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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4)] 일제에 비타협·불복종으로 맞선 유학자 심산(心山) 김창숙 

“세상을 구하려 하지 않으면 거짓 선비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항일운동 자금 마련하다 고문당해 앉은뱅이 됐어도 꺾이지 않은 저항정신… 67세에 해방 맞은 뒤 이승만 독재에 저항, 남북분단 막기 위해 헌신

▎성주청년유도회 김균섭 회장이 대가면 사도실 마을 청천서당에서 심산 김창숙의 집안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1925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은 중국에서 동지 이회영을 만났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이 시들해지던 시기였다. 심산이 구상을 밝혔다. ‘일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중국 변방의 황무지를 얻어 만주 일대 동포를 이주시키고 땅을 경작하자’는 안이었다. 그곳에서 군대를 기르면 독립을 달성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독립운동의 해외기지 건설이다. 심산은 그 무렵 쑨원(孫文) 등 중국 정계 인물을 만나며 교분을 쌓고 있었다.

심산은 땅 확보와 정착비가 과제라고 덧붙였다. 그가 잡은 예산은 대략 20만원. 이회영은 중국의 지도층과 협의하라고 권유했다. 중국 측의 배려로 만주와 몽골 접경지대 황무지 3만 정보가 배정됐다. 남은 건 20만원 마련이었다. 방법은 국내에 들어가 모금하는 길이었다.

일제강점기는 민족의 암흑기였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숱한 지사(志士)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선비도 의병과 혁신 유림 등, 결은 달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산은 국운이 기울자 유학자로서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 성토를 시작으로 3·1운동 직후 유림을 규합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장서를 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독립운동과 유림을 연결하고 대표했다.

11월 22일 경북 성주군을 찾았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청년유도회(靑年儒道會) 성주지부를 수년간 이끈 정재엽(64) 전 경북청년유도회장을 만났다. 이야기는 심산의 별호인 ‘벽옹(躄翁)’에서 시작됐다. 벽옹은 ‘앉은뱅이 노인’이란 뜻이다. 일제의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됐다. 이 별호의 내력이 중국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20만원 마련과 닿아 있다.

과정을 보자. 모금은 김창숙·김화식·송영우 등이 중국에서 국내로 잠입해 추진키로 했다.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유림 130여 명은 국내 협력자다. 권총 두 자루도 준비했다.

일제의 모진 고문에 하반신 불구


▎성주 심산기념관의 김창숙 초상화. 서양화가 김창락 화백이 그렸다. 성주 심산기념관은 문중이 중심이 돼 1974년 준공됐다. ‘심산기념관’ 편액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썼다.
김창숙은 1925년 6월 누더기 농부 옷차림으로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와 모금에 나섰다. 이 일은 신채호만 알았다.


정재엽 전 회장이 당시 성주지역 모금 분위기를 전한다. 심산의 친구였던 할아버지(정순화)가 들려 준 이야기다. “어느 날 김창숙이 찾아와 ‘독립운동 안해도 되니 돈만 내 놓으라’고 윽박질렀지. 결국 뒷논은 창숙이 독립 자금으로 다 주었어.” 심산은 먹고 살만한 문중의 종손 등을 찾아다니며 운동 대신 돈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주지역 많은 문중이 군자금을 댔다고 한다.

김창숙은 그 무렵 일제가 감시망을 좁혀 오자 이듬해 3월 급히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해 12월 그는 의열단 나석주를 보내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케 했다. 또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이 됐다.

1927년 2월 김창숙은 만성 맹장염이 도져 상하이의 영국인 병원에 입원했다. 어느 날 국내의 맏아들(김환기)이 사망했다는 통신을 접했다. 그는 상심에 빠졌고 병세는 악화됐다. 입원은 극비에 부쳐졌다. 6월 중순 어느 날 밤 일본 형사가 들이닥쳐 심산을 체포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로 압송됐고 이후 대구형무소에 구금됐다. 나석주 사건을 수사하던 일제는 김창숙이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 사실을 알게 됐다. 검거 바람이 불고 유림만 600여 명이 체포됐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 사건’이다.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 마련과 독립 투쟁이었다.

일제는 김창숙의 입을 열기 위해 고문을 자행한다. 심산은 예심 과정에서 일제를 전면 부정했다. 본적이 어디냐는 물음에 나라가 없는데 어떻게 본적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재판 과정에서는 포로를 자임하면서 일제의 변호를 거부했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꿔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며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 고문은 혹독해졌다. 그는 두 다리가 마비되고 급기야 하반신 불구가 됐다. 49세 때다. 심산은 그래도 굴복하지 않았다.

성주군청 왼쪽 심산기념관에 먼저 들렀다. 앞 도로가 심산로다. 기념관은 1974년 문중이 중심이 돼 세워진 뒤 성주군으로 넘겨졌다. 편액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기념관 아래층은 청년유도회가 쓰고 있었다. 김균섭(59) 청년유도회장이 위층 추모관으로 안내했다. 향을 피우고 참배했다. 벽면에는 심산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주변에 선대 문집과 사진자료 몇 점이 있었다. 심산의 유품은 대부분 독립기념관에 있다. 또 일부는 서울 심산기념관에 있다.

김창숙은 14년형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옥중 투쟁이 시작됐다. 그는 일제의 간수나 전옥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이 절하기를 강요하자 심산은 말했다. “내가 옥에 들어온 지 6~7년이 됐지만 옥리 보고 머리 한 번 까딱한 일이 없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그럴 필요가 있나?”

한주학파 만난 뒤 선비의 실천에 눈떠


▎경북 성주군 성주읍 군청사 왼쪽에 붙어 있는 심산기념관과 심산김창숙선생사적비.
회유도 끊이지 않았다.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건네며 감상문을 쓰라고 한다. 심산은 단호했다. “나는 일본에 붙어버린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짖어대는 흉서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오히려 죄가 남는다.”

김창숙의 일제에 대한 비타협·불복종은 이렇게 단호했다. 당시 변절자가 속출하던 현실에서 그의 기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1934년 심산은 지병이 악화돼 형 집행정지로 출옥했다.

1940년 창씨개명의 명령이 떨어졌다. 심산은 “사람으로서, 태어난 바를 잊는 자는 곧 짐승”이라며 결연히 반대한다. 그는 죽어도 창씨개명에 절대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제는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에 있는 김창숙의 생가. 심산이 나고 자란 곳이다.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이 집을 지키다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비어 있다.
1945년 심산은 67세에 나라를 되찾았다. 광복 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이승만 정부의 권위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1951년에는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며 하야를 촉구하는 경고문을 보냈다. 이 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됐다. 심산은 하야 경고문만 세 차례 발표했다. 광복 이후 그의 투쟁은 반탁과 반분단, 반독재로 흘러간다. 그는 남북협상운동을 끝으로 성균관 일에 전념했다.

성주읍 심산기념관을 나와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마을 심산의 생가를 찾았다. 군청에서 서쪽으로 6㎞쯤 떨어진 곳이다. 사도실은 산으로 둘러싸인 의성 김씨 20여 호 마을이다. 김균섭 회장이 빈 집이 된 생가를 안내했다. 생가(경북도 기념물 83호)는 안채와 사랑채, 판각고로 이뤄져 있다. 홀로 안채를 지키던 심산의 며느리 손응교 여사는 2016년 세상을 떠났다. 김 회장이 손 여사를 회고했다. “골초셨지요. 손 여사는 ‘우리 아버님이 내게 담배 피는 걸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심산은 자신 때문에 평생을 고생하고 앞으로도 홀로 살아갈 며느리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손 여사를 방문할 때는 담배가 선물이 됐다. 그러고도 여사는 100세 생일을 맞은 뒤 돌아가셨다. 손 여사는 앉은뱅이가 된 시아버지의 손발이 돼 수발을 들고 비밀편지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동네 친지도 심산이 움직이면 가마와 요강을 챙겼다.

김창숙은 1879년 의성 김씨 집안의 1남4녀로 태어났다. 그의 13대조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신 관료이자 학자였다. 동강은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를 받았고 심산은 종손이었다.

김창숙은 ‘벽옹73년회상기’를 남겼다. 회고록이다. [심산유고(心山遺稿)]에 실려 있다. 손자 김위(80) 주손은 1976년 [국역 심산유고]를 간행했다. 정성이 놀랍다. 번역과 출간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을 받았다. 그게 종자돈이 돼 이후 심산사상연구회가 발족됐고 올해로 21회를 맞은 심산상도 이어지고 있다.

김창숙은 어릴 때부터 기질이 억세고 남에게 지지 않아 함께 놀던 무리가 모두 피했다고 한다. 여덟 살에 [소학]을 읽었지만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는 18세에 부친상을 당하고도 술을 마시는 등 근신할 줄 몰랐다. 어머니가 간절히 꾸짖었다. 그는 상을 마친 뒤, 이종기·곽종석·이승희 등 유학자를 두루 만나고 느낀 바가 있었다. 나라는 기울고 있었다. 김창숙은 탄식했다. “성현의 글을 읽고도 그가 세상을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 실천을 중시한 한주학파(寒州學派)와의 만남이다. 그의 사상이 형성되는 첫 계기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빠져 ‘통탄’


▎김창숙이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없는 것을 통탄하며 추진한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낸 유림의 청원 장서. 유림대표 곽종석 외 136명의 유림이 서명했다. / 사진:서울 심산기념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를 따라 대궐 앞에 나아가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 등 매국노를 성토했다. 그 무렵 김창숙은 인재를 기르고 국채를 갚는 것이 시급하다고 봤다. 금연으로 돈을 모아 나라 빚을 상환하자는 단연동맹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모금한 돈이 턱없이 부족해 교육 투자로 돌려졌다. 집안 청천서당(晴川書堂)을 신교육기관인 성명학교로 정비했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해 계급타파에 헌신했다.

1910년 망국은 김창숙을 절망시켰다. 그는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 사는 것이 부끄럽다”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벗이 그가 술에 취해 쓰러진 걸 보고 “자네는 어찌 갓을 쓰지 않았는가” 묻자 “갓과 신이 이미 거꾸로 됐는데 갓을 써서 무엇 하느냐”며 그 자리에서 갓을 부숴 버렸다. 그는 그때부터 나들이에 삿갓을 썼다. 사람들은 “김창숙이 미쳤다”고 말했다. 1913년 겨울 집에 돌아오자 모친이 그를 안고 크게 울었다. “네가 정말 미쳤느냐. 문정공 선조의 신주를 어떻게 할 작정이냐. 너는 아직 젊다.” 김창숙은 그 말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35세 때다. 이때부터 출입하지 않았다. 그는 4∼5년에 걸쳐 집에 내려오는 경서(經書)를 읽고 또 읽었다. 평생의 실력이 당시에 이뤄졌다.

1919년 2월 김창숙은 서울 성태영의 편지를 받았다. “3월 2일 고종 황제 인산일을 앞두고 모 사건이 거행된다. 자네도 바로 상경하라.” 그러나 어머니 병환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2월 말 상경하자 성태영은 “어찌 그리 더딘가.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자네는 서명할 기회를 잃었으니 안타깝다”고 했다. 만세운동 전야였다.

3월 1일 김창숙은 독립선언서를 읽고 통곡한다. “한국이 유교의 나라인데…. 민족 대표 33인에 유교는 단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다니…. 부끄럽다.” 심산은 직후 유림의 광복운동으로 선비 137명이 연서한 ‘파리 장서운동’을 전개했다.

칠봉리 심산 생가 건너편에는 청천서당이 있다. 서당 앞 기둥에 세로로 ‘星明學校(성명학교)’라 새긴 편액이 걸려 있었다. 동행한 성주군 박재관 학예연구사는 “성명학교 글씨는 문화운동단체가 만들어 설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원군 때 훼철된 청천서원(晴川書院)은 1992년 청천서당 뒤쪽에 복원됐다.

성주군은 올해부터 심산 생가 건너편 칠봉산 자락에 ‘심산문화테마파크’(8만8600㎡)를 조성하고 있다. 국비와 지방비 187억원을 들여 2022년까지 ‘심산 휴(休) 문화센터’ 등을 짓는다. 선생의 업적을 알리고 문화관광 자원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병환 성주군수는 “지역에 들어서는 첫 인물 공원”이라고 소개했다.

김창숙은 슬하에 3남2녀를 뒀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두 아들을 잃었다. 장남은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으나 자금 사정으로 귀국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고문과 병이 겹쳐 사망했다. 차남(김찬기)은 1928년 진주고등보통학교 집단 수업 거부를 주도하고 1939년 왜관사건 등으로 형을 받았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환국을 앞두고 사망했다. 그 아들이 서울대 조선공학과를 나온 김위 주손이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지시로 전공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입학 지원서에다 철학을 적었는데 심산은 그걸 보고 “그런 전공 택하면 집안 망한다”며 “무역을 해야 나라가 살고 수출하려면 배가 필요하니 조선공학을 공부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손자는 엔지니어가 됐고 그 덕에 지금도 월급을 받고 있다.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는 말씀이 좌우명이 됐다고 한다.

두 아들도 독립운동 제단에 바쳐


▎성균관대 총장 시절 교수들과 함께 한 김창숙. 그는 성균관의 전통을 이어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석을 놓은 교육자이기도 하다. / 사진:서울 심산기념관
심산의 고향 성주는 한강 정구와 이진상의 한주학파 등 유림 정신세계의 중심지를 자처한다. 참외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더 많이 언론에 오르내렸다. 사드가 배치된 초전면 소성리 주민들은 지금도 반대 수요집회를 열고 있다. 집회는 벌써 100회를 넘겼지만 해법은 여전히 미궁이다. 심산이 이 사태를 접한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심산을 존경하는 한 유림은 이렇게 답했다.

“사드 6문 중 4문은 미국을 지키고 2문은 일본을 지키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솔직한 이야기다. 우리나라 방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군민들이 분개하는 이유다. 이 나라 자주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심산이 있었다면 대응이 분명할 것이다. 사드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오히려 더 찬성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 높게 비타협·불복종했을 것이다.”

심산은 유교를 지키며 항일 투쟁과 민족통일에 평생을 바쳤다. 말과 행동은 당당하고 떳떳했으며 죽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 이익과 권력에 병들지 않고 어떤 위세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 땅의 유교가 헛되지 않음을 보여준 참 선비였다.

[박스기사] 성균관대 초석 놓은 교육자 - 일제잔재 청산과 미래인재 육성을 위한 儒學

1945년 광복 뒤 김창숙은 유림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데 나섰다. 그는 “성균관(成均館)과 명륜당(明倫堂)이 친일과 민족반역자에 점거된 것을 한탄한다”고 말했다. 1947년 전국유림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김창숙은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 대회에서 일제 시기 경학원(經學院)으로 격하된 성균관의 명칭이 환원되고 우후죽순 생겨난 유림 단체는 ‘유도회(儒道會)’로 정리됐다. 또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해 유학정신을 건학 이념으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전국의 향교 재산이 모태가 돼 재단법인 성균관대학 설립이 본격 추진됐다. 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성균관은 일제와 결탁했던 황도유림이 자리 잡고 있었고 지방 향교에는 부패한 보수 유림의 반대가 만만찮았다. 1946년 마침내 철정과(哲政科)·경사과(經史科) 등 2개 과로 성균관대학 인가가 났다. 유도회가 성균관대학을 운영했다. 유도회 김창숙 위원장이 초대 학장을 맡았다. 문제는 성균관대학이 조선조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계속된 국가기관이 아닌, 유림에 의해 운영되는 사립 교육기관으로 성격이 바뀐 점이다. 국립대학이란 유구한 명맥이 단절된 것이다.

유림은 대학 운영에 더 적극적이 됐다. 유림은 시·도 향교재단의 자산을 성균관대학에 더 많이 지원하도록 독려했다. 건물을 짓는데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산의 고향인 성주는 솔선수범했다. 성주향교는 본래 자산이 넉넉했다고 한다. 성주향교는 많은 자산을 정리해 성균관대학에 보냈다. 그래서 지금은 가난한 향교가 됐다. 지금 자산이 많은 향교는 당시 지원금을 상대적으로 적게 보낸 곳이라고 한다.

심산은 성균관대학을 창설한 뒤 고향에 내려오면 신입생 유치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친구들 자녀를 보면 “집에 있으면 뭐하느냐”며 데려가 입학시켰다는 것이다. 정재엽 전 청년유도회장의 부친은 상경해 성균관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그런 사람만 성주에 10여 명이 있다고 한다.

1953년 성균관대학은 종합대학으로 승격됐다. 심산은 다시 초대 총장을 맡았다. 심산은 이렇게 성균관대학교의 초석을 놓은 교육자이기도 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1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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