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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 평양 ‘봄이 온다’ 공연 김정은 깜짝 관람… 북한한류 어느 정도였길래! 

‘장마당 세대’가 ‘남조선풍’ 주도 ‘레드벨벳도 놀랍지 않다’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한류의 원조는 1989년 평양축전 참가한 임수경…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단속반원들 사이에서도 유명… ‘2인자’ 최용해 아들도 단속 걸려 곤욕 치르기도

▎20년 전 핑클, 베이비복스가 북한 공연을 갔을 때와 달리 최근 북한의 젊은층은 남한의 걸그룹 문화에도 상당히 익숙하다고 한다. 4월 1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공연 ‘봄이 온다’를 관람한 뒤 ‘레드벨벳’ 멤버들과 대화하고 있다. /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지난 4월 1일 평양 대동강지구 동평양대극장에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 예술단의 공연 ‘봄이 온다’가 펼쳐졌다. 이미 세 차례나 북한 공연의 경험이 있는 가수 최진희씨가 무대에 올랐다. 최씨는 이날 자신의 히트곡인 ‘사랑의 미로’와 남매 가수 현이와 덕이의 ‘뒤늦은 후회’를 열창했다. 객석을 가득 채운 북한 관객들은 그의 무대에 큰 박수로 화답했다.

이번 평양 공연에서 이 두 곡이 선곡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사랑의 미로’는 이미 북한 지도층을 비롯한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인기 있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고영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김일성은 주로 러시아 노래를 불렀고, 김정일은 북한 노래 ‘내 나라가 좋아’를, 대한민국 노래 ‘사랑의 미로’를 불렀다”고 말했다.

‘사랑의 미로’가 처음 북한에 전파될 당시에는 남한 가수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 중국 옌볜의 노래로 알려졌다고 한다. 북한 대중에게 ‘사랑의 미로’가 알려지자 나중에 이 노래의 가사를 바꿔 김정일 찬양가로 부르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랑의 미로’는 김정일이 특히 좋아했고 이후 대중에게 전파되면서 이 노래를 부른 최씨도 덩달아 북한에서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최씨는 1992년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들어가 처음 공연을 했다. 이후 2002년에는 인천공항에서 직항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2005년에는 금강산에서 공연을 했다. 그때마다 북측의 환대는 대단했다고 한다. 특히 북한에서 인기 있는 곡을 부른 최씨에게는 별도로 벤츠가 제공됐고, 나머지 공연단원은 버스를 이용해 이동했다는 후문이다. 최씨가 이번 예술단 공연에서 부른 ‘뒤늦은 후회’ 역시 사전 섭외 당시 북측의 요청에 의해 선곡된 것으로 알려진다. 최씨의 얘기다.

“두바이 공연에서 귀국한 후 이틀밖에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방북 준비를 하느라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북측이 선곡한) ‘뒤늦은 후회’를 연습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촉박했거든요. 나는 그 노래가 뭔지도 모르고 왜 내 노래도 아닌 걸 불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이 공연 후 오셔서 저랑 악수를 하는데 ‘그 노래를 불러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해 그제서야 이해가 됐죠. 이 노래를 김 위원장이 선곡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어 알게 됐고요.”

김 위원장이 선곡한 것으로 알려진 ‘뒤늦은 후회’는 아버지 김정일의 애창곡으로 알려졌다. 2013년 탈북한 김영성(52·가명)씨는 “이번 공연에서 김정일 애창곡을 두 곡이나 부른 최진희씨는 앞으로도 북한 지도층은 물론이고 평양 시민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이어 “북한에 남한 문화가 전파된 것은 과거에는 주로 중국을 통해서였다”면서 “하지만 남측 공연단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 인민들을 파고든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음악과 영화 등 문화예술 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김정일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이미자, 김연자, 은방울자매를 꼽았다. “남자 가수는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물었을 때 김 위원장은 “나훈아와 조용필을 좋아한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김 위원장이 좋아하는 가수로 꼽은 김연자의 북한 공연은 2001년 성사됐다. 김씨는 그해 4월 평양에서 공연을 하고, 야간열차를 타고 함흥으로 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이 그곳에서 현지 지도를 하고 있었다. 함흥에서 공연이 끝나자 김 위원장은 “패티김과 이미자, (일본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장점이 모두 들어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김연자 공연에서 평양 시민을 울린 노래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당시 [노동신문]은 2001년 4월 13일자에 장문의 공연평을 실어 “창법에 민족 정서가 짙고, 기교와 형식이 매우 세련되었다”고 극찬했다. 한 탈북자는 “김정일은 내부적으로 남측 문화를 강하게 통제했지만 그 누구보다 한류를 확산하는 데 일조한 사람이 다름 아닌 김정일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정도로 남측 가요와 영화를 좋아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정일이 좋아하는 남한 가수로 꼽은 조용필은 북한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가수다. 이번 예술단 무대에서 마지막 순서를 장식한 조용필씨 역시 북한에서 많이 알려져 있다. 2005년 조용필의 평양공연 당시 ‘돌아와요 부산항에’ ‘봉선화’ ‘황성 옛터’를 듣고 관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한다. 이번 남측 예술단 공연에서 조용필씨가 부른 ‘그 겨울의 찻집’은 김정일의 애창곡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연 피날레를 장식한 조용필의 대표곡 ‘친구여’는 13년 전인 2005년 조 씨가 평양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할 때도 불렀던 노래다. ‘친구여’도 북한에서 제법 알려진 노래라는 것이 탈북자들의 얘기다.

윤도현·백지영 젊은층에 큰 인기


▎가수 최진희씨가 평양 공연에서 부른 ‘뒤늦은 후회’는 김정은 위원장의 선곡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 노래는 김정일의 애창곡이었다고 한다. 4월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공연에서 최진희씨가 열창하고 있다. /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이 밖에도 이번 예술단에서 부른 노래 중 북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노래는 또 있다.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록 버전으로 편곡해 부른 윤도현은 “(북한 사람들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좋아한다고 해서 선곡했다. 재미있으셨어요?”라고 인사를 전했다. 윤씨가 이 노래를 부르자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 큰 호응을 보냈다. 윤씨는 2002년 6·15 정상회담 이후인 그해 9월 이번 예술단 공연이 열린 동평양대극장 무대에서 공연한 경험이 있다. 탈북자 김영성씨는 “윤도현은 북한의 대학생 등 젊은층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가 부른 곡의 음악 파일이 중국을 통해 CD나 USB에 담겨 유통된다”고 말했다. 김씨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2002년 윤도현 공연 후 평양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의 노래 ‘너를 보내고’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평양 아가씨들이 윤도현에게 시집가겠다는 농반진반의 얘기가 흘러 다닐 정도로 윤도현이 인기였다. 당시 20~30대 젊은 북한인들이 윤씨의 노래를 좋아했다. 15년이 흘러 이번 남측 예술단 공연에도 윤씨가 참여했는데 이는 남한 당국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40대가 된 북한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있는 윤씨를 북측에서 꼭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씨는 처음 북한 공연에 참여한 가수 백지영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북한의 기성세대는 남측의 트로트풍의 노래를, 젊은이들은 애절한 발라드를 좋아한다. 이번 예술단 공연 무대에 선 백지영씨의 ‘총 맞은 것처럼’은 남측 노래 중 평양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다. 이번 공연을 관람한 김정은 위원장이 백씨의 무대를 보고 ‘백지영이 남측에서 어느 정도 위치의 가수인가’라고 관심을 표했다고 하는데 젊은 나이의 김 위원장 역시 평양의 젊은 층 사이에서 이 노래가 상당한 인기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또 다른 탈북자인 이지선(40·가명)씨 역시 백씨의 ‘총 맞은 것처럼’에 대해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2010년쯤 보위부가 ‘자본주의 날라리풍’(한류)를 집중 단속한 적이 있었다. 당시 평양 대학생들의 방이나 가방을 뒤지면 한국 영화, 드라마, 노래를 담은 CD나 USB가 나왔는데 그중 많이 적발된 것 중 하나가 백지영씨 노래였다고 한다. 백씨 노래가 하도 많이 단속반에게 걸리다 보니 단속반원들 사이에서도 백씨의 노래가 유명했었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이 잔잔하고 애절한 풍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최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탈북민 5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하 의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7년까지 탈북한 이들이 꼽는 북한에서 인기 있는 노래 1위는 안재욱의 [친구]였다.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뒤를 이었다.

이번 예술단 공연 중 가장 관심이 쏠렸던 가수는 걸그룹 레드벨벳이었다. 레드벨벳의 파격적 무대가 김 위원장을 비롯한 평양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큰 관심사였다. 그리고 레드벨벳의 “빠, 빠, 빨간맛”은 결국 두 차례의 평양 공연을 통해 울려 퍼졌다. 최진희나 조용필의 무대에 큰 호응을 보낸 북한 관객들은 레드벨벳이 공연할 때는 조용히 감상하는 분위기였다. 종종 미소짓는 표정의 관객도 있었지만 대체로 엄숙한 분위기로 공연이 진행됐다. 일각에서는 북한 사람들이 남측의 최신 걸그룹 노래를 생소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노래가 북한 사람들에게 파격적이어서라기보다는 북한 대중이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트로트나 발라드 풍의 곡과 달라서였을 뿐 걸그룹 자체의 파격 때문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한류 주소비층은 고위층·부유층 자녀들


▎과거 김정일 위원장은 남한의 남자 가수 중 조용필과 나훈아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4월 3일 통일전선부 초대소인 미산각에서 열린 남측 예술단 환송만찬에서 ‘그 겨울의 찻집’을 함께 부르는 조용필과 북한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 / 사진: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이와 관련 탈북자 이지선씨는 “레드벨벳의 무대가 북한 사람들의 큰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 했지만 이런 류의 노래에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남측의 걸그룹 베이비복스나 핑클이 방북해 공연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고 말했다. 이씨는 “남한에서도 걸그룹에 대한 세대별 호불호가 있듯이 북한에서도 남측 노래 중 좋아하는 유형이 있다”며 “과거처럼 이들의 공연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씨의 말처럼 과거 걸그룹의 북한 공연 당시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고, 북한 사람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1999년 젝스키스와 핑클이 아이돌 가수로는 처음으로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열린 평화 친선음악회 무대에 올랐다. 또 2003년 류경 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 통일음악회에는 신화와 베이비복스가 참여한 바 있다. 이때만 해도 복장과 율동 하나까지도 북한 당국의 ‘사전검열’을 받았다. 핑클은 ‘손가락 총’ 안무를 다른 동작으로 바꿔야 했다. 치마 길이에도 제한이 있었고, 튜브 톱과 끈 소매는 착용하지 못했다. 반소매 형태의 의상 정도가 허용됐다. 베이비복스는 공연 전 합동리허설에서는 배꼽티를 입고 무대에 올랐으나 리허설 후 북한 관계자의 요청으로 배꼽을 가린 다른 의상으로 갈아입고 본무대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북한 내부에서도 과거와 다른 풍의 공연 문화가 상당히 퍼져 있다. 대북 정보를 오래 다뤄 온 전직 국정원 관계자 A씨의 얘기다.

“모란봉악단은 2012년 김정은 체제가 형성되며 결성됐다.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여성 밴드로 이른바 ‘북한 걸그룹’으로 불린다. 2012년 7월 창단 무대에서 미국 영화인 ‘록키’의 주제곡과 미국 애니메이션 삽입곡 등을 연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북한에서는 음악 대학원 졸업생들이 팀을 만들어 일종의 걸그룹 형태로 공연을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과 당 간부들이 주최한 행사 등에 이들은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안무를 곁들인 악기 연주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변화도 일종의 ‘남조선풍’이 퍼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일부 탈북자의 전언에 따르면 수년 전부터 한국 남자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북한의 젊은이들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눈썹 타투, 귀걸이를 하는 젊은이도 있다는 것이 최근 탈북한 이들의 증언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진 않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이 남성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귀걸이 문화에 이전보다 관대해졌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북한판 걸그룹으로 불리는 모란봉악단이 2014년 3월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 A씨의 말처럼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남측의 가요와 드라마는 북한 사람들에게 보고 듣는 수준에서 퍼져나갔다. 그러다 점차 말투와 옷차림새, 미용 등 일상생활 문화로까지 조금씩 스며들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소위 한류의 유통엔 ‘장마당’의 역할이 컸다. 한류 문화를 접하는 수단인 DVD 플레이어나 녹화기 등은 장마당에서 판매나 구입이 가능하다. 장마당에서 북한 CD는 진열대에 내놓고 팔지만 남한 대중문화가 담긴 CD는 뒤에서 몰래 판매된다. 남한 영상물은 혼자서 몰래 보기도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은밀하게 돌려 보며 확산되기도 한다. 당국의 단속과 통제가 있지만 정치적 목적이 아닌 순전히 상업적 목적으로 유입되고 소비되다 보니 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북한 내 한류는 평양과 같은 대도시의 고위층이나 부유층 자녀 중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 주소비 층이라고 한다. 일부 젊은이는 남한의 아이돌 그룹이 부른 랩이나 힙합, 록 등을 들으면서 옷차림이나 몸짓을 흉내 내기도 한다. 북한 내 한류의 유입이 단순히 남한의 음악을 듣고, 드라마를 돌려 보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남조선풍 따라 하기’가 유행하기도 한다.

남조선풍 따라 하기의 원조는 김일성이 ‘통일의 꽃’으로 치켜세운 임수경이었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당시 임씨의 옷차림새부터 말 한마디, 몸짓 등 모든 것이 북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특히 젊은층에는 모방의 대상이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80년대 평양 대학생들 ‘임수경 따라 하기’ 열풍


▎북한 내 한류의 원조는 1992년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여한 임수경씨였다. 당시 평양의 대학생들은 임씨의 옷차림, 말투 등에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2009년 탈북한 박성영(55·가명)씨는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임수경의 평양 방문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남한의 아이돌처럼 당시 평양을 방문한 임수경씨는 스타나 다름없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임수경 신드롬’을 일으켰을 정도다. 임씨가 입고 온 티셔츠와 바지, 헤어 스타일 등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여자들뿐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도 임씨의 스타일은 화제였다. 특히 임씨가 보여준 자유분방한 언행은 북한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임씨는 가는 곳마다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사전준비도 없이 즉석에서 답변을 하고 손을 흔들며 열변을 통하는 모습은 북한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임씨의 거침없는 행보는 전체주의적 문화와 틀 속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들이었다. 일부 젊은이는 남한에서 온 20대 여대생의 모습에 반해 임씨의 서울 말투를 흉내 내기도 했을 정도다. 당국에서 대학생들에게 웅변과 토론 시간을 늘리라고 지시가 내려왔는데 이것도 임씨의 영향 때문이었다.”

30년 전 한류의 원조였던 임씨 따라 하기는 다분히 정치적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순수 한국의 대중문화가 북한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부터다.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가 수립된 후 한국의 대중문화가 중국으로 유입됐고, 그것이 북한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의 친지를 방문하거나 밀입국하면서 남한의 대중문화에 눈을 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 평양, 신의주, 청진 등 일부 대도시와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서만 유행하던 ‘남조선 바람’이 현재는 북한 전역으로 확산된 상태다.

북한 내 한류는 CD나 USB를 통해 퍼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유행한 드라마가 북한에 도착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르면 일주일, 늦어도 한 달 내에 한국의 최신 가요나 드라마가 북한에서도 유통된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남한 영상매체의 북한 유통 경로와 주민들의 의식 변화를 다룬 [한류, 북한을 흔들다](2011, 강동완·박정란 공저)에도 잘 나와 있다. 이 책은 2000년 이후 탈북한 33명을 심층면접한 결과를 바탕으로 했다. 저자인 강동완 동아대 교수에 따르면 심층면접자는 33명이지만 실제 연구를 위해 접촉한 탈북자들은 100명이 넘는다. 또 이들은 연령별, 지역별로 고르게 분포돼 있어 심층면접의 결과가 상당한 신빙성을 담보하고 있다. 강동완 교수는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 노래는 일주일 안에 북한에서도 인기를 끈다”며 “중국의 저가 태블릿PC에 담겨 넘어간다”고 말했다. 강 교수의 얘기다.

“북한에서 레드벨벳과 같은 아이돌 공연이 파격이지는 않을 거다. 그보다 더 파격적인 공연이 많다. 북한도 한류를 받아들이는 전략을 바꿨다. 자본주의 날라리풍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만 했는데, 요즘은 아니다. 차라리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을 만들라는 것이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북한 문화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우리는 그 흐름에 너무 무심하다”며 “지금은 핑클·베이비복스가 공연했을 때와 다르다. 2000년대 이후 북한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빨리, 많이 받아들였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한류와 관련해 여전히 북한이 불편해하는 부분도 있다고 말한다. 그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섹슈얼리티가 강조된 음악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싸이의 평양 공연이 무산된 것도 북한이 불편해 하는 콘셉트였을 수 있다. 싸이의 평양 공연이 어려운 건 그의 노래가 전반적으로 섹슈얼리티를 소비하는 분위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레드벨벳보다는 조금 더 귀여움이 강조된 아이돌이 북한 관객에게는 다가가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의 얘기처럼 지금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측의 다양한 대중문화가 북한 전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런 한류 따라잡기는 ‘장마당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북한 젊은이들은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남측의 패션을 흉내 낸다. 장마당에서 구할 수 없는 남조선풍 옷들을 직접 개인이 만들어 팔기도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내부 정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인 데일리 NK에 따르면 수년 전부터 북한에서는 남한의 패션 도안이나 디자인을 볼 수 있는 책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고 한다. 남조선풍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옷을 가공하는 재봉사들이 남한 잡지 등을 구해 본 뒤 비슷한 스타일로 옷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또 이 매체에 따르면 남한 아이돌 스타들의 춤을 배우는 젊은이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이 같은 ‘남조선 날라리풍’ 문화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CD나 DVD 등 일명 남한 ‘알판’의 유통을 지속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시·도에 중앙당 검열단을 파견해 집중 검열하는 작업을 벌이기도 한다. 단속반과 젊은이들 간의 숨바꼭질이 심심찮게 목격된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전해진다. 탈북자 이지선씨는 “라디오, TV는 물론 소형 녹음기, 테이프, CD, DVD까지 신고하도록 돼 있으나 집집마다 숨겨놓고 몰래 보고 듣기 때문에 단속이 쉽지 않다”며 “적발돼 처벌받는 경우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단속반원들에게 뇌물을 써 압수당한 전자제품을 되찾는 일도 흔해졌다”고 했다.

이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부 고위 간부들 자녀, 출신 성분이 좋은 평양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한류가 깊게 파고든 상태라 단속을 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강동완·박정란 공저 [한류, 북한을 흔들다]에도 검열과 단속 부분이 나온다. 이 책에 따르면 단속에 적발될 경우 검열원이 한 명이면 뇌물을 주고 풀려나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돈이 있으면 풀려날 수 있고, 돈이 없으면 그대로 처벌받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검열이 자주 있지만 대부분 인민반장이 미리 알려줘 단속에 대처하도록 한다. 따라서 한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당국이 주민을 통제하긴 하지만 그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 심층면접에 응한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단속 나온 ‘그루빠’ 뇌물로 해결하기도


▎장마당을 통해 남한의 영화와 드라마, 대중가요가 CD, DVD, USB에 담겨 은밀히 유통된다. 북한 주재 러시아대사관에 따르면 평양 시내 영상물 판매소에서는 미국의 애니메이션 CD도 팔린다고 한다. / 사진:연합뉴스
강동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일반 주민들보다 상대적으로 남한 정보나 영상매체 입수가 용이한 간부들이 남한의 드라마나 영화, 뮤직비디오 등을 더 많이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 영상매체의 시청이나 유통에 관여한 이들은 교양원 양성소 소장, 보위부 소장 및 지도원, 통신과장, 반탐과장, 외사지도원, 인민보안성 간부, 중앙은행 지배인 등이다. 한 면접 참여자는 “이모네가 잘 살고 이모부가 힘 있는 사람이었는데, 간부들이 남한 영화를 보러 집에 자주 왔다. 간부 집에는 숙박 검열이 없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검열하는 이들을 ‘그루빠’라고 부른다고 한다. 북한 형법에 따르면 단속에 걸리면 그 정도에 따라 2년 또는 5년 이하의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앞서 탈북자들의 증언처럼 워낙 한류를 유포하고 소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 뇌물로 해결하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또 오히려 밀수꾼들에게 압수한 한류 콘텐트를 간부들이 다시 암암리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강 교수의 책에 소개된 한 탈북자의 증언이다.

“남한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현행범으로 잡혔다. 그루빠에게 사정을 해 단독으로 처리해 달라고 했다. 3만원을 주고 사건을 무마했다. 그런데 앞집도 같이 단속됐는데 (6·25) 전사자 가족이라 봐주었다. 그 집 아버지가 전사자였는데 그것을 명분으로 압수된 텔레비전도 되찾아왔다.”

물론 단속에 걸려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다. 장성택 숙청 이후 현재 북한의 ‘2인자’로 불리는 최용해 노동당 중앙위 부위원장의 경우가 그렇다. 빨치산 출신으로 1세대 혁명그룹의 한 사람인 리을설 인민군 원수가 2015년 11월 사망했을 당시 장의위원 명단에서 최용해가 제외된 적이 있다. 당시 이를 두고 최용해 신변 이상설이 돌았다. 이와 관련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남한 드라마를 본 아들 때문에 최용해가 한동안 사라진 것”이라고 했다. 정 실장의 얘기다.

“북한 내부 사정에 밝은 대북 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최용해의 첫째 아들이 남한 드라마를 보다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됐다고 한다. 최용해가 이를 김정은에게 보고하면서 ‘자식 교양을 잘못했다’며 함께 혁명화 교육을 자청했다는 것이다. 최용해는 평양의 협동농장에서 아들과 함께 혁명화 교육을 받다 복귀했다. 최용해는 아들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뛰어난 처신 능력을 보여준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 북한이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가면 북한 내 한류 문화의 확산은 더 이상 검열과 단속으로 막을 수 없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견하고 있다. 대북 정보를 담당한 전직 국정원 직원 A씨는 “김정은 위원장은 남한과의 문화·예술 교류에 상당히 적극적이며 외국 생활을 한 탓에 아버지 김정일에 비해 (문화 교류에) 더 관대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며 “비핵화 합의가 이뤄지고 남한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 개선과 함께 투자가 활성화되면 과거 3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외래 문화가 북한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A씨는 “개혁·개방 이후 북한 당국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래 문화를 경계하겠지만 자본주의 문화의 확산을 공식적으로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큰 고민에 빠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 고성표 월간중앙 기자 muzes@joongang.co.kr

201805호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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