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3)] ‘대학생 세계 챔프’ 기네스 기록자 박찬희 교수 

“손 두 개, 눈 두 개 같은 조건, 상대 못 이기는 건 노력 부족” 

한국 복싱 최고 테크니션… 필리핀 영웅 파퀴아오 “박 선생이 내 롤 모델”
세계 챔프 5차까지 방어… “지는 날이 그만두는 날” 24세에 깨끗한 은퇴


▎서울 삼성동에 있는 청담복싱짐에서 글러브를 끼고 펀치를 뻗어 보인 박찬희 교수. 강렬한 눈빛과 정제된 자세에서 챔피언의 포스가 묻어나왔다.
대한민국이 배출한 역대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중에서 가장 주먹이 센 선수는 누구였을까. 술자리 화제로 자주 오르내리는 이 질문에 대해 “중량급은 박종팔(WBA·IBF 슈퍼미들급, 46승 39KO승), 경량급은 김태식(WBA 플라이급, 17승 13KO승)”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다. 그렇다면 가장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는 누구였을까. ‘4전 5기 신화’의 주인공 홍수환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복싱 전문가들의 의견은 한 사람으로 집약된다. 바로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지낸 박찬희다.

서울 한영고 1학년 때 아마추어 데뷔전을 치른 박찬희는 불과 1년 만에 국가대표에 뽑혀 1974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고교생 금메달리스트’가 된다. 146승 2패의 놀라운 아마추어 성적을 남기고 프로에 데뷔한 박찬희는 동아대 3학년이던 1979년 ‘링의 대학교수’라 불리던 미구엘 칸토(멕시코)를 15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WBC 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최초의 대학생 세계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핸섬한 얼굴과 깔끔한 복싱 스타일로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박찬희는 5차 방어에 성공하며 롱런의 길을 트는가 했으나 숙적 오쿠마 쇼지(일본)와의 세 차례 대결에서 모두 패한 뒤 미련 없이 글러브를 벗었다. “내가 지는 날이 복싱을 그만두는 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 링을 떠난 건 스물네 살 한창나이였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조기 은퇴지만 그는 그렇게 화려한 불꽃을 피운 뒤 사라졌다. 복싱인들은 “박찬희가 아까운 나이에 링을 떠났지만 한국 복싱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테크니션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새 이순(耳順)을 넘어 초로의 신사가 된 박찬희(63) 선생을 만난 곳은 서울 삼성동 청담복싱짐(관장 김영길)이었다. 이마가 살짝 벗어지긴 했지만 눈매는 여전히 날카로웠고 펀치를 내뻗자 ‘쉭쉭’ 바람 소리가 났다. 챔피언과 함께 4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현재는 서울 강서구에 있는 KBS 스포츠예술과학원 무예 스포츠 지도교수로 있습니다. KBS와 SBS 해설위원으로도 활약했고 공군사관학교 복싱 지도교수로서 생도들을 지도하기도 했지요. 1981년 은퇴한 뒤 80년대 후반까지 부산 사직동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했어요. ‘태극체육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내가 세계 타이틀매치 때는 이마에 태극기를 두르고 등장했거든요. 그 후 서울로 올라와 형님이 하시는 식당 일을 돕기도 했고요. 지금은 제 도움이 필요한 선배 후배들을 도우면서 살고 있습니다.”

복싱을 늦게 시작하고도 금세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요.

“중학교 3학년 때 헤비급 라이벌 조 프레이저와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를 보면서 권투의 매력에 빠졌고 바로 체육관에 등록했지요. 권투 시작한 지 1년 만인 73년 3월 한영고 1학년 때 서울시 신인대회에 첫 출전 했는데 한참 선배들을 모두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74년 4월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김치복을 물리치고 최연소 국가 대표가 됐습니다. 그해 9월 고교 2학년 신분으로 방콕 아시안게임 라이트플라이급 금메달을 땄지요. 76년 3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킹스컵 대회 결승에서 홈 링의 파야오 푼라트를 꺾고 금메달과 함께 대회 최우수선수에 뽑힌 기억도 생생합니다.”

실업팀 뿌리치고 동아대 진학 ‘학사 복서’로 인기


▎WBC 플라이급 4차 방어전에서 아르넬 아로살(필리핀)을 판정으로 꺾은 박찬희.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억울하게 메달을 놓쳤는데요.

“라이트 플라이급 8강에서 우승 후보인 쿠바의 호르헤 에르난데스를 만났습니다. 쿠바는 세계적인 복싱 강국이고 당시 한국이야 이름도 모르는 나라 아닙니까. 내가 분명히 우세한 경기를 했는데 심판 다섯 명 중 두 명은 내가 이긴 걸로, 두 명은 진 걸로 채점을 했어요. 마지막 심판은 동점을 줬는데, 아마추어 경기에서는 무승부가 없잖습니까. 그 심판이 쿠바 선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2대3으로 억울하게 졌어요. 결국 그 쿠바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날 밴텀급 황철순과 라이트급 최충일도 판정패하면서 메달 후보가 모조리 탈락하고 말았어요. 석연찮은 판정만 없었어도 내가 양정모(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보다 먼저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을 겁니다.”

고교 졸업 후 여러 실업팀의 입단 제안을 뿌리치고 동아대에 진학했는데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는 권투 선수를 깡패나 거지 보듯 했거든요. 못 배우고 가난하고 주먹밖에 쓸 줄 모르는 놈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강했죠. 난 그걸 깨고 싶었어요. 권투 선수도 대학에 진학하고, 정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운동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동아대 손영찬 감독님의 탁월한 지도 역량에도 믿음이 갔고요. 결과적으로 동아대 가서 실력이 확 늘었고, 세계챔피언이 된 후 ‘최초의 대학생 세계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고 ‘학사 복서’라는 명예로운 별명도 얻게 된 거죠.”


▎오쿠마 쇼지(일본)와의 WBC 플라이급 6차 방어전에서 9회 다운되는 박찬희.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억울한 판정패로 금메달을 놓친 박찬희가 4년 뒤 올림픽을 도모하는 건 나이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박찬희는 1977년 과감하게 프로로 전향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신의 한 수’가 됐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보이콧함으로써 반쪽 대회가 됐고 한국도 막판에 출전을 포기했던 것이다.

박찬희는 146승 2패의 빛나는 아마추어 성적을 남기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거물 신인’의 프로 데뷔전은 한·일전으로 치러졌다. 일본의 강호 무토 슈지를 맞아 박찬희는 현란한 테크닉을 과시하며 1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선수의 세컨드(링사이드에서 선수를 도와주는 역할)가 박찬희 쪽으로 찾아와 “박찬희 선수는 분명 세계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0전 9승(5KO) 1무승부를 기록 중이던 박찬희는 세계 타이틀매치에 도전할 기회를 잡았다. 상대는 ‘링의 대학교수’ 미구엘 칸토. 68전을 치른 노장 칸토는 교과서적인 복싱을 구사하며 WBC(세계권투평의회) 플라이급 타이틀을 14차례나 방어한 선수였다. 칸토는 “도전자는 아직 어리다”며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1979년 3월 18일 밤, 8000여 관중이 꽉 들어찬 부산구덕체육관에서 경기가 열렸다. 박찬희는 경기 초반 빠른 몸놀림을 바탕으로 짧은 소나기 펀치를 퍼부으며 기선을 제압했다. 대학생 도전자의 패기와 테크닉 앞에 대학교수 챔피언은 쩔쩔맸다. 승기를 잡은 박찬희는 3분씩 뛰는 매 라운드 2분 이후에 공격을 집중하는 포인트 위주 전략으로 바꿔 챔피언에게 반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15회가 끝나고 판정이 내려졌다. 한국 심판(150대141)과 미국 심판(148대145)이 박찬희의 손을 들어줬다. 멕시코 심판까지도 147대 146, 박찬희 우세로 채점할 정도로 완벽한 경기였다.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둔 박찬희는 한국의 8번째 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동시에 한국은 3체급 챔피언을 보유(WBC 주니어플라이급 김성준, WBC 슈퍼라이트급 김상현)하는 황금기를 맞았다. 경기 후 칸토는 “도전자의 기술이 뛰어났다. 스피드를 못 잡은 게 패인이었다”며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박찬희와 칸토의 경기는 화끈한 KO 승부는 아니었지만 한국 프로복싱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승부였다.

두 달 간격 방어전, 피로 누적으로 체력 방전


▎WBC 플라이급 3차 방어전에서 맞붙은 멕시코의 강타자 에스파다스(왼쪽). 박찬희가 2회 KO로 이겼다.
칸토와 2차 방어전에서 다시 만나 무승부로 타이틀을 지켰죠. 3차 방어전이 박찬희의 인생 경기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칸토와 같은 멕시코 출신 구티 에스파다스는 31승 24KO승을 거둔 강타자였어요. 홍수환과의 두 차례 경기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KO 머신’ 알폰소 사모라를 연상시킬 정도로 다부지고 강했어요. 전문가들도 ‘박찬희가 그 펀치를 견뎌낼까’ 걱정이 많았죠. 역시나 1회전 1분도 안 돼 가벼운 훅을 맞고 엉덩방아를 찧었어요. 나는 크게 대미지를 입지는 않았는데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에스파다스가 밀어붙이더라고요. 파고들어오는 에스파다스 안면에 카운트 펀치를 꽂았죠. 1회 두 번 다운시키고, 2회 속사포 펀치로 경기를 끝냈어요.”


▎1978년 개봉한 영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에서 복싱 지망생으로 출연한 박찬희(오른쪽).
본인은 펀치가 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의외로 KO승이 좀 있네요. 23전 17승(6KO) 2무 4패인데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복싱을 시작해 2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잖아요. 나한테 복싱 DNA가 있기는 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연타 능력과 테크닉은 누가 가르쳐줬다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터득한 게 많거든요. 그리고 나는 빠른 발을 이용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잽을 던지는 스타일입니다. 펀치를 많이 날리면 ‘꽝’ 하고 박히는 무거운 펀치를 날리기 힘들어요. 대신 펀치를 정통으로 잘 맞지도 않지요. 움직이면서 상대 펀치를 피하거나 맞아도 정타로 맞지 않으니까요. 권투 선수들은 한 대 맞으면 하늘이 노랗다, 골이 빈 것 같다는 말을 하는데 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5차 방어까지 하면서 롱런의 길이 열렸는데 의외로 일본의 노장 오쿠마 쇼지한테 무기력하게 9회 KO패를 당했죠. 80년 5월 18일이네요.

“그 내용은 당시 인기 스포츠 잡지였던 [주간스포츠]에 잘 소개돼 있어요. (박찬희의 컨디션은 18일 밤 최악의 상태였다. 오쿠마가 아니고 ‘더 형편없는 복서와 싸웠어도 질 수밖에 없었다’고 복싱 전문인들은 입을 모았다. 2회부터 스피드와 스태미너가 처진 상황에서 9회 53초까지 버텨온 것이 기적일 정도. 최악의 컨디션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인은 배탈이었다고 했다. 구시켄 요코의 방어기록(12차전)을 따라잡겠다던 박찬희의 꿈은 6차례에서 깨져버리고 말았다.-80년 5월 28일 자 [주간스포츠] 경기 당일은 라커룸에서 진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황해·황정순·김추련 등이 주연하고 박찬희도 출연한 영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의 포스터.
경기 이틀 전 공개 스파링 때도 컨디션이 좋았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한물간 일본의 오쿠마 정도는 초반에 KO시킬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2개월 간격으로 여섯 차례나 세계 타이틀매치를 하면서 누적된 피로가 그때 터져버린 거죠. 1회 끝나고 나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세컨드에게 ‘제발 수건 좀 던져 달라’고 경기 포기를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수건을 던지면 매니저에게 맞아 죽을 것 같으니까 세컨드가 수건을 안 던지는 겁니다. 속으로 오쿠마에게 ‘야, 제발 한 방만 제대로 쳐라’고 빌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상대 펀치가 날아오면 무의식적으로 피하거나 커버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8회까지 버티다가 9회 보디가 정통으로 들어오기에 그거 맞고 주저앉아버린 거죠.”

그렇게 힘들었나요?

“팬들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그 경기 끝나고 나니까 세계챔피언 됐을 때보다 더 시원하더라고요. 당시엔 프로 스포츠라고 해봐야 복싱과 레슬링뿐이었잖습니까. 세계 타이틀매치 한 번 하면 중계권과 입장권 등 수입에서 나한테 3000만 원 정도 떨어졌어요. 강남의 아파트 한 채가 넘는 돈이죠. 매니저는 나보다 훨씬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두 달이 멀다 하고 15라운드짜리 타이틀매치를 잡은 거죠. 나는 시합 앞두고 체중을 3kg 정도 뺐는데 다른 선수보다는 나았지만 워낙 뺄 살이 없는 상태라 그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소변으로 수분을 빼야 하는데 오줌 눌 힘도 없어서 벽에 기대고 서서 밑에 대야 같은 걸 받치면 후배가 ‘하나, 둘, 셋’ 하고 배를 확 눌러줘요. 그러면 소변이 찔끔 나오고 그랬죠.”

박찬희는 테크닉은 좋지만 체력과 근성이 약하다는 말이 나왔죠.

“하늘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주진 않잖아요. 박찬희는 몸도 빠르고 테크닉도 좋은데 거기다 체력과 펀치력까지 세면 영원히 해 먹겠죠. 하늘이 ‘김태식은 주먹 센 걸로 챔피언 해봐라, 박찬희는 테크닉으로 해봐라’ 하신 거죠. 내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스타일이라 체력 소모가 다른 선수에 비해 많습니다. 지금은 세계 타이틀매치도 12라운드만 하잖아요. 내가 뛸 당시에 12라운드를 했다면 더 오래 챔피언을 했겠죠. 내가 오쿠마한테 챔피언 뺏기고 그 뒤로 두 번이나 더 15회 판정으로 지니까 ‘박찬희가 술과 여자에 빠져 훈련을 게을리한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전혀 아닙니다. 챔피언이 되고 나서는 거의 하루 24시간 내내 트레이너 또는 매니저와 붙어 다녔는데 뭘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죠.”

박찬희는 1980년 10월 18일 일본 센다이에서 오쿠마와 리턴 매치를 벌인다. 이번에는 1회 다운을 뺏는 등 확실하게 앞선 경기를 했지만 결과는 1-2 판정패였다. 응원 왔던 교민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 결국 한 번 더 경기하기로 했다. 1981년 2월 3일 도쿄에서 열린 경기에서도 박찬희는 초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후반 체력이 달려 판정패하고 만다. 깨끗이 링을 떠난 그는 얼마 후 결혼을 했고, 현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경기당 3000만원 받았지만 연기처럼 사라져


▎“박찬희 선생을 롤 모델로 삼고 훈련했다”는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오른쪽).
‘학사 챔프’ 박찬희는 현역 시절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하이틴 스타로 유명했던 탤런트 김보연과의 염문설도 있었다. 그는 “74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고교생으로 금메달을 딴 뒤에 하이틴 잡지에 표지모델로 나온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같이 표지모델을 한 인연으로 김보연씨와 만난 적은 있어요. 그렇지만 당시에는 운동에 전념할 시기라 연애는 꿈도 못 꾸었죠”라고 말했다.

1978년에는 황해·황정순·김추련 등이 주연한 영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에도 출연했다. 언어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서 자라는 4남 2녀의 애환을 담은 영화였는데 박찬희는 학교를 안 다니고 복싱을 배우는 셋째 아들 역할을 맡았다. 80년에는 당대 톱 가수 조용필에게 방송사 PD가 “박찬희와 함께 나오면 출연시켜준다”고 했다고 한다.

한 번 게임을 뛰면 3000만원을 받았던 박찬희의 ‘맷값’은 어디로 갔을까. 당시 스타 복서들이 벌었던 돈처럼 연기처럼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박 교수는 “은퇴할 때 현금 1억5000만 원 정도 있었어요. 보증 잘못 섰다가 떼이고, 사업한다는 지인들 빌려줬다 못 받고 해서 2년 만에 날려버렸죠”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한영고 복싱부 선후배로서 40년 이상 친형제 못지않은 우애를 쌓아온 박찬희 교수와 김용일 대표(오른쪽).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 기회도 있었다. 현역 시절 서울시 고위 간부와의 저녁 자리에서 ‘양재동 말죽거리에 땅을 좀 사 놓으면 어떠냐’는 얘기를 들었다. 박찬희는 “거기가 다 논밭이라는데 제가 농사지을 일이 있습니까”라며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러자 그는 사당동 얘기를 했다. 박찬희는 또 “거기는 산이라는데 제가 나무 심을 일이 있습니까” 했다. 그 간부는 “사 놓으면 좋을 텐데…” 혼잣말을 하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당시 말죽거리 땅값이 평당 5만원도 안 됐으니 1000평만 사 뒀어도 박찬희는 노후 걱정 없이 살았을 것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박찬희를 이끌어준 사람은 한영고 복싱부 후배인 김용일 광창철강 대표다. 김 대표는 박찬희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공군사관학교 복싱 교수로 추천해주기도 했다. 박찬희 교수는 사관생도들을 가르치면서 “권투라는 운동은 ‘사각의 링’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 정직하게 두 손만 갖고 상대와 1대 1로 맞서는 외로운 운동이다. 전투기 조종사도 전시에는 하늘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적과 1대1로 마주해야 한다. 복싱을 통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이겨내는 정신력과 체력을 키우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 중에 박 교수는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지난해 어떤 행사에 초청받아 즉석에서 섀도우 복싱을 잠시 보여준 장면이었다. 영화 ‘록키’ 주제가에 맞춰 풋워크를 하는데 ‘빨리감기’를 한 것처럼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완벽한 스텝과 자세전환, 굳건한 커버링과 쉴 새 없이 뻗어 나오는 주먹에 객석에서는 탄성이 끊이지 않았다. 박 교수는 “지금도 세계챔피언과 맞붙어도 1~2라운드는 대등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다음은 안되겠지만…” 하며 웃었다.

지금도 아시아권에서는 ‘학사 챔피언 박찬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해 박 선생은 필리핀의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를 만났다. 파퀴아오는 “박찬희 선생은 내 복싱의 롤 모델이셨다. 그의 테크닉을 닮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말했다. 동남아 국가 중에서는 그를 국가대표 감독으로 모시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박 교수는 한국 프로복싱의 존재감이 갈수록 흐려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화려한 테크닉이나 화끈한 펀치력을 갖추고 대중에 어필할 매력적인 ‘스타 복서’가 나오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남다른 노력으로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레전드였다.

박찬희의 복싱 철학은 이것이었다. “복싱은 두 선수가 동등한 조건에서 맞붙는 것이다. 손도 두 개, 발도 두 개 똑같다. 체중도 거의 같다. 같은 조건의 상대를 이기지 못하는 건 내가 그만큼 노력하지 않아서다. 따라서 내가 링에서 지는 날이 은퇴하는 날이 될 거라는 각오로 오늘도 링에 오른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03호 (2020.0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