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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4)] 카르니 마타의 흰 옷 두른 이방인 

“여기, 살아있는 여신(女神)이 있다!” 

사원의 쥐들과 우유 먹는 행위예술에 군중들 엎드려 숭배
믿음에 따라 신격화하는 종교의 속성이 가져온 아이러니


▎비카네르 카르니 마타에서 시도한 쥐와 함께 우유를 먹는 행위예술. 퍼포먼스를 벌이는 도중에 관람객들이 다가와 필자를 경배하고 있다.
친근한 가정과도 같은 분위기 속에서 꿈 같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지난번에 충분한 교섭을 가지지 못했던 쥐사원, 카르니 마타를 다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인도를 떠나기 전에 이 비카네르 지역 데슈노크의 쥐사원에서 좀 충격적이고도 본질적인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다.

다음날, 히투는 나를 사원으로 데려갔고, 예술 프로젝트에 관해 상담할 수 있는 적임자를 찾았다. 우리는 그곳의 수석사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40대로 보이는 매우 호리호리한 사람이었고, 툭 튀어오른 콧날과 강한 턱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했으며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아마도 그는 그가 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에게 부과하는 표준적 금액인 미화 200달러를 내가 깎지 않고 낼 용의가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더욱 친절한 것 같았다. 이 사원은 그 독창성 때문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 상세히 소개된 바 있고, 그러한 연유로 세계의 많은 미디어들이 이 사원을 찍기 위해 왔을 것 같다. 그 다큐 촬영 허가 금액은 지역의 맥락에서 보면 꽤 큰돈이다. 그러나 내 생애에서 단 한 번 있을 뿐인 중요한 행위의 기록을 남기는 기회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200달러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질구질하게 협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사원의 여기저기를 안내하면서 그가 관광객들에게 흔히 뇌까리는 수준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일례를 들면, 한 우수한 과학자가 이곳을 방문해 수천 마리의 쥐를 검사한 결과 단 한 마리에게서도 병적 상태나 병원(病原)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사원의 쥐들이 신성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실로 말도 안 되지만(수천 마리 쥐의 건강 검진을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나는 그를 조용히 따라다니며 그의 허풍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의 허풍이 다 끝났을 때, 나는 그에게 나의 예술 프로젝트를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냥 사원에 쥐들과 함께 앉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쥐들과 함께 그들이 먹던 우유를 같이 마실 것입니다.” 갑자기 사제의 얼굴이 확 변했다.

“정말?”

그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러하다고 긍정을 반복했을 때, 그는 계속 뇌까렸다.

“당신은 쥐와 우유를 같이 마시는 최초의 인간이 될 것 같소. 실제로 이 지역 사람들조차도 쥐들이 먹던 우유를 먹을 때는 끓여서 먹지요.”

그가 그토록 열심히 이 사원의 쥐들은 병이 없고 성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면 그의 경악은 실로 모순적인 자가당착인 셈이다. 결국 그는 쥐들이 깨끗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떠벌린 말들은 실로 외국 관광객을 위한 비즈니스용도의 언변일 뿐이었을 수도 있다.

힌두 사원에서 쥐와 함께 만찬을 벌이다


▎쥐를 새긴 카르니 마타 사원의 금속 문 부조물.
2013년 2월 18일, 내가 서른두 살이 되는 그날,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이 정도의 삶의 고비였을까? 하여튼 나는 쥐들과 함께 숨쉬는 무차별의 경치를 체험하고자 카르니 마타 사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히투는 나를 사원으로 데려왔고 나를 수석사제에게 안내했다. 수석사제는 내가 쉴 수 있는 방도 내주었고, 나의 모든 짐보따리를 안전한 곳에 보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는 바로 이날 밤 델리로 가는 버스를 타야만 했기 때문에 호텔에서 나의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하얀 대리석 기둥 사이의 한 코너를 행위예술의 장소로 선택하고 장치를 하기 시작한 것은 이른 오후였다. 그곳은 흰 타일과 검은 타일이 체크무늬로 배열되어 있었고 홀에는 여신을 위한 주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두 개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메인 카메라의 프레임 한가운데에 나는 하나의 크고 둥근 금속제 쟁반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내가 방금 구입한 신선한 우유 여러 팩을 뜯어 쟁반에 부었다. 얼마 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르는 기존의 우유, 관광객들이 부어놓은 우유를 내가 마신다면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쥐들과 함께 우유 식사를 한다 해도 신선한 우유를 사용하는 것이 위험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사진의 효과를 위해 우유가 쟁반의 가장자리에 찰랑찰랑 넘치도록 우유를 부었는데, 그것은 결국 쟁반을 넘어 대리석 바닥에 쟁반 주변으로 작은 시냇물을 형성해버렸다. 나는 이미 카메라의 프레임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질척거리는 우유 위에 털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하얀 순면 소재로 만든 인도의상을 입고 있었다. 넉넉한 몸뻬 스타일의 바지와 길게 늘어지는 웃옷과 흰 면사포를 썼기 때문에, 내 옷이 바닥의 우유에 젖어도 표시는 나지 않았다.

드디어 나를 향하고 있는 카메라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의식의 새로운 영역으로 몰입한다. 그렇게 고양된 심적 상태에서는 나는 나의 몸이나 삶을 지배하는 모든 불안감에서 해방된다. 오로지 찰나 그 순간순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시킨다. 고승의 무아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비슷한 체험일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고승이래도 그러한 무아경을 일상적으로 지속시킨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행위예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물리적 결과물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 유니크한 특성이다. 화가는 그림 그리는 과정을 통해 유화나 수채화나 어떤 작품을 남긴다. 조각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진정한 행위예술은 행위의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없고 과정은 무위 속으로 증발해버린다. 관객이 나의 행위를 예술이라고 생각하든, 생각지 않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술가와 관객은 그 순간의 행위의 장 속에 같이 몰입할 수밖에 없다. 주·객이 일체가 되는 행위의 장 속에서 나는 새로운 황홀경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흑과 백, 순결과 혐오의 공존이 주는 긴장감


▎비카네르 쥐 사원 카르니 마타의 전경. 이곳에선 쥐를 신성시한다.
우선 나는 반가부좌를 틀고 편안히 앉는다.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관한 일체의 자의식이나 염려를 벗어버린다. 일상생활 속에서 나는 매우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기 때문에 범용에서 벗어나는 짓을 공적으로 행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서 내가 행위를 감행할 때는 나의 에고가 지어내는 다양한 걱정으로부터 완벽히 해탈되는 모양이다.

처음에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목마른 쥐들이 나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자 나의 우유 쟁반가에 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을 축이는 동안 나는 서서히 손으로 우유를 떠서 마시는 행위를 계속했다. 손으로 떠 마시니까 아무래도 우유가 팔뚝으로 흐르기도 했다. 내가 계속 우유를 쥐와 같이 마시고 있을 때 비둘기가 날아가면서 밀크쟁반 속에 똥을 한 방울 찍 싸고 가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속이 뒤틀리고 메스꺼워진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위장의 고통에 관해서는 감내할 각오가 서 있었다.

나는 그런 퍼포먼스를 행하기 전에 그것을 하는 것에 관한 명백한 정치적, 사회적 맥락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사원 안의 블랙 앤 화이트 인테리어의 순수한 시각성, 검은 쥐들과 흰 우유 그리고 나의 흰 옷의 대비가 나의 행위 그 자체의 당위성에 대한 창조적이고도 시적인 비전을 자극하리라고 나는 기대했다. 내 생각으로는 젊은 여인이 흰색 옷을 입고 사원에 앉아있다는 것 그 자체로 순결성·청결성·성스러움이라는 전통적 심볼리즘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러한 여인이 마시는 우유라는 액체는 성스러운 모성애와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런 고결한 심볼리즘이 인간들, 아니 우리의 상식적 인식 속에서 더럽고 혐오스럽고 역병의 근원처럼 느껴지는 기분 나쁘게 시커먼 생쥐들과 곧바로 연합되는 장면은 오묘한 텐션을 자아내며, 우리 인간이 관념적으로 동물에게 부과하고 있는 가치규정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일례를 들면, 이명박 대통령을 ‘생쥐’라고 표현할 때 부과되고 있는 행위양식은 생쥐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하등의 도덕적 비열성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인즉, 인간이 쥐새끼만도 못한 것이지, 쥐새끼가 인간에게 폄하되고 있는 특성은 결코 쥐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쥐는 더럽다’는 편견을 깬 일화


▎사원에 비치된 쟁반에 담긴 우유를 쥐들이 몰려와 먹고 있다.
나는 본시 쥐 일반에 대해 특별한 애호의 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하우스 펫으로서 두 마리의 쥐를 오랫동안 양육한 적이 있다. 하나는 검고, 하나는 흰색이었는데, 이들과 수년간 교섭을 하고 지내면서, 쥐가 얼마나 영리하고 깨끗한 동물인지에 관해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우리에서 한 구석에 변소로 지정된 -물론 그들의 의식 속에서 지정된 것이겠지만- 같은 곳에만 변을 본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침대나 소파에서 놀 때에는 그곳을 더럽게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몸을 끊임없이 핥아 정돈하고, 남도 깨끗이 핥아준다. 행동방식이 고양이와 다르지 않다.

나는 그들 스스로 우리 밖을 나가고 또 들어오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내가 밖으로 산보를 나갈 때 내 손으로 뛰어올라 팔뚝을 타고 내 어깨로 기어오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신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쥐는 개 같은 애완동물과 마찬가지로 주인을 정확하게 알아본다. 까만 쥐가 특히 영리했다. 내가 내 손을 그 쥐 앞에 내밀면 내 어깨에까지 기어올라 같이 산보할 채비를 차린다. 그리고 산보할 때 그 쥐가 언제 어디서 변을 볼지를 나는 잘 안다. 내가 손을 땅에 대면 쥐는 팔뚝을 타고 내려와 변볼 곳으로 간다. 변을 보고 난 후에는 나를 졸졸 따라온다. 내가 손을 내밀면 그제야 손바닥으로 뛰어올라 어깨의 원위치로 복귀한다. 나는 쥐와 이토록 친근한 관계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나의 행위예술을 통해 인간이 쥐들에게 덮어씌워 온 클리셰, 즉 고정관념들을 깨버리거나 역전시키는 한 편의 시를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행위예술을 촬영하려고 설치한 카메라에 쥐가 올라탔다.
원래의 의도와 달리, 나의 퍼포먼스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의미체로 발전해나갔다. 행위예술 그 자체가 원래 의도된 그 무엇만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퍼포먼스가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그토록 증오하고 혐오하는 동물을 고귀한 그 무엇으로 숭배하는 아이러니를 간직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서 이미 그러한 의미체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쥐사원의 지역 참배자들은 내가 하는 것이 어떠한 퍼포먼스인지에 관해 근원적으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의 행위를 예술로서 파악하는 사람은 오직 사제 하나뿐이었다. 나의 비디오카메라는 자동으로 작동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제는 매 20분마다 셔터를 눌러주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관람객들에 의해 ‘살아있는 여신’이 되다


▎카르니 마타 사원 신전의 입구는 여신을 참배하려는 이들로 늘 북적인다.
퍼포먼스는 2시간 남짓 지속되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내 주변으로 몰려들어 무심히 구경하고는 또 생각 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완전히 붉은 옷으로 휘두른 한 정중한 여인이 나에게 다가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무르팍 주변에 흘려진 밀크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적시고, 그 손을 그녀의 이마에 댄 후에는, 양손을 기도하는 자세로 모아 공손히 절을 하자마자 분위기는 일변했다. 그녀의 숭배 퍼포먼스가 끝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같은 동작을 하며 내 앞에 공손히 경배의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 무릎을 직접 만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앉아있는 곳에 엎질러진 우유를 부드럽게 터치하곤 했다.

그러던 중 4명의 여인이 본격적인 태세를 갖추고 이마를 땅에 대는 제대로 된 경배의 예식을 행하는 것이다. 이때쯤, 나는 그들의 행위가 단순한 존경의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서 갑자기 내가 신격화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발생은 나에게는 완벽하게 생소한 것이고, 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이다. 이 상황의 황당무계함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웃음의 감정을 압박시켰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처절하게 고생해야만 했던 가장 기묘한 순간이었다. 나는 나의 안면표정을 변화시키지 않은 채 고요히 앉아있었으나 속에서는 계속 웃음이 치솟아 올랐다. 나는 나의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경배의 현실을 내가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이 어쩌면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순간에 끊임없이 웃음이 치솟았다는 것 자체가 그러한 사태의 가장 진실한 수용태세였을 것이다. 웃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자체가 나의 진실이요, 나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알고 보면 모든 ‘성스러움’이라는 것이 웃기는 것일 수도 있다. 사제는 그 사람들은 머나먼 북동 지역에서 온 참배객들이었는데, 그들은 나를 살아있는 여신으로서 실제로 믿었다는 것이다.

나는 전설이라는 것이 관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체험했다. 예수나 싯다르타에 관한 모든 기술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신비롭거나 기적적인 사태에 관해 믿음을 가지고 싶어 한다. 온 몸을 흰 천으로 휘감고 앉아서 쥐들과 같이 우유를 마셨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내가 신적인 존재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 순간 나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환각이나 믿음에 빠져버리고 말았다면 나도 신적인 존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예수나 싯다르타나 모두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갈림길에서 방황한 불쌍한 존재들이었을지도 모른다.

2시간 정도 흘렀을 때, 사제는 내게 말해주었다. 바나나 절편을 나의 구부린 손이나 팔에 사람들에게 안 보이게 해, 여기저기 뿌려두면 쥐들은 더욱 몰려들 것이라는 것이다. 그대로 하니 쥐들이 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시에 10~15마리 정도의 쥐들이 내 다리와 팔 주변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어떤 놈들은 내 머리에까지 올라갔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에게 어떤 초자연적 영감이 있어서 성스러운 신전의 쥐들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고 믿게 될 것은 빤한 이치였다.

생각해보라! 지나가던 한 참배객이 흰 옷을 입은 청순한 젊은 여인이 새카맣게 쥐들로 덮여있고, 그 여인 앞에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자연히 이와 같이 속삭이리라! “보라! 저기 동방에서 온 살아있는 여신이 있다!”

이 처음의 속삭임은 다른 속삭임들로 전파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전파에는 반드시 변형과 추가가 동반된다.

믿고 싶은 대로 보는 신앙의 속성


▎여성 참배객들이 예를 갖춰 엎드린 채 정성껏 절을 하고 있다.
“저 살아있는 여신은 아무개의 화신이야! 아무개 신의 딸이야!”

“저 여인은 신성한 흰 옷을 입고 있고, 카르니 마타의 화신인 흰 쥐가 그녀의 몸 위에 있다!”

“저 여인이 우유를 만지자마자 그 쟁반으로부터 우유가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이런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회자될 것이다. 나는 결국 지구상의 모든 종교적 텍스트에 실려 있는 환상적 이야기들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라는 확신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라는 것은 결국 신앙에 관한 것이다. 신앙이란 믿음의 도약이다. 믿음의 도약이란 아무런 물증 없이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계속 반복적으로 이야기되고 낭송되면서, 원래 일어난 사태와는 무관한 방향으로 발전된다.

사람들은 열두 해 동안 혈루병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에게 나아가 그 망토를 만지는 것만으로 혈루가 즉각 멈추었다는 이야기를, 예수가 그 여인에게 초본약처방을 내려서 혈루가 멈추었다는 이야기보다 선호하게 마련이다. 전자가 훨씬 더 재미있고 신기하고 드라마틱하고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왜 인간들이 그토록 초자연적 권능에 관한 사특한 이야기들을 맹목적으로 믿고 싶어하는지에 관해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가 종교가 퍼뜨리는 기적담화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신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에서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러한 맹신이 인간에게 안전과 위로의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전과 위로는 거짓에 기반한 것이다. 맹신이 인간에게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허약한 이야기를 나는 찬동할 수 없다. 나 같은 행위예술가에 의해 너무도 쉽게 농락당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 중인 오래된 학교의 주건물.
그들이 믿는 ‘살아있는 여신’은 기실 보통사람이고, 기벽이 있는 관광객이거나, 혹은 사기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행위예술이라는 단순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렇게 전개된 의외의 상황은 더없이 최상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 관객이 예술가의 퍼포먼스 그 자체의 과정으로서 참여했으며, 부지불식간에 그 퍼포먼스의 의미체 속에 혼연일체가 되었으며, 그 예술작품의 상징적 의미를 변화시키고 첨가하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더 바랄 수 없는 행위예술의 전형이었다.

관객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신전에서 일어나는 일이 행위예술의 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카르니 마타 사원의 사제였고, 또 하나는 나중에 온 그 사제의 친구였는데 그는 비즈니스맨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 사람 모두 비즈니스맨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누구이고 어떤 예술을 행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비즈니스 감각을 넘어서서 나의 퍼포먼스에 완벽히 몰입해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두 시간 이상을 지속한 나의 전 퍼포먼스 과정을 통해 놀람과 경탄의 제스처나 탄성을 내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쥐에 물린 손에선 피가 흐르고…


▎인도 여인이 전통 물레인 차르카를 이용해 옷감을 짜고 있다.
사실 그 퍼포먼스는 나의 손가락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함으로써 끝이 났다. 한 마리의 쥐가 나의 손가락을 바나나 조각으로 생각하고 꽉 물었던 것이다.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좀 뺀 후에 눌러 지혈을 시키고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쥐들을 쫓아버렸다. 사제 또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내 퍼포먼스가 완료되었는지를 물었다. 나는 내가 쥐에게 물렸다고 조용히 말했다. 사제는 나의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충격을 받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빨리 의사에게 가야 돼요! 의사에게 가야 돼요!”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그때 나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사제님! 이 쥐들이 사제님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깨끗하고 성스러운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내가 의사에게 그렇게 서둘러 갈 필요가 없잖아요?”

물론 나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쥐에게 물린다고 반드시 병에 걸린다는 미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별 걱정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신 나는 물었다.

“어디 내 손 씻을 곳이 없을까요?”

손을 대강 치료한 후, 사제에게 내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을 만한 곳이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이날 밤 델리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델리에서 하룻밤을 잔 후에 그리운 조국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사제와 그의 친구는 영어를 꽤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가 버스 타기 전에 편히 쉴 만한 곳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사원에는 내가 샤워를 하고 옷 갈아입을 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매우 경청을 해주었고 또 친절했다. 아마도 나의 퍼포먼스를 체험한 후에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둘 다 모두 나의 퍼포먼스가 너무 좋았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이 현대미술에 관해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있든지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들은 사원에서 목격한 장면의 진실성에 깊게 감동된 것 같다. 예술은 사람을 묶는 힘이 있다.

그들은 나를 태우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옛집으로 갔다. 큰 정원이 앞으로 나있고 낮은 담이 둘러쳐져 있는 집이었다. 그것은 폐쇄된 학교 건물 같았다. 사제의 친구 이름은 아쇼크(Ashok)였는데 아주 조용한 성품을 지녔고 안경을 쓴 중년신사였다. 아쇼크는 이 낡은 학교 건물을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우선 그는 엉성하지만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목욕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더운 물은 없었다. 찬물을 통에 담아 끼얹고는 이내 정상적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버스를 타기까지 아직도 몇 시간이 남아있었다.

차르카는 인도 독립의 상징물


▎아쇼크의 학교 주변 기념품 상점. 불가촉 천민 부락에서 만든 공예품들을 판매한다.
남는 시간을 활용해 아쇼크는 그 학교 건물 안에 자리한 자기 비즈니스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그는 불가촉천민의 공동 부락에서 수공으로 만든 천과 공예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공예품으로 가득 차있는 작은 방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의 회사를 차르카(Charkha)라고 이름지었다고 했다. 차르카는 전통적 방적에 쓰였던 물레의 인도말이다. 산스크리트 어원상으로는 원(cakra)을 뜻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 차르카를 인도인이 자족과 독립을 성취하는 상징으로서 그의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았다.

아쇼크는 그의 핸드폰에 들어있는, 차르카를 돌리고 있는 마을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땅바닥에서 물레를 돌렸다. 그리고 다양한 천을 짜는 큰 베틀기계는 그의 작은 상점에 설치돼 있었다. 차르카의 심볼리즘은 인도의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그것은 인도 국기의 초기형태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양으로 들어가 있다. 나는 아쇼크의 설명을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결국 울로 만든 큰 숄과 실크 스카프를 하나씩 샀다. 가격은 지역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비쌌지만, 천이 자연섬유였고 순결한 고급품이었기에 어차피 나에게는 비싼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이 두 사람은 나로 인해 오늘 하루 장사를 잘한 셈이다. 사제에게는 200달러를 주었고 그의 친구에게는 40달러를 주었다. 그것도 현찰로. 인도의 평균임금은 하루에 2.7달러다. 내가 산 스카프를 만든 사람은 아마도 1달러도 벌지 못했을 것이다.

하여튼 나는 이 날이 다 가도록 하루 종일 만족감에 젖어 있었다. 공생애의 예수와 비슷한 나이가 된 서른두 번째의 생일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나를 버스정류장에 데려다 주었고 나는 석별의 정을 나누며 수없이 감사를 표했다. 나는 극도로 피곤해있었기 때문에 버스 안에서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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