할 자격을 갖춘 이른바 ‘재상지종(宰相之宗)’ 중 일족이었다. 이방원은 이성계 가문 최초의 과거급제자였다.

방원의 과거급제에 눈물 흘린 이성계


▎청계천 광교를 만드는 데 사용된 정릉 석물의 일부. 신덕왕후를 계모로 인정하지 않았던 태종은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고,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했다. / 사진제공·김영수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번은 왕우(王瑀)의 딸과 결혼했다. 왕우는 비록 신종(神宗)의 후예로 이미 정통에서 상당히 멀어진 상태이긴 했으나 어쨌든 왕족이었다. 이들에 와서야 비로소 이성계 가문은 개성 세족들의 울타리 안에 진입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신흥 가문·무장·문신 세족들과 혈연적 유대를 형성했다.

이처럼 이성계는 개성의 지배계급에 진입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성계가 그의 아들 중에 과거급제자가 나오기를 열망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1383년(우왕 9) 이방원이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했을 때 이성계는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가문에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없음을 불만히 여겨, 전하(이방원)로 하여금 스승에게 나아가서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이해에 전하가 급제하니 태조가 대궐 뜰에 절하고는 매우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후에 제학(提學)에 임명되니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 4품 이상의 임명장)를 읽기를 두세 번에 이르렀다. 태조가 매양 빈객과 연회할 적에 전하로 하여금 연구(聯句)를 하게 하고, 문득 이르기를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하였다.”(<태조실록> ‘총서’) 이성계는 단지 군공을 넘어 개성의 귀족사회가 요구하는 교양과 관습의 습득을 통해 그 세계에 진입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관문이 과거 합격이었다. 이방원의 과거 합격은 그 문이 비로소 열렸음을 뜻했다. 군사적 기예를 통해 입신했던 이성계 가문에 학문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던 것이다.

이성계가 어느 때부터 왕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공민왕대에는 그러한 야심을 품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 젊은 데다 지위나 기반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민왕은 권력 운용에 능란해 감히 도전을 꿈꾸기 힘들었다. 공민왕은 말년에 인격이 파탄되고 실정을 저질렀지만, 당대인들에게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이 때문에 조선 개국 후에도 이성계는 태조 왕건과 더불어 공민왕에 대해서도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또 왕씨들을 모두 죽였지만 왕우만은 제외시켜 고려 왕조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그때 이성계는 왕우에게 “내가 경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으므로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라고 말했다.(<태조실록>)

이성계가 모종의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왕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인임은 이성계가 “모름지기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최영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노했다고 한다. 이인임의 말은 결국 이성계가 언젠가 반역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최영만이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인임은 사실 최영의 행동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최영은 이를 거부했다. 최영은 오히려 1388년(우왕 14)의 무진정변에서 이성계와 연합해 이인임을 제거했다. 위화도회군 뒤 죽음에 임해서야 최영은 탄식하면서 “이인임의 말이 진실로 옳았다”고 후회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인임은 이성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승패는 누가 최영을 설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최영은 자신이 존재하는 한 이성계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왕이 아니라 공민왕이었다면 이성계는 아마 일찍 제거됐을 것이다. 일찍이 홍건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장군을 모두 죽였던 공민왕은 최영조차 처형하고자 했다. 정치권력이라는 문제를 놓고 공민왕은 어떤 부류의 인간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극단적인 태도이긴 하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권근이 쓴 건원릉(이성계의 능)의 비문을 보면 이성계가 일정 시기에 역성혁명의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우리 태조 대왕께서 잠저에 계실 때, 공덕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 : 왕조창업의 천명)도 또한 나타났다.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금으로 된 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것을 주면서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 하였다. 하(夏)나라의 현규(玄圭)와 주나라의 꿈(周夢)과 동부(同符)하다고 하겠다. 또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 암석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가 다시 삼한을 바로잡으리라’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서운관의 옛 장서인 비기(秘記)에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란 것이 있는데, 건목득자(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이 곧 진단(震檀)이라고 한 설은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지금에 와서야 증험됐으니, 하늘이 유덕한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은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태종실록> 태종 9년 4월) 현규는 요 임금이 우 임금에게 하사한 검은색의 큰 홀(笏)로, 천하의 모든 것을 물려준다는 뜻이다. 주나라의 꿈이란 문왕이 사냥 나갈 때 꿈꾼 것을 점쳐 대업을 도운 강태공을 얻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대업이 이뤄질 때는 하늘의 도움이 있다는 뜻이다.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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