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미루의 어드벤처(27)] 베두인 호스피탤리티와 고대 문명의 암각화 

원수가 찾아와도 손님맞이부터! 

‘무조건 환대’하는 손님 접대 의무를 관습법처럼
고대로부터 전해져 온 삶의 방식 고수하며 전통 이어가


▎살라의 캠프 응접실 내부. 이곳에서 밤마다 여행자들과 함께 다양한 사교 활동이 펼쳐진다.
나는 그 포르투갈 청년들과 함께 일몰을 감상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마치 내가 그들처럼 휴가를 이용해 사막의 진귀한 광경을 바라보려고 온 관광객인 것처럼. 땅거미가 깔리고 나의 서재동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자신들의 관광캠프로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 캠프에 투숙하고 있는 관광객이 많으며, 베두인 호스트는 자기들과 함께 내가 저녁식사에 참가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친절한 초대를 받아들였다. 어두운 부엌이나 라운지에서 혼자 깡통채소를 뜯어먹으며 앉아 있는 것보다 그곳이 백방 나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모랫길을 걸어 그들을 따라갔다. 나의 모닝카페 바위 동쪽으로 펼쳐진 광막한 오픈 스페이스에 발자취를 남기면서 따라간 것이다. 서재바위에서 보면 이곳은 정말 아름다운 파노라마가 장쾌하게 펼쳐지곤 했던 곳이다. 이 오픈 스페이스 한복판에 베두인들이 트럭을 몰고 지나다니는 일종의 하이웨이가 나있다. 그래서 나는 방향감각을 잡기가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갈 청년들이 묵고 있는 캠프에까지 실로 한 15분 도보의 거리였다. 그 캠프도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포근히 안치되어 있는데 서쪽이 터져 있었다. 내 서재 의자로부터 멀리 바라보이는 세 개의 캠프 중 가운데 것이었다. 그 캠프는 살라(Salah)라는 매우 점잖은 남성이 소유한 곳이었는데, 그곳이 내 생애에 의미 있는 사건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당시 전혀 예기치 못했다. 그 인연은 내가 요르단을 완전히 떠난 이후로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타야의 캠프와는 달리, 살라의 캠프는 꽤 큰 캠프였고, 거의 매일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주 객실인 라운지 텐트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15명에서 20명 정도 되는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그 라운지는 베두인 스타일의 양탄자와 태피스트리 벽걸이로 품위 있게 장식되어 있었고, 가운데는 진흙으로 만든 실내 화로가 있었다. 식사가 제공되는 곳의 선반에는 골동품 놋 주전자, 그릇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공식 초대손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수줍음을 탔다. 그 분위기를 알아챈 포르투갈 청년 중 한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나를 주인 살라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나를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같이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포르투갈 여행자들의 저녁 초대


▎염소를 잡아 손님 식탁 위에 머리를 놓는 것은 ‘베두인 호스피탤리티(환대)’의 상징이다.
살라는 베두인치고 키가 큰 사람이고 아주 반듯한 체형에서 풍기는 풍채가 매우 노블하고 압도적인 그 무엇이 있었다. 딱 벌어진 어깨뿐 아니라, 그의 인자하게 굴곡진 얼굴의 모습과 섬세한 표정이 거물급이라는 인상을 금방 풍긴다. 나는 그의 얼굴을 어디서 많이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나는 그가 피터 오툴이 주연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 나오는 한 캐릭터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역사적 실존 인물인, 호웨이타트 종족의 추장인 아우다 아부 타이(AudaAbuTayi)와 흡사했다. 그는 로렌스와 같이 아카바만을 공격하고 요르단 지역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세력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영화 속에서 그 역할은 성격파 배우 앤서니 퀸(Anthony Quinn)이 맡았지만, 나는 실제 로렌스의 책과 역사서를 통하여 아우다 아부 타이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놀랍게도 이 지역의 베두인들은 거의 전부가 아우다 아부 타이의 종족인 호웨이타트 종족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의 추론이 허황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살라는 마제스틱하고 위엄있는 제스처를 유지하면서 나를 환영했다. 그는 이미 이웃 캠프에 아시아의 처녀가 한 명 자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처녀가 자기 캠프를 방문했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작은 마을에서 소문은 급행열차를 탄다. 타야의 캠프가 비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나의 적막감이 걱정되었는지, 앞으로 언제고 자기 캠프쪽에 건너와도 좋다고 친절하게 초대를 해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초대는 매우 관대한 제의이다. 그곳의 식사는 숙박료를 내는 게스트를 위한 것이므로 유료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살라와 그의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나는 이웃으로서 언제고 와서 공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세계문화사에 항상 베두인 특유의 풍속으로 기록되고 있는 ‘베두인 호스피탤리티’라는 관례의 한 표현이다.

최근에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테러사건들 때문에 우리는 아랍권 사람들을 매우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 것처럼 인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베두인 원래의 토착적 삶은 지극히 평화롭고 상부상조의 친절한 에토스를 바탕에 깔고 있었다. 오늘날의 왜곡된 모습은 궁극적으로 서구권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초래한 측면이 강하다. 물론 자신들의 책임도 없지 않겠지만, 세계의 토착 문명의 순수성이 서구 이권의 침탈로 인해 변모해가는 모습을 그냥 인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서글프다고 말할 수밖에!

베두인의 이웃사랑에는 격식이 있다


▎베두인이 손님을 접대할 때 사용하는 3층으로 된 시렁의 맨 꼭대기에 올라가는 고기 구이. 육즙이 아래에 놓인 채소를 적셔 자연히 맛과 향이 밴다.
과거의 베두인들은 친구이든 낯선 이방인이든,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든 누구든지 텐트에 접근하기만 하면, 그들에게 마시고 먹을 것을 친절하게 제공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무조건 접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손님이 오면 염소 한 마리를 잡는 것이 관례였고, 전통적인 맛있는 커피를 달여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모든 게스트는 커피를 세 컵까지 달라고 할 수 있었다. 세 컵 이상 달라는 게스트는 탐욕의 인간으로 낙인 찍혔다. 커피는 집안간 원한 문제 해결이라든가 결혼에 관해 합의할 때도 반드시 필수품이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가장 특이한 측면은 완벽하게 낯선 이방인일지라도, 본인이 얘기하지 않는 한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같은 질문을 제4일까지는 던질 수 없다. 우선 무조건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한국인의 친절이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들의 친절이라는 것은 좀 제식적·율법적 측면이 강하다. 그만큼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예지가 묻어나는 것이다.

한 베두인 가정의 사례로 전해 내려오는 재미난 얘기가 있다. 한 가정에 남자가 왔는데 대접을 하다 보니 그가 자기 가족의 한 사람을 죽인 집안의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사람에게 염소 한 마리를 잡아 후대했고, 그들의 천막에서 3일 동안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제4일이 되는 날 그는 자기 갈 길을 평온히 떠났다. 텐트의 주인은 자기 장남에게 곧 명한다. “따라가서 그를 죽이고 오너라!”

또 하나의 스토리는 이 호스피탤리티 습관 때문에 아랍반란(1916~1918,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정부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가 연합해 오스만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차질을 빚을 뻔한 얘기이다. 아랍의 리더들이 메디나(Medina)에 모여 혁명의 깃발을 올리기로 모의하고 비밀스러운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두 명의 터키 군인들이 이들을 따라붙었다. 터키 군인들은 혁명에 장애를 주는 존재였으므로 일찍 제거했어야 옳았는데, 이 호스피탤리티 습관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랍인들은 이 두 명의 적군을 다마스커스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후에야 혁명의 깃발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러한 스토리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에 속하는 것이지만, 베두인들의 호스피탤리티의 엄격한 관습은 아마도 매우 실용적인 삶의 요청으로부터 생성된 미풍양속일 것이다. 어떠한 사막의 여행자라도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닥칠 수가 있고, 음식과 수면의 절박한 요구는 누구에게나 발생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호스피탤리티는 결국 나의 생명줄이 되는 것이다. 전 사막공동체가 하나의 생명공동체였던 것이다.

요즈음은 이러한 관습이 같은 방식으로 통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살라가 나를 자기 캠프에 받아들이는 태도는 같은 호스피탤리티 전통이라 말할 수 있다. 언제고 한 끼의 식사는 대접할 수 있다는 여백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살라의 캠프에는 관광객들에게 대접하는 주 메뉴로서 관심을 끄는 특별한 ‘베두인 닭요리’라는 것이 있다. 그들이 요리하는 특별한 방법 때문에 그들이 그런 명명법을 자신있게 취하고 있지만, 실상 닭고기는 알고 보면 미국이나 브라질에서 온 냉동닭이다.

여행자의 식욕 당기는 사막의 정찬(正餐)


▎유목민이 음식 재료들을 담은 시렁을 달군 숯과 함께 모래에 파묻어 은근히 익히는 전통 요리법을 여행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우선 통닭을 칼로 쳐서 조각 내고 물로 씻은 다음, 거기에 특별한 향신료와 레몬, 어떤 때는 깡통 토마토소스를 넣어 재운다. 물론 이런 양념들을 다 전통적 베두인 요리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들은 2층 또는 3층으로 된 동그란 형태의 메탈 바비큐 시렁 위에 양념된 것을 놓기 시작한다. 보통은 닭고기를 맨 꼭대기에 놓는다. 그리고 다음 층에 양파, 감자 등을 통째로(깎거나 가르지 않고) 놓고, 바닥에는 토마토를 통째로 놓는다. 이처럼 3층 시렁에서 요리가 만들어지는 동안 맨 위층의 육즙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아래 음식들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 요리의 핵심적 부분, 그리고 베두인의 독자적인 풍속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불을 때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사막의 모래를 깊게 후벼 파내어 그곳에 강철실린더를 박는다. 그리고 그 실린더 안에다 모닥불을 지핀다. 그 모닥불을 꽤 오래 잘 태우고 나뭇가지들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숯이 되었을 때, 바로 그 위에 준비된 시렁을 올려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린더 오븐 전체를 쇠 뚜껑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그 위에 삽으로 사막의 모래를 떠서 두툼하게 덮는다. 그러니까 요리를 하는 오븐 전체가 땅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최소한 두 시간 정도 담소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베두인 바비큐를 자르브(Zarb)라고 하는데, 이 자르브는 관광객들을 대접하는 데 최상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땅속에 파묻은 숯의 향기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를 먹은 깨끗한 모래의 향기 속에서 푹 익는 모든 것들은 우선 조리방식이 쉽고 간편하며 도무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각적인 요소가 풍요롭게 전개된다. 관광객들은 모래로 덮인 오븐을 다시 헤쳐 꺼낼 때, 땅속에 들어간 시렁이 지상에 나올 때까지, 주변에 빙 둘러서서 구경을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전 과정을 촬영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잘 요리된 바비큐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게 된다. 그리고 기다리느라 배가 고파질 대로 고파졌으니 한 입의 맛은 천상의 열락이 아닐 수 없다!

살라의 집에서 내가 느낀 음식에 관한 가장 인상적이었던 요소는, 채식주의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베두인 사회에는 그러한 배려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살라의 집에서는 쿠부츠(호떡), 쌀밥, 오이-토마토 샐러드, 토마토소스와 수프로 만든 야채스튜 같은 것이 꼭 나오는 것이다. 깔끔한 국물이 있는 요리는 한국인의 식성에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른다.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음식을 조금씩 다 맛봤다. 플레이트 가득 음식을 담았는데 어찌나 맛있었는지 마지막 한 입, 손에 묻은 양념까지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최근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잘 익은 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다.

별똥별 지는 밤하늘 아래 대화는 무르익고…


▎살라의 캠프 전경.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저녁식사 후에, 베두인들은 차를 더 끓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주변에 둘러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었다.

살라의 큰아들은 알리라는 이름의, 아주 잘생긴 24세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쳐다보면 항상 졸고 있는 듯이 좀 힘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알리는 매우 즐거운 이야기를 잘 만들어내는 유쾌한 담론가였다. 말은 매우 천천히 했지만…. 그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을 했다.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는 떨어지는 별똥별을 쳐다보게 되면 누구나 소원을 빌라고 소리쳐요. 그런데 우리 베두인에게는 전혀 그런 관념이 없거든요. 우리는 별똥별을 악귀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던지는 무기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악귀를 진멸하고 있는데 또 뭘 빌어요? 어느 날, 저는 여자 관광객과 같이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순간 그 여자는 본능적으로 외치더군요. 헤이, 알리, 빨리 소원을 빌어요! 그런데 나는 도무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몰랐어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전혀 모를 때 빌 수 있는 소원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아세요? 대답해 보실 분 계십니까?”

그리고는 그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머뭇거리자 곧 자기가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세요? 떨어지는 별똥별을 다시 보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죠.”

그 순간 관광객이 낄낄 웃었다. 그 소리를 듣자 알리는 흐뭇해했다. 죠크가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야생이 숨쉬는 사막의 유희


▎캠프의 주인인 살라와 호웨이타트 종족의 추장인 아우다 아부 타이.
잠시 후 그는 텐트 밖에 있는 무엇인가를 본 듯했다. 그리고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되돌아왔는데 그의 손에는 고슴도치가 들려 있었다. 고슴도치를 손에 놓을 때는 가시로 덮여있는 등쪽으로 눕혀 안아야 하기 때문에 두꺼운 수건을 깔아서 두 손에 담아야 한다. 그러니까 고슴도치의 얼굴과 발이 하늘 쪽으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고슴도치를 가시 속에 웅크린 채로 항상 보기 때문에 그 까발려진 모습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그리고 사막의 고슴도치는 한국의 고슴도치보다는 가시털이 덜 날카로운 것 같다.

고슴도치의 얼굴과 네 발을 그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고슴도치가 그렇게 귀여운 동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얼굴이 쥐처럼 생겼지만 주변의 털과 함께 훨씬 더 귀엽게 보인다. 가시털을 지닌 포유동물이다. 알리가 데려온 고슴도치는 만화 속의 캐릭터처럼 보였고, 알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굴을 다 드러내놓고 발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고슴도치는 이 부자연스러운 자세를 뒤엎기 위해 두발로 요동을 쳤다. 그런데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하면, 얼굴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시늉을 하기만 하면 금방 얼굴을 푹 파묻고 다리를 감싸 가시공처럼 동그랗게 되어버린다. 포식자(맹금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렇게 변형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고슴도치가 항상 알리 주변에 있는 페트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알리에게 물었다. “얘 이름이 뭐야?”

그러자 모든 관광객들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알리는 아주 웃기는 목소리로 이와 같이 말했다:

“나의 이름은 리브 미 얼론(Leave Me Alone, 혼자 있게 해주오)입니다.”

알리는 고슴도치가 자유롭게 자기 길을 가도록 놓아주었다. 고슴도치는 우선 텐트 안에서 자유롭게 어슬렁거렸다.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돌리느라 야단이었다.

저녁식사 후 또 하나의 유희는 여우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닭을 먹고 나면 어차피 뼈다귀가 남는다. 그 뼈다귀나 살 찌꺼기를 바위 위에다 던지는 것이다. 그 장소는 관광객이 있는 곳으로부터 안전하게 떨어져 있지만 또 전등을 비추면 굶주린 놈들이 음식을 확보하기 위하여 몰려드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지난 나흘간, 나는 타야의 캠프에서 가까이 오는 여우를 전혀 목격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근방의 여우들은 밤이 되면 모두 저녁잔치를 위해 살라의 집으로 집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국물이 없는 나에게 올 리가 없다.

쫑긋 세운 큰 귀와 덥수룩하게 무성한 꼬리털이 나의 인상에 포착되었을 때, 나는 아우데 엄마의 캠프에서 여우와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밤중에 자다가 문득 눈을 떴는데 바로 내 코앞에서 내가 먹다 놓아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공포 속에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야생동물에 대해 그다지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나 습관에 보다 깊은 이해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여튼 무엇이든지 물 수 있는 동물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한다. 그래서 나는 살라의 집에 갔다 온 이후로 여우를 위한 음식을 서재 올라가는 산 밑에 갖다 놓았다. 부엌에서 내다보이는 곳이다. 그렇지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 캠프권역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여우는 잡식성의 포유동물인데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여우들이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나는 관광객들이 하는 대로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관광객 그룹의 일원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는 내가 관광객이 돼 그 그룹 속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여행을 해도 혼자 했고, 주변의 사람들이 감히 할 엄두도 못 내는 짓들만 골라서 했다.

그러나 4일 동안의 완벽한 고존(孤存)을 겪은 뒤 자연스럽게 나는 타자와 같이 행동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느낌을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 결국, 나 또한 사회적 동물일 뿐이구나!

밤마다 사교장으로 변하는 베두인의 천막


▎살라의 아들인 알리가 캠프 주변에서 발견한 고슴도치를 들어보이고 있다.
극도의 피곤이 휘몰아 닥쳤다. 잘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일어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살라를 찾았다. 살라에게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했을 때, 그는 그날 밤을 자기 집 텐트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고무샌들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는 길에 전갈이나 뱀 같은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나는 정중하게 그의 제안을 사절했다. 그리고 홀로 나의 잠자리로 향했다. 이마 전등을 켜고 대지의 상황을 살피며 걸었지만 고독과 무심 속의 행보는 그 나름대로 범인이 느껴볼 수 없는 광막한 아름다움이었다.

이 밤이야말로 앞으로 무수히 연속될 밤들의 시작이었다. 나는 살라의 캠프를 줄곧 다녔다. 그 번잡한 캠프는 곧 나의 나이트 라이프의 일환이 되어버렸다. 타야의 캠프에서 생활한 그 해, 여름과 가을 내내, 일주일에 여러 번 야행성 사교와 유흥을 감행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맨해튼에서 저녁 먹으러 나가고, 마시고 춤추고 하는 똑같은 유흥 생활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적막한 사막 한가운데로 맨해튼을 옮겨 놓은 셈이 되고 말았으니 이게 뭔 아이러니일까? 살라 캠프에 갈 때면 옷도 더 멋있게 입고, 눈화장도 하고, 작은 핸드백 속에 전화와 열쇠를 넣고, 텐트를 굳건히 잠궈 놓고 출발하는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 내가 모닝카페 고인돌 책상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한 방문객이 그곳까지 올라와 나를 찾는다. 모하메드 팔라(Mohammed Falah)였다. 23세의 이 청년은 최초에 나의 나무책상을 돌산 꼭대기로 운반해 주었던 인물이다. 모하메드는 그냥 와서 그늘 밑에 앉아있는 것이다. ‘그냥 앉아있는데’ 뭐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모하메드는 영어를 잘했고, 재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별로 성가실 것도 없었다.


▎암각화에는 사람의 형상 두 개와 그 밑에 발바닥이 그려져 있다. 인간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갑자기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는 바위산 지점, 그리고 서재 바위산의 어느 지점에 고대의 다양한 암각그림과 문양과 문자가 새겨져 있는 곳을 안내해주겠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로컬의 사람들이 아니면 나 같은 이방인이 그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다. 나는 실제로 가보고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사막에서 만난 고대인의 흔적들


▎고대의 알파벳으로 추정되는 따무딕 문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와디 럼 보호구역에만 2만5000개의 암각 문양들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점 바로 뒤켠에 그토록 장쾌한 고대인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석각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보았던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와 매우 비슷하다. 반구대의 암각화는 고래 사냥의 현실적 모습을 그렸다는 데 그 세계사적 가치가 있다. 물론 반구대에도 호랑이·사슴·멧돼지 같은 육상동물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낙타, 휘어진 큰 뿔이 있는 아이벡스, 타조와 같은 현지의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고, 또 놀라운 것은 기원전 수 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의 문자들이 상당히 잡다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갑골문과 문자학·성운학의 대학자인 엄마와 같이 왔더라면 이 그림이나 문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느낌을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방면의 지식이 별로 없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들어간 와디 럼 보호구역만 해도 암석면에 새겨진 암각 문양들이 2만5000개가 넘는다. 이 다양한 암각은 이 지역에 인류가 정착하는 1만2000여 년의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암각화의 숫자가 너무 적고 문자가 거의 없는 데 반해 여기는 다양한 문자가 널브러져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의 고대인은 문자를 통해 소통하는 문화를 매우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시아는 한자의 강력함 때문에 로컬 문자의 개발이 묵살된 반면 이곳은 상형이나 알파벳 문자가 다양하게 개발된 듯하다.

동물들의 가축화 과정, 사냥 장면, 싸움이나 전쟁 장면, 사람의 손과 발의 이미지(사람의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수단), 다양한 종교적 제식, 추상적인 종족의 마크 등등이 풍요롭게 그려져 있는데, 이 암각의 대부분은 BC 2세기로부터 AD 4세기 사이의 작품으로 추론되고 있다. 그리고 BC 4000~5000년 사이 작품으로 추정되는 상형문자들도 있다. 그리고 나는 매우 신비롭게 보이는 심볼들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그 심볼들은 상형문자가 아닌 소리글자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고대 알파벳의 조형들이었다. 이 석각문자들이 제대로 해독되기만 한다면 페니키아 문자 중심으로만 알파벳을 생각하는 우리의 기존 관념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사막이야말로 인류 고대문명의 무궁한 심원일 것이다.


▎필자의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대 문명의 암각화와 문자.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8호 (2019.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