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0)] 32세 아우구스투스가 무덤부터 만든 까닭 

정적(政敵)과의 결전 앞서 목숨 건 출사표를 내다 

‘죽더라도 로마에 묻히겠다’ 결기 내세워 20년 정국혼란 수습
‘카이사르의 후계자’ 명분 아닌 ‘대제국의 청사진’ 설계에 전력


▎로마 테베레 강변에 자리 잡은 아우구스투스 영묘(靈廟). 410년 서고트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했을 당시 이곳도 크게 훼손됐다. / 사진:getty images bank
한 사립대에서 등산대학 설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국립 지정도 염두에 둔 모양이다. 등산이 한국인 모두가 즐기는 국민 스포츠라는 방증이다. 미세먼지 때문에 주춤하지만, 온 국민이 틈만 나면 산에 오른다.

그러나 산 자체에 대한 관찰은 등산에 대한 관심만큼 깊진 못하다. 한국의 어떤 명산도 단번에 떠올릴 만한 이미지가 없다.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라고 할까. 서울 남산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각도,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본 남산 모습이 가장 아름다울까? 한눈에 봐도 누구나 인정할 만한 남산의 초상화 말이다. 없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억하는 남산은 서울타워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조연에 불과하다.

외국은 어떨까? 알프스를 예로 들어보자. 해발고도 4505m인 최고봉 마터호른(Matterhorn)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할리우드 영화가 시작될 때 이따금 등장하는 눈 덮인 봉우리가 바로 마터호른이다. 영화제작사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로고다. 한국 편의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스위스 초콜릿 브랜드인 토블론(Toblerone)도 마터호른을 로고로 쓴다. 덕분에 누구나 마터호른을 첫눈에 알아본다.

일본의 후지(富士)도 세계인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산이다. 후지 초상화가 바깥세계로 퍼져나간 때는 19세기 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남긴 판화,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이 매개 역할을 했다. 도쿄를 시작으로 태평양 인접 36개 지역 풍경에다 후지를 집어넣었다. 다채로운 각도의 크고 작은 후지가 탄생했다. 파도에 잡아먹힐 듯한, 바닷속에서 바라본 작은 후지의 모습은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주목할 부분은 일본인이 묘사하는 후지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냥 뾰족한 화산이 아니다. 반드시 3개의 산등성이가 정상에서 아래로 이어져 있다. 3개의 실루엣으로 드리워진 삼각형 화산이 후지만의 정확한 초상화다.

산의 모습이 뭐가 중요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일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대하는 기본적인 자세가 어떤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식으로 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러나 정작 산을 한눈에 설명해 줄 초상화가 없다.

환웅이 터 잡았다는 ‘태백산’은 어디에


▎백두산이 높고 성스럽단 얘기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정작 백두산이 어떤 모습의 산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일까? 산을 대하는 한국인의 정서가 원인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바로 ‘이념으로서의 산’이다. ‘백두산=민족정기’란 이념이 대표적 본보기다. 우리는 왜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에게 분노할까. 또 왜 백두산 천지에 오른 남북 정상 소식에 환호할까. 다름 아닌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신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백두산은 마땅히 우리 민족이 점유해야 할 산’이 된다.

그러나 정말 ‘단군 할아버지’가 백두산에 터 잡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무리 삼천과 함께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내려왔다고 전할 뿐이다. 정작 일연은 태백산이 오늘날 평안북도에 있는 묘향산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은 평양 인근 대박산이 태백산이라고 보고 단군릉을 지었다. 남한에선 한 민간단체가 1982년 강원 태백시에 소재한 태백산에 단군성전을 짓는다. 이렇게 각론으로 들어가면 각자에 해석에 따라 위치가 애매해진다.

이념의 약점이지만, 결국 개인이 없다는 얘기로도 통한다. 백두산 초상화가 없는 이유도 그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민족의 정기는 넘치는데, 개개인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모두의 조감도’가 없다. 얘기를 꺼낸다 해도 ‘민족의 정기’라는 큰 얘기 속에 파묻힌다. 백두산에 대한 자랑과 긍지가 넘치지만, 구체적인 얘기로 들어가면 막히게 된다.

백두산 초상화가 왜 필요한지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많을 듯하다. 새삼스럽게 초상화를 만들자고 강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전 세계 역사를 보면, 초상화의 유무가 성공의 잣대 중 하나란 사실을 알게 된다. 같은 집단주의 사회·국가라도 개인에 기초할 때 한층 더 강력하다.

로마는 그 같은 상식을 일깨워주는 좋은 본보기다. 정확히 말해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년까지 이뤄진 41년간의 역사가 로마의 하이라이트다. 공화정과 독재를 거쳐 제정로마 시대를 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집권 기간이다.

키워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다. 로마의 평화란 뜻이다. 팍스 로마나는 제정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2세기 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약 200여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의 전형, 다시 말해 초상화는 아우구스투스다. 오래된 신탁(神託)이나 경전, 혹은 어느 독재자의 프로파간다에서 일부러 그려낸 초상화가 아니다. 로마 시민, 그리고 후세의 모두가 납득할 만한 로마 초상화로서의 팍스 로마나다.

신전 세운 도시에는 감세 혜택도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 마터호른은 알프스, 나아가 스위스를 한눈에 보여주는 ‘초상화’로 통한다.
원래 팍스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Eirene)에서 유래된 로마의 여신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0년 여신 팍스를 기리는 제사를 올리면서 로마의 국가적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아우구스투스는 종교를 중시한 황제다. 도덕 상실이야말로 공화정 로마를 타락시킨 가장 큰 이유라 보고, 수많은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내란으로 인해 신전의 상당수가 폐허로 변해가고 있던 시대였다. 황제로 올랐던 기원전 27년 한 해 동안 무려 82개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주목할 부분은 이념으로서의 신, 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로마와 로마시민을 위한 현세적 수단으로서의 정신무장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총론적 이념에 집착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로마 변방과 속주(屬州)에서도 신전들이 들어선다. 기존의 신만이 아닌, ‘살아있는 신’ 아우구스투스를 모신 제단도 대제국 구석구석에 들어선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생전에 신으로 추앙된 황제다. 본인 스스로는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요청으로 인해 이미 생전에 신으로 부상한다.

이탈리아 변방의 경우 로마 중앙정부와 친교를 맺고, 현지에서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수단으로 아우구스투스 신전 건립에 매진한다. 신전이 들어선 도시는 감세 혜택은 물론 독자적 통화의 유통이 허락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조각이나 관련 유물 유적이 유럽·아프리카·중동 곳곳에서 대량으로 발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여신 팍스는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꾸미는 필수품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아우구스투스를 볼 수 있는 곳에는 반드시 여신 팍스를 만날 수 있었다. 팍스 로마나의 전설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팍스 로마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이다. 로마인들에게 팍스 로마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유와 풍요다. 평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는 삶이다. 슬로건으로서의 평화에 기초한, 언제 닥칠지도 모를 미래의 약속이 아닌, 지금 당장의 번영과 자유가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해낸 역사이자 현실이다.

흔히 아우구스투스라고 하면 로마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안토니우스와의 패권싸움부터 생각하기 쉽다. 원로원파가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수십 년간 이어진 내전을 종식한 승리자란 의미에서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진가는 최후의 승리자에 그치지 않는다. 로마 변방의 적들을 몰아내고 국토를 넓힌 것은 물론, 새로운 상권(商圈) 창조와 확대에 주력한 비즈니스 황제가 바로 아우구스투스다.

대제국 로마의 비즈니스는 모두에게 통용될 법과 규율을 필요로 한다. 번영을 위한 각론으로서의 법과 규율이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인구 증가와 세법 정비다. 대제국 전체에 걸친 인구 조사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인구를 늘리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낸다. 독신 여성과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세금을 물리는 식이다.

세법의 경우 로마 중앙정부와 지방 속주와의 재정을 하나로 연결해 운용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자신의 초상화가 들어간 동전도 대제국 전체로 확대한다. 통화 통일이다. 부분적으로 존재하던 상속세도 로마 전체로 확산한다. 대제국의 수도 로마도 14개 행정조직을 통해 새롭게 정비된다. 화재와 홍수를 위한 특별조직도 신설된다. 화재 예방을 위해 노예로 구성된 600여 명의 소방조직을 신설하기도 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정열과 집념 서린 제단


▎평화의 제단 동쪽 상단 부조는 로마 탄생 스토리와 이후의 역사를 설명한다. 늑대에게서 자란 로물로스 쌍둥이 형제 얘기에서 보듯, 태생 자체가 험하고도 도전적인 나라가 로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아우구스투스 영묘(Mausoleum of Augustus)에 다시 들른 것은 3년 만인 올해 5월이다. 로마 한복판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의 무덤으로, 제정로마를 대표하는 최고의 성지(聖地)다. 로마의 명물 판테온 신전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영묘는 아우구스투스만이 아닌, 가족과 친척 10여 명이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 부인 리비아(Livia)는 물론, 친구인 아그리파(Agrippa)도 묻혀있다. 경주 왕릉보다 5배가량 크지만, 묻힌 사람 수로 보면 경주 쪽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곳은 방문할 때마다 공사 중이다. 너무도 이탈리아다운 풍경이다. 3년 전은 물론, 4년 전, 5년 전에도 줄곧 보수공사 중이었다. 2019년 초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9월 시점인 지금도 공사 중이다. 두꺼운 철창 벽이 둥근 제단 전체를 막고 있다. 카메라 렌즈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틈만 허용될 뿐 내부를 살피기는 불가능하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와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제작 시기다. 기원전 31년에 시작해 28년에 끝났다고 한다. 영묘가 완성됐을 때 그의 나이는 35세에 불과했다. 기대수명이 70세 안팎을 오르내리던 시기다. 평균수명은 30세를 넘기기 어려웠지만, 높은 영아 사망률 때문이었다.

더구나 무덤이 착공된 해인 기원전 31년은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이 벌어졌던 때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즉위 이후 붙여진 명칭이다)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연합함대와 그리스 서쪽 악티움 해협에서 일대 결전을 치른다. 이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4년이 흐른 기원전 27년에야 옥타비아누스는 황제에 오른다. 제단이 완성된 시점에서도 그는 아직 황제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무덤이 너무 일찍 세워졌다고 볼 만하다. 앞으로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는데도 그는 무덤부터 만들었다. 왜 이렇게 서둘렀던 걸까?

필자는 그가 로마의 영광을 위해 언제라도 죽을 수 있고, 죽는다면 로마에 묻히고 싶다는 것을 로마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고 본다. 목숨을 건, 임전무퇴 배수진으로서 무덤이다. 제단 착공을 명령한 32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죽음을 각오한 ‘로마의 혼(魂)’ 그 자체로 행동했다고 판단된다.

흔히들 비교되는 얘기지만, ‘천재 카이사르와 평범의 극치인 아우구스투스’라는 말이 있다. 권력을 이해하고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산전수전 카이사르와 지지기반이나 특별히 뛰어난 지략도 없이 주변 참모들의 도움으로 얼떨결에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를 비교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암살당한 카이사르가 아닌 36세에 제정로마 초대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를 선택한다. 죽음을 내건 채, 모두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꾸준히 전진해간, 한 인간의 정열과 집념의 증거가 바로 아우구스투스 제단이다.

영묘가 보수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흔적은 20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로마 곳곳에 남아있다. 영묘 바로 옆에 마련된 ‘아라 파키스 아우그스타이(Ara Pacis Augstae)’가 단적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이란 뜻으로, 기원전 9년 아우구스투스가 스페인·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마친 기념으로 세워진 사원이다. 20세기 초 복원된 이래 현재는 뮤지엄으로 쓰인다. 이곳은 평화의 여신 팍스에게 바치는 사원이지만, 초대황제에 대한 당시 로마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전의 개방성은 곧 체제의 보편성


▎로마의 핵,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대로에 서 있는 아우구스투스 동상.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로마의 사원은 원로원의 허가와 자금에 의해 완성됐다. 카이사르가 그러했듯,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는 갈등과 반목의 연속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줄곧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원로원의 강력한 지지는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한 팍스 로마나의 배경이다. 로마 역사를 대하는 기본이지만, 원로원과 관계가 나쁜 황제는 99% 비극으로 끝난다. 이른바 ‘5현제’로 통하는 로마의 최고 전성기는 황제와 원로원이 일치단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아라 파키스는 거대한 유리 공간 속에 들어선 제단이다.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5㎞ 떨어진 북쪽에 있었지만, 1933년 아우구스투스 영묘 옆으로 옮겨졌다.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진두지휘한 끝에, 2000여 년 만에 재현된 로마의 영광이다. 무솔리니는 생전 자신의 역할을 아우구스투스에 비교하기도 했다.

아라 파키스는 개방형 신전이다. 천정이 오픈된 것은 물론, 제단으로 들어가는 통제된 문이 아예 없다. 당시 로마시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들러 기도를 하거나 의식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반인 접근 여부는 그리스와 로마 신전을 가르는 큰 차이 중 하나다. 그리스 신전의 경우 사제만 안에 들어갈 수 있을 뿐, 일반인은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아폴로의 오라클(예언)을 듣기 위해 사원 밖에서 기다리는 식이다.

아라 파키스는 다르다. 아예 처음부터 문이 없는 개방형이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한 발 더 나간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로마시민뿐 아니라 범죄인·창녀·노예 여부와 관계가 없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기독교가 로마 국교에까지 오른 원동력이었다.

아라 파키스 뮤지엄으로 들어서는 즉시 제단이 눈에 들어온다. 사각형 대리석 구조로, 언뜻 보면 같은 개방형 신전인 터키 페라가몬(Pergamon) 제단을 연상시킨다. 외벽을 기준으로, 가로 11.65m, 세로 10.62m, 높이 4.60m 크기다. 별로 크지 않다. 그리스 신전처럼, 외벽을 두고 안에 다시 내벽을 만드는 식의 이중 건물이다. 내벽 안에는 의식을 위한 제단이 들어서 있다. 뮤지엄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마주치는 입구의 방향이 동쪽이다. 로마는 물론, 그리스·이집트·메소포타미아 건축물에서의 기준은 방향이다. 건물 입구의 기본은 해가 뜨는 동쪽에서 시작된다. 한국에서 말하는 풍수지리설은 전 세계 공통되는 인류의 DNA이기도 하다. 반대편으로 넘어가, 동쪽 입구에서부터 살펴봤다. 동에서 서, 남에서 북으로 훑어보는 식이다.

외벽의 장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식물·동물로 표현된 하단과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의 뿌리와 영광에 관한 상단 장식이다. 동쪽 외벽 오른쪽 상단은 유실된 상태다. 그러나 왼쪽 상단 장식을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대지의 여신이 두 아이에게 사과를 나눠주며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다. 땅과 바다의 요정이 보호하고 있고, 바닥에는 소와 양이 드리워져 있다. 반대편인 서쪽 외벽의 경우 오른쪽 상단은 아이네아스(Aeneas)로 추정되는 인물이 들어서 있다. 그리스에 의해 트로이가 함락될 당시 망명한, 이탈리아 건국의 아버지로 통한다. 이탈리아는 트로이의 후손이란 의미다. 왼쪽 상단에서는 늑대의 젖을 물고 있는 두 어린이, 즉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를 볼 수 있다. 로물루스 형제는 아이네아스의 손자로 알려져 있다. 외벽 동과 서에는 로마의 이념과 역사, 정통성이 새겨져 있는 셈이다.

‘평등한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남쪽과 북쪽 외벽 상단의 부조는 아우구스투스의 정통성과 파워를 주제로 한다. 신성한 의식에 참가하는 수많은 인물의 입상이 새겨져 있다. 추정해서 풀이할 뿐, 정확히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쪽 상단의 경우 아우구스투스와 친구이자 사위인 아그리파 장군을 중심으로 한 입상이다. 북쪽은 아우구스투스의 딸 줄리아와 손자들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스 신전의 경우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익명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정 유력자를 집어놓을 경우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와 다른 점이다. 아라 파키스는 신전인 동시에 이미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공간이다. 아우구스투스와 제정로마를 연 인물들의 모습이 외벽에 새겨져 있다.

주목할 부분은 아우구스투스의 위상이다. 아우구스투스로 추정되는 인물 부조를 보면, 뭔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신이라고 하지만, 신전으로 향하는 행렬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수많은 공적 타이틀 가운데 ‘프린셉스(Princeps)’라는 것이 있다. ‘평등한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First among Equals)’란 의미다. 신으로까지 추앙된 인물이지만, 로마를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신일뿐, 그 자신은 로마인 중 한 명이란 의미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아우구스투스의 행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2000년 전 당시만 해도 혁명이라 불릴 만한 개혁들을 단행한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아우구스투스야말로 제정로마가 서기 476년까지 지속한 가장 큰 동력을 제공한 장본인이다. 41년에 걸친 아우구스투스의 치적 덕분에 대제국 로마가 인류의 역사로 지금까지 살아남게 된 것이다. 200여 년에 걸친 대제국의 번영과 자유는 이념만이 아닌, 각론에 기초한 아우구스투스의 머리에서부터 출발했다.

등산에 오르기 전 산의 초상화를 그려보기 바란다. 한층 재미있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지도 상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 간다면, 먼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의 초상화, 조감도부터 살펴보길 바란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10호 (2019.09.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