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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논쟁] 기본소득 바라보는 전문가 8인의 ‘시선’ 

‘잘 놀면서 잘사는’ 사회는 올 것인가 

기본소득 논쟁은 낡은 제도의 옷 바꿔 입히는 것 아닌, 판부터 바꾸는 것... 의제화는 환영할 일이지만, 정치적 셈법에 갇히면 지리멸렬하게 될 뿐

기본소득제도는 오랜 논쟁의 역사만큼 접근하는 방법과 해석이 다양하다. 무엇이 정통이고 진리라고 단언할 수 없을뿐더러 무의미하기도 하다. 국내 수많은 연구자 중 자신의 주장이 뚜렷한 8명의 의견을 한데 모았다. 기본소득 논쟁에 관한 연구자들의 주장을 총망라한 [프레시안]을 비롯해 각종 기고와 연구 보고서, 논문 등을 통해 정립된 연구자들의 핵심 의견을 간추렸다.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이후 정치권은 ‘기본소득’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 용두사미로 끝난 ‘경제민주화’ 전철 밟지 않아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불평등 정도가 상위권에 속하는 한국이 이 정도 복지체계를 갖춘 것은 경제민주화와 양극화 이슈가 갈등의 축을 형성하고 선거 쟁점이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진영을 막론하고 경제적 삶과 공정 평등 문제의 하나로 기본소득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문제는 기본소득 쟁점화가 정치 공학으로 변질하거나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슈 선점을 통해 표를 얻는 것을 비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바람직하다. 그러나 실질적 결론 도출보다 언론의 관심을 유도하고 의제 형성을 통한 전시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면 이 역시 민주주의의 지체를 가져올 뿐이다.

사회·경제적 이슈와 특정 정치 세력의 유불리에서 자유로운 사회 개혁이 화두가 된다면 한국 정치도 변화의 실마리를 열어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쟁은 기본소득 자체에만 그치면 안 된다. 복지체계 전반과 사각지대에 방치된 노동자·소외계층을 제도권 내에서 관리 가능한 시스템 차원으로 논의 수준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산업화의 단물과 냉전의 우산에 숨었던 보수 진영도 구각(舊殼)을 벗고 민생과 사회 정의를 위한 의제 설정에 동참해야 한다. 기본소득이 그 접점이 될 수 있다. 진보 진영도 화려한 말의 성찬에 그치지 말고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해야 한다. 2012년 정치권을 달궜던 경제민주화 공약들은 흐지부지 의제에서 사라졌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기본소득은 쉽게 수그러지지 않을 의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비정규직과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구를 고려하면, 기본소득은 복지의 대체냐 아니냐의 논쟁을 포함해 사회 안전망을 모색하는 중대한 변곡점이 돼야 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학술적 정의(定義)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적 변형을 통해서 구조적 모순들이 성찰되고, 사회 변화의 기폭제로서의 의제가 될 수 있느냐의 여부다. 정치권이 기본소득 논제를 선거전략의 정략으로 활용하고, 소모적 이슈로 소비하려면 지금이라도 논쟁을 접는 편이 낫다.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상임이사 | ‘진짜 기본소득 논쟁’을 벌이고 있는가?

유럽 등지의 기본소득 논쟁은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부당성, 노동의 호혜성과 연대성 등이 주제 중심이었다. 반면 지금 한국에서는 코로나19 위기, 재난기본소득, 재난긴급지원금 그리고 여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혁신’을 요구하는 총선 결과 때문에 기본소득이 갑자기 소용돌이 정치의 중심이 됐고, 곧 도입될 수 있다는 착각을 낳고 있다. 지금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내용 측면에서 보면 1939년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서부 전선에서 벌어졌던 ‘가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에 선전포고하긴 했지만, 전면전을 우려해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기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짜 전쟁이라 불렀고, 또 누군가는 우스꽝스러운 전쟁이라 불렀다.

기본소득을 전 국민 고용보험과 대립시키는 주장이 그렇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그 제안자들이 말하듯, ‘완전고용’ 시대와 달리 고용이 불안전하고 불안정해진 시기에 ‘일하는 혹은 일하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 보호하는 소득 안전망’이다. 다시 말해 기존 복지체제의 연장선에 있다.

반면 기본소득은 그 효과가 비슷하게 나올지는 몰라도 앞서 토지와 정보를 비롯한 사회가 일군 공유부(公有富, Wealth of Commons)에 대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몫을 분배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비교할 일이 아니다. 단기간에 ‘고용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전 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하는 것에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굳이 반대할 일도 아니다. 도리어 전 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에서의 노동의 의미와 상태가 제대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사회 상태에 대한 인식부터 지향까지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기존 사회에 기본소득이라는 정책을 끼워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전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제주대 교수 |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6월 4일 국회에서 ‘기본소득’ 등 현안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정치권에 기본소득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이 유령은 곧 닥쳐올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일자리 불안 등을 과장하며 마치 유능한 해법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한다. 복지 수준이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현실에서 사회보장의 실질적 보편주의 달성을 위해 전력 질주를 해야 할 시기임에도 일부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 실체 없는 유령에 정신이 팔렸다.

완전이든 부분이든, 지금까지 기본소득은 어떤 나라에서도 도입된 전례가 없다. 제도 정치권의 좌·우파 모두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복지국가의 주요 정치 세력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본소득을 거부한다. 보편적 사회보장보다 복지·경제·소득 재분배 효과가 현저하게 작기 때문이다.

연간 10~25조원의 재정으로 가짜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5200만 국민 모두에게 매달 1만6000~4만원씩 나눠줄 수 있다. 합리적 결정을 내린다면 모두에게 푼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 고용 안전망 확충 등에 이 소중한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지출 구조조정이든 증세든 간에 연간 10조~25조원의 재정이 추가로 생기면 당연히 사회보장의 실질적 보편주의 실현을 위해 투입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복지국가의 적극적인 사회 정책적 대응은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래에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는 서비스 분야의 저임금·저숙련 일자리를 재정 능력을 갖춘 복지국가가 개입해 적정 일자리로 조정해줘야 한다. 즉 사람의 능력을 키워주는 사회 서비스 분야와 직업훈련 등에 정부 지출을 늘려야 한다. 이것이 기본소득을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경제 효과가 압도적으로 크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는 방식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정부는 더 나은 일자리 창출과 고용보장에 최선을 다하는 포용적 복지국가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 역할의 제약을 초래할 기본소득은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럴 경우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 속에 대다수가 수동적이고 불행한 처지로 내몰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 허망한 기대 앞세워 복지국가 발전 가로막나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의 한 그릇 상점에 재난지원금 사용 시 할인한다는 안내문이 부착돼 있다. / 사진:뉴시스
기본소득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기본소득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사회보험의 사각지대를 확실하게 메울 수 있고,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전체에게 나눠주면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풀린 돈으로 소비 증대를 이뤄 경제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이 막연한 기대감은 허망하다.

기본소득의 정당화 논리로 사각지대 해소를 많이 거론한다. 원리상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하니 사각지대가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급여 수준이다. ‘적용의 사각지대’가 해소돼도 급여가 너무 낮아 소득보장의 의미가 없다. ‘급여의 사각지대’는 그대로 남는다. 기본소득 방식의 소득보장은 너무나 가성비가 낮다. 사각지대 해소는 사회보장 시스템의 적용 확대로 풀 수밖에 없다.

또 다른 기대는 소득 재분배와 양극화 해소다. 그러나 소득이 있건 없건 똑같은 액수를 받으니, 소득 재분배 효과는 미미하다. 고소득층이든 저소득층이든 동일 액수를 받으니 양극화 해소 효과 또한 마찬가지다. 경기부양 효과가 발생할 거라는 기대감도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지급하면 한계소비 성향의 차이로 소비 증대 효과가 반감된다. 복지 원리에 맞게 저소득층과 소득이 없는 집단에 지급하는 것이 경기부양 효과가 훨씬 크다.

온갖 이유를 달고 기본소득 도입을 정치권이 주장하는 이유는 정치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당장 복지급여를 받는 수혜자는 항상 소수다. 반면 기본소득은 모든 유권자가 받는다. 최대 실업급여 198만원을 소수 실업자에게 몰아주기보다 1만5000원을 다수에게 나눠주는 게 표 동원에 유리하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증가일로에 있는 복지비에 더해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해야 하는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자면 기본소득같이 사회·경제적 효과가 떨어지는 제도에 가용자원이 낭비돼선 곤란하다. 정치가들의 표 계산에 한국 복지국가의 발전이 지체될까 걱정이다.

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전 국민 고용보험 대 기본소득’ 대결은 부당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우려는 기본소득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사진은 자율주행 테스트 모습. / 사진:폭스바겐
일각에선 전 국민 고용보험을 먼저 도입하고 기본소득은 차차 고민하자고 주장한다. 전 국민 고용보험만 실현하는 데도 연 10조원 이상의 재정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기본소득까지 한꺼번에 실현하려 했다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한 잘못된 대립 구도다. 전 국민 고용보험과 기본소득 모두 처음부터 천문학적인 재원이 소모되는 것은 아니다.

2020년 실업급여 중 구직급여 예산은 본예산이 약 9조5000억원이다. 얼마 전에 편성한 3차 추경에서 약 3조4000억원이 추가돼 합하면 약 13조원이다.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다만 이 돈이 조세로 충당되는 일반회계에서 지출되는 경우에 그렇다. 사실 고용보험 예산은 조세가 아니라 고용보험기금이 재원이며, 고용보험기금은 노사의 고용보험료로 조성된다. 현재 한국의 실업급여 보험료율은 1.6%(노사가 절반씩 부담)로, 16개 선진국 평균인 2.6%에 크게 못 미친다. 현재 가입 대상이 아닌 공무원, 사립학교 교직원, 군인 등 특수직역연금 가입자도 고용보험에 가입시켜 보험료를 납부하게 한다면 고용보험기금 확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에는 돈이 많이 드는가? 이번 긴급재난지원금처럼 매달 1인당 40만원씩 지급하는 것은 정부 재정을 고려할 때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이 정도도 지급하지 않으면 최저생계를 보장하기엔 턱없다. 그런데도 필자는 다만 매달 1만원이라도 기본소득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은 복지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왜 기본소득은 권리인가? 토지를 예로 들어보자. 토지 자체는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토지에서 비롯되는 수익을 배분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유자가 개간·개발에 투여한 자신 노동의 대가 이상으로 그 수익을 차지한다. 만약 ‘토지=공유자산’이라는 국민의 권리의식이 커진다면 그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투쟁의 크기에 따라 공동의 몫, 즉 기본소득의 금액이 결정될 것이다. 처음엔 1만원으로 시작하더라도 점차 그 액수가 확대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전 국민 고용보험과 기본소득은 선후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추진될 수 있고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 ‘잘 놀수록 더 잘사는’ 신(新)경제의 역설


▎보편적 복지의 일환으로 약 263만 명이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을 받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기본소득 개념은 18세기 산업혁명 때 처음 나왔다.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든 지금, 기본소득 개념도 이에 발맞춰 진화해왔다. 그런데 국내에서 기본소득을 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18세기 기준에 갇혀 있다.

산업혁명 초창기엔 사회보장제도도 없었고, 노동조합도 불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복지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마다 차이는 있어도 사회보장제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그런데도 좌파와 우파는 저소득층으로 돌아갈 몫이 축소될까봐 과도한 복지 퍼주기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 불붙은 기본소득 논쟁은 산업구조 재편과 맞물려 있다. 제너럴 일렉트릭(GE), 제너럴 모터스(GM) 같은 전통 제조업체가 쇠락하는 반면, 페이스북이나 아마존 같은 플랫폼 업체가 급부상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가 중심으로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결정적 차이는 노동시간과 가치창출의 관계가 깨져버렸다는 점이다. 과거엔 노동시간을 두 배로 늘리면 생산량도 두 배로 늘었다. 그런데 이제는 노동시간을 두 배로 늘려도 아이디어가 두 배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려야 아이디어가 더 잘 나오는 역설에 부딪혔다. 이제 잘 놀아야 더 많은 부를 만들어낼 수 있단 이야기다. 이는 근면 성실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기성세대로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여전히 복지정책으로 보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젠 경제정책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봐야 한다. 생계비를 정부에서 일부 부담하는 방법으로 자유시간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구조를 재편할 만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근면 성실에 매몰되면 미국 제조업의 전철을 피하지 못한다. 재원이 제한된 만큼, 혁신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세대를 중심으로 기본소득을 우선 도입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법일 수 있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 재난지원금 준 나라들, 공통점은 ‘복지 실패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1%가 2차 긴급재난지원금 지급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지난 총선 당시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여부를 두고 여야가 치열하게 싸웠던 것을 떠올리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재난지원금을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나라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복지 시스템이 미비하다는 점이다. 코로나19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당시, 국내 광역 지자체들은 처음엔 선별 지원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벽에 부딪혔다. 재난지원금을 받아야 할 당사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다. 특정 타깃에 자원을 집중하려고 해도, 타깃을 잡을 시스템이 부재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팬데믹을 선언했을 때, 북유럽에서 가장 먼저 한 게 고용 동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 분담 캠페인 이상의 대응이 없었다. 고용보험에 자영업자들은 들어와 있지만 유명무실하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배제돼 있다. 그러면 이들이 해고당했을 때 핀셋 지원을 하고 싶어도 할 방법이 없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보완이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서구 복지국가가 경험했던 비효율적인 복지정책 운용을 답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지 않나. 개인적으로 지방정부에서 정책을 집행할 때 굉장히 난감했던 것이, 지방은 재원에 한계가 있어 선별 지원을 할 수밖에 없는데도 주민들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행정 데이터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아서 그렇다. 행정안전부나 국세청, 보건복지부에 흩어진 정보들만 잘 모아도, 복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원재 LAB2050 대표 | 기본소득 보장할 때 산업구조 전환도 속도감

노동은 우리 생각보다 빨리 그 형태가 변하고 있다. 일례로, 최근 트렌드를 보면 점포 없는 자영업자가 굉장히 빠르게 늘고 있다. 집에서 혼자 일하는 디자이너, 온라인에 접속해 영어 튜터링 하는 사람, 해외에서 직구해 한국에서 다시 포장하고 세금 처리해서 배송해주는 구매 대행 등 이들은 1인 기업이면서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다.

논쟁점은 이것이다. 아직 우리가 제조업, 일자리 중심 국가의 비전으로 가는 것이 방향이라면, 이들을 노동자 개념 안으로 넣어서 고용보험으로 보장해주자는 주장이 전통적인 케인스주의자의 시각이다. 기본소득론자는 이미 바뀐 세상에서 이를 다 커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기본소득을 주고 시작해보자는 입장이다.

물론 케인스주의자라고 해서 노동 형태가 불변한다고 보는 건 아니다. 그렇게 가는 것 맞지만 30년 뒤에 오는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본소득론자들은 지금 이미 사회 구조의 변화가 시작됐다고 본다. 자동화로 인한 노동 소멸 문제가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 노동의 소멸과 함께 소득 불평등도 꾸준히 심화하고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와 대기업 사업주와의 차이는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서 더 벌어지기 마련이다. IMF 외환위기 때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했지만, 정책자금 지원도 병행했다. 서민은 먹고살기 어려워졌지만, 대기업은 수출하기 좋아져 더 부유해졌다.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면 불평등이 더 심해진다. 그러지 말고 이번엔 개인들에게 지원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본소득을 지급해 생계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 ‘학습’도 중요하다. 기본소득으로 생계가 보장되는 가운데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좀비기업 등 비생산적인 부분은 없어지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전면화할 때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재교육을 받고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는 등 직무 전환이 유연하게 이뤄지도록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뉴딜이다.

- 허인회ㆍ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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