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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9)] 23세에 친정(親政) 시작한 고종 

국제정세 변화는 ‘딴 나라 얘기’였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메이지 정부·이홍장, 천문학적 금액 투입해 해군 육성… 조선 정부는 프랑스·미국과 통상 맺으라는 조언도 거부

▎구한말 프랑스 일간지에 실렸던 만평. 조선의 지도를 밟고 있는 일본이 러시아와 링에서 격돌하고 있다. 양국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청나라는 천막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고종은 1872년에 즉위 9년이 됐다. 12세의 미성년으로 왕위에 올랐던 고종은 어느덧 21세의 어른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도 정치 실권은 고종의 생부이자 섭정인 흥선대원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명색만 왕일 뿐, 고종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청나라의 정치 상황도 비슷했다. 고종보다 4세 아래의 동치 황제는 6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실권은 숙부인 공친왕과 생모인 서태후에게 돌아갔다. 공친왕은 의정왕(議政王)의 자격으로, 또 서태후는 태후의 자격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그렇게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1872년이 됐다.


▎19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나라 동치 황제.
그해 동치 황제는 17세가 됐다. 그때까지도 동치 황제에게는 황후가 없었다. 그래서 1872년 연초부터 동치 황제의 혼인이 청나라 조정의 긴급 문제로 대두했다. 그해 9월 동치 황제는 정식으로 황후 아로특씨(阿魯特氏)를 맞이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어른이 됐다.

동치 황제의 혼인을 전후해 황제의 친정(親政) 문제가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동치 황제가 이미 성년의 나이를 넘었고 또 혼인까지 했으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동치 황제의 즉위 때 서태후는 “황제의 학문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즉시 귀정(歸政)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이제는 약속을 지킬 때가 됐다. 서태후는 다음해인 1873년에 귀정하겠다고 공포했다. 그 약속에 따라 동치 황제는 18세가 되던 1873년 1월부터 공식적으로 친정을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동치 황제는 양심전에서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이 황제의 공식적인 침전이었다. 황후 아로특씨는 건청궁 뒤편에 있는 곤녕궁에 거처했다. 동치 황제는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인 황후 아로특씨를 총애했다.

1873년 1월에 동치제의 친정이 실현되자 조선의 고종 역시 친정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고종은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보고를 통해 동치 황제의 친정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소상히 파악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1873년 당시 고종은 이미 22세였고, 혼인까지 치렀으니 당연히 친정을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정작 흥선대원군은 친정에 대해 언급조차도 하지 않았다. 18세의 동치 황제가 친정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22세나 된 고종에게 왕권을 넘겨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종신 섭정이 되려 했다. 친정을 원하는 고종과 종신 섭정을 고집하는 흥선대원군 사이에 권력 투쟁은 피할 길이 없었다.

1873년(고종 10) 10월 10일 고종은 포천에 사는 최익현을 행동부승지(行同副承旨)에 임명했다. 최익현은 강직하기로 소문난 학자였다. 그것도 남인 계통의 흥선대원군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노론 계통의 원리주의자였다. 최익현은 화서 이항로의 제자였다. 이런 최익현이라면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분노할 만했다. 고종은 이미 22세인데도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내놓지 않는 것은 유교윤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승지에 임명됐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포천을 떠나지 않았다. 승지로 취직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경우 왕명으로 속히 취직하게 하거나 아니면 교체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럼에도 고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0월 10일에 행동부승지로 임명됐던 최익현은, 18일에는 우부승지로 그리고 21일에는 동부승지로 임명됐다.

최익현은 승지로 취직하든가 아니면 사직상소를 올려야 했다. 1873년 10월 25일, 한양의 날씨는 맑았다. 그날 최익현의 사직상소가 올라왔다. 그러나 사직상소라는 명색이 무색할 정도로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怪癖)스럽다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 하고 있습니다”라는 언급이 고종의 속을 후련하게 해줬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바로 고종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이란 흥선대원군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10여 년간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흥선대원군 개인만을 섬길 줄 알뿐, 고종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았다. 혹 성년이 된 고종을 위해 뭔가 하려다가는 곧바로 괴벽스러운 사람으로 매도되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바로 이런 현실에 고종은 분개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같은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문은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최익현의 상소


▎양복 차림의 고종 황제 사진.
최익현의 상소문을 읽어본 고종은 “그대의 이 상소는 진심에서 우러나왔고 또 나를 위해 경계한 말도 매우 가상하다”고 비답(批答)하면서 그를 호조참판으로 승진·임명했다. 최익현의 의견에 적극 찬동한다는 입장을 공포한 셈이었다.

또한 고종은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해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해 최익현에게 찬성하면 정직한 사람이고, 반대하면 소인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달리 말하면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찬성하는 사람은 소인이라고 단정한 언급이었다. 고종으로서는 자신의 친정 욕망을 공개적으로 또 강력하게 천명한 셈이었다.

최익현의 상소문은 일대 파란을 불러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최익현을 ‘정직한 사람’이라 규정한 고종의 비답이 파란을 불러왔다. 고종의 비답은 10년 섭정한 흥선대원군은 물론 그 흥선대원군을 보좌했던 사람들까지 ‘부정직한 소인’으로 판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종의 비답이 공포된 다음날, 정승들은 스스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야 했다. 육조 판서들은 물론 사헌부·사간원·홍문관·승정원 관료들도 자아비판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강경한 처분을 내렸다. 육조 판서들에게 감봉 조치를 내리는 한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승정원 관료들을 모두 파면 조치했다. 대대적이 환국(換局)이 일어날 조짐이었다. 최종 목표는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이었다.

심지어 고종은 최익현의 상소문에 대해 옛날의 준엄했던 상소문에 비하면 부족하다는 언급도 했다. 최익현이 더욱더 준엄하게 흥선대원군을 비판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다는 의미였다. 고종은 최익현이 보다 더 노골적으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비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종의 친정을 더 확실하게 요구했으면 하고 아쉬워했던 것이다.

반면 고종의 이 같은 언급은 흥선대원군 쪽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당연히 그들은 반격을 가했다. 흥선대원군 쪽에서는 최익현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흉악한 사람’ 또는 ‘애매모호하게 사건을 날조하는 사람’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고종은 그들을 ‘부정직한 사람’ 또는 ‘불충한 사람’이라 비난하며 숙청했다. 나아가 최익현을 비판하는 상소문은 승정원에 접수시키지도 못하게 했다. 이번 기회에 흥선대원군을 반드시 하야시키고 친정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밝힌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흥선대원군 본인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울분과 노여움으로 흥선대원군은 문을 닫고 일 처리를 사양했다. 공개적으로 섭정을 그만둔 다음에 일 처리를 사양한 것이 아니라 섭정인 상태에서 일 처리를 사양했다. 고종의 문안인사도 받지 않았다. 섭정으로서 또 왕의 아버지로서 파업 투쟁을 벌인 셈이었다.

나랏일이 지체되고 고종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지면 고종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만약에 비판 여론을 견디지 못한 고종이 제 발로 찾아와서 잘못을 빌고 계속해서 섭정을 해달라고 간청하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마음 약하고 효성스러운 고종은 분명 그렇게 할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고종은 문안인사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던 조선시대라, 자식이 부모에게 문안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크나큰 불효로 지탄받았다. 그럼에도 문안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불효자라는 지탄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낸 셈이었고, 그 정도로 고종의 친정 욕망이 강했다.

군색해진 흥선대원군은 직접 고종을 찾아갔다. 지난 10년간의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섭정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해냈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요컨대 이렇게 어려운 상황은 자신이 아니면 헤쳐나갈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고종은 아직도 어리기에 자신이 계속해서 섭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흥선대원군을 보며 고종은 ‘말없이 잠잠했다’고 한다. 아예 상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 약하고 효성스럽던 지난날의 고종에게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고종이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고종 자신의 친정 욕망이 컸기 때문이었다.

‘10년 섭정’ 흥선대원군의 퇴장


▎조선을 10년간 통치했던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굳건한 고종 앞에서 흥선대원군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1874년(고종 11) 2월 8일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양주의 직동으로 낙향했다. 이렇게 해서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고 고종의 친정이 실현됐다. 고종의 나이 23세였다.

그런데 고종의 친정 직후인 1874년 4월에 일본의 대만 침공이 발발했다. 당시 청나라에는 제대로 된 근대 해군이 없었고 그래서 속수무책이었다. 반면 메이지 유신 직후 일본은 근대 해군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유신 이후 메이지 일본은 막부로부터 획득한 근대 군함 이외에 사쓰마번, 조슈번 등으로부터도 근대 군함을 헌납받아 1871년 당시 이미 10여 척을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에서 나가 메이지 일본은 1873년 2월에 ‘해군 확장 10개년 계획’을 세워 근대 해군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고 국위를 해외에 떨치기 위해서는 근대 해군이 시급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해군 확장 10개년 계획’의 핵심은 1년 국가예산의 약 15%에 해당하는 600만 엔을 10년간 투입해 총 86척의 함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 육군의 1년 예산이 800만 엔이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해군 예산 600만 엔은 막대한 규모였다. 일본의 해군 예산과 육군 예산을 합한 1400만 엔은 총 국가예산의 35%에 해당하는 것으로 1873년부터 메이지 일본은 본격적으로 해군 확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의 국방정책은 육군에 치중돼 있었다. 유사 이래 중국의 주적(主敵)은 대체로 북방의 기마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통시대 중국의 국방정책은 기마 유목민을 어떻게 방어할지에 집중됐다. 전통시대 중국의 대표적인 방어시설인 만리장성은 근본적으로 기마 유목민의 습격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주력군은 육군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전통적인 국방정책은 육방(陸防)과 육군으로 압축될 수 있었다.

사실 청나라가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서양 열강에게 참패한 이유 중의 하나도 육방과 육군에 치중된 국방정책 때문이었다. 청나라는 전통적인 국방정책에 따라 해방(海防)과 해군을 소홀히 했다. 그래서 근대 군함으로 무장한 서양 열강은 수월하게 바다를 제압했고 해전에서도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두 차례의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 권력층 사이에서는 기왕의 국방정책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예컨대 제1차 아편전쟁의 당사자로서 영국 해군과 대결했던 임칙서·위원 등은 서양열강에 대응하려면 근대 해군을 육성하고 해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반면 1874년 4월 일본의 대만 침공 때 청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육군 위주의 방위전략은 근본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근대 해군으로 무장한 일본을 막으려면 육방과 육군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日에 자극받은 淸도 군비확충에 혈안


▎흥선대원군의 아들인 고종은 23세가 되던 1874년 친정을 실현하게 됐다.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 고종(이진우 분)이 대신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의 대만 침공 문제가 일단락된 1874년 10월 5일에 총리아문에서는 동치 황제에게 ‘해방육조(海防六條)’라는 건의서를 올렸다. 해방에 필요한 여섯 가지 조목을 정리한 것으로서 1만2000명 규모의 해군 설립, 10척의 철갑선 구입, 안정적인 해군재정 확보, 조선소 설립 등등의 내용이었다.

이 건의서에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이 바로 이홍장이었다. 그는 11월 2일에 ‘주의해방탑(籌議海防搨)’이라는 제목의 상소문을 올려 해방육조의 실현을 위한 각각의 방안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홍장은 해방을 위해서는 1년에 최소한 1000만 냥의 군자금을 들여 속히 48척 규모의 함대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갑선 구입, 해군 봉급, 무기 구입 등을 위해 그 정도는 필요하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1년 예산이 대략 1억 냥 내외였다. 이홍장은 그중에서 대략 10%를 해방 예산으로 요구한 것인데 이는 당시의 국방 예산 거의 전부를 요구한 셈이었다.

이홍장이 해방을 위해 1년에 1000만 냥의 예산을 요구한 배경은 일본의 근대 해군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이미 1873년부터 매년 600만 엔의 예산을 투입해 근대 해군을 육성하는 일본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보다 많은 예산이 필요했다. 당시 청나라의 1냥은 일본의 1.6엔으로 환산됐다. 따라서 1000만 냥은 1600만 엔에 해당하는데, 이는 일본의 해군예산 600만 엔에 비해 대략 세 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홍장은 이 정도 예산을 투입해야 일본의 근대 해군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99년 치러진 흥선대원군의 장례식 장면. 많은 백성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는 아라비아의 아고백(阿古柏)에게 빼앗긴 신강(新疆)을 되찾기 위해 대규모 육군을 투입하고 있었다. 작전은 섬감 총독(陝甘總督, 섬서성과 감숙성 총독) 좌종당이 총괄했는데 연간 800만 냥의 예산이 지출됐다. 요컨대 이홍장은 신강 수복에 들어가는 800만 냥에 더해 추가로 200냥을 해방 예산으로 돌리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당연히 좌종당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해방도 물론 중요하지만 국토 회복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좌종당과 이홍장을 중심으로 육방과 해방, 육군과 해군 중에서 국가적으로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청나라의 주적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의 문제로까지 확대됐다.

좌종당 쪽에서는 청나라의 주적 국가를 러시아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는 신강 수복이 시급하고 국방예산도 육방과 육군을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반면 이홍장 쪽에서는 청나라의 주적 국가를 일본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을 막기 위해서는 신강 수복과 육군보다는 해방과 해군을 우선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좌종당과 이홍장 사이에 주적 논쟁이 치열하던 때 갑자기 동치 황제가 중병으로 병석에 누웠다. <청사고>에는 1874년 10월 말에 동치 황제가 갑자기 병들어 이홍장으로 하여금 황제 대신 장주(章奏)를 살펴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1874년 10월 말이면 동치 황제가 친정을 시작한 지 겨우 1년 10개월째 되던 시점이었다. 그때 동치 황제의 병세는 공문서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병든 동치 황제는 건청궁을 떠나 양심전에서 요양했지만 병세는 업무 자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 11월 초에는 공친왕이 동치 황제를 대신해 공문서에 결재했고, 다시 얼마 후에는 서태후와 동태후가 황제 대신 장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렴청정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결국 동치 황제는 1874년 12월 5일(음력) 저녁때 양심전의 동난각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 딸 하나도 두지 못한 처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친정을 한지 2년 만이었고, 나이는 19세에 불과했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쓴 <아적전반생(我的前半生)>에는 동치 황제가 천연두를 앓았으며 그 병이 죽을 정도로 무서운 병은 아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럼에도 19세밖에 되지 않은 동치 황제가 천연두로 죽은 이유는 병중에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충격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병석에 누운 동치 황제가 보는 앞에서 서태후가 황후 아로특씨를 구타하는 등의 사건이었다. 서태후는 병든 아들이 죽어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대로만 행동하였던 것이다.

동치 황제가 세상을 떠난 지 2개월쯤 후에 황후 아로특씨 역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황후 아로특씨는 특별히 병을 앓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세상을 떠나자 수많은 소문이 돌았다. 어떤 소문에서는 황후 아로특씨가 비관해 자살했다고도 하고, 또 어떤 소문에서는 황후 아로특씨가 임신한 것을 꺼린 서태후가 죽였다고도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서태후 재등장, ‘주적(主敵)’은 러시아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
동치 황제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카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야 했다. 동치 황제의 조카들 중에는 장성한 남자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장성한 조카가 후계 황제가 될 경우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할 수가 없었다. 또 어린 조카가 후계자가 돼도 마찬가지였다. 동치 황제의 황후가 태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기 때문이었다.

서태후는 예상 밖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신이 수렴청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바로 자신의 조카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들이는 책략이었다. 서태후의 여동생과 순친왕 사이에서 출생한 4세짜리 조카 재첨(載湉)이 그였다. 그가 훗날의 광서 황제였다.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입궁한 광서 황제는 마치 동치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양심전에 거처하며 공부에 전념했다.

서태후는 동태후와 함께 양심전에서 수렴청정을 시행했다. 서태후는 아들과 며느리를 잃었지만, 그 대가로 더욱더 강력한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동치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4세의 광서 황제가 입궁하던 때 서태후는 겨우 40세에 불과했다.

이처럼 청나라의 주적을 놓고 좌종당과 이홍장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던 시기에 어린 광서제가 즉위하고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함으로써 그 결론은 무엇보다도 서태후의 최종 판단이 중요했다. 1875년 3월 서태후는 좌종당을 ‘흠차대신(欽差大臣) 독판신강군무(督辦新疆軍務)’에 임명했다. 건륭 황제가 개척한 신강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서태후는 신강을 수복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서태후는 제2차 아편전쟁으로 함풍 황제와 함께 열하로 피난했을 때 러시아에 연해주를 빼앗겼던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서태후에게 주적 국가는 일본보다는 러시아였다. 서태후는 육군과 육방을 중시하는 전통 국방주의자였다. 어쨌든 서태후의 이 같은 판단으로 신강이 수복될 수 있었다. 오늘날 광대한 신강 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남아 있게 된 것은 서태후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면에서 서태후는 육군과 육방 쪽으로는 탁월한 안목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서태후가 해방과 해군의 중요성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홍장을 신임하던 서태후 역시 해방과 해군의 중요성을 알았다. 다만 이홍장만큼 절박하게 느끼지는 못했을 뿐이었다. 서태후는 육방을 위주로 하면서 해방을 보완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에서는 최선이라 판단했다.

서태후가 육방과 해방의 중요성을 각각 어느 정도로 판단했는지는 당시의 국방예산 배분에서 잘 드러났다. 대략 1000만 냥의 국방예산 중에서 서태후는 신강 수복에 약 800만 냥을 배정하고, 해방을 위해서는 약 300만 냥을 배정했다. 이것으로 볼 때 서태후는 육방을 해방보다 두 배 이상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해방론자인 이홍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필요한 1000만 냥에 비해 3분의 1도 안 되는 300만 냥만 배정됐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홍장은 결정권이 없었다. 그 300만 냥을 가지고 이홍장은 남양대신 심보정과 함께 해방을 강화하고 해군을 육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욱 치열해진 양국의 해군 육성 경쟁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동치 황제가 죽자 다시 섭정을 시작했다
1875년부터 이홍장은 300만 냥에 더해 개인적으로 마련한 예산으로 해방에 전념하며 북양 해군을 육성했다. 300만 냥은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480만 엔에 해당됐고 당시 일본의 해군 예산이 600만 엔이었으므로 양국의 해군 예산은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청나라와 일본의 근대 해군 육성 경쟁은 더더욱 치열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의 군비 경쟁이 가열됐지만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잘 알지 못했다. 고종은 친정 직후인 1874년 6월, 청나라 예부로부터 외교문서를 받았다. 그 외교문서는 공친왕이 주장해서 보낸 것인데 미국·프랑스와 통상을 맺으라는 권고였다.

이 같은 공친왕의 권고는 대만의 해방대신 심보정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당시 심보정은 프랑스 해군제독인 지켈[prosper Marie Giquel, 중국 이름은 일의격(日意格)]을 고문으로 두고 있었다. 그 지켈이 심보정에게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면 프랑스·미국과 통상을 맺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던 것이다. 심보정은 총리아문에 편지를 보내 조선이 프랑스·미국과 통상을 맺도록 설득하라 요청했고, 이 요청을 받아 공친왕이 예부의 이름으로 고종에게 통상을 권고하는 외교문서를 보냈던 것이다.

고종은 청나라의 외교문서를 접수한 후 당국자들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통상에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불쾌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도제조 이유원은 “총리아문에서는 우리나라에 일이 있어서 알려주고자 한다면 단지 일이 있다고만 해야 할 터인데, 어찌 통상 등의 이야기를 해서 마치 공갈협박으로 유인하듯 한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이유원은 통상을 반대하고 그 대신 무기를 준비하고 국경을 엄히 지키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고종은 이유원의 의견에 적극 찬동했다. 고종과 이유원이 이렇게 청나라의 권고에 불쾌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권고를 빙자한 내정간섭이라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힘들게 지켜낸 전통문화를 총리아문이 파괴하려 획책한다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청나라에 보낸 회답 국서에서 조선은 통상 의사가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고종을 비롯한 당시의 위정자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군비 경쟁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공친왕의 통상 권고가 의미하는 바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은 근대화에 더더욱 뒤처지게 됐으며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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