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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3·1운동 세계에 알린 이방인 앨버트 테일러 

갓 태어난 아들 침대에 독립선언서를 감췄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AP통신원으로 활약, 그의 보도 인용한 NYT 기사로 앨버트의 조선 참상보도 검증돼… 조력자 김주사 본명도 확인, 폐가로 방치된 테일러家 저택 ‘딜쿠샤’는 새해 복원 후 하우스뮤지엄으로 활용 예정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전시 유물은 딜쿠샤 복원공사가 완료되면 옮겨진다. 딜쿠샤는 하우스뮤지엄으로 2019년에 개방될 계획이다.
# 서울 한복판인 종로라고 온통 번화하진 않다. 사직터널 부근 행촌동에 오래전부터 폐가 같은 저택이 있었다. 은행나무 옆, 붉은 벽돌의 서양식 가옥이었다. 아무도 이 집의 정체를 몰랐다. 오랫동안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2000년대 중반, 서울시는 언론 사적(史蹟) 벨트를 발굴 중이었다. 구한말, 영국 출신 언론인으로서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조선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한 어니스트 베델의 집을 찾는 것이 프로젝트의 과제였다. 서울시는 처음에 이 붉은 벽돌집을 ‘베델하우스’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집의 초석에 찍힌 ‘DILKUSHA 1923’을 발견한 순간,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베델과 딜쿠샤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서울시도 두 손을 들고 포기했다. 그렇게 그 저택은 다시 방치될 뻔했다. 브루스 테일러라는 미국인이 나타나기 전까지.

# 김익상 서일대 방송영화학과 교수는 2005년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발신지는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브루스 테일러라는 미국 노인이 젊었을 때 가족들과 일제치하 서울에 거주했다. 당시 살았던 집을 찾고 싶어 한다’는 요지였다. 브루스와 그의 딸 제니퍼 테일러는 선대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스토리의 골격이 될 책도 있었다. 브루스의 어머니 메리 테일러가 쓴 ‘호박목걸이’가 그것이다. 그래서 영사관을 통해 메일 주소를 받아 한국영화제작자협회 회원 전원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이었다. 약 50명의 회원 중 메일에 반응한 이는 단 한 사람, 김 교수였다. 그는 테일러 가문의 집을 찾아 나섰다. 단서는 거의 없었다. 당시 주소도 일본식 표기인데다 부정확했다. ‘임진왜란 때 장군이 심은 은행나무 옆의 집’과 ‘북경(베이징) 가는 길목’이라는 브루스의 희미한 기억만이 힌트였다. 김 교수는 “이순신 장군을 지칭하는 줄 알고 충무로와 필동을 찾아다녔다, 장충동 외국인가옥까지 뒤져봤지만 다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의주로’가 떠올랐다. 북경 가는 길인 함경남도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로’는 의미가 연결됐다. 의주로 일대에 행촌동이라는 지명을 알아냈다. 여기서 ‘행(杏)’자는 은행나무를 뜻했다. 이곳을 탐사하다 김 교수는 ‘딜쿠샤’를 만났다.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브루스에게 답장이 왔다. “이곳이 맞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260㎞ 떨어진 소도시 멘도시노에 살던 브루스와 제니퍼는 2006년 서울을 찾았다. 브루스는 1919년 2월 28일 태어났다. 3·1운동 하루 전날이었다. 87세에 한국을 찾았던 브루스는 2015년 세상을 떠났다. 딸 제니퍼가 2016년 가문의 자료 1026건을 서울시에 영구 기증하기로 했다. 3년간 4차례에 걸쳐 물품이 한국으로 건너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이 3·1운동 100주년 기획으로 2018년 11월 23일부터 2019년 3월 10일까지 기증유물특별전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전시회를 열게 된 사연이다.

브루스의 아버지 앨버트 테일러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시작될 수 없었다. 앨버트는 1875년 미국 네바다주에서 출생했다. 스무 살 되던 해 조선에 입국했다. 그의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는 금광 기술자였다. 조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아들들을 전부 불렀다. 앨버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굴삭기 매입 차 일본에 갔다. 요코하마 그랜드호텔에서 영국인 메리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1917년 인도에서 결혼했다. 긴 신혼여행을 했고, 그해 9월 서울에 정착했다.

조선 주재 AP통신원 된 광산업자


▎앨버트 테일러의 1910년대 사진. 테일러는 1917년, 42세 나이에 28세의 메리와 결혼했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에 체류할 때, 앨버트는 AP통신원이 됐다. 자원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나라에 기자를 파견할 수 없던 AP가 주재 외국인에게 그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어쩌다 맡은 조선 통신원이었지만 그의 눈앞에 고종의 국장, 3·1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 격동의 현실이 펼쳐졌다. 부조리한 세상과 식민지 조선의 아픔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앨버트가 제국주의에 얼마나 문제의식을 가졌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당시 조선 민족의 핍박에 관해, 있는 그대로를 전한 거의 유일한 외국 언론인이었던 점은 사실이다.

앨버트는 1941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추방당했다. 이후 군수업계에서 일했고,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정착했다. 한국에 돌아가려고 계속 시도했다. 그러다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앨버트의 죽음 이후, 이야기는 묻힐 뻔했다. 그러나 부인 메리에 의해 [호박목걸이]란 조선체류 회고담으로 복원됐다. 메리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앨버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1948년 입국했다. 앨버트의 화장된 유골은 양화진 선교사 무덤에 묻혔다. 이후 메리는 미국 멘도시노로 돌아갔다. 조선에서 겪고 느낀 것에 관한 강연 활동을 했다. 1982년 사망했다.

죽기 전, 메리는 [호박목걸이] 출판을 희망했다. 그러나 살아서 이뤄지지 못했다. 아들 브루스가 유고를 정리해서 1992년 책이 나왔다. 한국어판은 2014년 번역됐다. 김동준 서울역사박물관 전시과 학예연구사는 “메리의 아버지가 의사였다. 집에 선물이 많이 들어왔다. 메리는 아버지의 호박목걸이 선물을 굉장히 아꼈다. 그런데 목걸이 줄이 끊어졌다. 앨버트가 결혼 예물로 새 호박 목걸이를 선물해줬다. 책 [호박목걸이] 목차도 구슬 하나, 구슬 둘… 순서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전시회에 실제 메리가 착용했던 호박목걸이가 있다. 메리의 손녀인 제니퍼가 서울시의 딜쿠샤 복원 소식을 듣고, “호박목걸이와 유품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 기증한 결과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알리다


▎3·1운동 전날, 세브란스 병원에서 복사된 독립선언서 원본. 앨버트는 이를 한 부 입수해 세계에 3·1운동을 알렸다.
앨버트와 메리 부부는 1919년 2월 28일 아들 브루스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산했다. 그 방은 앨버트의 아버지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난 방이기도 했다. 이때 앨버트는 운명적으로 3·1운동과 조우한다. 병원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간호사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다녔다.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인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AP통신원을 겸했던 앨버트는 이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립선언서 1부를 손에 넣었다. 관건은 일본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외부로 유출시키는 것이었다. 자칫 적발됐다간 다음날 예정된 한민족의 거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앨버트는 갓 태어난 아들의 침대 밑에 문서를 숨겼다. 병원을 나설 때 종이를 접어 구두 굽에 숨겼다. 그 뒤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겼다. 당시 조선의 정보유통 경로는 일본을 거쳐야 미국에 전해질 수 있었다. 윌리엄은 일본으로 건너가 형이 쓴 기사에 독립선언서를 첨부해 송고했다. 그렇게 3·1운동은 세상에 알려졌다.

그 전까지 앨버트의 행적과 [호박목걸이]는 온전히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정말 AP통신원이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자료를 통해 상당부분 입증이 이뤄지고 있다. 3·1운동에 관한 테일러의 보도를 뉴욕타임스가 두 차례에 걸쳐 인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커티스 영사관, 언더우드 공사의 보고서에도 테일러가 AP통신원으로 적시돼 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의 행적도 이용설(전 세브란스 병원장)의 3·1운동 증언 메모를 통해 뒷받침됐다. 메모에서도 “등사기로 독립선언문을 찍었고, 간호사들이 숨겼다”는 문구가 나와 [호박목걸이]의 신뢰도가 올라갔다.

일본의 제암리 학살 사건에 관해서도 테일러가 ‘일본의 만행을 기사화하고. 하세가와 조선총독을 추궁해 유감 표명과 재발 방지를 받아냈다’는 기사가 확인됐다.

‘딜쿠샤와 호박목걸이’ 특별전을 통해 최초 확인된 사실 중 하나는 테일러의 측근이었던 조선인 김주사의 존재다. 김주사로만 알려졌던 그의 본명이 김상언으로 사료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김상언은 대한제국 시기 주미공사관 견습생으로 일했다. 당연히 영어에 능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 의정부 주사 관직으로 일하다가 테일러를 만났다. 테일러 상회와 광산에 관여했다. [호박목걸이]에는 그의 독립의식이 투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언과 그의 아들은 해방 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전한다. 이때 끝까지 숨겨놓은 태극기가 1948년 한국으로 돌아온 메리에게 전달됐다. 메리는 이를 보관했고, 이번 기증을 통해 공개됐다.

앨버트가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외면하지 않고 보도한 데에는 ‘김상언의 민족의식에 감화된 측면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 앨버트와 김상언이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일방적 상하관계로 여겨지지 않는다. 김상언이 오히려 앨버트보다 당당하게 앞에 서 있다.

다만 역사는 개연성이 아니라 사료로서 받쳐져야 될 ‘사실’의 세계다.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의 도록 논고를 집필한 이순우 연구원은 “이번에 김주사의 본명이 김상언으로 확인된 것은 맞다. 그 밖에 앨버트와 함께 일했던 한국인, 일본인 직원의 본명도 일부 확인됐다. 다만 [호박목걸이]에 실린 모든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아직 미흡하다. 이를테면 김상언이 정말 일본의 고문으로 죽었는지부터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언더우드 가문과 교류


▎메리 테일러가 저술한 [호박 목걸이]의 원본과 번역본. 메리 사후 1992년 책이 출간됐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앨버트와 메리는 신혼여행 때 인도 북부 러크나우를 찾았다. 여기서 딜쿠샤라는 이름의 건축물을 보고 매혹됐다. 메리는 “나중에 집을 갖게 되면 꼭 그 이름을 따서 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조선 땅에 지어진 서양식 붉은 벽돌 저택은 딜쿠샤라는 이국적 이름을 갖게 됐다.

초석에 새겨진 ‘1923’은 공사 시작 시점을 뜻한다. 딜쿠샤는 1년 후인 1924년 완공됐다. 앨버트와 메리는 서울에 온 뒤, 한양도성 길을 자주 산책 다녔다. 길을 걸을 때마다 큰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은행나무 옆에 집이 지어진 사연이다.

김익상 교수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장수가 심은 나무’ 이야기만 듣고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지만 그 설화의 주인공은 권율 장군이었다. 딜쿠샤는 권율 장군의 집터였다는 말도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만 해도 반발이 심했다. 집 근처에 우물이 있었는데 오염될까 봐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던 탓이다. 원래 테일러 부부는 더 높은 곳을 집터로 생각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 집을 못 짓게 해서 이곳에 지었다는 설도 있다.

딜쿠샤는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김동준 학예연구사는 “전형적인 미국식 가옥이다. 다만 4계절에 잘 적응하기 위해 구조 변경이 있었다. 바람이 잘 들어오도록 유난히 큰 창문을 달았다. 겨울에 추우니까 난로와 굴뚝을 세 곳에 배치했다”고 말했다. 대저택으로서 규모를 짐작케 한다. 딜쿠샤는 1927년 낙뢰를 맞아 일부가 탔다. 이 소식이 신문기사에 나올 정도로 당시 조선 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집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렇게 큰 집이 지금까지 보존됐다는 점이다. 서울의 중심이지만 외진 곳에 해당하는 행촌동의 독특한 입지가 딜쿠샤를 보존시켰다. 테일러 가문이 추방된 뒤, 집 소유권이 애매해진 원인도 작용했다.

딜쿠샤에서 메리는 문화적으로 살았다. 특히 그림과 연극에 능했다. 메리의 조선사람 스케치는 지금도 다수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추방되기까지 메리는 가택 연금됐다. 이 그림들을 일제에 뺏길까 봐 전전긍긍했다. 집사였던 공 서방의 바지에 숨겨 그림을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공 서방의 초상화도 남아 있다.

당시 서울에 살던 서양인들은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했다. 원체 수가 적으니 서로 잘 알았다. 테일러 가문은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가문과 교류가 있었다. 조선의 외국인들은 ‘유니온 클럽’을 결성해서 친목을 다졌고, 정보를 교류했다. 메리는 서양인 부인들에게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이때 메리는 조선 옷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저고리가 남자의 것이었다. 당시 한국 여성의 신체가 지금보다 작아서 서양 여자들은 남자 옷을 입어야 사이즈가 맞았기 때문이었다.

활동적인 여성이었던 메리는 조선 곳곳을 찾아다녔다. 특히 1937년 처음 방문한 금강산에 푹 빠졌다. 금강산에 관한 그림을 그렸고, 엽서 등 자료를 수집했다. 테일러 가문은 강원도 고성에 별장까지 두고 있었다. 함경남도 안변에 위치한 금광에서 금을 채취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미완의 이야기 품은 김주사와 윌리엄


▎메리가 그린 조선인 초상화. 둘째 줄 왼쪽이 김주사의 초상화다. 본명은 김상언으로 독립의식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앨버트는 금광업 외에도 테일러상회를 열었다. 현재 태평로 웨스틴조선호텔 맞은편이다. 안 다루는 물건이 없었다. 조선의 특산품을 외국에 팔고, 외국 물건을 조선에 들여오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제는 적국관계에 있는 서양인들을 구금했다. 앨버트는 선교사 집에 감금됐고. 메리는 가택 연금됐다. 5개월간 감금됐다가 외국인추방령 2~3일 뒤 바로 추방됐다. 앨버트와 메리는 사실상 일본의 포로 신분으로 싱가포르까지 갔다. 그곳에서 포로교환 형식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뉴욕에 도착했다.

앨버트는 갑자기 나온 터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재산과 사업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조선에 돌아가야 했다. 6년간 미국 국방부의 문을 두드렸지만 한국 땅을 밟기 전에 심장마비가 먼저 왔다.

메리는 해방 이후 가까스로 한국 정세가 안정되자,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입국했다. 메리도 잠깐 들른 것인지라 한국의 지인들 안부를 확인하고 남편의 재를 한국 땅에 묻고 왔을 뿐, 실무적 정리는 못했다. 미국에 돌아간 메리는 1982년, 93세로 사망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새로 부각된 인물이 앨버트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다. 그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만주에 피신했다가 해방 때 입국했다. 이순우 연구원에 따르면 윌리엄은 조선에 자동차와 영화를 최초로 보급한 인물로 볼 수 있다. 실제 테일러상회가 쉐보레 화물차 신문광고를 냈던 자료가 남아 있다. 이 연구원은 “문화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윌리엄은 해방 후 잠시 딜쿠샤를 관리했다. 그러나 결국 집을 팔고 한국을 떠났다. 이후 조경규 자유당 의원이 이 집을 소유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이 집의 소유권이 박탈됐다. 1960년대 이후 딜쿠샤는 명목상, 주인 없는 집이 됐다. 실질적으론 다세대 주택이 됐다. 최대 20가구까지 거주했다고 전한다.

법적 소유가 모호하다 보니, 건물은 방치된 상태였다. 노숙자가 살기도 했다. 2006년에야 그 역사가 알려진 뒤 딜쿠샤는 국가소유의 등록문화재가 됐다. 그러나 이미 건물감정 결과, D등급을 받았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수준이었다. 김동준 학예연구사는 “안에서 발을 구르면 집 전체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긴 시간이 걸려서 2018년 딜쿠샤에서 마지막 거주민이 나갔다. 서울시는 2019년 말까지 복원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김 연구사는 “이미 설계도는 나왔다. 복원 뒤 하우스뮤지엄 형태로 시민들에게 개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백범 김구의 집무실이었던 경교장, 가회동 백인제 한옥의 뒤를 이를 하우스뮤지엄 모델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팩트에 관한 확인이 역사학계의 몫이라면 딜쿠샤를 찾아낸 김익상 교수는 픽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앨버트와 김주사의 관계를 토대 삼아 한국판 ‘쉰들러리스트’ 같은 영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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