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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16)] 금배지 다는 ‘우생순’ 임오경 전 핸드볼 국가대표 

“인생은 네잎클로버 찾기 과정의 고통 견뎌야 행복 보여” 

199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총선 경기 광명갑 출마해 당선
“여성 인권 보호·향상에 주력, 스포츠 발전에도 역할 할 것”


▎임오경 당선인이 지역 주민을 섬기고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는 각오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임오경(49)은 스포츠 레전드다. 전북 정읍여고 2학년 때 핸드볼 국가대표가 된 임오경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의 주역이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혼과 출산 후 대표팀으로 복귀하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따냈다. 이 스토리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400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임오경은 현재 국회의원 당선인 신분이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영입 인재 15호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에리사(탁구), 조훈현(바둑) 등 스포츠 분야 레전드들이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것처럼 그도 비례대표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당은 지난 연말 그에게 지역구 출마를 권했다. 임오경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결국 당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광명갑 지역구에 전략공천된 그는 45일간 바닥을 샅샅이 훑는 선거전략으로 총선에 임했다. 임오경은 4만3019표(47.66%)를 얻어 당당히 금배지를 달게 됐다.

전임 백재현 의원이 쓰던 사무실을 물려받은 임오경 당선인을 그곳에서 만났다. 그는 “금메달보다 금배지가 더 소중하다. 국민과 지역구 주민의 뜻을 소중히 받드는 국가대표 의원이 되겠다”고 했다.

여론조사 볼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만나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 은메달을 딴 한국 대표팀.
왜 하필 광명이었나요?


▎2004 아테네 올림픽 핸드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슛을 하는 임오경.
“이 지역구 현역인 백재현 의원이 지난해 12월 불출마 선언을 했어요. 당에서 여론조사를 돌려본 뒤 결정한 것 같아요. 조직에 오래 있어본 경험으로 조직이 생각 없이 제안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조직을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했을 뿐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죠. 울면서 결정했지만 딱 결정하니까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제 고향이 전북(정읍)이니까 전북 어디에 나가든 당선 가능성이 99%라고 했어요. 그렇지만 그건 제가 싫었죠. 거저 받는 거 같았으니까요. 제 성격과도 맞지 않았고.”

정치 초년생이 전혀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선거 운동을 했는데요, 뭐가 제일 힘들었나요?

“육체적으로 힘든 건 견딜 수 있는데 사람과 얽히면서 정신적으로 힘든 건 견디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당헌당규에 현역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곳은 전략 공천 지역이라고 나와 있어요. 그렇지만 여기서 6개월 이상 출마를 준비한 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의 지지자들이 저한테 질책을 했어요. 그분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자책감으로 일주일 내내 울었어요. 사람들은 저를 ‘백재현이 심은 아바타’라고 거짓 소문을 냈어요. 그렇지만 이미 출발을 했는데 뒤돌아 갈 순 없잖아요. 3월 1일에 출마 지역이 언론에 발표된 뒤 다음 날 옷가지·화장품·침대만 갖고 이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어떤 방향으로 선거 전략을 짰나요?

“아무 연고 없는 곳으로 날아온 셈이 됐으니 지역 주민에 죄스러운 마음이 너무나 컸고 이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진실성과 믿음을 보여드리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임오경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대접만 받아왔는데 낮은 자세로 다가가서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정말 많은 분을 만났죠. 그랬더니 자신들이 생각한 거랑 많이 다르다, 언론이나 TV에 나오는 임오경이랑 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운동선수 출신이라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말도 잘 못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해요. 저는 항상 편견을 깨기 위해 살았거든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 운동한다는 인식이 싫어서 대학을 갔고 박사까지 땄어요. 행동하는 사람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죠. 그래서 선거 운동 과정에서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게 두렵지 않았어요.”

유권자들이 기성 정치에 대해 불만이 많았을 텐데요.

“동물국회·식물국회 같은 말들이 많았잖아요. ‘당신도 우리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국회 가면 싸우지 않을 거냐’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는 ‘싸움이 필요할 땐 싸우겠지만 국민을 위해 싸우겠다’고 했어요. 저는 어떤 직위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삶의 어려움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어떻게 바꿔나갈까 고민하겠다고 했어요. 이곳(광명갑)은 광명시장·새마을시장이 있는 구도심과 아파트 단지가 있는 신도심으로 확연히 나눠집니다. 저는 구도심 쪽으로 더 자주 갔어요. 시장 상인들을 많이 만났죠. 45일간 선거 운동을 하면서 어느 집 아들이 무슨 차를 탄다는 것까지 다 알게 됐어요. 서민들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직접 물어보고 접하면서 답을 찾았죠.”

45일 선거운동, 39년 핸드볼 인생보다 길어


▎정읍여고 시절 국가대표가 돼 태극마크를 단 임오경.
그분들의 구체적인 요구는 무엇이었나요?

“코로나19로 인해 너무 힘들다며 경제 좀 풀어 달라고 이야기하셨어요. 시장에 가도 품목에 따라 온도 차가 있더라고요. 먹는 건 그나마 좀 버티는데 옷가게나 가방가게 등은 손님이 너무 없어요. 이제 시민들도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시장에서 옷을 사기보다는 아울렛이나 대형 마트를 찾는구나 싶었어요. 업종 변경에 대해 컨설팅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십인십색(十人十色)이라고, 각자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다른데 그분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항상 메모를 하게 됐죠. 택시기사를 만나면 ‘쉼터가 없다’고 하시고, 주부나 회사원들은 ‘운동할 곳이 없다. 체육관이 없다’면서 스포츠 인프라를 조성해 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어느 하나에 포커스를 맞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메모를 다 하면서 ‘이건 해줄 수 있고, 이건 논의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무조건 해줘야지’ 하는 분도 있었어요. 저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당장 해줄 수 없는 걸 된다고 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죠.”

언제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나요?


▎아테네 올림픽 은메달을 걸고 개선해 딸과 입 맞추는 임오경.
“저는 한 번도 이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주변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더라고요. 저쪽으로 간 분이 다시 오기도 하고요. 그럴 때마다 ‘나는 스포츠인이다, 거짓말을 할 수 없다. 핸드볼도 종료 버저가 울려야 경기가 끝나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승패는 알 수 없다. 개표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고 스스로 다그쳤어요. 보좌진이 당선 가능성이나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그런 이야기 안했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저는 광명 시민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갖고 1초라도 더 시간을 내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표 순간까지 승패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나요?

“정말입니다. 중앙당에선 ‘대통령 지지도 올라가면 이 지역은 가능성 있다. 문재인 지지율+당 파워가 있으니까 후보 인지도만 좀 더 올리면 된다’고 했어요. 당에선 여론조사를 보니 여기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지원 유세를 안 해주더라고요.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 중앙당에 전화해서 ‘왜 아무도 유세 안 도와주세요’ 했더니 선거 사흘 전에 지원 유세단이 오시더라고요. 하하.”

당선 확정된 순간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그날 한 끼도 못 먹었어요. 긴장돼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당선 확정’이라는 발표가 날 때까지 숙소에 머물렀죠. 밤 11시 반쯤 선거 사무소에 도착했어요. 당선 인사하고 새벽 5시쯤 당선증을 받으러 가는데 그동안 계속 눈물만 나오더라고요. 올림픽에서는 마지막에 금메달을 따면 기쁨의 눈물이 나오고 그걸로 끝나는데, 국회의원 선거는 그게 시작이더라고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다들 ‘우리가 뽑아줬으니 잘해야 합니다’고 하셔요. ‘감사합니다. 잘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는데 ‘아, 이제 시작이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선거 운동 45일이 39년 핸드볼 인생보다 더 길었는데 끝났다 싶은 순간이 다시 시작이더라고요. 올림픽 금메달이랑 금배지랑 어느 게 더 힘들까 생각했는데 정치는 당선부터 시작이니까 금배지 다는 게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오경은 한국체대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갔다. 히로시마 메이플레즈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면서 2부에 있던 팀을 1부로 끌어올린 뒤 무려 8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결혼과 출산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건너뛴 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했다. 2008년 귀국해 서울시청 핸드볼팀 창단 감독을 맡아 팀을 11년간 이끌었다. 말주변이 좋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올림픽 때는 TV 해설을 했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가끔 출연했다. 여성 스포츠인의 성 평등과 인권 향상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고, 여야를 막론하고 각 정당의 영입 러브콜을 받아왔다.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을 다 겪으면서 운동을 계속하셨습니다. 여성이 겪는 불평등에 대해 생각이 많으셨을 텐데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전 일본에서 뛸 때인데 몸 상태가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임신이라고 해요. 운동선수에게 올림픽은 단순한 대회가 아니라 인생 최대의 목표거든요. 선수로서 전성기였는데 올림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분이 일본 소속팀의 회장님이었어요. 한국에서는 운동선수가 임신하면 바로 은퇴니까 회장님께 운동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회장님이 ‘일본에서는 아이 낳고도 회사를 다닙니다. 임신했다고 왜 운동을 그만두고 한국에 갑니까. 아이 낳고 바로 복귀하세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너무 고마웠죠. 3월에 임신 사실을 알고 6월 말까지 감독 겸 선수로 경기를 뛰었어요.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13초 남기고 동점을 만든 뒤 우승을 했고, 양수가 터져서 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아이 낳고 2주 만에 복귀했죠. 너무 고마웠으니까요.”

한국 현실과는 너무 다르네요.

“제가 아이를 좋아해서 둘째, 셋째도 낳고 싶었어요. 근데 더 못 낳아서 미안했죠. 39살에 한국에 돌아와서 서울시청 감독을 하면서 선수로도 뛰었어요. 아이들이 부상당하면 제가 메워야 했으니까요.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선수들 결혼도 시키고 아이도 낳게 하고 싶었는데 비정규직·계약직이라 안 되더라고요. 부상도 길어지면 은퇴해야 하고…. 그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당시 스포츠법학회라는 게 생겨서 ‘여성 운동선수들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나는 아이를 하나밖에 낳지 못했다. 후배들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막 얘기를 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자꾸 얘기하다 보니 내 분야만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아이 많이 낳고 싶었지만 한국은 힘들어


▎서울시청 감독 시절 임오경(오른쪽)은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경단녀(경력단절 여성)·유리천장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어느 분야에도 존재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그걸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은 어디가 돼야 할까요?

“단순히 이야기하면 ‘정규직’이죠. 비정규직 입장에서는 정규직이 너무 부러워요. 정규직 사람들이 하루 8시간 일하는데 내가 정규직만 되면 더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저는 서울시청에서 11년을 비정규직으로 있으면서 같은 비정규직인 우리 선수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면 아이 낳고도 계속 회사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하나는 육아 문제입니다. 집이나 직장 근처에 돌봄센터가 있다면 출근길에 아이를 맡기고 홀가분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겠죠. 저희 지역구에 스포츠 아레나를 만든다면 돌봄센터를 당연히 넣을 겁니다. 그래야 일자리 창출도 되고 삶의 질이 높아지겠죠. 물론 정규직이 쉬운 건 아니라서 정규직 전환이 아니더라도 5년, 10년 장기 계약을 하거나 무기 계약직을 하게 되면 장래에 대한 불안감 없이 일에 열중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임 당선인이 정치를 하겠다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스포츠계 미투(me too)와 성폭력 등 여성 스포츠계 인권 개선인데요.

“미투는 이미 알려진 부분 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어요. 이건 운동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의 문제인데도 유독 스포츠 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죠. 코치에게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선수의 이름이 지금도 계속 거론되는 게 저는 너무나 마음 아픕니다. 처벌을 강화해서 가해자는 아예 스포츠계에 발을 못 들여놓도록 해야 합니다. 법만 강화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과 제도도 손을 봐야죠.”

어떤 게 필요합니까?

“교육과 프로그램이 다 필요하죠.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성(性) 인지 교육을 해야 하고, 특히 전문체육을 시작하는 아이들과 지도자들에게 성 인지 프로그램 이수를 의무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 과정에서 투명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지도 행위는 CCTV가 설치된 체육관 안에서 해야 하고, 인권 보호 차원에서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는 라커에서는 일대일 지도를 할 수 없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봅니다.”

2020년 도쿄 올림픽이 1년 연기됐습니다. 대부분 환영하는 분위기지만 몇 년 동안 준비한 선수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도 있는데요.

“자가격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습니다. 이럴 때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연기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림픽을 세 번 경험한 제 입장에서는 4년을 준비한 올림픽·패럴림픽 선수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코로나는 세계적 재난이니 스포츠 분야에서도 한 발짝 물러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임오경은 서울시청 감독을 하면서 한국체대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필자는 그와 박사과정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다. 토론식으로 진행된 스포츠사회학 강의 시간에 “핸드볼은 직접 보면 정말 재미있는 종목인데 사람들이 왜 보러 오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열을 올리던 그를 기억한다.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으면서도 소위 비인기 종목의 설움도 톡톡히 겪은 그가 한국 스포츠 전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솔루션을 제시할 거라고 스포츠인들은 기대한다.

학교 운동시설 일반에도 개방해야


▎선거 운동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 앞에 선 임오경 당선인.
대한민국은 스포츠 강국에서 스포츠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습니다. 이를 상징하는 슬로건이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일반 학생’인데요.

“공부하는 운동선수에 대해선 백번 찬성이죠. 그런데 유예 기간, 적응 기간을 줬어야 합니다. 중간에 끼어 있는 사람은 무슨 죄인가요. 공부하는 선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운동을 이제 시작하는 학생부터 접목시켰으면 그 아이가 나중에 대통령도 될 수 있겠죠. 그런데 최저학력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대회 출전을 금지하는 제도 등의 유예 기간을 2년만 줬어요. 그럼 대학 1, 2학년 선수, 고 1, 2학년 선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건 전쟁인데요, 그렇다고 이제 돌려놓기도 힘듭니다. 지금 대학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수위 조절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특혜를 주란 얘기는 아닙니다. 시작한 지가 한 3년 됐으니 5~6년 뒤에는 기반이 잡힐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반 학생의 운동 기회도 늘려줘야 할 텐데요.

“정부가 학교체육을 활성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자식이 아파서 만날 병원 가는 사람들 많아요. ‘공부 못 해도 좋으니 제발 아프지만 말아 다오’라고 부모는 빕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벌써 척추측만증이나 비만으로 고생합니다. 학생의 40% 정도가 상담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잖아요. 그 아이들이 욕구불만을 분출할 수 있는 건 신체활동밖에 없어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신체활동을, 그것도 학교 안에서 할 수 있도록 다목적체육관, 수영장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 시설을 새벽이나 저녁에 일반인에게 개방하면 스포츠 인프라를 이중으로 만들 필요가 없어요. 교육부·문체부·보건복지부가 영역 다툼만 할 게 아니라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면 해결 방안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건강한 나라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 다 할 것”


▎임오경 당선인은 “45일 선거 운동이 39년 핸드볼 인생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 사진:임오경
국회에 들어가서 맡고 싶은 상임위나 발의하고 싶은 법안이 있나요?

“저는 스포츠인으로서는 사회 활동을 많이 한 편이라 저출산, 성폭력 근절 등 일반인의 생활에 관심이 많아요. 임오경은 체육인이니까 문체위에 가야 한다고 한계를 짓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여성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법안이 통과되고 잘 시행될 수 있도록 챙기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선으로서 다른 분들이 잘 살피지 않는 분야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기존에 드러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광명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됐는데 지역 발전에 대한 구상은 무엇인가요?

“광명은 신도시와 구도시의 격차가 너무 큰데 그걸 좁혀서 도시의 균형 발전을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재건축·재개발·뉴타운·하천 정비 등 승인이 다 떨어진 사업이 많더라고요. 새로운 걸 하기보다는 이미 결정된 사업이 스톱되지 않도록 잘 연결하겠습니다. 또 광명은 생활 인프라가 너무 부족하고 잠자는 동네, 베드타운이 돼버렸어요. 낮에는 서울과 인근 도시에 있는 직장으로 다 빠져나갑니다. 광명에 있는 건 KTX 광명역, 이케아, 광명동굴, 폴리텍 대학 정도지요. 복합 스포츠 시설인 스포츠 아레나를 만들고 프로 스포츠단을 유치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해 광명을 빠져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찾아오는 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았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본인이 어떤 노력을 해왔나요.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 ‘저 감독 누가 안 데려가나’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할 정도로 힘든 지옥훈련을 견뎌냈어요. 그렇게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시상대에 올라갔을 때 눈물범벅 속에서 그동안의 희로애락이 한순간에 스쳐갔어요. 저는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은퇴하려고 했죠. 그런데 마흔이 넘도록 가장 길게 현역으로 뛴 선수가 됐어요. 왜 내 다리가 남자처럼 두꺼워져야 하나, 왜 근육파열에다 얼굴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운동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게 결국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제2의 임오경’을 꿈꾸는 후배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임 당선인은 뜬금없이 ‘네잎클로버’ 얘기를 꺼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풀밭에서 네잎클로버 찾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아요. 풀숲을 이 잡듯이 뒤지다가 네잎클로버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행복하던지요. 그걸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책갈피에 끼워서 고이 보관했잖아요. 인생은 네잎클로버 찾기 같아요. 힘들 때마다 이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깨닫고 견뎌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진부한 얘기 같지만 ‘돈을 잃는 건 일부를 잃는 거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것이다’는 말을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께도 꼭 해주고 싶어요. 저는 대한민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제 모든 걸 바칠 겁니다.”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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