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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책과 사람’(6)] 식민지 경성의 삶 연구 토드 헨리 교수 

야스쿠니 신사 규탄대회 남산 조선신궁 자리서 연다면… 

일제 치하 신사·박람회·공중위생 분야 일상 복원한 '서울, 권력 도시' 펴내
한·일 갈등 뿌리인 역사 지우기는 문제… 동화정책, 통념과 다른 부분 많아


▎미국인 한국학 학자 토드 헨리 미 UC샌디에이고 교수. 최근 국내 번역 소개된 [서울, 권력 도시]에서 선악 이분법으로 일제 강점기를 재단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 사진:한겨레 신문
시계를 과거로 돌리자. 일제 강점기 시절 이야기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44년 가을 지방 관리들이 충남 지역에 조사를 나간다. 좀처럼 정착되지 않는 가정에서의 신토(神道) 숭배 실태를 파악하려는 조사였던 듯하다. 관리들이 발견한 것은 기대와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수많은 농촌 가족들이 가미다나(神棚)라고 부르는 가내 신사 앞에서 ‘왜놈 귀신’이라는 노골적 반감이 묻어나는 별칭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신토가 무엇인가. 일본의 토속신앙이다. 다만 일제 말기 신토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 숭배 사상을 결합해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던 국가 종교, 국가 신토다. 이 국가 신토가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일본 국체의 전설적인 시조 아마테라스와 첫 근대 군주인 메이지 천황쯤은 조선 농촌의 촌부, 촌로 앞에서는 한낱 왜놈 귀신에 불과했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신토 사상을 주입해 제국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을 양산하려던 황국신민화 정책이 당초 의도와 달리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토드 헨리 교수가 쓴 [서울, 권력 도시] 표지.
올해는 1919년 3·1 운동이 벌어진 지 101년째가 되는 해다. 이른바 ‘꺾어지는 해’가 아니어서 열기가 지난해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시 거사의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3·1 운동의 기억, 확장해서 일제 강점기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그 기억의 빛깔은 어떤 색인가.

UC샌디에이고 역사학과 토드 헨리(48) 교수가 최근 펴낸 [서울, 권력 도시](산처럼, 2014년 영문판 [Assimilating Seoul])는 아마도 부실한, 어쩌면 치우친 우리의 일제 강점기 기억에 흠집을 내는 책이다. 책의 공동 번역자 중 한 사람인 김백영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지 수탈론 vs 근대화론’ 같은 익숙한 선악 이분법적 역사관과는 상극인 자리에서 일제라면 대놓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역사 소양과 식견에 관한 한 언제나 미달 상태인 우리의 치부를 사정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형국이라서다. 앞서 소개한 왜놈 귀신 에피소드는 물론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345쪽)

가령 우리는 일제 강점기 35년(한때 우리는 36년으로 알고 있었다)을 학교 선생님(교원)들이 칼을 차고 다니던 무단(武斷)통치 시기, 3·1 운동의 여파로 언론·출판 자유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문화통치 시기, 전시동원으로 치닫던 병참기지화통치 시기 혹은 민족말살통치 시기, 이렇게 세 시기로 구분해 알고 있다. 그런데 헨리 교수에 따르면 무단통치, 문화통치라는 표현은 조선인들의 예상 밖 도전에 맞선 적응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용어다.(49쪽) 우리는 그동안 식민지 지배 권력의 어휘를 아무 생각 없이 가져다 써왔던 거다.

일본 천황 신사 조선 농촌에서는 ‘왜놈 귀신’으로 불러


▎1929년 경성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 제작된 관광안내조감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 사진:산처럼
선악 이분법적 역사에서 결별한 헨리 교수의 지향점은 미시사(微視史)다. 일제의 지배전략 연구에 초점을 맞춰 역사의 큰 물줄기를 어림잡는 데는 유용하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의 내면, 일상적 실천의 내용들은 잘 알 수가 없었던 ‘전체사’를 극복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 헨리 교수는 비교문학자 메리 루이스 프랫이 제안한 ‘접촉 지대(contact zone)’ 개념을 내세워 경성의 공공 공간 공략에 나선다. 신토 신사, 각종 박람회, 공중위생 운동이 펼쳐졌던 시가지. 이런 세 덩어리의 접촉 지대에서 이질적인 주체들이 만나 어떤 충돌 상황과 활기를 연출하는지를 보겠다는 거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경성일보 등 일본어 자료를 광범위하게 훑어 자신만의 무기로 삼는다. 그동안 한국인 연구자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 이데올로기에 오염됐다는 이유로 잘 들여다보지 않던 자료들이다. 비판적 독법으로 접근하면 굴절된 언어 속에서 진실의 파편들을 건질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다.

그 결과 드러난 경성의 모습은 우리의 통념과는 다르다. 어쩌면 실제로는 이랬으려니 여겼던 심증을 뒷받침하는 물증들을 제시했다고 할 수도 있다. 접촉 지대에 수시로 출몰하는 조선인들의 불온한 언동으로 인해 일제의 동화정책, 통치 권력이 뒤틀리고 굴절되는 장면이 책에 수시로 나온다. 가령 일제가 ‘산업/ 근면’ 이데올로기를 고취해 물질적 동화 정책의 하나로 추진했던 각종 박람회는 상업적이고 오락적인 놀잇거리에 빠져드는 관람객들의 행태로 인해 뜻한 바를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176쪽) 조선인들에게 위생관념을 심어주기 위해 장려한 지방 순회 위생 강연이 변질돼 강연 주최로 나선 조선인 의대생들은 민족주의적 의제를 홍보하면서 일제 식민 정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293쪽)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앞서 왜놈 귀신 에피소드 역시 통념과 다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무단통치·문화통치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용어


▎토드 헨리 교수는 해외의 3세대 한국학 연구자로 분류된다. / 사진:토드 헨리
헨리 교수는 원래 일본 문화에 관심 있었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재일 조선인 등을 접한 후 한반도 과거사 연구로 방향 전환했다. [서울, 권력 도시]가 서울의 생생한 삶의 공간을 통해 일본 식민 지배의 사회·문화를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선지 한·일 사이 중간 지점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책의 행간에서 느껴진다. 미국인이라는 타자 신분까지 감안하면 두 겹으로 제3자적인 입장에서 최대한 신중하게 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선동적이고 퇴행적인 [반일 종족주의], 그에 대한 반론 성격으로 쏟아지는 이번에는 공고한 민족주의적 입장의 책들이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절름발이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은 상황에서 헨리 교수의 책을 살펴보는 것 어떨까 싶다.

코로나 사태 속에 다시 한번 불꽃 튀었던 살아 있는 한·일 갈등을 헨리 교수는 어떻게 바라볼까. 전화로 그를 만났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일본의 조선인 동화 정책은 결국 차별적인 동화 정책이었다. 책에서도 그런 부분을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일본 제국주의는 강점기 내내 동화 정책을 펼쳤다. 내가 책에서 시도한 것은 신토 신사, 박람회, 공중위생 운동이라는 세 종류의 공간을 중심으로 각각 정신적 동화, 물질적 동화, 공중적 동화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동화 정책에는 무척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이 존재한다. 나는 경성 거주자들의 일상에 동화 정책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를 미시적으로 하나씩 분석하고 싶었다. 물론 일제의 동화정책에는 차별적인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가령 지금 우리가 처한 자본주의 체제만 해도 굉장히 억압적이고 차별적이지 않나. 식민 치하에서 부자가 된 사람도, 근대적 교육을 받은 사람도, 황국신민이 되고 싶어 한 조선 사람도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시기였지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시기다.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

미시사적 접근인데, 책을 읽다 보면 자칫 일제 강점기 때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흐려져 역사적 상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단순히 ‘일제’라고 하면 그게 총독부인지 보다 넓은 의미의 식민 권력인지,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신사 참배만 해도 그렇다. 일제 강점기에는 누구나 의무적으로 신사를 참배해야 했었다고 많은 한국인이 상상하는데 1930년대에는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1910~20년대 경성의 일본 거류민들은 신토를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여겨 오히려 조선인들의 참여를 막았다. 식민지의 다양한 주체들의 삶의 경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보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1930년대 우리가 보는 것은 엄청난 긴장의 정점이다. 일제는 절박하게 조선인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권력 메커니즘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폭력의 표출이었다. 일제가 처음부터 조선인을 억압했다고 상상했다가는 실제 식민주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놓치게 된다. 조선인들은 실제로 동화되려 하면 다시 차별받는 경험을 해야 했다.”

일제의 권력 메커니즘 그렇게 강력하지 않아


▎토드 헨리는 미시사 연구자다. 세밀하게 들여다 봐야 ‘전체사’에서 놓치기 쉬운 식민지 조선인들의 내면, 일상적 실천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 사진:한겨레 신문
일제의 동화정책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정책과 비교한다면?

“동화정책을 펼친 제국주의 국가는 많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주의가 부상하자 식민지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면서 통제력을 유지하는 식으로 정책을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은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피부색이 하얗지 않은 유일한 제국이라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아마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제국은 조선을 포함해 같은 아시아 종족들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른 제국과는 다르다는 점을 서방 세계에 선전하고 싶었고 그에 따라 끝까지 동화정책을 고수한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신토는 어떤 역할을 했나?

“서구 제국주의가 확산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 종교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개인 차원의 개종보다는 동원을 위한 국가 종교, 공공 종교였다.”

1920년대 일본인들의 전염병 감염률이 조선인들보다 높았다는 대목이 책에 나오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나?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많은 일본인이 한반도의 토착 질병에 대한 면역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보다 공중위생 측면에서 우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많은 공적 자원이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남촌에 집중됐고 조선인들은 그만큼 치료받을 기회가 줄어들었다. 조선인의 면역력은 일본인보다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 건물, 남산의 조선신궁 등을 철거한 한국 정부의 결정이 과거를 침묵 시키는 협소한 반(反)정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흔적을 지우려 한 일제와 기분 나쁠 정도로 닮았다고 책의 에필로그에서 지적했는데.

“경복궁 복원 사업에 반대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거다. 경복궁은 어쩔 수 없지만 남산 같은 경우 식민지 시기의 흔적을 되살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 기억하기가 가능할 것 같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가령 한국인 희생자를 합사한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규탄하는 집회를 하게 될 때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리라 초등학교 자리에 과거 경성신사가 있었는데 그런 사실이 거의 잊혀졌다. 그 역사를 되살리는 오디오 안내 시설을 설치하면 어떨까. 현재 한·일 갈등의 깊은 뿌리에는 역사 문제가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가령 일제 치하 신사 참배 문제만 해도 교과서에 약간 소개된 내용 말고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조선총독부, 조선인, 일본인 거류민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사 참배의 역사를 신사가 서 있던 공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 간의 역사갈등은 한국만 제대로 기억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두 나라 사이에 합의된 역사 기억이 가능하다고 보나.

“어렵다고 본다.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한다. 결국은 미국까지 포함해서 한·미·일의 역사를 함께 봐야 한다. 왜냐면 미국은 가령 한국인 위안부 문제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2차 세계대전 직후 냉전 체제에 일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식민 통치에 대해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넘어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식민 치하 조선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행위자들의 복잡한 작용을 세밀하게 알아야 한다.”

미국이 그런 인식에 따라 현재 한·일 갈등을 푸는 데 중재역할을 하려면 역시 엘리트 지도층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까.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많은 미국 사람들이 자국의 이익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남·북한 분단 문제만 해도 미국이 일정한 역할을 했음에도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미국 지도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연구자 입장에서는 자꾸 이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알고 있는 동아시아 역사를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거다.”

한국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실제 삶이 어땠는지 재창조하는 데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 사람들의 경험을 왜곡시키는 획일적인 연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어떤 상황이 당시 모든 조선인에게 똑같이 좋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진 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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