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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남북 정상회담 성공의 조건] 1994년 YS-김일성 정상회담 실무 책임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인터뷰 

“남북, 비핵화의 방향성과 원칙 도출해야” 

글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북·미, 비핵화 개념의 간극 좁히고 있어 회담 낙관적…북한, 주한미군 주둔 인정하되 리비아식 해법은 용납 않을 것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은 ‘선핵폐기 후보상’ 방식의 비핵화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12일 청와대에서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원로자문단과 오찬간담회를 가졌다. 자문단의 일원으로 청와대를 찾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잠시나마 야릇한 상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비록 막판에 무산되긴 했지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이 추진되던 1994년 여름의 뜨거운 기억이 불쑥 뇌리를 스쳤다는 것이다. 그해 남북은 사상 첫 정상회담을 7월 25일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당시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일하던 그는 말 그대로 밤낮을 잊고 회담 실무 준비에 매달렸다. D데이를 16일 앞둔 7월 9일 정오 북한 방송이 전한 김일성 사망 소식에 그는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 전 장관은 그 시절을 돌이키면서 “나라의 운명이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면서 “한반도에 새 시대를 열어 줄 중대한 기회가 사라졌다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4월 27일로 예정된 제 3차 남북 정상회담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하게 와 닿는다. 정 전 장관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대한 방향성 있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큰 성과”라고 전망했다. 인터뷰는 청와대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원로자문단 오찬간담회가 열린 4월 12일 늦은 오후 진행됐다.

원로자문단 오찬간담회에서 분위기는 어땠나?

“‘원로 자문단’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세부 현안을 놓고 구체적인 언급을 할 자리는 아니었다. 디테일은 앞으로 있을 ‘전문가 자문단’ 회의에서 다뤄질 것이다. 오늘 참석자들은 대부분 총리, 장관을 지냈거나 그에 버금가는 분들로 비핵화 등 핵심 의제에 대한 큰 방향에 대해 주로 의견을 개진했다.”

북한, 미국에 ‘적극적 안전보장(PSA)’ 기대


▎지난해 11월 금성트랙터 공장 현지지도에 나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 사진:조선중앙통신
이 자리에서 거론된 비핵화 관련 논의를 소개한다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는 반드시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이에 상응해 미국도 비핵화의 반대급부를 확실히 제시해야 한다.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 이 두 가지가 쌍방에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이 주종을 이뤘다. 문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설득해 비핵화에 나서게 함과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해 북한 체제 보장, 북·미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등 비핵화의 반대급부를 북에 제공토록 해야 한다.”

미국이 더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신호로도 들린다.

“그동안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소극적 안전보장(NSA, 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해주겠다고 했었다. 이는 북한이 미국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북한을 먼저 치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약속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자신들이 미국을 공격할 리는 없으므로 애당초 우리를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달라는 입장이다. 이른바 ‘적극적 안전보장(PSA, Positive security assurance)’을 통해 북한이 가진 안보에 대한 불안감을 씻어 달라는 주문이다.”

비핵화라는 개념에 미국과 북한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나?

“비핵화 개념에 대해 미국과 북한은 생각이 달랐다. 한국은 어쩔 수 없이 동맹국인 미국 입장에 서 왔다. 미국의 비핵화는 ‘북한의 비핵화’인데 반해 북한은 선대의 유훈이라며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말한다. 둘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다. 한반도 비핵화 개념에는 미국의 핵우산 제거가 포함돼 있다. 그런데 트럼트 대통령이 최근 북·미 간 사전접촉 사실을 확인하면서 ‘다음 달 또는 6월초에 그들(북한)과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시사했다. 이렇게 말한 건 북·미 정상회담 준비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미국도 제법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2일(현지시각)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아주 멋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주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지금 나와 김정은 사이의 회담에 대한 준비가 이뤄지고 있다”며 “매우 존중하는 마음으로 (협상장에) 들어갈 것”이라고도 예고했다. 정 전 장관은 트럼트의 이 발언을 지목,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면 접점을 만들 수 있다는 표현”이라고 진단했다. 정 전 장관은 “트럼프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비핵화에 대한 개념 차이가 줄었다는 것”이라며 “굉장히 컸던 북·미 간 비핵화 개념 격차의 줄어든다고 판단했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원로자문단 오찬 간담회에서 나온 문 대통령 얘기 중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

“문 대통령의 얘기도 비슷했다. 북·미 사전접촉에서 북한이(비핵화 관련) 종래 입장과 다른 얘기를 미국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 전망을 낙관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입장 변화를 말하나?

“북한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요구하면 미국은 수긍하지 않을 게 자명하다. 결국 주한미군 철수 요구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연례적 수준으로 하는 한미연합훈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왔지 않았나. 이는 굉장히 중요한 얘기다. 나만의 확대 해석일지 모르지만 주한미군이 북한에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는 것 아닐까? 김일성 주석 생전인 1992년 김용순 노동당 국제비서는 미국에서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부 차관을 만나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수교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도 김대중 대통령에게 냉전 이후 주한미군이 동북아 안보 질서를 유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주한미군을 두는 조건에서도 북·미 수교가 가능하다는 게 김일성·김정일의 생각이었다. 김정은 위원장도 북·미, 북·일 간 적대 관계를 해소한 뒤 외자 유치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할 것이다.”

트럼프 ‘리비아식 해법 안 된다’고 생각할 듯


▎문재인 대통령이 4월 12일 남북정상회담 원로자문단과의 오찬에 앞서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과 인사하고 있다.
주한미군 문제는 그렇다 쳐도 북한 비핵화 로드맵에서 간극은 여전하지 않나?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북핵 완전 폐기를 6개월에서 1년 내에 완료하도록 요구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그건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이라는 존 볼턴 신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리비아식 해법’을 얘기하는 건데….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등 한국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미 정상회담을 수용하겠다고 결단했다. 트럼프 참모들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에 대한 확실한 메시지에도 신중한 접근을 주문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즉석에서 만나겠다고 잘라 말했다.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리비아식 해법은 안 된다’는 게 입력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

“선(先) 핵폐기를 결심한 리비아 지도자 카다피가 그 뒤로 행복해졌다면 리비아식 해법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리비아는 2003년 12월 핵 포기를 선언한 뒤, 경제 지원을 받고 2006년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까지는 갔다. 이후 리비아는 내전에 휩싸이고 카다피는 2011년 10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원을 받은 리비아 반군에 붙잡혀 처형됐다. 당시 미국은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나토의 모자를 쓰고 리비아에 들어갔었다. 북한은 그때 이미 리비아식 해법을 거부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리비아가 핵을 포기한 과정은 미국이 안전 담보와 관계개선이란 사탕발림으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킨 뒤 군사적으로 덮치는 것”이라고 비난 논평을 냈다. 북한은 한 번 꺼낸 얘기는 절대 바꾸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의 고위 관료들은 ‘북한에 보상을 제공하기 전에 비핵화 결과를 먼저 얻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존 볼턴 보좌관은 북한 외무성이 논평을 내던 시점인 2011년 즈음엔 정부를 떠난 상태였다. 오랜 기간 현직에서 떨어져 있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그 얘기(리비아식 해법)를 하면 북한은 필히 카다피의 비참한 죽음과 이라크 후세인 전 대통령 축출 사례로 맞설 것이다.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은 막상 그런 무기가 없으니까 다른 핑계를 대고 인민재판식으로 후세인을 죽음으로 몰았다. 북한은 미국과 대량살상무기 폐기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체제 안전보장을 받고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핵화를 위한 ‘행동 대 행동’ 원칙을 고수할 것으로 본다.”

결국 ‘리비아식 해법’이 등장하면 비핵화 협상은 겉돈다는 말인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 볼턴 보좌관이 말한 리비아식 해법을 언급하면 회담은 한 발짝도 못 나갈 것 같다. 강경론자이자 압박을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6월초 회담 시점을 언급했다. 이는 선 핵폐기 후 보상 방식으로는 얘기가 안 된다는 감(感)을 잡았기 때문 아닐까.”

비핵화 프로세스를 완결짓는 기간은 어느 정도 소요될까?

“트럼프 대통령이 시작했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끝을 맺는 게 좋다. 임기가 끝나는 2020년 말까지 2년 반 이상이 남았다. 며칠 전 방한한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도 기술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3년 안에 매듭지을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 김 위원장의 의지 문제다. 3년 내에 확실히 종결짓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게 걸맞은 체제 안전보장이라는 비핵화의 반대급부를 줘야 가능하다. 그렇게 시작해 놓으면 트럼프 대통령 재선에 대한 기대치도 올라간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1년 안에 끝내자고 나온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김정은 위원장을 화끈하게 하려면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화끈하게 나와야 한다.”

북한, 미·중 경쟁구도에서 등거리 외교할 것


4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어떤 성과를 내면 성공적이라고 하겠나?

“비핵화에 대한 방향성 있는 원칙에만 합의해도 큰 성과라 하겠다. 그동안 북한은 남북 간에는 비핵화 문제를 얘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핵화 문제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가진 여러가지 중압감과 부담을 북한도 고려해야 한다. 또 남북 관계를 잘 설정해야 북·미 관계도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문제가 의제로 다뤄질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비핵화에 대한 방향성 있는 원칙에 합의해 그게 북·미 대화의 출발점이 되게 한다면 회담은 성공작이다.”

문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전 트럼트 대통령을 만날 예정이다. 북·미 두 정상을 사전에 만나 보는 유일한 지도자인 셈인데.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래 남북 관계는 북·미 간 핵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걸음도 못 내딛는 운명에 처해 있다. 문재인 정부는 ‘트럼프의 푸들’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지만 끝내 트럼트 대통령을 자기편으로 만들지 않았나. 트럼프 대통령을 어떻게 다루면 김 위원장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가를 정상회담에서 알려줄 수도 있겠다. 또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마찬가지로 김 위원장을 대하는 요령을 설명할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본인이 북·미 정상회담을 수락한 이상 좋은 결실을 맺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첫 단추를 꿰도록 하는 가교 역할을 문 대통령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도 친미(親美) 국가가 될 수 있나?

“글쎄 그것까지…. 친미라기 보다는 반미(反美)를 해서 득이 될게 없으므로 반미는 안 할 것이다. 지금 북한이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선 건 외자(外資)를 유치해 경제를 살리려는 필요도 있다. 김 위원장이 집권 후 접경지역과 내륙, 해안에 만든 경제특구만도 22곳에 이른다. 배가 고파 두 손 들고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내부적으로 동력이 상당히 고갈된 건 맞다. 국제사회 제재의 여파로 외자도 막혔다. 북·미 관계가 풀리면 돈이 들어오고 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반미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이다. 그렇다고 자기 정체성을 가진 나라가 친미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은 중·소 분쟁 시기에 등거리 외교로 재미를 봤다. 미·중 경쟁 구도에서도 북한의 등거리 외교는 유효할 것이다.”

중국은 북·미 관계 개선을 속으로도 반길까?

“중국 내 보수적 인사들 중에는 북·미 관계 개선으로 중국이 불편해진다는 이유로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펴는 이도 있다. 북한이 중국과 미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다. 하지만 그런 북한이 중국에 주는 불이익과 불편함도 함께 따져 보면 계산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고 그랜드 국가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에 주력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 글 박성현 월간중앙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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