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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 대기자의 사랑학개론(17)] 쇠렌 키르케고르 '유혹자의 일기'의 ‘유혹’ 

사랑은 아름다움보단 선함과 더 관계 깊다? 

심미적 사랑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자 유혹에 대한 지적인 기록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된다는 건 지식이란 자식을 낳는 길


▎KBS 인기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 실화를 바탕으로 부부의 사랑·갈등·이혼을 그렸다.
사랑과 섹스와 결혼. 이 세 가지에 어떤 형식으로든 질서를 부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문명이나 문화, 국가나 사회는 없다. 법과 규범과 관습으로 통제한다. 유교권·그리스도교권·이슬람권 등 전근대 사회에 뿌리를 둔 주요 문명권에서는 사랑과 섹스가 결혼에 종속됐다. 이들 전근대 문명의 결혼은 조건과 조건이 만나는 중매결혼이었다. 초야(初夜)를 치를 때까지 신랑·신부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근대화는 중매결혼을 연애결혼으로 대체했다. 유럽이 주도한 근대화는 정치 영역에서 민주주의,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 사랑·섹스·결혼 영역에서는 연애결혼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탈근대화는 연애결혼의 위상을 흔들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섹스·결혼의 영역은 흔들리고 있다.

전근대나 근대사회에서도 사랑·섹스·결혼이 삼신불(三身佛)·삼위일체(三位一體) 같은 완벽한 통일성을 이룬 적은 없었다. 21세기 사랑·섹스·결혼에 상호 분리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사랑과 섹스는 더 이상 결혼에 종속되지 않는다. 결혼은 안 하고 사랑과 섹스만 하면서 살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사랑도 섹스도 결혼도 안 하겠다는 선택도 등장했다. 우리는 어쩌면 ‘포스트연애결혼시대’에 살고 있다.

중매결혼 시대에는 매파와 같은 중매가 필요했다. 연애결혼 시대가 개막하자 코트십(courtship)이 중매를 대체했다. 코트십을 영한사전에 찾아보면 “결혼 전의 교제(연애)” “(동물의 짝짓기를 위한) 구애”라고 나온다. 코트십은 우리말로 구애(求愛) 즉 ”이성에게 사랑을 구함”이다. 또 코트십·구애를 달리 표현하면 유혹이다.

[유혹자의 일기]는 19세기 코트십·유혹을 그리고 있다. 저자인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는 42세에 사망한 덴마크 철학자·신학자다. [유혹자의 일기]는 키르케고르의 대표작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의 일부분이지만, 따로 출판되기도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덴마크 철학을 유럽 철학사의 본류로 합류시킨 역작이다.

19세기는 구애를 거치는 연애결혼이 정착돼 가는 세기였다. 어떤 현상이 갑자기 등장하는 일은 없다. [유혹자의 일기]에서 우리는 ‘탈연애결혼시대’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1469~1527)가 정치를 윤리·종교와 분리했고, 키르케고르는 사랑·섹스가 결혼과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로맨스 소설처럼 읽을 수도 있는 [유혹자의 일기]는 심미적인 사랑, 미학적 사랑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다. 유혹에 대한 지적인 기록이다. 4월 4일부터 9월 25일까지 6개월에 걸친 일기 형식을 띠고 있다. ‘실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유혹자의 일기]에서 성애(性愛)의 문제를 다룬다. 키스에 대한 철학적 논의도 나온다. 플라톤의 [향연] 같은 작품이 사랑의 문제를 다루지만, 사실 사랑이 통상적인 철학의 주제는 아니다.

유혹 그 자체보다 유혹의 ‘계획’에 탐닉했던 요하네스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실존을 미학적·윤리적·종교적 영역으로 나눠봤다. 이 세 영역에 사랑·섹스·결혼을 집어넣고 살펴볼 수 있다. 사랑·섹스·결혼을 윤리적·종교적 영역은 고려하지 않고 미학적 영역에서만 넣어보면 무엇이 드러날까. [유혹자의 일기]는 미학의 영역만 따진다.

키르케고르는 개개인이 삶의 여러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완전히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선택이 요구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혹자의 일기]의 주인공은 지극히 무책임하다. 한마디로 나쁜 놈이다. 타락한 남자다.

남자 주인공 요하네스는 26세다. 개인주의자다. 자신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표면적인 관계만 유지한다. 즐거운 삶에 집중하는 쾌락주의자다. 요하네스는 숱하게 많은 유혹을 해봤다. 꾼이다. 그의 직업이 뭔지 안 나온다. 유혹이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 돈후안과 달리 닥치는 대로 여성을 유혹하는 인물은 아니다. 지적인 그는, 섹스 그 자체보다는 유혹, 유혹 자체보다는 유혹의 계획에 탐닉한다.

자기 또래 여성에는 무관심하다. 20대의 ‘나이든’ 여성은 반응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하네스에게는 어린 여성 ‘정복’이 유일한 삶의 의미다.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에는 무관심하다. 유혹에 성공한 다음에는 여자를 버린다. 결혼에는 관심이 없다. 하도 많이 사랑과 섹스를 해봤기에 그에게 평범한 구애는 따분하다. 그는 흥미로운 사랑을 바란다.

그 남자의 최대 무기는 성적 매력 아닌 지성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두상(頭像).
[유혹자의 일기]의 여주인공은 코델리아다. 16세다. 부모를 여의고 두 명의 자매와 고모와 함께 산다. 탐미주의자(aesthete)인 요하네스는 코델리아를 마치 예술 작품처럼 즐긴다. 또 코델리아를 가르치려고 든다. 에로틱한 사랑, 사랑의 본질 등등에 대해 말이다. 코델리아는 이렇게 반응했다. “그는 때로 너무 지적이어서 여성으로서 저를 무시한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또 어떤 때는 그가 너무도 사납고 열정적으로 욕망에 불타고 있어서 그의 앞에서 저는 거의 덜덜떨 정도였어요.”

요하네스에게 유혹은 게임이다. 전략이 필요한 전쟁이기도 하다. 장난은 아니다. 그는 진지하다. 여성을 유혹하고 소유하고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소유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우연히 마차에서 내리는 코델리아를 처음보고…. 며칠 후 거리에서 마주치고 사랑에 빠진다.

요하네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코델리아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다! 진심으로? 그렇다. 성실하게? 그렇다. 심미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또 얼마나 흥미진진한 일인가!”

요하네스에게 모든 유혹은 첫사랑과 같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바란다. 사랑 고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여러 번 사랑 고백을 했었지만, 고백은 매번 아주 색다르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이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까. 요하네스는 비논리적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두 번이나 그녀는 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그녀가 더 많이 나타날 것을 의미한다. 요셉이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면서 덧붙인 말이 있다. ‘두 번씩이나 그런 꿈을 꾸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머지않아 이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깃의 이름을 알아내고는 어린 아이처럼 좋아한다. 다음과 같이 횡설수설한다. “코델리아, 코델리아, 이것이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내게는 무척 소중한 이름이다. (… ) 코델리아! 아주 멋진 이름이다. 그렇지. 리어왕의 셋째 딸도 바로 그 이름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술에 올리지 못했고, 그녀의 입술은 그녀의 마음속에 할 말이 가득해도 침묵했었지. 나의 코델리아도 그렇다. 나는 그녀가 리어왕의 코델리아를 닮았다고 확신한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술에 올렸는데 그것은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심 어린 키스를 통해 드러냈다. 그녀의 입술은 얼마나 건강미가 넘치게 무르익었던지! 그렇게 아름다운 입술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요하네스에게는 유혹의 매뉴얼이 있다. 타깃을 관찰하며 가족 관계, 친구, 취미, 하루 일정, ‘소설을 많이 읽었다’와 같은 정보를 최대한 수집한다. 타깃을 완전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요하네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언제나 준비하고 또 연구해야 한다. 모든 것은 잘 짜여 있어야 한다.” “오늘 그녀를 세 번이나 만났다. 나는 그녀의 가벼운 산책이나 외출 시간을 모두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의 존재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나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주 조용히, 이렇게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다.” “나는 서서히 그녀를 포위해 들어가며 좀 더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

그의 최대 무기는 성적인 매력이 아니라 상대방을 압도하는 지성이다. 하지만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는 거짓도 유혹의 전략이라고 이렇게 털어놓는다. “사람들은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정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아가씨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정직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정직 이상의 것을 나는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짓이다.”

“여자의 눈물과 애원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체코 프라하 시가지에 세워진 마틴 루터의 동상. 루터는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다.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랑에서 로맨틱한 단계의 유효기간은 6개월에서 4년이다. 요하네스가 주장하는 사랑의 유효기간은 반년이다. 그러니 결혼은 있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랑의 본질과 요령을 잘 알고 있으며 사랑을 믿고 사랑의 속내를 잘 알고 있는 심미적인 사랑의 대가(大家)이므로 어떤 사랑도 6개월 이상 지속돼서는 안 되며 사랑의 절정을 맛보자마자 즉시 그 관계는 끝이라고 생각한다.” “약혼이 해로운 점은 항상 윤리적인 것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것은 인생에서나 학문에서나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 얼마나 다른가! 심미적인 하늘 아래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쾌활하며 일시적이다. 반면 거기에 윤리적인 것이 끼어들게 되면 모든 것이 모가 나고, 엄하고 한없이 지루해진다.” “사랑은 신비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사랑에 빠지는 처음 단계 역시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신비스럽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둘러 약혼을 하거나 다른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손을 들어 결혼서약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게 된다.”


▎키르케고르의 저서 [유혹자의 일기]의 한글판 표지.
[유혹자의 일기]의 배경은 가부장적이고 남녀차별이 존재하는 사회다. 여성은 ‘순결한 처녀성을 통해 특정지워지는 존재’다. 여성은 남자를 통해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없는 존재다.

종교적으로는 루터교가 [유혹자의 일기]의 배경이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여성해방이나 성적인 해방, 지적인 해방을 과제로 삼지 않았다. 19세기 덴마크 여성은 코트십에서 수동적인, 성애에 무관심한 비성적인 존재이어야 했다. ‘밝히는’ 여성은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한 여성은 사회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여성의 혼전 순결에 대해 요하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의 여성은 순결한 처녀성을 통해서 특징지어진다. 즉 처녀성이란, 그것이 자신을 위한 존재인 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며, 타자를 위해서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존재이다.” “여자란 모름지기 모든 것을 주어버리고 나면 약해질뿐더러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순결이란 부정적인 요소이지만 여자에게 순결이란 그 존재의 실질적 요소다.”

목적을 달성한 요하네스는 코델리아를 버린다. 코델리아 스스로 파혼을 요구하게 유도한다. 언제나처럼 요하네스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되돌아간다. “여자의 눈물과 애원만큼 혐오스러운 것은 없다. 여자의 눈물과 애원은 모든 것을 바꿔놓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그녀는 더 이상 내 마음속에 없다.”

필멸인 인간이 불멸을 얻는 두 가지 방법은?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서 주연배우로 열연한 김서형(아래)과 김성수.
[유혹자의 일기]는 자전적이다. 요하네스와 키르케고르의 삶은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27세였을 때 16세인 레기네 올센이라는 여성과 약혼했다. 1841년 파혼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집필 직전이었다. 파혼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우울증이 결혼생활에 미칠 악영향이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평생 레기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레기네는 키르케고르의 창의성에 영감을 주는 뮤즈(Muse)였다.

19세기와 21세기 남성을 비교해 보면 얼마나 달라졌을까. 요하네스는 당시 기준으로 극단적인,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유혹자의 일기]는 당시에도 인기와 분노를 동시에 샀다. [유혹자의 일기]와 키르케고르의 생각은 일치한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는 윤리와 종교와 분리된 심미적인 사랑의 폐해나 한계를 드러내려고 했는지 모른다.

비평가들은 키르케고르가 [유혹자의 일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産婆術)을 사용했다고 지적한다. 사랑에 대한 소크라테스와 키르케고르의 관점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기원전 427년께~347년)이 쓴 [향연(饗宴)](기원전 384년께)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사랑의 기예(技藝)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기에 유일한 현자가 된 소크라테스가 한 말치고는 파격적이다.

[향연]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관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랑은 욕구의 한 종류다. 사람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갖고 싶어하고 가진 것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행복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진정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움(Beauty)이라기보다는 선함(Goodness)이다.

사람은 아름다움에 끌리지만 사랑은 아름다움보다는 선함, 덕(德)과 더 관계가 깊다. 사람은 선함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영원히 갖고 싶어한다. 뭔가를 영원히 갖고 싶어하는 것은 필멸(必滅)인 인간이 불멸(不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필멸인 인간이 불멸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자식을 낳는 것과 영원한 예술·지식 같은 것을 낳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도덕과 지식을 낳는 관계가 보다 숭고한 사랑의 관계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지식이라는 자식을 낳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이며 불멸에 동참하는 길이다.

키르케고르와 소크라테스는 둘 다 사랑을 미(美)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에 종교가, 소크라테스는 사랑에 철학이 필요하다고 본듯하다. 과연 그럴까. 사랑을 사랑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인 실체로 볼 수는 없을까.

※ 김환영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서울대 외교학과와 스탠퍼드대(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에서 공부했다. 중앙일보에 지식전문기자로 입사, 심의실장과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서강대·한경대·단국대 등에서 강단에 섰다. 지은 책으로 [따뜻한 종교 이야기] [CEO를 위한 인문학] [대한민국을 말하다: 세계적 석학들과의 인터뷰 33선] [마음고전] [아포리즘 행복 수업] [하루 10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말하다] 등이 있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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